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125화 북방 토벌 (2)
성난 황소처럼 나아가던 행군은 다음 날 점심이 되기 전에 멈춰 버렸다.
눈이 내려도 이상하지 않으리라 생각되던 구름은 얕은 봄비를 내렸고, 그 탓에 발이 묶여 버렸다.
촉촉이 젖은 땅은 마차 바퀴를 놓아 주기 싫은 듯 붙잡고 늘어졌으니깐.
덕분에 점심부터 의미 없는 회의를 하느라 진이 빠졌다.
시후는 팔을 축 늘어트린 채로 막사로 돌아가려 했지만, 어깨를 붙잡는 손길에 뒤를 돌아봤다.
“차 한잔할래?”
제갈려가 쓸데없이 붙잡지 않을 것이기에 시후는 고개를 끄덕이며 제갈려의 뒤를 따랐다.
남궁천 또한 마찬가지.
세 사람은 보슬보슬 내리는 얕은 봄비를 헤치며 제갈려의 막사로 향했다.
안으로 들어가자 따스한 훈기가 맴돌고 있었다.
시후의 막사보다 넓은 건 둘째치고, 우습게도 중앙에 자그마한 화덕을 만들어 놓았다.
제갈려의 성격상 스스로 만들었을 리는 없으니 누가 만들어 준 게 분명했다.
“누가 관리해 줘?”
“당번병이 해 주지.”
해는 동쪽에서 뜬다고 말하듯 지극히 태연한 대답.
시후는 할 말을 잃었다.
제갈려와 남궁천은 엄밀히 말하면 시후의 부관이었다.
당번병은 보통 자기가 관리하는 병사를 시키는 법인데, 시후는 허울뿐인 천호장이었기에 병력이 없었다.
병력이 없으니, 당번병도 없는 게 당연했다.
“이거 원, 더러워서······.”
남궁천은 허탈해하는 시후의 어깨를 두들기며 자리에 앉혔다.
화덕에 물을 얻고 탁자 위에 다기를 준비하는 게, 진짜 차를 대접할 모양새였다.
“차는 됐으니깐 이야기나 해.”
“내가 마실 건데?”
“하······.”
시후는 실랑이를 하는 대신 그냥 자리에 앉아서 기다렸다.
제갈려는 끓는 물을 다기에 부었고, 곧바로 은은한 차향이 막사 안을 휘감았다.
차의 향에는 마음을 진정시키는 효과가 있는 걸까, 아니면 기다리는 동안 화가 누그러진 걸까.
시후는 한결 평온해진 마음으로 제갈려에게 찻잔을 건네받았다.
“저거 다 연기야.”
“뜬금없이 무슨 말이야?”
“화냈던 거 말이야.”
“하긴, 너무 뜬금없긴 했지. 그보다, 그 말만 전해 주기 위해서 부른 건 아니잖아?”
시후의 물음에 제갈려는 차를 한번 홀짝인 다음에 품에서 조그만 지도를 꺼내 들었다.
“오늘 저녁쯤엔 비가 그칠 거 같으니 내일 아침이면 출발할 수 있을 거야. 그렇게 되면 여기 메마른 늪지를 지나게 되는데······.”
“잠깐만, 비가 그칠 건 어떻게 알고 메마른 늪지라는 건 어떻게 알고 있는 거야?”
“날씨를 읽는 정도는 우리 집안에서 다섯 살날 꼬맹이도 다 해. 그리고 설명할 테니 말 끊지 마.”
다소 날이 선 제갈려의 목소리에 시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라면 메마른 늪지에 주목할 만한 가치가 없는데, 비가 온 뒤에 특이성을 띠는 지역이야. 겉으로는 땅이 단단해 보일지 몰라도, 주변보다 지대가 낮음으로써 빗물이 지면 아래로 흐르게 되고······.”
제갈려의 설명은 길어질 여지가 다분했다.
하지만, 말을 끊지 말라고 못 박았는데 끼어들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시후는 잠자코 이야기를 들었다.
문제는 지형에 관한 설명이 끝나면서부터였다.
“내일 점심쯤에 그곳에 다다른다면, 식량을 실은 마치는 그곳에 바퀴가 반쯤 빠져서 못 나오게 될 거야.”
시후는 순간적으로 말을 끊을 뻔했다.
참아 낼 수 있었던 건, 요 며칠 사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인내심 덕분이었다.
하지만, 엉덩이가 들썩이는 건 막을 수 없었다.
제갈려는 그런 시후의 모습을 보곤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런데 왜 들어가냐고?”
시후는 열정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제갈려가 의자에 앞으로 잡아끌며 얼굴을 가까이했다.
덩달아 시후와 남궁천도 바짝 앞으로 붙었다.
