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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자의 클리어 공식-116화 (98/201)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116화 북풍이 불어오는 곳 (3)

땅거미가 질 무렵.

시후는 홀로 자금성을 찾았다.

남궁천이 같이 가고 싶은 눈치였으나, 황제가 동네 친구도 아니고 그럴 수야 있겠는가.

덕분에 불쾌한 내시의 걸음걸이를 보는 건 오롯이 시후 혼자만의 몫이었다.

건청궁 담을 따라 월화문에 다다르자 몸수색을 하였으나, 사전에 이야기가 되어 있었는지 시늉으로 그쳤다.

“안으로 드시지요.”

“어? 신선폐는요?”

“황제께서 그냥 들여보내라 하셨습니다.”

신선폐의 미복용은 곧 신뢰를 의미했다.

배교에 이어 수로채를 일망타진한 것에 이 정도 신뢰를 보낸다?

시후 혼자서 이뤄 낸 성과라면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중간중간 몇 가지 일들을 제외하면 정의맹에서 다 처리한 것과 마찬가지였기에 회의적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궁금증이 더욱 커졌다.

왜 이런 대우를 해 주는지.

고민을 길게 할 시간은 없었다.

건청궁 안으로 발을 내디뎠으니깐.

시후는 익숙하면서도 익숙하지 않은 예법에 따라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위대하신 대명 제국의 황제를 뵙습니다.”

“도망친 놈들을 죄다 일망타진했다고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바로 본론인가.

시후는 이마를 바닥에서 떼며 고개를 살짝 들어 올렸다.

“믿고 맡겨 주신 덕분입니다.”

“적룡 금 패를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들었는데 딱히 이유가 있는가?”

“나라를 좀먹는 간악한 무리를 물리치는 일을 두고 본다면, 어찌 대명 제국의 백성이라 하겠습니까. 너 나 할 것 없이 앞장섰기에 구태여 손을 빌리지 않았습니다.”

“매번 입에 발린 소리를 잘도 늘어놓는구나.”

“진실을 입에 발린 소리라 말씀하신다면, 그렇다 하겠습니다.”

시후는 더욱 머리를 조아리며 아부했다.

곧이어 보좌 위에 앉아 있는 영무제의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감언이설에 놀아날 나이는 진즉에 지났으나, 아무래도 이런 아첨이 듣기 좋은 건 사실이지.”

시후는 입술을 살짝 떼었지만, 곧바로 입을 꾹 닫았다.

과함은 모자람만 못하다는 말을 떠올렸다.

더 아부를 떨었다간, 되려 역풍을 맞을지도 몰랐다.

“일 처리도 매끄럽고, 눈치도 빠른 거 같기에 짐이 한 가지 일을 더 맡겨 보려고 한다.”

귀를 쫑긋 세웠다.

하오문에서 알아본 망이라는 인물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거부권은 없었다.

아니, 거부해도 상관은 없다.

그렇게 된다면 적룡 금 패를 반납해야 할 것이고, 앞으로 관의 도움은 바랄 수 없을 뿐.

“명하면 따르겠습니다.”

“내부가 평온해지니 밖이 어지럽구나.”

왔다.

시후를 천천히 심호흡하며 고개를 들었다.

당당한 표정으로 영무제를 바라봤다.

믿고 맡기라는 눈빛을 절절히 담아 보냈다.

“선대에서 저 간악한 북방의 오랑캐 무리를 내쫓았지만, 중원을 향한 놈들의 움직임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지금은 보잘것없으나 이를 내버려 둔다면 훗날 화근으로 돌아올 터. 이에 따라 한가지 계책을 마련했다.”

“훌륭하신 계책입니다.”

시후는 말이 끝나자마자 칭찬했으나, 아직 영무제가 하고자 하는 말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 사실은 뒤늦게 말을 내뱉은 다음에야 깨달았다.

마주한 영무제의 눈빛이 묘하게 변했다.

“무슨 말인 줄 알고 훌륭하다고 하느냐?”

“······ 폐하의 영민하신 두뇌에서 떠올리신 계책이라면 그 무엇이 훌륭하지 않겠습니까? 실로 대단한 계책일 게 분명합니다.”

시후는 되려 당당하게 나섰다.

그리고 속으로, 제발 그냥 넘어가 달라고 기도했다.

그 기도가 통한 것일까. 영무제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첨이 끝이 없구나.”

“송구합니다.”

시후는 머리를 조아렸다.

하지만, 채근하는 말과 달리 영무제의 음색에는 묘한 웃음기가 담겨 있었다.

