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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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화 가혹한 겨울의 땅 (1)
“황량하네.”
제갈려는 짐 마차 위에 걸터앉아 발을 굴리며 중얼거렸다.
그 말에는 시후도 십분 동감했다.
북경을 떠나온 지 닷새가 지났다.
만리장성을 지나 오백 리쯤 올라왔을 뿐인데도 주변 환경이 돌변했다.
소복이 내린 눈 사이로 보였던 푸르른 초목들은 한 줌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뿐이랴, 숨을 쉴 때마다 목이 칼칼해질 정도로 건조했다.
하지만, 이건 아직 초입에 불과했다.
나아갈수록 더욱 가혹한 환경이 펼쳐질 것이다.
“그보다 이대로 쭉 가는 걸까?”
“그럼 쭉 가야지.”
“아니, 그 말이 아니라 저기 저 사람.”
제갈려가 눈짓으로 가리킨 방향에는 중환이 있었다.
대열 가장 앞에 있는 그는 남궁천에게 제대로 한 방 먹은 탓인지, 나흘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냉기가 풀풀 흘렀다.
하긴, 누가 짐마차 열 대 분량의 식량을 가져갈 것으로 생각했겠는가.
남궁천이 먹을 식량을 마차에 실어서 가져갈 수 있냐고 물어보라 했던 이유가 여기 있었다.
“만약에 아라사까지 가는 동안 안 만나면 어떻게 할 생각이에요?”
“돌아오는 길에 팔아야지.”
“진짜 팔 생각이에요?”
“그들은 겨울을 풍족히 보낼 식량을 얻을 것이고, 나는 양질의 가죽과 털을 얻지 않겠나.”
“갈 때는 그들을 피해서 움직이고, 올 때는 그 반대가 되겠네요.”
“못 찾으면 난 쪽박 차는 걸세.”
남궁천이 너스레 떨며 말했다.
물론 제법 돈을 썼을 테지만, 남궁세가의 재력을 생각한다면 이건 푼돈이라 부르기도 민망했다.
짐 마차 열 대를 그득히 채운 곡식들은 남궁천이 가진 쌈짓돈으로 만들어 낸 결과일 뿐이니 말이다.
“어? 멈춘다.”
제갈려의 말대로, 앞에서 속도를 줄이더니 마차가 줄줄이 멈춰 섰다.
그에 남궁천도 이리저리 바삐 움직이며 마차를 세웠다.
사방이 뻥 뚫린 공간이지만, 육안으로 보이는 반경 내에는 이러한 공간밖에 없기에 별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찬 바람을 막기 위해 마차를 다닥다닥 붙이고 하룻밤을 묶어 가기 위해 자리를 마련했다.
남궁천이 준비한 마차들은 이럴 때 미약한 도움이 되었다.
중환 휘하의 병사들은 변복했지만, 절도있는 움직임을 보이는 게 대놓고 군 소속임을 드러냈다.
북원의 몽골인들을 만난다면 다짜고짜 무기부터 빼 들지 않을까 걱정일 정도였다.
중환은 병사들에게 이것저것 지시를 내리곤 시후를 향해 다가왔다.
“이대로 이틀만 더 가면 석림호특(錫林浩特)이오.”
중환이 닷새간의 침묵을 깨며 시후에게 말을 걸어왔다.
여전히 남궁천에겐 시선조차 주지 않는 게, 화해를 바라기엔 아득히 먼 이야기 같았다.
그가 말하는 석림호특은 북원의 몇 안 되는 도시 중 하나로, 이 메마른 땅을 지나는 이상 들릴 수밖에 없다.
다만, 이쪽은 들릴 수 없는 처지다.
애초에 들를 계획도 없었지만.
“서쪽으로 크게 우회하실 건가요?”
“동쪽은 지대가 낮고 작은 부락들이 흩어져 지낸다고 하니, 아무래도 그편이 좋을 듯싶소.”
