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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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화 북풍이 불어오는 곳 (4)
초현 공주.
영무제의 다섯 번째 자식이자 셋째 딸이며, 아라사와 이어지기 위한 초석.
이번 ‘초원의 바람’이 피바람이 되지 않게 하려면 반드시 살려야 할 존재였다.
만약 보게 된다면 출발 직전에서나 보게 될 것으로 알았는데, 이렇게 갑작스레 보게 될 줄을 생각도 못 했기에 당황했다.
하물며 제갈려는 초현 공주가 어떤 사람이냐고 들먹였었고, 남궁천은 미인이지 않겠냐고 거론했으니 더욱 난감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초현 공주는 두 사람에겐 별다른 관심도 없었다.
“그대가 차시후라는 무림인인가?”
“아, 예!”
초현 공주의 말에 시후는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취하려 했으나, 뒤편에 있던 중환이라는 자가 어서 앉으라는 눈빛을 보냈다.
그에 시후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반쯤 일어났다가 다시 앉았다.
“본녀가 암행을 나왔다고 사방에 소문이라도 내려는 게 아니라면, 앉은 자리에서 예를 갖춰도 나무라지 않으마.”
내부에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았지만, ‘공주마마를 뵙습니다’라고 외치는 순간 소문이 퍼지기 마련이다.
“어······ 그럼······.”
“주 공녀라 부르거라.”
초현 공주의 말에 다들 쓴웃음을 지었다.
북경에서 주씨 성을 가진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눈 가리고 아웅과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확실한 건 공주마마라 부르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는 점이었다.
“주 공녀께선 여기에 어인 일로 오셨습니까?”
“초원을 지나다 보면 초대받을 일도 있다고 들었기에, 그들의 음식을 먹어 보기 위해 들렸노라.”
“현명하십니다.”
“그대들도 똑같은 이유로 들린 것 같은데 맞는가?”
“예, 초대를 받으면 마유주를 권한다고 하여 오게 되었습니다. 차 아우 말로는 이 녀석을 처음 먹으면 탈이 날 수도 있다고 하기에 미리 적응하기 위해 마시러 왔습니다.”
확실히 남궁천이 대화를 잘 나눴다.
초현 공주는 그간 북원을 주제로 공부했던 남궁천의 이야기에 점차 빠져들었다.
덕분에 시후는 마음 편히 마유주를 홀짝일 수 있었다.
석 잔쯤 비웠을까.
옆구리를 쿡쿡 찔러 들어오는 손가락이 있었다.
“그거 맛있어?”
“더럽게 맛없지.”
“그런데 왜 그렇게 먹어?”
“적응해야 할 테니깐.”
시후는 제갈려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기에 대화가 묻힌 줄 알았다.
하지만, 초현 공주는 들었나 보다.
“그게 아까 말한 마유주라면 본녀도 맛보고 싶구나. 잔을 하나 내오거라.”
그 말에 다들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다들 초현 공주의 뒤에 서 있는 중환을 바라봤다.
“주 공녀님, 이건 술입니다.”
“중환 호위는 내가 술도 못 마시는 어린아이라고 착각하는 건가?”
“울타리 안에서 드시는 거라면 상관없지만, 여긴 밖이지 않습니까?”
술이라는 건, 한 잔을 비우는 것보단 한 병을 비우는 게 더 쉽다.
이 말은 술이 술을 부른다는 말과 일맥상통했다.
중환은 술을 마시는 건 문제가 아니지만, 만에 하나 초현 공주가 취한다면 몸에 손을 쉽사리 대기 어렵다는 점을 계속 강조했다.
“혹시라도 취하시면 제가 부축해 드릴게요.”
하지만, 제갈려는 그런 중환의 걱정을 덜어 줬다.
덕분에 중환은 다른 핑계가 없었는지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 물러났다.
점소이가 새 잔을 가져다주자 제갈려가 배시시 웃으며 술을 따라 주었다.
“색이 독특하군.”
초현 공주는 잔에 따른 마유주를 보곤 면사를 슬쩍 들어 올려 입가에 가져다 댔다.
눈매가 찌푸려졌다.
일반적으로 먹는 술들과 궤를 달리했을 테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초현 공주는 억지로라도 한 모금을 마셨다.
익숙하지 않은 술을 마시는 게 적잖은 곤욕이었는지, 잔을 다 비우지도 않고 내려 놨다.
덕분에 중환의 표정이 밝아졌다.
“타지 음식도 입에 안 맞는 법인데 그들의 술이 입에 맞을 리 없지 않습니까? 음식이야 먹는 시늉만 하면 될 것입니다.”