“이이제이(以夷制夷)라는 말이 있다. 저 북방의 오랑캐들을 굳이 우리가 상대할 필요가 없는 법이지.”

바닥에 깔린 금전(金塼)은 반질반질했다.

시후는 바닥에 납작 엎드려 있었기에 어렴풋이나마 자신이 짓고 있는 표정을 볼 수 있었다.

드러난 감정은 혼란 그 자체였다.

“아라사(俄羅斯)를 아느냐?”

시후는 머릿속이 복잡하여 대답 대신 머리를 숙인 채 고개를 끄덕였다.

아라사.

밖에선 러시아라 불리는 그곳.

“놈들이 힘을 합치는 건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지.”

전해진 의도는 명확했다.

동맹이다.

망이라는 자는 은밀히 아라사와 접촉하기 위해 갔을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동맹을 맺을 것인지가 문제다.

보통 동맹은 서신 쪼가리를 주고받는 거로 끝나지 않는다.

이 시대를 반영한 최고의 동맹 약속은 혈맹(血盟)이었다.

“초현 공주를 아리사 세자에게 시집 보낼 것이니, 그대는 초현 공주를 잘 보호해서 아리사 국경까지 데려다주어라.”

[특수 임무 ‘초원의 바람’이 발생합니다.]

시후는 보았다.

바닥에 비친 자신의 얼굴에 드러난 절망이라는 감정을.

이번에 받은 ‘초원의 바람’은 피바람이 될 것이다.

은밀히 위장시켜 보냈지만, 아라사에 다다르기도 전에 초현 공주는 살해당할 운명이니깐.

* * *

시후의 역할은 간단했다.

호위.

황실에서 모든 준비를 할 테니, 출발 전까지 적당히 시간을 보내다 보면 될 것이다.

하지만, 사지로 가야 하는 시후로서는 이 임무가 달갑지 않았다.

더욱이 남궁미는 물론이거니와 남궁천과 제갈려 또한 데려갈 수 없었다.

살 가능성보다 죽을 가능성이 압도적으로 높은 곳에 두 사람을 데려가는 건 미친 짓이었다.

시후는 이번 일의 위험성에 관해 남궁천에게 설명했다.

덕분에 시후는 남궁천의 또 다른 면모를 알아차렸다.

남궁천은 미쳤다.

“미아를 보내고 왔네. 그리고 일전에 보부상들에게 부탁한 정보를 받아 왔네. 우선 가장 문제가 되는 건 가칸 부족이라는 곳일세. 물론, 위험한 부족들이 한두 곳은 아니지만······.”

시후는 남궁천의 뒷말을 흘려들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남궁미는 팽가의 도움을 받아 안휘로 돌아갔다.

가기 싫다고 징징거렸으나, 남궁천은 일전에 본 적 없는 강경한 모습을 보이며 남궁미를 돌려보냈다.

시후가 연신 남궁천도 데려가지 않겠노라 말했지만, 고래 심줄보다도 질긴 그의 고집을 꺾을 순 없었다.

“넌 정말 안 가냐?”

“왜?”

태연한 표정으로 되묻는 걸 보니, 제갈려 또한 갈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강제력을 동원하기도 어렵다.

어차피 먼저 맡은 ‘제갈세가 차녀 생존기’는 아직도 진행 중이니 말이다.

결국, 시후의 마음가짐이 바뀌었다.

부득이하게 죽으면 어쩔 수 없다는 마음을 버리고 무조건 살아서 돌아온다고 말이다.

그렇기에 남궁천이 가지고 온 정보를 샅샅이 살폈다.

가장 눈에 띄는 건 엉성하게 그려진 지도였다.

“제법 상세하네요?”

엉성하게 그렸음에도 상세했다.

어불성설이지만, 이 말로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조악한 수준의 지도였음에도 안에 들어 있는 정보는 대단히 양질이었다.

“그들에겐 목숨이 달린 일이니, 당연하지 않겠나.”

지도에는 북원(北元)을 이루는 열두 부족들이 이 시기에 움직이는 방향이 그려져 있었다.

이 정보가 틀리지 않는다면 위험 부담을 십 분지 일로 줄일 수 있을 것이다.

꼼꼼히 살피고 또 살폈다.

시후는 당장 눈을 감아도 떠오를 만큼 살핀 뒤에야 곱게 접었다.

“옷도 바꿔 입어야 할 걸세. 혹여나 지나가다가 조우했을 때, 경계심을 조금이라도 늦추려면 말일세. 그리고 그들의 풍습 또한 알아두는 게 좋지. 그에 관해선 오늘 밤에 이야기해 주겠네.”