“그럼 경로는 이쪽으로 해서······.”
시후는 저물어 가는 햇빛에 지도를 비춰 가며 중환과 이야기를 나눴다.
남궁천이 곁눈질로 지켜보는 게 느껴졌지만, 중환은 거기까지 막아설 생각은 없는지 내버려 두었다.
게다가 중간중간 끄덕이는 게 남궁천의 생각 또한 다르지 않다는 걸 의미했다.
중환이 몇 마디를 더 나누곤 초현 공주의 곁으로 돌아갔다.
공주는 여전히 면사를 쓰고 있었다.
“만났을 때 계속 면사를 쓰고 있는 것도 의심받기에 십상일 텐데, 차라리 남장하는 게 낫지 않아?”
“남장한다고 가려질 미모는 아니잖아? 게다가 몽골인들은 남자답지 못한 남자를 혐오하는 수준이라고 하니깐, 차라리 안 하는 편이 낫지.”
시후는 순간적으로 미미객잔을 떠올렸지만, 이내 머릿속에서 지웠다.
쓸데없는 생각보다는 지도를 조금 더 유심히 들여다보는 게 건설적인 행동이었으니깐.
* * *
북서쪽으로 끝없이 나아갔다.
중간중간 조그만 저수지를 만나면 조심스레 접근해 물을 채웠다.
메마른 땅이기에 물이 아주 귀했다.
초현 공주조차 이틀에 한 번 세안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할 정도였으니 오죽하랴.
그래도 초현 공주는 신분에 걸맞지 않게 불편한 와중에도 꾹 참아줬기에 그나마 나았다.
“지맥이 아주 구려. 이런 땅을 밟은 것 자체로 몸이 간질간질한데 여기서 어떻게 살아간다는 거야? 망할, 이래서 유목민이 된 건가?”
“농사지을 땅이 없으니 유목민이 된 거겠지.”
“지맥이 구리니깐 농사를 못 짓는 거야.”
“뭐, 전후를 따지고 들자면 그게 맞겠지.”
달걀이 먼저냐 닭이 먼저냐의 이야기 같았지만, 시후는 이야기를 길게 이어 갈 생각이 없었기에 대충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해가 정수리 위까지 떠올랐지만, 북으로 향했기에 날이 갈수록 추워져만 갔다.
시후는 홍설이 만들어 준 털모자를 더욱 깊게 눌러쓰며 앞을 바라봤다.
아침과 그다지 다르지 않은 풍경이었다.
어제도 이와 비슷했다.
물론, 내일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가야 할 길은 메마른 땅이 쭉 이어질 테니까.
“새다.”
남궁천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황량한 대지를 거니는 정체 모를 무리를 반기는 것일까.
새 한 마리가 일행의 머리 위를 맴돌았다.
정수리 위에 떠 오른 해 때문에 얼마나 높이 있는지 무슨 새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만큼 높이 떠 있다면 맹금류 중 하나일 게 분명했다.
“먹을 걸 주면 내려오려나?”
“쓸데없는 소리.”
시후는 헛소리를 늘어놓는 제갈려에게 핀잔을 준 뒤, 남궁천과 함께 중환에게 다가갔다.
그 역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남궁천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새를 쫓을 수 있습니까?”
“활이 없소. 있다고 한들, 높이를 보아하니 맞추는 건 불가능하오.”
“높이를 잴 수 있습니까?”
“대략 삼백 장 위에 있소.”
그간 서로 말을 나누지 않았으나, 지금도 그러기엔 상황이 좋지 않았다.
저 새가 문제가 아니다.
제아무리 날카로운 발톱과 부리를 지녔다고 한들, 검기 한 방에 날개가 꺾일 한낱 미물에 불과하다.
하지만, 머리 위를 빙글빙글 돌고 있는 모습은 저 멀리서도 잘 보일 것이다.
그 사실이 중요했다.
