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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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화 환골탈태 (2)
쿠구구구구구.
제법 커다란 폭포가 있는지 계곡에 도착하기 전부터 소리가 조그맣게 들려왔다.
시후는 자운유성창을 단단히 움켜쥐었다.
넋 놓고 있다가 당하는 것만큼 한심한 건 없다.
게다가 독각혈망은 영물 중에서도 가장 윗줄에 있는 녀석이기에 방심은 금물이었다.
시후는 사방을 경계하며 조심스럽게 비탈길을 내려갔다.
소리가 가까워질수록 음습한 기운이 점점 짙어졌다.
“으음······.”
원래는 없던 안개마저 생겨났다.
안개로 인해, 시후의 시야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하지만, 시후는 당황하는 대신 허리를 숙여 자세를 낮췄다.
‘좀 더 천천히, 좀 더 신중히 나아가면 될 일이다.’
촉촉이 젖은 흙이 신발에 달라붙었다.
풀잎에 맺힌 물방울들이 옷을 적셨다.
뺨을 스치는 안개 속에서 파충류 특유의 비릿한 냄새가 맴돌았다.
확신이 섰다.
시후는 내공을 끌어올려, 혹시라도 있을 습격에 대비했다.
‘어디에 있을까.’
시후는 계곡을 훑으며 내려갔다.
멀어지는 폭포 소리와 함께 비릿한 냄새 또한 옅어졌다.
한참을 내려가자 냄새가 사라졌다.
“하긴, 이무기라면 폭포지.”
시후는 주저 없이 몸을 돌렸다.
지나온 길을 그대로 되짚어 올라갔다.
확실히 소리가 가까워짐에 따라 냄새가 짙어지는 것으로 봐서, 녀석의 보금자리는 폭포 근처로 추측되었다.
‘숨어 있다면 끌어낸다.’
시후는 계곡 바닥에 깔린 무수한 자갈들을 걷어찼다.
발끝이 조금 아려왔지만, 자갈은 촤르륵 거리는 소리와 함께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속으로 서른을 헤아리며 기다렸다.
고요했다.
지나칠 정도로.
시후는 내공을 끌어 올려 다시 자갈을 걷어찼다.
조금 더 많이, 조금 더 멀리.
그러나 이전과 다르지 않았다.
시후는 방심을 유도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긴장을 늦추지 않았지만, 한참이 지나도 반응이 없자 경계심을 누그러트렸다.
“숨어 있다는 건 말이 안 되는데?”
영물은 한 번 보금자리를 틀면 특정 조건을 갖출 때까지 머무르는 게 특징이다.
폭포 근처가 녀석의 보금자리라면, 지금 시후는 앞마당이 아니라 안방에 들어온 상황이었다.
그리고, 독각혈망은 영물 중에서도 공격적 특징이 두드러지는 녀석이었다.
그런데 안방에 침입자가 들어왔는데 내버려 둔다?
특정 조건이 충족되어 이곳을 떠나지 않고서야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임무 ‘환골탈태’는 그대로였다.
‘놈은 있다.’
그 사실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공격하지 않는가.
“숨어 있는 건가?”
시후는 중얼거리며 폭포를 바라봤다.
높은 확률로 폭포 뒤편에 공간이 있을 것이다.
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물속에 있으면 꼼짝없이 당할 텐데······.”
시후는 투덜거리며 차가운 계곡물에 천천히 몸을 담갔다.
물 아래서 눈을 부릅뜨고 훑어봤으나, 딱히 눈에 띄는 건 없었다.
시후는 자운유성창을 꽉 붙들곤 폭포 아래로 조심스럽게 헤엄쳐 접근했다.
독각혈망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가슴이 두방망이질 쳤다.
폭포로 다가갈수록 긴장감이 켜졌다.
“푸하!”
수면 위로 올라와 참았던 숨을 토해냈다.
