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129화 조우 (1)
발을 늦추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첫째, 길을 돌아갈 수밖에 없도록 함정을 판다.
하지만, 사방이 뻥 뚫린 이곳에서 함장을 판다는 건 무의미한 짓이다.
둘째, 놈들을 위협한다.
시도 때도 없이 습격한다면 경계를 강화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는 별동대의 체력을 급속도로 갉아먹는다.
말 또한 버텨 내지 못할 게 분명했다.
으레 계획은 뒤로 갈수록 유의미한 결과를 창조해 내기에 적합하다.
그런 점에서 세 번째 계획은 괜찮은 편이었다.
살을 주고 살을 깎으니 말이다.
“출(出).”
달빛이 구름 뒤로 숨어드는 자정.
별동대는 그들의 밤을 빼앗기 위해 움직였다.
하루 치 거리를 먼저 앞선 다음에 휴식을 취한 터라 소모했던 체력도 다 회복했다.
말들의 걸음은 가벼웠고, 병사들의 얼굴엔 생기가 맴돌았다.
다만, 구름이 무한정 이어지지 않았으니 별동대는 달빛 아래 노출되었다.
그 순간, 별동대는 달빛을 등불 삼아 미친 듯이 내달렸다.
팔천의 기병이 내달리며 만들어 내는 진동은 꾸벅꾸벅 졸면서 불침번을 서는 이들을 깨우기에 충분했다.
삐이이이이익!!
밤을 찢어발길 듯 울려 퍼지는 호각 소리.
그와 동시에 게르 곳곳에서 놈들이 튀어나왔다.
마치 오길 기다렸다는 듯 기민한 반응이었다.
하지만, 제대로 대열조차 이루지 못한 그들을 돌파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회(回)!”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유는 지체하지 않고 별동대를 돌렸다.
게르에서 튀어나오던 놈들은 너무나 손쉽게 물러나자, 쫓을 생각도 못 한 채 주변을 경계했다.
고작 이렇게 잠을 깨우고자 습격했다곤 생각하지 못할 테니까.
별동대는 멀찍이 떨어진 언덕으로 도망친 다음에야 속도를 줄였다.
시후와 남궁천은 언덕을 넘으며 느긋하게 대화를 나눴다.
“여기까지는 예상대로네요.”
“몇 번이나 통할지 예상해 보겠나?”
“세 번까지는 안 통하겠죠.”
시후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하자, 남궁천은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으며 손가락을 쫙 펼쳤다.
“난 적어도 오늘은 쫓지 않을 거라 보네.”
“그 정도로 순진할까요?”
“순진한 게 아니라 숫자를 생각한다면 그럴 수밖에 없지 않겠나? 우리 쪽 숫자는 팔천이네. 양동작전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없을 리 없고, 우리를 붙잡고자 한다면 최소한 동수를 보내야 할 텐데, 양동작전임을 의심한다면 그마저도 어려울 테지.”
남궁천은 잠시 말을 끊고는 뒤돌아 저 먼 곳을 바라봤다.
“이마저도 염두에 두고 팔천이라는 병력을 배정한 게 분명하네.”
시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허허거리며 잘 웃던 사람이 이렇게 치밀한 계획을 염두에 뒀다니, 쉽게 믿기 힘들었다.
하지만, 남궁천의 표정엔 신뢰가 잔뜩 묻어나 있었기에 딴지를 거는 대신 말에서 내려 쉴 준비를 했다.
시후가 자운유성창으로 땅을 다지는 사이, 누워 있는 병사들 사이로 연위랑이 다가왔다.
서글서글한 눈빛과 호리호리한 몸은 갑옷만 벗겨 놓으면 영락없는 서생이었다.
연위랑이 옅은 미소를 보이며 바로 본론을 꺼냈다.
“최소 한 번은 이처럼 시늉만 할 것입니다.”
“알겠습니다. 혹여, 앞으로 가야 할 일이 있다면 신호를 주십시오.”
“하하, 아마도 어지간해선 그럴 일 없을 겁니다.”
세 번째 계획은 수면 시간을 교환하는 것이다.
다만, 공격권은 이쪽이 쥐고 있으므로 일방적인 교환이었다.
“언제 움직일지는 모르지만, 일단 쉬십시오.”
“예, 연 경력사(經歷司)께서도 잠시 눈이라도 붙이시길.”
연위랑은 남궁천이 직위를 불러 주자 제법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시후는 멀어지는 연위랑의 뒷모습을 보며 남궁천의 팔을 툭툭 건드렸다.
“끽해야 반 시진도 못 쉴 거 같은데, 쉴 수 있을 때 편히 쉬죠.”
