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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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화 숨기려 하는 것 (3)
시후는 하늘을 올려다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달빛은 약하고, 구름이 짙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은 아니지만, 미약한 달빛마저 구름 뒤로 숨어 버리면 칠흑 같은 어둠이 펼쳐질 것이다.
하지만 시후는 독왕문을 염탐하기 위해 숨어 있는지라, 달빛의 유무는 별 상관이 없었다.
어차피 독왕문은 사방에 횃불을 걸어 두어 훤히 잘 보였으니깐.
위이이잉.
찰싹!
제갈려가 자신의 뺨을 때린 뒤 인상을 찌푸렸다.
천천히 떼어 낸 손바닥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삐죽 튀어나온 입술에서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돌아가면 벌레를 쫓아주는 진을 만들어야겠어.”
그 말에 시후는 피식 웃었다.
벌레를 쫓는다고 하니, 남궁미가 당가의 쌍둥이에게 받은 방충 패가 떠올랐다.
“나중에 당가 사람들한테 방충 패가 있는지 물어봐. 제법 쉽게 만들어 주던데?”
“응? 그걸 어떻게 알아?”
“용봉지회 때 당가의 쌍둥이와 같은 건물을 썼잖아. 그때 남궁미도 하나 선물 받았어.”
“진작 말해 주지!”
방충 패에 들어가는 재료를 듣고도 저렇게 반길 수 있을까.
시후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숨기기 위해 독왕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무너져 내린 담벼락은 어설프게나마 보수한 뒤였다.
낮에 종패가 한바탕 난리를 피운 탓인지 경계 또한 제법 삼엄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줄어들긴 했지만, 스물 아래로 내려가진 않았다.
지루한 관찰이 이어졌다.
찰싹!
찰싹!
시간이 지날수록 제갈려가 자신의 뺨을 두들기는 횟수가 늘어 갔다.
그 숫자가 대략 스무 번이 넘어갈 때쯤, 좌측에서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차 아우.”
남궁천의 목소리.
다만, 평소와 달리 약간 상기된 목소리였다.
제갈려는 부어오른 뺨을 문지르며 바닥에 꽂아 둔 천로수변을 뽑았다.
두 사람이 모습을 드러내자, 남궁천은 다급히 손짓했다.
“어서 가세.”
별다른 설명도 없었지만, 시후와 제갈려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급히 부를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으니깐.
남궁천은 두 사람을 독왕문 뒤편으로 안내했다.
당패철은 살짝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건넸지만, 종패는 미동조차 하지 않은 채 독왕문을 주시하고 있었다.
“대략 반 각 전에 안으로 들어갔네.”
“뒷문으로요?”
“아닐세. 번을 서는 인원이 교대하는 틈을 노려 담을 넘었네.”
몰래 담을 넘었다면, 아직 흑련회와 독왕문이 완벽하게 결탁한 건 아닐 수도 있었다.
물론, 오늘이라도 흑련회의 밑으로 들어갈지도 모른다.
독왕문의 영역에서 당가의 인원이 목숨을 잃었으니깐.
그것도 둘이나.
하물며 한 사람은 당가팔수였다.
당가에서 그냥 지나칠 리가 없었다.
없는 범인도 만들어 낼 것이 분명하니, 독왕문이 흑련회와 손을 잡지 않았다고 한들 이제는 잡을 것이다.
“차 소협의 경공이 가장 은밀하니, 나와 같이 가지.”
종패는 독왕문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 말했다.
당패철의 얼굴에 아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곧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곤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가장 좋을 것 같습니다. 일단, 흉수가 더 있을지도 모르니 거리를 둔 채로 따르겠습니다.”
“그리하거라. 그리고······.”
종패는 잠시 제갈려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제가 도울 일이 있나요?”
“혹시 독왕문 주변에 진법을 펼칠 수 있겠나? 아까 들어간 놈이 빠져나갈 수 없을 정도로.”
“은밀히 움직여야 하니 시간이 조금 걸릴 거예요. 못해도 한 식경? 조금 더 서두른다면······.”
“그럼 되었다.”
종패가 말을 자르자 제갈려는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좁은 지역이면 모를까, 넓은 지역에 펼치는 진법은 시간이 필요하기에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아쉬워할 필요가 없었다.
달이 막 구름에 가려지려는 찰나, 독왕문주가 머무르는 것으로 추정되는 건물에서 흑의에 복면을 두른 인물이 나왔으니깐.
시후는 내공으로 안력을 높였다.
놈의 허리춤에는 처음 보는 특이한 모양의 도가 눈에 띄었다.
곁에 선 종패의 몸에서 뭉클뭉클 살기가 피어올랐다.
남궁천이 종패를 진정시키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도대체 상흔이 왜 그리 거칠었는지 알겠군. 저 흉악한 거치도(鋸齒刀)를 쓰는 인물이 있을 줄이야······.”