그와 동시에, 역겨울 정도로 비릿한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시후는 인상을 구기며 물 밖으로 빠져나왔다.
폭포 뒤편의 공간은 넓었다.
그리고 깊었다.
폭포를 지나 들어오는 미약한 빛이 닿을 수 없을 정도로.
시후는 눈으로 내공을 흘려보낸 뒤 천천히 나아갔다.
발소리가 저벅저벅 울려 퍼졌다.
대놓고 들어간다고 알리는 꼴이지만, 아무리 조심한다고 해도 독각혈망의 감각을 피할 순 없었다.
빛은 사라지고 어둠만이 가득했다.
그러던 찰나, 시후의 귓가에 기묘한 소리가 들려왔다.
츠즈즈즈, 츠즈즈즈.
집중하지 않고 있었다면 폭포 소리에 묻혔을 법한 조그만 소리.
시후의 걸음이 멈췄다.
마치, 더는 다가오지 말라고 경고하는 듯했다.
‘이상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시후는 이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앞으로 나아갔다.
어둠 속으로 한참을 나아간 결과.
어지간한 건물 몇 채도 집어넣을 수 있을 정도로 넓은 공간이 나타났다.
그리고 가장 안쪽에 몸을 돌돌 말고 있는 독각혈망을 발견했다.
녀석이 왜 적극적으로 침입자를 제거하지 않았는지.
그리고 왜 이번 임무가 ‘환골탈태’인지 깨달았다.
툭.
독각혈망의 꼬리 끝자락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던 허물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녀석과 눈이 마주쳤다.
피를 흘리는 듯 새빨간 눈.
예상치 못한 상황에 잠시 주춤거리긴 했지만, 시후는 창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기회다.
탈피하는 도중에 도착했다면 가장 좋았겠지만, 탈피를 막 마친 지금도 절호의 기회였다.
단계를 뛰어넘었으니 이전보다 강해졌겠지만, 그건 온전히 힘을 회복했을 때의 이야기였다.
“참월!”
한줄기의 금빛이 어두운 동굴 안을 가로질렀다.
목표는 돌돌 말고 있는 몸통.
막 탈피를 마친 몸이 얼마나 단단한지 시험해 볼 요량으로 날린 참월이었다.
시후가 참월을 날림과 동시에 독각혈망의 꼬리가 움직였다.
툭.
녀석은 꼬리로 바닥에 널브러진 허물을 쳐올렸다.
와그작.
참월에 닿은 허물이 구겨졌다.
입에서 실없는 미소가 흘러나왔다.
얇디얇은 허물로 공격을 막아 낸 것이 어처구니없기도 했지만, 조금 전 독각혈망의 행동으로 인해 한가지 확신을 얻었다.
놈은 분명 위협을 느낀 것이다.
그랬으니, 벗어 놓은 허물을 방패 삼아 여린 몸을 숨긴 것이다.
츠즈즈즈.
녀석이 허물 뒤에 숨어 혀를 날름거렸다.
시후는 마음을 다잡으며 천천히 거리를 좁혔다.
샤악! 샤악!
놈이 머리를 빳빳이 쳐들자, 놈을 보기 위해 시후는 한참이나 목을 뒤로 젖혀야 했다.
그와 동시에 꼬리가 좌우로 움직였다.
녀석의 공격 수단은 머리와 꼬리.
어느 쪽이든 위협적이었다.
시후는 잠시 주춤거렸지만, 어릴 때부터 들어온 싸움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를 떠올렸다.
‘선수 필승.’
자고로 결투는 먼저 치는 게 최고였다.
“붕악굴천!!”
종패를 포위했던 청풍명월을 대경실색하게 했던 찌르기.
그에 맞선 녀석은 벗어 놓은 허물로 막는 대신, 뿔을 들이밀었다.
콰아앙!!!
고막을 강타한 굉음에 시후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나, 인상은 더 구겨졌다.
뿔은 아무런 흠집조차 없었다.
“하······.”
