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119화 가혹한 겨울의 땅 (2)
이틀에 한 번꼴로, 일행의 머리 위로 새가 찾아들었다.
그럴 때마다 초현 공주를 진법으로 숨겼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남궁천이 나서서 입에 발린 소리를 해댔다.
물론, 구덴 타이시에게 받은 활과 뿔 나팔이 있기에 더욱 효과적이었다.
그들에게도 곡식을 가득 실은 마차 하나씩을 내어 주었다.
결과적으로 짐 마차 세 대와 말 몇 마디로 얻은 이득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흔히들 시간은 금이라는 말을 하지만, 남궁천이 확보한 시간을 돈으로 책정한다면 최소 천금의 값어치였다.
무려 사흘이라는 시간을 당겼으니 말이다.
다만, 안심하긴 일렀다.
아직 온 거리만큼 가야 했거니와, 저 북쪽에는 가칸 부족의 부락이 있었으니깐.
“오늘은 여기서 날을 보내려고 하는데 어떻습니까?”
“아, 좋은 거 같습니다.”
그 사건 이후로 중환이 변했다.
무생물을 바라보는 듯하던 시선은 온데간데없어졌고, 남궁천에게 의견을 구하는 일이 잦아졌다.
아니, 잦은 정도가 아니다.
야영 위치를 정하는 것조차 남궁천과 상의할 정도로 신뢰했다.
“사람은 참 간사해.”
그 모습을 본 제갈려는 혀를 찼다.
물론 중환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나지막하게 말이다.
사실 중환이 듣는다고 하여도 역정을 내진 못할 것이다.
틀린 말은 아니었으니깐.
다만, 남궁천은 중환의 뒷담을 하는 제갈려를 말리고 나섰다.
“결과가 좋아서 그렇지만, 당시에는 내가 속여 넘긴 게 맞으니 그의 태도를 욕하는 건 그만두거라.”
“어휴, 참 속도 좋아요.”
“본래 뒤에서 하는 말은 비수가 되어 날아오는 법이니, 항상 말을 할 때는 주의를 기울여야 할 필요가 있는 법이다.”
“아, 그렇죠. 지당하신 말씀이에요.”
제갈려가 다소 빈정대는 어투로 말했지만, 남궁천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시후는 짐 마차에서 간이 천막을 내렸다.
곧 땅을 파기 시작했는데, 얼어붙은 흙을 헤집는 것도 며칠 동안 하다 보니 이젠 익숙해졌다.
끼에에엑!
듣기 불쾌한 소리.
시후가 인상을 팍 썼다.
단순히 듣기 싫어서가 아니다.
소리의 근원지는 하늘이었다.
어제오늘 보이지 않는가 싶더니 해가 기웃기웃 저물어가는 지금, 새가 나타났다.
제갈려가 한숨을 내쉬며 초현 공주에게 다가갔다.
잠시 후, 두 사람의 모습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시후는 중환을 찾으려 했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는 어느새 남궁천 옆으로 다가와 있었다.
“곧 해가 저물 텐데 귀찮게 됐습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이러면 저녁 식사도 애매해지는군요.”
“식사보다야 시간이 문젭니다. 이 시간에 찾아온다면 돌아가지 않을 가능성도 있지 않습니까?”
남궁천의 말에 중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이틀에 한 번꼴로 조우하는 것조차 긴장되는데, 하루를 같이 보낼지도 모른다는 말은 안전을 책임져야 할 중환에겐 너무나도 가혹했다.
“그러지 않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만약을 대비해서 나쁠 건 없습니다. 일단, 빠르게 공주님 주무실 곳을 마련해서 다시 진법을 펼치지요. 식사를 준비할 시간은 없을 듯하니, 육포 등으로 해결해야 할 거 같습니다.”
중환은 침중한 표정을 지었지만, 금세 안색을 회복하곤 병사들을 닦달했다.
채 반 각도 걸리지 않아 간이 천막이 세워졌다.
“아, 짜증 나.”
제갈려가 진법을 해제하며 짜증을 부렸다.
밖에서 하는 이야기를 다 들었을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게 하는 건 물론이거니와 접근까지 배제해야 했다.
진이 조금 더 복잡해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제갈려의 수준이라면 어려운 것도 아니지만, 감옥에 갇힌 것처럼 간이 천막 안에만 있어야 할 것이다.
“불도 못 피우잖아!”
“왜? 어차피 안 보이지 않아?”
“열기는 어쩌고?”
“못 막아?”
