<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143화 역공 (1)
비령은 못 본 사이 제법 바뀌었다.
끓던 물처럼 불안정하던 기도는 고요한 호수처럼 가라앉았다.
괄목상대라는 표현을 사용함에 있어 부족함이 없었다.
불과 몇 달 사이에 이토록 발전했으니 말이다.
용봉지회 때와 비교하면, 족히 두 배는 강해졌을 테니깐.
하지만, 그보다도 눈에 띄는 변화가 있었다.
바로 말.
말이 많아졌다.
“······ 그러다가 안령현에 들렸는데 웬 할머니 한 분이 절 붙잡지 뭐예요? 종일 비를 맞으며 걸은 탓인지, 제가 워낙 불쌍해 보였나 봐요. 따뜻한 국에 밥 한 그릇 먹고 가라고 붙잡는데, 눈물이 쏟아질 거 같아서 그냥 냅다 도망쳤죠. 아, 앞으로 제 마음의 고향은 안령현이에요. 올해가 지나기 전에 들려서 그 할머니한테 따스한 밥 한 끼 얻어먹을 거예요. 그리고 또 생각나는 게······.”
그간 어떻게 지냈는지 물어본 적도 없고 궁금해하지도 않았지만, 제갈려를 붙들고 그간 있었던 이야기를 주저리주저리 떠들어 댔다.
처음에야 반가운 마음에 대화를 나누던 제갈려조차, 시간이 한 시진을 훌쩍 넘기자 진이 빠지는지 건성으로 대답했다.
비령도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지만, 오랜만에 대화를 나눈다는 사실이 반가운지 입가에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시후는 혀를 찼다.
“신이 났군.”
“스승님의 말을 잘 지키는 참된 제자의 모습 아닌가.”
“멍청한 거죠. ‘되도록’이라는 말의 의미를 저렇게 극단적으로 해석하는 게 어딨어요?”
시후의 말에 남궁천은 빙긋 웃었다.
제갈려와 저토록 즐겁게 대화를 나누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비령이 말하길 검후는 탈검지도(脫劍之道)의 경지에 다다르기 전까지, 되도록 사람을 만나지도 말을 섞지도 말라고 했다.
하지만, 비령은 검후의 의도완 달리 식량을 구매하는 일이 아니면 마을조차 들르지 않았다.
엊그제 석림에서 깨달음을 정리하고 탈검지도의 경지에 다다랐다고 하니, 최소 석 달은 단절된 삶을 산 것과 다름이 없었다.
시후는 여전히 떠들어 대는 비령에게서 강변으로 시선을 돌렸다.
비령은 잘 모르겠지만, 저 어딘가에 검후가 있을 것이다.
덕분에 안도감과 불안감이 동시에 교차했다.
안도감은 비령과 사천으로 간다면 이번 일에 검후라는 보험 장치가 생기게 되는 안도감이었고, 불안감은 일전에 검후에게 변명할 때 비령에게 관심이 있다고 말한 것에 관한 불안감이었다.
하지만, 곧 이어진 두 사람의 대화에 시후는 다소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다음 목적지가 형문산이면 의빈에서 배를 갈아타겠네?”
“응? 이 배는 어디로 가는데요?”
“성도.”
“아으······. 그럼 어쩔 수 없네요. 그럼 의빈까진 얼마나 걸려요?”
“하루? 거슬러 올라가는 것도 아니니깐 그쯤 걸릴걸? 저 사람들한테 물어보면 더 정확하겠지만. 물어볼까?”
제갈려의 물음에 비령은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정확한 시간이야 중요한 게 아닐 테니까.
시후는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듣다가 슬금슬금 옆으로 다가갔다.
“형문산으로 간다고?”
제갈려는 시후가 말을 걸어오자, 화색을 띠며 비령의 곁에서 멀어졌다.
아주 천천히.
비령은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나 모르니깐 같이 당가에 좀 들렀다가 가.”
시후의 제안에 비령은 난감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잠시 떨어져 있는 당패철을 힐끔거리더니 곧 고개를 저었다.
“어······. 당가 이야기는 들었지만, 별일 없기도 하고 내가 더해진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잖아? 게다가 내가 놀러 다니는 게 아니라 좀 그런데······.”
“구천종주가 시간이 촉박한 일은 아니잖아?”
비령은 깜짝 놀라며 눈을 치켜떴다.
구천종주를 어찌 알고 있냐는 눈빛이었다.
“너 정도면 매우 빠른 편 아냐? 역대 검후들 중에선 여기저기 일에 끼어드느라, 십오 년 만에 구천종주를 마친 사람도 있다며?”