남궁천이 막사 내부에 기막을 두르자, 제갈려는 천천히 입술을 뗐다.
* * *
“마차 바퀴가 빠졌습니다!”
“이쪽도 마찬가집니다.”
“바퀴 밑에 깔개를 대고 마차를 밀어라!”
수송대 인원들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무의미한 짓이었다.
지금 이 일대는 거대한 늪이었으니깐.
두꺼운 갑옷을 입은 장수들의 말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가만히 있으면 서서히 말발굽이 땅으로 들어갔기에 말에서 내려야 했다.
다만, 일반 병사들과 달리 장수들의 갑옷은 조금 더 화려하고 두꺼웠다.
그렇기에 최대한 무게를 줄이기 위해 굉갑(肱鉀)과 대퇴갑(大腿鉀) 등 그나마 탈착이 용이한 부위를 말에 얹기 시작했다.
시후는 그 모습을 보곤 덩달아 갑옷을 벗기 시작했다.
“우리는 아니지 않은가?”
“죄다 갑옷을 벗고 있는데 우리만 입고 있으면 이상하잖아요?”
“다른 목적이 있는 것 같네만······.”
남궁천이 미간을 좁히며 의심 어린 눈빛을 보냈지만, 시후는 어깨를 한 번 으쓱이며 굉갑을 풀었다.
병사들은 마차를 빼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장수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갑옷을 풀어헤쳤다.
지루한 시간이 흘러갔다.
마차를 빼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무릎 깊이까지 빠진 바퀴는 쉽사리 나올 생각을 안 했다.
삐이이익!
그 와중에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매가 길게 울음을 토했다.
그간 소리 내어 운 적이 없었기에 병사들이 살짝 동요했다.
메마른 늪지라 불리는 이곳은 지대가 낮다.
그것을 달리 말하면······.
“왔다.”
시후는 구릉 위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눈 몇 번 깜빡할 사이에 족히 수천은 되어 보이는 기마가 모습을 드러냈다.
홍무제가 원을 북쪽으로 몰아내는 데 성공했고, 영락제가 무려 다섯 번의 친정했으나 굴복시키지 못했던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매를 이용한 압도적인 정보력.
그 정보력을 바탕으로 장소와 때를 정하는 건 그들의 권리였고, 그들은 지금 그 권리를 행사하러 다가왔다.
“방진!! 방진을 구축하라!!”
마차를 빼내던 보병들은 방패를 들어 올리기 바빴고, 장수들은 벗어 둔 갑옷들은 허겁지겁 챙겨 입었다.
하지만, 놈들이 기다려 줄 이유는 없었다.
말들은 구릉 아래로 내달렸다.
시후는 놈들의 복장을 살폈다.
철저히 기동전을 펼치겠다는 듯 등에 매인 활과 화살집이 전부였다.
거리를 좁히게 두지 않겠다는 자신감의 표출이었다.
그 사이, 거리는 삽시간에 좁혀졌다.
“밀(密)!”
방패병들은 이 와중에 기민하게 움직였다.
촘촘하게 뭉쳐서 날아올 적의 화살을 막기 위해 자리 잡았고, 그 바로 뒤에는 궁병들이 줄지어 섰다.
그 순간, 놈들이 말 위에서 시위에 화살을 걸기 시작했다.
“오백 보!”
화살을 날아오는 거리는 대략 이백 보.
전력으로 달리는 말에게 삼백 보의 거리는 찰나와 같았다.
궁병들도 그에 대응하기 위해 시위를 당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놈들은 기마 궁술을 어떻게 펼쳐야 하는지 아주 잘 이해하고 있었다.
정면으로 달려오던 놈들은 길게 줄지어 사선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열(列)!”
말의 속력을 얻은 화살은 이백 보보다 훨씬 먼 거리를 날아갔다.
궁병들은 놈들이 화살을 쏘는 걸 보고 맞대응했으나, 그들의 발치에조차 스치지 못했다.
이쪽의 공격은 닿지 못했는데, 저쪽은 일방적으로 때리고 있었다.
부대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끄아아아악!”
“등(等)!”
궁병들은 대응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방패병 뒤에 바짝 붙었다.
놈들은 부대와 떨어진 채 큰 원을 그리며 계속 내달렸다.
그 상태로 빙글빙글 돌며 쏘고 또 쏘고를 반복했다.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으며 쓰러지는 병사들이 속출했다.
시후와 남궁천 주변으로도 주기적으로 화살이 날아들었지만, 두 사람은 눈을 감고 있다고 한들 이런 화살에 맞을 수준이 아니었다.
시후는 가볍게 화살을 튕겨내며 주변을 둘러봤다.
‘아직이다.’
하지만,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신음이 시후의 인내심을 순식간에 날려 버렸다.