“진법이라고 다 되는 줄 알아? 아, 몇 개를 겹쳐야 하는 거야?”
제갈려는 짜증이 한 것 나는지 목소리에서 날이 바짝 섰다.
시후는 이럴 때 말을 더 섞어 봤자 귀찮아지기만 할 것을 알기에 침묵을 지켰다.
초현 공주도 상황이 그다지 좋지 않게 흘러감을 인지했는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간이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제갈려의 손을 떠난 천로수변이 얼어붙은 땅에 하나둘 꽂히더니, 어느 순간 천막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저녁을 준비하는 게 어떨까요?”
“지금 상황에서 말이오?”
“차 아우, 좋은 생각이네. 위공, 가만히 기다리면 너무 부자연스러우니 그편이 좋겠습니다. 보통 스물 남짓이 찾아 왔으니, 준비하던 것의 두 배를 준비하면 될 것입니다.”
시후의 제안에 중환이 의문을 표했지만, 남궁천이 거들자 곧바로 병사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병사들이 불을 피우고 음식을 준비하는 동안, 중환은 보이지 않는 초현 공주의 천막을 계속 힐끔거렸다.
이 추운 날 따뜻한 음식을 대접하지 못하는 게 못내 마음에 걸리는 듯했다.
고기를 잔뜩 넣은 탕에서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기 시작할 무렵, 저물어 가는 햇빛을 가르며 먼지구름도 덩달아 피어올랐다.
“온다.”
아주 미약하지만, 지축이 울리는 진동이 전해졌다.
그와 동시에 놈들의 숫자도 확인되었다.
먼지구름 때문에 뒤가 정확히 보이진 않았지만, 서른에 약간 못 미쳤다.
다행히도 준비한 식사가 모자라진 않을 것이다.
문제는 여태까지 만났던 부족들과 접근 방식이 달랐다.
대표 한 명이 아니라 전원이 접근했다.
다들 긴장하는 게 전해졌다.
시후가 옆에 내려 둔 자운유성창으로 손을 뻗으려 하자 남궁천이 만류했다.
“자중하게. 저들이 병장기에 손을 올린 뒤 반응해도 늦지 않네.”
틀린 말은 아니다.
정면으로 붙는다면 순식간에 저들을 쓸어 버릴 수 있다.
단, 달아나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행여나 시비가 붙더라도 말에서 내린 다음에 싸워야 합니다.”
“다짜고짜 활을 쏘지 않은 것을 보니 싸울 생각은 접어 두셔도 될 거 같습니다. 위 호위께서도 긴장을 누그러트리십시오. 날 선 반응을 보일수록 저들의 경계심 또한 더욱 가중될 겁니다.”
남궁천은 전투 의지를 보이는 중환을 진정시켰다.
이전과 달리, 놈들은 접근 방식이 달라졌음에도 여전히 침착했다.
짧은 속삭임을 나누는 사이, 놈들은 표정을 읽을 수 있는 거리까지 다가왔다.
시후는 눈을 좌우로 굴리며 우두머리를 찾아냈다.
덩치는 주변인들에 비해 다소 왜소했으나, 풍기는 기세는 여태껏 만난 자들 가운데 가장 강렬했다.
최소한 절정이다.
“누구의 허락을 받고 칸의 대지에 발을 디디는가!”
고막을 쩌렁쩌렁 울리는 성난 목소리.
그를 상대하기 위해 남궁천이 앞으로 나섰다.
“이 땅의 주인이 칸임을 모르진 않습니다. 저는 그 후예들을 위해······.”
남궁천은 이전과 같이 구구절절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경계 어린 시선이 조금이나마 누그러지길 바랐으나, 여전히 날을 바짝 세우고 있었다.
“······ 하여, 초원의 영웅들에게 한 끼 대접하고 싶은데 그 기회를 주시겠습니까?”
대답은 없었다.
이를 지켜보는 중환의 손끝이 움찔움찔했다.
하지만, 남궁천은 고개를 숙인 채 미동조차 없었다.
얼마나 침묵이 이어졌을까.
사내가 몸을 돌렸다.
“돌아간다.”
생각지도 못한 반응에 남궁천은 진심으로 당황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붙잡을 새도 없이, 바로 말 머리를 돌렸다.
중환은 멀어져 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시후와 남궁천의 표정은 잔뜩 굳어 있었다.
마냥 좋아할 일은 아니다.
분명 뭔가 목적이 있어서 온 게 분명한데, 물러난 이유를 몰랐다.