“아라사로 가면 이보다 더 입에 안 맞겠지?”
문화 자체가 다르니 입에 맞을 리 만무했다.
중환의 표정은 삽시간에 어두워졌다.
그 어떤 위로의 말도 해 줄 수 없었으니깐.
애초에 초현 공주에게 거부권은 없었다.
그렇기에 내려놓았던 잔을 다시금 집었을 때도 그는 아무런 말을 못 했다.
* * *
북경에 도착하고 정확히 닷새 만에 모든 준비가 끝났다.
자금성에서 출발했다간 대놓고 귀에 들어가기에 십상이어서, 시후 일행은 사전에 연락받은 곳으로 이동했다.
[태릉 상단]
기존에 있던 곳일까.
아니면 이번 일을 위해서 새롭게 만든 곳일까.
잠깐이나마 궁금증이 일었지만, 크게 관심을 기울이진 않았다.
문을 두드리자 무뚝뚝한 남자가 나왔고, 시후가 적룡 금 패를 보이자 황급히 옆으로 비켜섰다.
그를 지나쳐 안으로 들어가자 남궁천의 표정이 떨떠름하게 변했다.
북원과 교류를 막았다고 한들, 오가는 상단이 없는 건 아니다.
어느 정도 돈을 찔러 주는 대가로 눈감아 주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하지만, 마차 다섯 대라니.
정도가 과했다.
“양을 줄이는 게 어떻겠나?”
“······ 일단 말이라도 해 볼게요.”
시후는 주위를 둘러보며 중환을 찾았다.
사람이 북적거렸지만,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들려왔으니깐.
“철룡! 육포는 이쪽으로 가져와라! 명지 이 녀석은 어디서 뭘 하는 게야!”
“위 호위님.”
“아, 차 호위께서 일찍 오셨군요. 지금 물건을 정리하느라 바쁘니 안에 들어가서 쉬십시오. 명지는 마차 안을 다시 한번 더 정리하도록 하고······.”
“그 물건 정리 때문에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시후가 말을 끊자, 중환이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아무리 그가 이전부터 초현 공주의 호위를 맡고 있었다지만, 시후 또한 황제의 명으로 호위를 맡은 몸이다.
무시할 순 없었기에 어서 말해 보라는 듯 고개를 까딱였다.
“이 마차가 전부 다 출발하는 건 아니겠죠?”
“부족하지만 이게 전부요.”
“부족하다뇨? 지금 너무 많아서 탈인데요.”
“아무리 비밀리라고 한들, 최소한 마차 세 대 분량의 지참금은 필요한 법이오.”
그 말에 시후는 짐 마차들을 자세히 살폈다.
특정 마차는 그리 많은 양을 싣지 않았음에도 바퀴가 땅에 깊숙이 틀어박혀 있었다.
필시 무게가 나가는 금은보화 등이 실렸을 터였다.
시후는 속으로 욕을 내뱉었지만, 간신히 표정 관리에 성공했다.
“곡식 위주로 챙겨서, 그들과 거래하면서 올라가는 게 좋을 거라고 말했잖아요.”
“녀석들이 이맘때 어디에 머무르고 어디로 가는지 알고 있으니 피해 가면 될 일이오.”
“모르진 않죠. 하지만, 실제로 마주치지 않고 지나칠 수 있다는 보장은 없잖아요? 만났을 때 저 마차를 보고 뭐냐고 물으면 어떻게 말하려고요?”
“아라사에 팔 물건이라 둘러대면 될 일이지 않소.”
“아니, 그거야······.”
“이 문제에 관하여 왈가왈부할 시간이 없으니 이만 물러가시오.”
중환은 시후의 말을 단호하게 자르며 등을 돌렸다.
곤란하다.
가혹한 겨울을 보내는 그들의 땅을 지나면서 식량을 챙겨가지 않는다?
온갖 시비를 걸어도 이상하지 않다.
그 시비가 약탈로 이어지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
조그만 부락이야 문제없겠지만, 문제는 가칸을 포함한 거대 부락들이었다.
시후는 일단 남궁천에게 돌아가 사정을 설명했다.
그의 얼굴이 구겨진 건 당연지사였다.
“싸워서 뚫겠다는 소리가 아니고서야 어떻게 저런 생각을 한다는 말인가?”
“어쩌죠?”
“으음······.”
기본적으로 남궁천과 제갈려는 외인(外人)이다.
이번 일에 따라오긴 했으나, 끼어든 것에 불과했기에 목소리를 내기는 힘들다.
남궁천은 한참을 고민하더니 슬쩍 시후를 돌아봤다.