“안되네!”
남궁천이 시후의 들끓는 기운을 느꼈는지 선수를 쳤다.
하지만, 병사들을 미끼 삼아 시간을 벌고 있는 현 상황은 두고 보기 힘들었다.
“얼굴만 비추고 올게요.”
“지금 타박만 주는 이유를 알지 않은가? 지금 마음대로 움직였다간 군법으로 다스릴지도 모르네.”
“황제의 명이 있으니 죽이진 않겠죠.”
“그건 너무 안일한 생각이······.”
남궁천은 말을 끝까지 내뱉지 못했다.
시후는 이미 말에 올라타 옆구리를 걷어찬 뒤였으니깐.
그 또한 뒤늦게 말에 올라타 시후의 뒤를 쫓았다.
시후는 틈을 찾았다.
기마 돌격을 막아 낸다면 주먹 하나 지나갈 틈도 없겠지만, 단순히 화살을 막아 내는 중이었기에 제대 간의 틈이 존재했다.
바로 저곳처럼.
“하앗!!”
갑자기 들려온 기합 소리 때문일까.
틈은 더 벌어졌다.
말 한 마리는 족히 지날 수 있을 정도.
시후는 말 옆구리를 강하게 걷어차며 속력을 높였지만, 문제는 뒤따라오던 남궁천이었다.
애당초 본대에서 저들에게 돌격하는 계획은 없었다.
장수들은 뒤이어 달려오는 남궁천을 저지하기 위해 틈을 메웠다.
지나가기 위해선 아군을 짓밟거나 베어야 하는 상황.
남궁천은 급히 고삐를 잡아당겨 멈춰 세워야 했다.
“차 아우!!”
모난 돌은 정을 맞기 마련.
거북이처럼 웅크리고 있는 본대에 쏟아지는 화살 일부가 시후에게 향했다.
일부라고 하지만, 수천의 달하는 화살 중 일부였다.
시후의 몸은 화살로 인해 당장이라도 고슴도치로 변할 것만 같았다.
“막창!”
하지만, 거리를 벌리는 대신 화살을 선물한 게 놈들의 첫 번째 실수였다.
쏟아지는 빗줄기를 튕겨 내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아니, 빗방울과 화살의 무게를 생각한다면 수십 배는 어려운 일이리라.
게다가 말까지 보호해야 하기에 내공 소모는 상상을 초월할 것이지만, 어찌 된 게 내공은 줄어드는 둥 마는 둥 했다.
시후는 이질감에 잠시 고민했지만, 이내 부여잡은 자운유성창의 효과를 떠올리곤 고개를 끄덕였다.
항상 곁에 누군가 있어서 발동된 적 없던 자운유성창의 능력이 드디어 빛을 보았다.
- 혈혈단신으로 적을 상대할 시, 내공의 소모가 절반으로 감소합니다.
최초에 얻었을 때도 본 적 있지만, 이렇게 실감하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더욱이 금사박투도 진기 소모를 2할 줄여 주니, 한 시진이라도 막아 낼 수 있을 듯했다.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다.
놈들이 화살을 쏘아대는 거리는 삼백 보 남짓.
숨 두어 번 내쉬자 놈들이 성큼 눈앞으로 다가왔다.
“참월!”
찰나의 틈을 이용한 공격.
아낌없이 내공을 쏟아부었다.
내공에 관한 걱정은 사라진 지 오래다.
금사박투의 효과는 잔챙이를 죽일수록 빛이 나니깐.
- 살해 시, 일정 확률로 내공을 회복합니다.
적은 많다.
시후는 양 떼에 뛰어든 늑대처럼 흉포하게 놈들을 휘저었다.
“쏴라! 말을 노려라!”
쓸데없는 짓이다.
놈들의 두 번째 실수.
도망치지 않았다.
혼란스럽게 뒤섞인 이상 활은 무용지물이었다.
도망치지 않더라도, 최대한 산개해서 시후가 쉽사리 붙지 못하도록 견제해야 했다.
하지만, 놈들은 안일했다.
아니, 비처럼 쏟아지는 화살 세례를 뚫고 붙는 데 성공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누가 예상했겠는가.
“밀어붙여라! 창을 휘두를 공간도 주지 말고 밀어붙여!”
물론 몇몇은 도검을 들고 있긴 했지만, 잠시 시후를 붙잡아 두는 것에 불과했다.
본대에 쏟아지던 화살이 점차 멎어 들기 시작했다.
머리 위까지 방패를 치켜들었던 방패병들이 하나둘 방패를 내리기 시작했다.
장수들의 불호령이 떨어져도 이상하지 않지만, 그들을 뭐라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도 넋이 나간 채 시후를 바라봤으니깐.
- 126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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