아무리 온 힘을 쏟아부은 게 아니라지만, 흠집조차 없다는 사실에 힘이 쭉 빠졌다.
하지만, 이내 생각을 고쳐먹었다.
잡으면 저보다 좋은 재료가 없을 것이었다.
어차피 쉽게 잡을 수 있다는 생각은 안 했다.
시후는 숨을 짧게 들이쉰 다음, 실영보를 펼쳐 달려들었다.
그에 맞서 바닥을 쓸 듯 휘둘러지는 꼬리.
그대로 창을 찌를 듯 자세를 취한 뒤, 교천영신으로 아슬아슬하게 뛰어넘었다.
그와 동시에 창준으로 놈의 비늘을 긁었다.
지지직.
역시, 따끈따끈하게 뽑아낸 비늘이라 그런지 아주 잘 찢겼다.
창을 역수로 잡았다면 가죽까지 베었을 터라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지만, 생각을 길게 할 여유는 없었다.
새로이 탈피한 비늘이 찢긴 탓일까.
녀석은 잔뜩 흥분하여 혀를 날름거렸다.
잠시 성질을 부리던 녀석은 꼬리를 몸쪽으로 끌어당겼다.
얕은 일격을 먹이긴 했어도, 녀석의 면적을 생각한다면 손톱으로 긁은 수준.
엄살이 심한 녀석이다.
시후는 씩 웃으며 창을 찔렀다.
“비룡붕요! 월선일도!”
덩치가 큰 만큼 노릴 곳도 많았다.
시후는 녀석의 몸 이곳저곳을 향해 창기를 날렸다.
꼬리로 탈피한 허물을 쳐올려 막는 것도 한두 번이었기에, 나머지는 죄다 머리를 바삐 움직이며 뿔로 막아야 했다.
결과적으로, 시후는 제자리에서 창을 휘둘렀고, 녀석은 부산스럽게 움직여야만 했다.
“배고프지?”
탈피는 오래 걸린다.
그리고 그사이엔 먹이를 구할 수 없었을 테니, 위는 텅 비어 있을 것이다.
연신 피하기만 하던 독각혈망의 눈이 점점 더 붉어졌다.
쉭! 쉭!
녀석이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위협하는 모양새였지만, 그다지 위협이 느껴지진 않았다.
“와 봐. 입구는 여기 하나잖아?”
시후는 입구에서 다소 떨어져 있었다.
입구를 틀어막고 있지 않으니, 녀석도 머리를 집어넣을 순 있었다.
물론, 그 대가로 목숨을 내놓아야 할 것이었다.
잠시 대치가 이어졌다.
시후는 시간을 길게 끌 생각이 없기에 슬슬 움직이려는 찰나, 놈의 머리가 움직였다.
쾅! 쾅!
“응?”
녀석이 벽을 들이받았다.
자해라고 하는 건가 싶어 잠시 관찰했다.
수어 번 벽을 들이박은 녀석은 곧 머리를 돌렸다.
그리곤 바닥에 떨어진 돌을 꼬리로 모으기 시작했다.
“아!”
시후가 앞으로 달려갔지만, 놈이 조금 더 빨랐다.
꼬리로 바닥에 놓인 돌들을 후려치자, 작은 조약돌이 되어 쏘아졌다.
시후는 창끝을 잡고 있던 손을 재빨리 중간으로 옮겼다.
“막창!”
쏘아진 돌을 쳐 내는 사이, 녀석이 거리를 좁혔다.
쩍 벌린 입은 소도 단번에 삼킬 듯 젖혀졌다.
시후 또한 팔을 뒤로 젖히며 내공을 한계까지 끌어 올렸다.
“붕악굴천!!”
쏘아낸 붕악굴천은 그대로 녀석의 입으로 들어갔다.
* * *
수색은 딱 사흘만 했다.
애초에 정해놓기를 사흘 안에 못 찾으면 과감히 포기하기로 했으니깐.