하지만, 놈들의 경계심은 시후의 예상을 웃돌았고, 공격은 반 시진이 아니라 한 시진 후에 이어졌다.
놈들의 반응은 한층 더 기민해졌지만, 이번에도 쫓아오진 않았다.
그렇게 별동대는 하룻밤 사이에 총 네 번의 공격과 후퇴를 반복했다.
물론, 남궁천의 예상대로 쫓아오는 놈들은 없었다.
* * *
그렇게 수면 시간을 던져 가며 놈들의 발목을 붙잡은 지 사흘이 지났다.
“죽을 맛이네요.”
시후가 피곤함에 절은 채 주위를 둘러보니, 눈 밑이 거뭇거뭇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중간중간 쪽잠을 잤다곤 하지만, 차가운 바닥에 누워 눈을 붙인 것에 불과했다.
게다가 어젯밤의 마지막으로 행한 공격에 놈들은 추격을 감행했다.
그 거리가 무려 오십 리.
삼십 리만 더 달렸다면 말들이 지쳐 쓰러졌을지도 모를 정도로 맹렬한 추격이었다.
오늘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불 보듯 뻔했다.
“오늘 하루를 쉬는 것도 한 방법이 될 수 있겠지만······.”
남궁천은 말끝을 흐리며 동쪽을 바라봤다.
가만히 내버려 둔다면 내일 대흥안령산맥에 도착할 것이다.
산맥 초입은 완만하기에 별다른 문제가 없다.
하지만, 산맥 동쪽으로 간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경사가 급격히 가팔라지고 지날 수 있는 길이 한정되어, 수백의 병력으로 수만의 병력을 상대할 수 있는 곳이 나온다.
별동대가 앞질러서 길을 틀어막는 방법도 있지만, 기마병으로 이뤄진 별동대는 농성에 유리한 병종이 아니다.
본대와의 거리는 하루.
아니, 채 반나절도 차이가 안 난다.
하지만, 그 반나절을 좁히는 건 그들만의 노력으로는 불가능했다.
“시간을 끄려면 최소 한 번의 싸움은 불가피하겠죠?”
남궁천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심각한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는 종유와 연위랑을 바라봤다.
주로 연위랑이 이야기를 하는 쪽이었고 종유는 듣는 쪽이었다.
시후는 좀처럼 결론을 내리지 못하는 둘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해뜨기 직전이 가장 좋을 텐데······.”
“음? 무슨 이유라도 있나?”
시후는 세 개를 펼치더니 하나씩 꼽았다.
“이유야 많죠. 기본적으로 가장 해이해지는 시간이기도 하고, 한바탕 휘젓고 달아날 때쯤 해가 떠오를 테니 화살을 제대로 쏘기 힘들 테죠.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전후처리로 시간을 할애하는 만큼 본대가 가까워진다는 거겠죠?”
“과연······.”
남궁천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시후의 말대로, 놈들이 휘청거릴 만한 일격을 먹이기엔 해뜨기 직전이 가장 효과적이었다.
그는 곧바로 종유와 연위랑에게 말을 전달하기 위해 다가가려 했으나, 두 사람도 이야기를 끝마쳤는지 시후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연위랑은 낯빛을 굳힌 채 입을 열었다.
“두 분께 다소 어려운 부탁을 드려야겠습니다.”
그 말에 시후는 콧잔등을 살짝 찌푸렸다.
무슨 부탁인지 예상됐으니깐.
남궁천 또한 짐작했는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연위랑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말을 꺼내지도 않았는데 대뜸 알겠다고 하니,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를 것이다.
시후는 남궁천을 바라보며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말씀하시죠.”
“크흠, 동트기 전 공격을 감행할 예정이니 선두를 맡아 주십시오.”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다만, 선두를 맡아 달라는 말에 살짝 주먹을 움켜쥐었다.
치고 바로 빠질 생각이라면 가장 후미에서 막아 주는 게 피해를 줄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선두를 맡아 달라는 건 안을 최대한 휘젓겠다는 말과 다름없었다.
시후는 의심을 가득 담아 종유를 바라봤다.
팽초량이 무리해서 전공을 올리고자 한다면 말려 달라고 했으니, 여차하면 그의 이름을 들먹일 요량이었다.
그 시선에 종유는 쓴웃음을 지었다.
“우리가 생각한 것을 놈들이 짐작하지 못하길 바라는 건, 놈들을 너무 무시하는 처사라고 생각하지 않소? 분명 우리 공격을 받아치기 위한 준비를 철저히 하고 있을 것이오.”
“그런데, 땅을 파고 기다리면 우리도 꼼짝없이 당할 텐데요?”