거치도는 ‘벤다’라는 표현보다 ‘뜯어낸다’라는 표현이 잘 어울렸다.
날이 톱날처럼 서 있다 해서 이름 붙여진 거치도는 살점을 뭉텅이로 뜯어내기에, 정사지간의 인물들도 사용을 꺼리는 무기였다.
“조력자가 있을지도 모르니 거리를 두고 따라오거라.”
“예.”
“차 소협은 날 따라오게.”
종패는 대답을 듣기 전에 비탈길을 내려갔다.
시후는 조심스럽게 그 뒤를 따라 내려갔다.
구름이 재차 달빛을 가렸을 때, 흑의인은 그 자리에 없었다.
십여 초가 흘렀을 뿐이지만, 흑의인은 이미 담장을 넘은 상황이었다.
흉악한 무기를 소지한 것과 달리, 날렵한 다람쥐와 같은 움직임이었다.
『생각보다 빠르니 놓치지 않도록 주의하게.』
종패는 대략 삽 십여 장의 거리를 두더니 출발했다.
우거진 풀숲에 들어간 상대를 쫓아간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종패는 발자국과 한쪽으로 쓸린 풀 등을 토대로 놈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았다.
밤이슬에 바짓단이 축축이 젖어 왔다.
개울가에서 한바탕 물장구라도 친 것처럼 옷이 젖어 왔을 즈음, 종패는 갑자기 자리에 멈춰 섰다.
시후는 천천히 내공을 끌어 올렸다.
종패는 혼자 가겠다고 손짓한 뒤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눈으로 보고 있지 않았다면 움직이고 있는지 모를 정도로 은밀한 움직임이었다.
시후는 뒤에서 잘 쫓아오고 있나 돌아보려는 찰나, 종패가 사라진 방향에서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다.
“망할.”
시후는 짧게 욕지거리를 내뱉은 뒤, 기운이 느껴지는 방향으로 달렸다.
실영보를 전력으로 펼치자 칼바람이 뺨을 두들겼다.
느껴지는 기운은 넷.
물론, 종패를 제외한 숫자였다.
시후는 여덟 쌍의 시선을 한몸에 받으며 왼발을 땅속 깊게 밖은 뒤, 창을 내질렀다.
“붕악굴천(崩岳掘天)!!”
산을 무너트리고 하늘에 구멍을 내 버리겠다는 오만한 초식.
하지만, 자운유성창과 일원신공의 만난 이상 오만하지 않았다.
아니, 부족했다.
“미친!”
종패의 뒤를 점하고 있던 복면인은 급히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막고자 한다면 갈기갈기 찢겨 나갈 게 분명했으니깐.
그 틈을 타서 종패는 뒤로 훌쩍 물러났다.
곁눈질로 살펴보니, 그 짧은 사이에 몸 이곳저곳에 혈흔이 잔뜩 새겨졌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단순히 피부가 긁힌 정도에 불과했다는 것.
“어느 정도죠?”
두서없는 질문이었지만, 종패는 시후가 원하는 대답을 정확히 알려 줬다.
“하나하나가 초절정의 초입.”
하지만, 진실은 괴로운 법이었다.
시후는 얕은 신음을 흘렸다.
하나는 상대할 수 있어도 둘은 힘들었다.
시후는 종패와 등을 맞댄 채 대화를 나눴다.
“하나는 가능해요.”
“둘은?”
“버티려고 해도 얼마 못 버틸 것 같은데요? 끽해야 삼십 초 안팎?”
“어렵게 됐군.”
그 사이, 복면을 쓴 네 명의 흑련회 무리는 주변을 완벽히 에워쌌다.
그중 시후의 정면이 있는 놈이 고개를 몇 번 갸웃거리더니 낮은 탄성을 내질렀다.
“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어 왔군.”
그가 자리에 멈춰 섰다.
뒤이어 다른 자들도 몸을 흠칫흠칫 떨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전음을 주고받는군. 뭐가 호박이 넝쿨째 굴러 왔다는 거지?”
시후는 복면 안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을 느끼곤 소름이 돋았다.
‘사로잡을 생각이다.’
절대 안 된다.
죽으면 죽었지, 잡힐 순 없었다.
하지만, 이건 기회였다.
목숨을 담보로 놈들을 죽일 기회.
시후는 손가락에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자운유성창을 꽉 움켜쥐었다.
“용적출해!”
동귀어진을 노릴 게 아니라면, 모든 공격은 방어를 염두에 둬야 했다.
하지만, 시후는 목숨을 도외시한 것처럼 창을 휘둘렀다.
앞에 있던 놈은 검을 찌르려 했지만, 시후가 되려 몸을 앞으로 들이밀자 놀라서 검을 뒤로 잡아당겼다.