“어? 어······. 그렇긴 한데······.”
“그리고 뭐든지 빨리 먹으면 체하는 법이니깐 소화할 시간도 줘야지. 며칠만 당가에 머무르면서 소화 좀 시켜.”
음식 이야기가 아니다.
탈검지도의 경지에 다다랐으나 아직 확실히 제 것으로 만들었다고 말하긴 어렵다.
그를 조금 더 다듬으라는 뜻이다.
별일이 없다면 당가라는 울타리 안에서 편히 다듬을 수 있을 것이고, 무슨 일이 생긴다면 실전을 통하여 더욱 매섭게 다듬을 수 있을 테니깐.
그런 시후의 생각이 전해진 탓일까.
비령은 고운 아미를 찡그리며 고민했다.
하지만,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 * *
성도는 떠날 때와 똑같았다.
적어도 시후가 보기에는 그러했다.
그 사이, 주변 상인에게 말을 물으러 갔던 당패철이 돌아왔다.
그의 얼굴에서 어떠한 대답을 들었는지 알 수 있었다.
“이거 괜한 걸음 한 게 돼 버릴 수도 있겠군.”
“괜한 걸음 했다는 생각이 안 들도록 대접해 주시면 되죠.”
시후의 대답에 당패철은 순간 당황했지만, 이내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시후의 어깨를 두들겼다.
“하하하, 그 말도 맞네. 자, 어서들 가게나.”
다들 익숙한 길이지만, 당패철의 안내를 받으며 당가에 도착하자 문을 지키는 위사들이 눈이 커졌다.
그 반응에 당패철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리 놀라는가?”
“아, 벌써 오실 줄 몰랐습니다.”
위사의 말에 당패철은 인상을 찌푸렸다.
성도는 당가와 밀접한 관계에 있는 인구가 많았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당패철이 돌아왔다면, 나루터에 내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소식이 전해져야 함이 옳았다.
그런데 전혀 몰랐다는 반응이라니.
“당가의 눈이 그리 어둡진 않을 텐데?”
“아, 그게······.”
위사는 뒤편에 있는 네 사람을 힐끔거리더니 말끝을 흐렸다.
말해도 괜찮으냐는 의문 섞인 시선이었기에 당패철은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위사는 일단 문 안으로 다섯 사람을 데리고 들어왔다.
그리고도 제법 안으로 들어갔다.
혹시라도 담장 너머에서 누군가가 엿듣기라도 하면 곤란한 것처럼.
“일수께서 돌아오시자마자 가주님을 독대하였고, 그 뒤에 당가의 모든 눈은 외부인에게 향하도록 지시를 내렸습니다. 뒤에 계신 저 소저처럼 사천에서 본 적 없는 무림인들을 중점으로 말입니다. 그러는 와중에······.”
성도에서 동쪽으로 오십 리.
그곳에는 천중구릉(川中丘陵)이라는 곳이 있다.
사천을 둘러싸고 있는 진령산맥과 대파산맥 때문에 구릉이라 부르는 것이지, 애당초 조그만 산맥과 다름없었다.
문제는 구릉이냐 산맥이냐가 문제가 아니라, 최근 그곳에 낯선 무림인들이 하나둘 들어갔다는 점이었다.
비령과 마찬가지로, 사천을 처음 찾는 이들이었다.
그 때문에 사람 몇몇을 천중구릉으로 보내었지만, 그들은 돌아오지 못했다.
위사의 말이 끝나자 당패철은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아미와 청성은 언제 도착한다더냐?”
위사는 말이 없었다.
당패철의 표정이 괴기하게 변했다.
“분명 종패 숙질께서 오자마자 청성과 아미에 연락을 취했을 텐데?”
“전서구를 띄워 보내긴 하셨지만, 천중구릉 남쪽은 아미와도 이어져 있고, 북쪽에서 반나절만 가면······.”
“그만 되었다!”
당패철은 더 듣기 싫다는 듯 위사의 말을 끊었다.
입술을 잘근잘근 씹던 그는 휴심각으로 가 있으라 말한 뒤, 어디론가 급히 사라졌다.
위사도 고개를 꾸벅 숙인 뒤 원래의 위치로 돌아갔다.
“지원을 보냈다가 역으로 공격받기라도 하면 곤란하다고 생각했나 보군.”
“이해는 해요. 이해는 하는데······. 이해하기 힘든 결정이네요.”
“지켜야 할 것이 많으면 고민이 많은 법이지. 하지만, 한편으로는 아미와 청성의 입장도 이해가 되네.”
“어째서요?”