“아쉽구나.”
남궁천은 배에 올라타기 전에 잠시 뒤돌아보더니 작게 중얼거렸다.
험한 산지야 두 발로 뛰어다녔지만, 운남 북쪽의 영인(永仁)에서 배를 타면 성도까지 갈 수 있었다.
물론, 중간에 배를 갈아타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지만, 뛰어다니는 것보다야 나았다.
“채집꾼들의 가족은 생계를 이어감에 불편함이 없도록 당가에서 손 쓸 테니 너무 염려 말아라.”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았습니다.”
“하하, 걱정하지 않았다면서 안심하는 건 무엇이더냐?”
“티가 났습니까?”
당패철은 남궁천과 부쩍 친해졌다.
제갈려는 그런 두 사람의 곁에서 히죽거리며 웃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조그만 목 패 하나가 들려 있었다.
당패철이 시간을 틈틈이 내어 만들어 준 방충 패였다.
제갈려는 벌레가 접근하지 않는 걸 확인하곤 고개를 끄덕였다.
“효과는 확실하네.”
시후는 당패철에게 다가가 재료가 뭔지 물어보려다가, 조금 더 내버려 두기로 했다.
곧 시선을 느꼈는지 제갈려가 시후를 빤히 바라봤다.
“너도 받았어?”
“응?”
“방충 패 말이야. 네 주변에도 벌레가 안 꼬이네?”
“그냥 벌레가 날 싫어하나 보지.”
시후의 말에 의심쩍은 듯 바라봤지만, 당패철이 만든 건 하나가 다였기에 그러려니 넘어갔다.
벌레가 안 꼬이는 이유는 간단했다.
독각혈망의 내단을 섭취했으니깐.
그로 인해 벌레들은 물론이고, 어지간한 독사들도 시후의 근처로 다가오질 않았다.
물론, 사천과 운남을 벗어나면 별 의미 없는 효과일 테지만.
“곧 출발합니다!”
선원들의 외침에 한가로이 부둣가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사람들이 하나둘 배에 올라탔다.
마지막 사람이 오르고 반 각을 더 기다렸지만, 더 오를 사람이 없다고 판단했는지 선착장에 묶어 둔 줄을 풀었다.
배는 흐르는 물살에 떠밀려 나아가기 시작했다.
“잠시만요!!”
선착장 끝에서 다급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이미 출발한 배를 붙잡을 방법은 없었다.
시후는 혀를 차며 고개를 돌리려 했지만, 선착장을 달려오는 몸놀림을 보니 그녀는 무림인이었다.
경공이 뛰어났다.
선착장 끝에서 배까지의 거리는 대략 삼 장.
저자가 도착할 즘이면 그 배는 될 것이었다.
팔황급 고수가 아닌 이상, 그 거리를 뛰진 못한다.
하지만, 선착장을 달려오는 자는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되려 전력을 다해 뛰었다.
“저, 저······.”
가장 끝을 밟더니 도약했다.
훌륭한 경신법.
삼 장이 넘는 거리를 뛰었다.
날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다만, 배는 그보다 한참 멀리 있었다.
여인이 물에 빠지는 건 기정사실이었다.
그러나, 죽립을 벗어 던지더니 아래로 던졌다.
촘촘히 엮은 죽립은 도약을 한 번 더 허락했다.
“어?”
시후는 죽립을 벗어던진 얼굴을 보곤 깜짝 놀랐지만, 곧바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깨닫곤 자운유성창을 뻗었다.
탁.
그녀는 아슬아슬하게 자운유성창의 창대를 붙잡았다.
곧 짧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더니, 고개를 올려 시후를 바라보곤 싱그럽게 웃었다.
“고마워. 오랜만이네?”
천비령은 시후의 자운유성창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 인사를 건넸다.
시후는 갑작스러운 천비령의 등장에 얼떨떨한 표정을 지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 143화에 계속 -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