상대의 의도를 모르는 것만큼 찝찝한 건 없었다.
“앞으로 주의해야겠네요.”
“우리가 조심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니 문제로군.”
“차라리 속도를 올리는 방법은 어떨까요?”
“아무리 빨리 움직인다고 해도 저들을 따돌리기엔 요원한 일이지 않은가?”
이쪽은 몸이 무겁다.
그에 반해 상대는 가볍다.
하루에 움직일 수 있는 거리를 비교해 본다면 족히 다섯 배는 차이가 날 것이다.
물론, 짐을 버려도 떨쳐 낸다는 보장은 없다.
그들의 속도는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시후도 그 사실을 모르진 않았다.
그냥 답답해서 해 본 소리일 뿐.
저물어가는 해를 뒤쫓으며 사라지는 그들의 뒷모습을 불안감을 담아 노려볼 볼 수밖에 없었다.
* * *
준비했던 육십 인분의 저녁 식사를 아침에도 먹어치운 뒤 출발하려 했으나, 다시금 나타난 새 때문에 그러지 못했다.
출발은 지연됐다.
찾아오리라 생각했으니깐.
하지만, 한 식경이 지나고 반 시진이 지날 때까지 나타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제갈려는 천로수변을 손에 쥔 채로 하늘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뭐 하자는 짓일까?”
별 의미 없는 혼잣말이었지만, 다들 머릿속에 잠들어있는 말이기도 했다.
중환은 점점 높이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곤 고개를 저었다.
“어떻게 하는 게 좋겠습니까?”
남궁천이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상대의 의도를 모르는데 그라고 뾰족한 수가 있겠는가.
하지만, 계속 머무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사방을 경계하면서 움직이되, 누군가 다가오는 게 관찰된다면 바로 멈춰서 공주님을 숨깁시다.”
어쩔 수 없이 눈치를 보다가 출발했다.
막상 출발하긴 했지만, 다들 연신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하늘을 올려다보느라 나아가는 속도는 한없이 더뎠다.
그나마 고무적인 점이라면, 제아무리 튼튼한 날개를 가진 새라고 해도 무한정 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어? 간다!”
새는 서쪽으로 날아갔다.
제갈려는 초지일관 목이 빠지도록 하늘을 올려보고 있었기에 누구보다 빨리 그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중환은 눈치를 보더니 속도를 올렸다.
덕분에 말들의 입에서 연신 뜨거운 김이 뿜어져 나왔지만, 허비한 시간을 생각하면 마냥 천천히 갈 수는 없었다.
중간중간 최소한의 휴식을 취하며 나아갈 뿐이었다.
“어제 왜 그냥 돌아갔을까?”
짧은 휴식 동안 말들에게 건초를 먹이는 사이, 제갈려가 시후의 옆으로 다가와 물었다.
시후는 마땅한 대답을 해 주기 어려웠기에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을 아꼈다.
제갈려 또한 시후가 답해 주길 바란 건 아닌 듯 침묵을 이어갔다.
다만, 그 침묵은 그리 길지 않았다.
“조금 불길해.”
불길한 감정을 비단 제갈려만 느끼진 않았을 것이다.
시후 역시, 찜찜함을 넘어서 매우 거슬리는 느낌을 전해 받았으니깐.
그럼에도 시후는 애써 태연한 척 자신을 포장했다.
“뭐가 불길한데?”
“그냥 다 불길해.”
어린아이의 이유 없는 투정과 같았다.
하지만, 허투루 흘려들을 수만은 없었다.
‘제갈세가 차녀 생존기’의 임무 대상인 그녀가 불길하다면, 정말 생존에 중대한 위협이 될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안 그래도 분위기가 좋지 않은데 불안감을 증폭시킬 필요는 없었다.
시후는 검지로 제갈려의 이마를 툭툭 밀었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초현 공주 옆에 붙어 있어.”
“쓸데없는 소리라니. 여자의 감을 무시하는 거야?”
“너도 여자긴 하냐?”
시후의 말에 제갈려가 주먹을 불끈 쥐더니, 씩씩거리며 초현 공주의 곁으로 다가갔다.
곧 이쪽을 가리키며 뭐라 열심히 입을 놀리는 모양새가 욕을 하는 듯했다.
시후는 관심을 거두고 앞으로 일어날 변수들을 되짚어 보려 했으나, 곧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힐끔 바라본 서쪽에 일어나는 먼지구름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도 아주 자욱이.
- 120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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