“그럴 걱정은 없소. 안 그래도 감시병들을 보내 놨는데, 아직 그런 식의 함정을 만들고 있다는 연락을 받지는 못했소. 물론, 그들이 게르 안에서 뭘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오.”
종유의 말에 시후는 해가 지기 전 어디론가 떠나던 병사 몇몇을 떠올렸다.
확실히 갑자기 땅이 꺼지거나 하는 게 아니라면, 앞장서는데 별다른 부담감은 없었다.
시후는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종유를 빤히 바라봤다.
“일단 전체적인 계획을 알려 주시죠. 계획에 맞춰서 움직이려면 어느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할 테니까.”
* * *
우드득.
기지개를 켰을 뿐인데 뼈 바스러지는 소리가 났다.
놈들을 앞지르면서 이틀, 그리고 괴롭히는데 사흘.
총 닷새간 휴식다운 휴식을 취한 적이 없었으니깐.
“아으, 뼈마디가 쑤신다······.”
“감각이 있다는 건 산자의 몫이지. 감사히 여기게.”
“그렇게 말하면서 전혀 감사한 표정이 아닌데요?”
“요 주둥이와 얼굴이 따로 노는군.”
남궁천은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뺨을 톡톡 두들겼다.
시후는 피식 웃으며 엉덩이에 먼지를 툭툭 털었다.
어차피 조금 뒤면 흙먼지 따위는 문제가 안 될 테지만.
제법 길게 눈을 붙였음에도, 닷새간의 피곤을 씻어 내기엔 부족한 듯 사방에선 연신 하품 소리가 들려왔다.
종유는 아직 졸음을 떨쳐내지 못한 별동대를 한자리에 모았다.
피곤함에 절었음에도 대열을 갖추는데 걸린 시간은 고작 반 각에 불과했다.
그는 대흥안령산맥 너머로 숨어드는 달을 바라보더니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피곤한가? 아니, 멍청한 질문을 했군. 지난 닷새 동안 맘 편히 잠조차 청하지 못했는데, 피곤하지 않다면 거짓이겠지. 나 또한 푹신한 침대에 몸을 뉘고 싶은데, 그대들이야 오죽하겠는가.”
그는 잠시 말을 끊고 고개를 살짝 돌려 서쪽을 흘겨봤다.
놈들이 있는 방향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그 어느 때보다 피곤한 하루가 될 것이다. 너무 피곤한 나머지 땅에 몸을 뉠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한들 나무라지 않을 테니, 맘껏 쉬어라. 하지만, 다시 일어날 수 없을 테니 땅에 몸을 뉘는 건 신중히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깊은 울림이 있었다.
미약하게나마 내공을 실은 것이다.
“쉴 곳을 찾아 이 북방까지 왔는가? 집에 금 스무 냥을 보내기 위해 이곳에 왔는가? 우리가 왜 이곳에 왔는지 누구 때문에 이 고생을 하는지 기억하라! 그리고 분노하라! 그 분노를 거침없이 쏟아내라!”
종유는 말을 끊고는 좌중을 둘러보았다.
그의 시선에 닿은 병사들은 그의 뜨거운 마음이 전이된 듯, 한껏 상기된 표정으로 눈을 부라렸다.
종유는 제법 긴 침묵을 깨고 손끝을 뻗어 서쪽을 가리켰다.
“나는 저들을 향해 그 분노를 아낌없이 털어 낼 것이다! 그대들은 준비가 되었는가?”
대답은 없었다.
다들 주먹을 쥐어 가슴을 두드렸을 뿐.
종유가 말에 올라타기 무섭게, 다들 연습이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말에 올랐다.
시후와 남궁천은 눈빛을 주고받은 뒤 출발했다.
둘은 종유의 곁을 지나 선두에 섰다.
“어휴, 닭살 돋아.”
“크흠.”
다소 거리가 있었음에도 목소리가 들렸는지, 종유의 헛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시후는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뒤통수를 긁적였다.
지금 사과하는 건 재차 욕하는 것과 다름없었기에, 별다른 말 없이 침묵을 지켰다.
“난 좋았네. 특히 마지막에 ‘그대들은 준비가 되었는가?’ 이 부분에서 내공이 아주 적절하게 배분되었지 않나? 실로 마음을 동하게 만드는 연설이었네.”
남궁천은 나름대로 종유를 변호해 주려 했겠지만, 이건 그들 두 번 죽이는 것과 다름없었다.
시후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속도를 높였다.
약 반 시진 후, 감시병으로 배치해 둔 병사들과 합류하자 새벽 어스름이 밀려날 듯 요동쳤다.
시후는 숨을 길게 들이키며 자운유성창을 비껴들었다.
“가 볼까.”
- 130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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