그건 놈의 사인(死因)이 되었다.
“명!”
놈의 이름이었나 보다.
가슴이 뻥 뚫린 놈은 입에서 피 분수를 뿜으며 뒤로 넘어갔다.
복면인이 넷에서 셋으로 줄었다.
초절정에 오른 것 치고는 너무나도 무력한 죽음.
하지만, 사로잡겠다는 안일한 마음가짐이 부른 이변에 불과했다.
이런 목숨을 도외시한 공격은 또다시 성공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하나를 죽인 것도 대단한 성과였다.
“둘을 상대해 주세요!”
시후의 말에 종패는 잠시 당황했지만, 둘 사이로 뛰어들었다.
시후는 나머지 한 녀석과 대치했다.
“놈! 사지를 잘라서 돼지처럼 끌고 가 주마!”
“그럼 죽을 걱정은 안 해도 괜찮겠네?”
“이노옴!!!”
놈은 허리에 둘러놓은 다절편(多節鞭)을 쫙 풀었다.
거치도보다도 생소한 무기였다.
놈이 다절편의 끝을 잡은 채 손목을 계속해서 움직이자, 채찍은 마치 뱀이라도 된 것처럼 바닥에서 꿈틀거렸다.
전체적인 길이는 자운유성창과 비슷했다.
다만, 놈은 다절편의 끝을 잡고 있었지만, 시후는 창대의 중간을 잡고 있었다.
처음 상대하는 무기였지만 이미 거리에서 밀렸다.
시후는 흥분한 상대가 먼저 들어오길 바랐지만, 녀석은 이미 흥분을 가라앉힌 뒤였다.
천천히 뒷걸음질을 치며 물러났다.
“풍과 월이 당가 놈을 잡고 나면, 네놈을 같이 요리해 주마.”
죽은 자는 명이고, 패철이 상대하는 자는 풍과 월.
시후는 혹시나 한 마음에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넌 청?”
대답은 없었지만, 미세하게 떨린 어깨를 보고 정답임을 알아차렸다.
시후는 피식 웃으며 창을 늘어트렸다.
“유치하게 청풍명월이 뭐냐?”
“그런 어쭙잖은 도발에 넘어갈 성싶더냐? 그래, 마음이 급하겠지. 당가 놈이 쓰러진다면 다음은 네 차례니 말이야.”
“급하다고? 누가 급한데? 너희가 급할 텐데?”
시후의 말에 청은 코웃음을 쳤다.
“어디까지 허세가 이어지나 보자.”
“허세? 이게 허세라고 생각된다면······.”
시후는 말을 하다말고 창을 들어 올렸다.
그에 청은 피식 웃으며 이죽거리기 시작했다.
“이제야 급해졌나 보지?”
하지만, 시후는 창을 겨눈 채로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청이 뭐 하는 짓이냐고 물으려는 찰나, 풍과 월 쪽에서 고함이 들려왔다.
“이 개자식아 빨리 안 돕고 뭐 해!”
청이 고개를 돌려 뒤를 확인하려 했지만, 시후는 그 모습을 가만히 두고 보고 있진 않았다.
“일섬!”
하지만, 청 또한 노림수는 있었다.
시후가 창을 찔러 들어가는 순간,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다절편이 땅에서 튕겨 나오듯 창을 휘감았다.
“승천호!”
급히 창을 잡아당기며 크게 휘둘렀다.
간발의 차이로 창이 완전히 휘감기는 건 피할 수 있었지만, 청의 고개가 돌아가는 건 막을 수 없었다.
시후는 아쉬움을 달래며 창을 고쳐잡았다.
“한 명만 잡아서 될 일이 아니지?”
시후가 뒤로 물러났던 이유에는 다절편을 처음 본 것도 있었지만, 저들과 거리를 벌리기 위해서였다.
이쪽은 남아 있는 패가 더 있었으니깐.
“당가 놈만 잡으면 된다고? 저기 남궁 씨도 있는데 어쩌냐? 오, 방금 팔이 날아갈 뻔했는데, 운이 좋았네.”
합류한 남궁천이 종패를 도와 풍과 월을 상대했다.
제갈려와 당패철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걸 보니, 영리하게도 어디 숨어 있는 게 분명했다.
그 말은, 이쪽을 위협하는 요소는 전혀 없다는 걸 의미했다.
게다가 종패는 두 명과의 대결에선 밀렸을지 몰라도, 일대일로 들어서자 상대를 완벽히 찍어 누르고 있었다.
저놈이 월인지, 아니면 풍인지는 몰라도, 시후가 지켜보는 동안에도 죽을 고비를 서너 번 넘겼다.
청이 다절편을 다부지게 고쳐잡았다.
“역시 급한 쪽이 움직여야지?”
시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청이 앞으로 쇄도했다.
- 140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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