“한 가지 물어보아 줄 수 있겠나?”
“짧게 물어보는 것 정도는······.”
중환의 태도는 대단히 단호했었지만, 남궁천의 표정 또한 그에 못지않게 진지했기에 시후는 조금 쓴소리를 듣기로 했다.
“그럼 우리가 먹을 식량을 마차에 실어서 가져갈 수 있겠느냐 물어보게.”
“그 정도야 그냥 얻어도······.”
“어서!”
남궁천이 낮게 소리 지르자, 시후는 이유를 되묻지도 못한 채 중환에게 다가갔다.
연신 명령을 내리던 그가 잠시 주변을 둘러보는 사이, 재빨리 다가가서 물었다.
“위 호위님. 혹시, 우리가 먹을 식량을 마차에 실어서 가져갈 수 있을까요?”
“마음대로 하십시오.”
다소 짜증 섞인 어투였지만, 시후는 원하는 대답을 들었기에 후다닥 물러났다.
“마음대로 하라는데 도대체 뭐 때문에······.”
“출발이 오시였지?”
남궁천이 다시금 말을 끊으며 다급히 물었다.
시후가 고개를 끄덕이기 무섭게 그는 곧바로 태릉 상단을 나섰다.
도무지 왜 저러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기에 제갈려를 바라봤다.
하지만, 제갈려 또한 남궁천이 왜 저러는지 짐작 가지 않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두 사람은 바쁘게 움직이는 인부들을 피해 구석으로 이동했다.
제갈려는 긴장도 안 되는지 여유롭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공주는 어디에 있으려나.”
“너 그거 불경죄야.”
“말 놓으라고 했잖아?”
“술 먹고 한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냐?”
“여아일언 중천금이랬어.”
“그래, 맘대로 해라······.”
시후는 헛소리를 늘어놓는 제갈려를 뒤로한 채, 고민에 고민을 더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초현 공주의 노출을 최소화하려고 한들, 끊임없이 움직이는 유목민들에겐 들킬 수밖에 없다.
최단 거리로 간다고 해도 사천리.
따지고 보면 광동성에서 북경까지 올라온 거리보다 짧았다.
다만, 노출을 최소화하기 위해선 길을 상당히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끽하다간 사천리가 아니라 오천이 훌쩍 넘을 것이다.
물론, 이쪽 땅을 제외한다면 끽해야 삼천리.
“삼천리 금수강산도 아니고······.”
“응?”
“아무것도 아냐.”
고비사막을 지날 때까지는 괜찮다.
지금 이 시기의 고비사막은 몇 개 가정이 모인 규모의 부락이 전부다.
규모가 작은 만큼 그들이 접근해오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쪽이 눈에 띄어서 좋을 건 없었다.
혹여라도 거대 부락의 귀에 들어가면 여간 곤란 한 일이 아닐 테니까.
“조금 빙 둘러가더라도 헨티산맥까지 갈 테고······.”
시후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이동 경로를 예측했다.
나중에 어떻게 이동할지 물어보긴 하겠지만, 예상과 다르다면 왜 그렇게 이동하는지 물어야 했으니깐.
남궁천이 얻어온 정보를 토대로 최선의 길을 생각해 내고 있는 사이, 인부들의 움직임에 여유로움이 묻어나기 시작했다.
출발 정리가 끝나 가는 것이다.
시후는 아직 남궁천이 돌아오지 않았다는 걸 깨닫곤 황급히 일어섰다.
“아직 안 오셨어?”
“어? 그러고 보니 언제 오신대?”
해가 중천에 떠오르기 직전이었다.
저 깐깐한 중환이 기다려 줄까?
기다린다면 시간을 얼마나 할애할까?
시후는 서둘러 태릉 상단을 빠져나왔다.
이 넓은 북경에서 남궁천을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 머리가 복잡했지만, 문제는 금방 해결되었다.
남궁천은 길 끝자락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다만, 전혀 예상치 못한 광경이 펼쳐졌다.
시후는 남궁천의 뒤를 가리켰다.
“······ 저게 뭐, 뭐죠?”
“우리가 먹을 식량이네.”
“저걸 다요?”
“그렇네.”
남궁천의 담담한 태도에 시후는 할 말을 잃었다.
긴 여정이 될 테니 식량과 식수 확보는 그 무엇보다 중요했다.
혹독한 초원의 겨울에서 자급자족할 식량을 구하긴 요원한 일이니깐.
다만, 남궁천의 뒤에 멈춘 짐 마차는 그 수가 무려 열 대였다.
- 118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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