“단순한 새일 가능성은 없을 것 같죠?”
중환과 남궁천은 의견이 일치했는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마차 열다섯 대.
최소한의 인원으로 움직인다고 하지만, 무려 서른에 달하는 인원이다.
먹잇감으로 보이려야 보일 수 없는 숫자인 만큼, 사람에게 길들었다고 보는 게 옳았다.
“마냥 좋은 의도로 쫓는다고 생각되긴 어렵겠습니다. 대책이 있으십니까?”
남궁천의 물음에 중환은 대답하지 못했다.
사방을 둘러봐도 몸을 숨길 수 있는 곳은 없다.
게다가 바닥에 아로새겨진 바퀴 자국은 너무나도 선명했다.
“피하긴 힘들겠군.”
“어차피 붙들릴 거라면 준비를 하죠?”
시후의 말에 중환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떻게 말이오?”
“일단, 진법으로 초현 공주님을 숨기시죠. 그다음에 대화를 시도해 보는 게 어떨까요?”
“대화라······.”
“차 아우의 말대로 이 주변은 호전적인 부족들이 있는 곳은 아니니, 죽이고 빼앗겠다는 생각은 아닐 겁니다.”
남궁천이 거들고 나섰다.
그에 중환은 갈등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마에 새겨진 주름의 골만큼이나 짧은 고민 뒤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이 있거든 말해 보시오.”
중환이 허락하자 시후는 곧바로 남궁천을 바라봤다.
이럴 경우를 대비해서 준비하지 않았는가.
남궁천 또한 자신 있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먼저 나서서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 * *
새는 여전히 머리 위를 맴돌았다.
그 시간이 어느덧 반 시진이 지났을 무렵, 저 멀리서부터 먼지구름이 일었다.
“그렇게 날을 세우고 있으면 싸우자는 것과 다르지 않을 텐데요?”
“크흠!”
시후의 핀잔에 중환은 얼굴을 붉히며 헛기침했다.
어차피 정면에 서는 건 남궁천의 몫이기에 중환은 뒤로 물러났다.
뿌연 먼지구름은 시시각각 다가왔다.
도통 속도를 줄일 생각이 없나 싶은 생각이 들 무렵, 멈춰선 마차를 본 것인지 놈들은 조금씩 속도를 줄여갔다.
숫자는 총 스물.
놈들은 삼십 장 근처에서 멈추더니, 다들 등에 걸린 활을 왼손으로 쥐었다.
시위에 화살은 걸지 않았지만, 위협으로는 매우 적절했다.
“위대한 칸의 대지에 함부로 발을 디디는 자 누구인가!”
가장 거대한 말에 올라탄 사내가 성난 목소리로 외쳤다.
그에 화답하듯 남궁천은 앞으로 나섰다.
“태릉 상단에서 온 추모라고 합니다! 평소 드넓은 초원의 기상을 간직한 칸의 후예를 존경한 터라, 잔혹한 겨울을 보내고 있을 그 후예들에게 도움이 되고자 찾았습니다!”
상대를 적절히 치켜세운 덕분일까.
흉포하게 느껴지던 상대의 기세가 한풀 꺾였다.
그는 그대로 말을 몰아 다가왔다.
아무리 무기를 쥐고 있지 않다고 한들, 홀로 다가오기엔 적지 않은 숫자였다.
하지만, 사내는 감히 대적할 것이라는 생각이 없는지 삼 장 거리까지 다가왔다.
“도움이 되고자 왔다고 했는데 왜 길로 다니지 않는 건가!”
“제 짧은 생각으로는 북쪽에 계신 영웅들이 더욱 힘겨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고 판단하여 조금이나마 위로 가고자 했습니다.”
“음······.”
사내의 표정이 더욱 누그러졌다.
그는 뒤에 줄지어 세운 짐 마차를 흘겨보았다.
“이게 다 곡식인가?”