“당가로 다가오는 적들은 모습을 드러낼 수밖에 없지만, 아미와 청성은 산을 타고 올 수가 있지 않나? 뒤가 불안하면 쉬이 움직일 수 없는 법이니, 최소한의 방비는 세워 두기 위해 시간이 필요한 것이겠지.”
남궁천의 말에 시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딱히 반박할 말이 없었다.
“일단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휴심각으로 가세.”
남궁천이 앞장서서 휴심각으로 향했다.
중간중간 마주친 당가 식솔들은 안내도 없이 움직이는 네 사람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다들 바쁘게 움직이느라 관심을 두진 않았다.
시후는 그들을 바라보며 입맛을 다셨다.
운남에서 사천으로 돌아오는 길에 왜 흑련회에서 당가를 이토록 대놓고 노리는지 짐작한 바가 있었다.
분명 신의 때문이다.
예정보다 일찍 고독을 방비할 수 있도록 약을 만들어 냈으니깐.
게다가 작령환 또한 문제였다.
흑련회의 회원이 정보를 실토하려 하면, 그들의 몸속에 심어 둔 고독이 발작을 일으켰다.
하지만, 작령환은 그를 무력하게 했다.
뇌에 작용하는 고독과 뇌를 죽이는 작령환이 서로 맞부딪힌 결과였다.
애초에 신의가 만들어 낸 약 또한 작령환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한 것이었다.
흑련회의 입장에선 지금 당가는 시후와 마찬가지로 최우선 제거 대상이었다.
아니, 정보를 빼낼 수 있다는 점에선 당가는 더욱 우선순위가 높을 것이다.
* * *
휴심각에 들어선 지 채 반 각이 지나기도 전에 시후와 남궁천에게 사람이 찾아왔다.
가주가 부르니 잠시 함께 가자는 것이었다.
찾아온 사내의 뒤를 따라 도착한 곳에는 가주인 당모준과 당가일수 종패를 포함해서 당가의 중진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두 사람의 도움이 없었다면 우리 세가의 피해가 이루 말할 수 없을 지경으로 참담했을 것은 자명하오. 그에 보답은 물론이거니와 연회까지 열어 환영해야 하나, 지금 상황이 상황인 만큼 뒤로 미뤄야 할듯하구려.”
이전에 자연스러운 하대와 달리 말을 높였다.
자리도 자리지만, 시후와 남궁천이 아니었다면 당가는 치명적인 피해를 볼 뻔했다.
시후는 대답하지 않고 남궁천을 힐끔 바라봤다.
“응당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사람도 많이 있기에 더욱 고맙구려. 그에 대한 보상은 이번 일이 끝나면 일괄토록 지급할 테니, 한 번 더 당가를 도와줄 수 있겠소?”
“그러기 위해 왔습니다.”
남궁천의 다부진 대답에 여기저기서 남궁세가를 칭송하는 말이 터져 나왔다.
당모준은 조용히 손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려 시끌벅적 떠들어 대는 사람들을 침묵시켰다.
“그보다 소검후와 동행했던데 운남에서 만났는가?”
“영인에서 배를 타는데 우연히 만났습니다. 비령 역시 당가를 돕겠다는 생각이 가득합니다.”
“아, 그렇다면······.”
당모준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곧 종패와 눈을 마주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은 덜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들키는 걸 원하지 않으실 테니, 입이 무거운 아이들로 하여금······.”
당모준의 말에는 많은 말이 함축되어 있었지만, 종패는 알아차린 듯 고개를 끄덕이며 방을 빠져나갔다.
의도는 명확했다.
현월문의 제자가 구천종주를 다니는 동안, 그의 스승이 제자를 따라다니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다.
비령에게 알릴 필요가 없으니 검후에게 은밀히 접촉하여 도움을 청하려는 것이다.
검후 또한 비령이 위험에 처할 수도 있으니 사전에 큼직큼직한 돌부리를 제거해 주지 않겠는가.
당가의 입장에선 청성과 아미의 어설픈 지원보다야 이쪽이 더 안심일 것이다.
“첨예 각주는 기관진식 증설 작업은 취소토록 하고, 노정 당주는 피독주 수량을 확인하도록 하시오. 중열은 첨예와 같이······.”
검후의 합류가 확정된 것도 아닌데, 당모준은 거침없이 지시를 내리기 시작했다.
아무리 구천종주가 중요하다고 하지만, 검후가 이 상황을 외면할 리 없다는 걸 확신하듯 말이다.
물론, 시후의 생각도 동일했다.
[연계 임무 ‘역공’이 발생합니다.]
공세를 취하려면 아주 날카로운 검이 필요한 법이니깐.
- 144화에 계속 -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