“제 기준으로 좌측에 있는 마차는 전부 다 칸의 후예들을 위한 것입니다.”
“좋다! 북으로 간다고 하니 마차 한 대 분만 교환하지. 우리 게르로 온다면 양털······.”
“죄송하지만 그건 힘들 것 같습니다.”
한참 좋던 분위기가 급속도로 싸늘해졌다.
뒤로 물러났던 중환이 매섭게 노려봤다.
하지만, 남궁천은 뜻을 굽힐 생각이 없는지 고개를 뻣뻣이 들었다.
사내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저희는 한시라도 빨리 저 북녘 영웅들의 시름을 덜어드리기 위해 지체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죄송스럽지만, 마차는 직접 끌고 가셔야겠습니다.”
“뭐?”
사내의 얼굴은 수만 가지 감정이 뒤섞여 엉망이 되었다.
그는 허공에 손을 휘젓더니, 잠시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한 듯 고개를 살짝 숙였다.
이윽고 고개를 든 그는 떫은 감을 씹은 것처럼 변해 있었다.
“그 말은 곡식을 그냥 주겠다는 말인가?”
“제 행동이 일회성에 그친다면 모를까, 그럴 순 없지요.”
남궁천이 고개를 내저으며 말하자, 사내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말을 똑바로 해라!”
“북으로 갔다가, 추후 내려오는 길에 들리겠습니다.”
물건을 받는 처지에서 후불로 해 주면 안 되겠냐는 경우는 많지만, 주는 처지에서 후 불로 값을 치르라 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남궁천의 말에도 사내는 아무런 대답 없이 노려볼 뿐이었다.
허공에서 한참이나 엉키던 시선은 사내가 웃음을 터트리면서 끝을 맺었다.
“크하하하, 실로 대초원의 기상에 어울리는 사내로다! 좋다!”
남자는 곧바로 말 옆에 묶어 둔 산양 뿔 나팔과 손에 들고 있던 활을 던졌다.
남궁천은 두 물건을 놓치지 않고 받아 내자, 사내는 뒤를 돌아보며 다가오라 손짓했다.
“우리 차하르 부족은 칸의 명예를 아는 자들이다. 이 근방에 오거든 그 뿔 나팔을 세 번 불어라.”
“알겠습니다. 헌데, 이 활은 무엇입니까?”
“북에는 우리 형제 부족인 할하라 부족과 우량카이 부족이 있다. 이 활은 가지고 있으면 형제로 대해줄 것이다.”
남궁천은 곧바로 산양 뿔 나팔을 허리에 차고 활을 등에 멨다.
사내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그 사이, 시후는 가장 뒤에 있는 짐 마차를 돌려놓았다.
“난 구덴 타이시다.”
“추자헌이라 합니다.”
구덴은 남궁천과 잠시 눈빛을 주고받더니 마차를 이끌고 그대로 자리를 떴다.
머리 위를 맴돌던 새도 그들과 함께 사라졌다.
“대단하오. 이 위모, 진심으로 그대에게 탄복했소이다. 정면으로 붙었어도 이겼을 테지만, 말 몇 마디로 그들을 물리다니!”
“별거 아닙니다.”
중환이 한껏 들떠 남궁천을 칭찬했지만, 정작 이 엄청난 성과를 이뤄낸 남궁천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손을 내저었다.
분명 그의 성격상 속여넘기는 게 못내 맘에 걸렸을 것이다.
중환은 그런 사실을 모를 테니 신이 나서 몇 마디 더 떠들었다.
“이야기는 밤에 나눠도 충분하니, 어디로 갈지부터 다시 정하죠.”
본래라면 이곳에서 서쪽으로 쭉 간 뒤에 돌아가야 했다.
하지만, 남궁천의 기지로 할하라 부족과 우량카이 부족을 지나칠 수 있게 되었기에 여정이 확 단축되었다.
중환은 지도를 살피더니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북으로.”
- 119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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