남궁천은 철두철미했다.

황실에서 준비해 주는 것과 별개로 여러 방법을 알아보고 있었다.

그 모습에 시후도 뒤늦게나마 하오문을 통해서 이것저것 알아보기 시작했다.

두 나라 간에 교류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국가 대 국가의 교류가 아니었을 뿐.

“알아보니, 마유주(馬乳酒)를 권하는데 이를 거부하는 것은 예의에 어긋난다고 하네요. 게다가 처음 먹어보면 배탈이 날 가능성이 크다고 하는데, 가서 고생할 바에 미리 먹어 보는 게 어떨까요? 마침 마유주를 파는 객잔도 북경에 있다고 하는데.”

“그 핑계로 술을 먹자는 건가?”

“시음. 딱 시음만 해 보자는 거죠.”

“시음이 한 병이 되고, 한 병이 한 말이 되는 게지.”

“그럼, 겸사겸사 이야기도 하지요.”

시후의 말에 며칠간 심각하던 남궁천의 얼굴에 웃음기가 맴돌았다.

“하하, 좋네. 안 그래도 머리에 지식을 쑤셔 넣느라 고생했으니 뱃속에도 뭔가를 넣어 줘야 하지 않겠나. 어서 앞장서게.”

마유주를 마시겠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가서 고생하지 않으려면 확실히 먹어보는 편이 좋았으니까.

다만,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시후 홀로 가야 했다면,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떠났을 것이다.

실패할 수밖에 없는 임무라는 걸 알았으니 말이다.

그렇기에 오랜만에 남궁천과 함께 술이라도 기울이고 싶었다.

쪼르르 따라오는 제갈려는 덤이지만 말이다.

제갈려는 자리에 앉아 마유주를 홀짝이더니 인상을 찌푸리며 내려놨다.

대신 위에 놓인 안주를 탐하였으나, 몇 점 먹다 말고 남궁천을 바라봤다.

“그간 관계가 소원했던 아라사와 혈맹으로 맺어진다면 어떤 변화가 일어날까요?”

“그렇다면 우리네 백성들 삶도 조금 더 나아지지 않겠는가?”

“왜요?”

“뒤통수에 적을 놔두고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없는 법이지. 하물며 지금의 북원은 온전치 못한 나라니 더더욱 그러할 테니.”

“그렇다면 이번 일을 성사시키는 게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겠네요?”

“중요하지. 이 나라에도 우리에게도 말일세.”

가슴을 짓누르는 남궁천의 한마디에 제갈려는 목이 메는지 내려놓았던 마유주를 들이켰다.

호기롭게 마시던 것과 달리, 채 반도 비우지 못하고는 인상을 팍팍 쓰며 내려놓았다.

제갈려는 워낙 묵직한 분위기를 싫어하는 터라, 화제를 전환하기 위해 이리저리 눈알을 굴렸다.

그러던 그녀가 갑자기 손끝을 튕기며 시후를 바라봤다.

“그보다 초현 공주는 어떤 사람이야?”

“미인이지.”

대답은 남궁천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 사실은 시후도 몰랐기에 떨떠름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두 사람의 시선에 남궁천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대체로 공주는 미인이지 않은가. 그냥 해 본 소릴세.”

“실제로 본 건 아니고요?”

“내가 무슨 재주로 공주의 옥안을 뵐 수 있겠나?”

“천이 형님이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봤을 줄 알았죠.”

“동감.”

시후와 제갈려의 의견이 오랜만에 일치했다.

그에 남궁천은 짐짓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떨궜다.

“두 사람이 날 이리 생각하는 줄은 꿈에도 몰랐군.”

“우리 둘만 그러면 다행이게요? 천이 오라버니를 조금이라도 안다면 열에 아홉은 이런 생각 했을걸요?”

“어허,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네.”

“진실을 외면하지 마세요.”

“이런, 그건 거짓된 진실이라네.”

세 사람의 목소리는 제법 컸다.

게다가 시후는 등에 자운유성창을 매고 있었기에 눈에 안 띄려야 안 띌 수가 없었다.

그래서일까.

시후는 위층에서 내려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너무 떠들었나 싶어 고개를 슬쩍 들어 위를 바라봤다.

시선이 마주쳤다.

여인은 눈을 제외한 얼굴 전체를 가리고 있었는데, 드러난 눈과 어렴풋이 보이는 얼굴 윤곽만으로 신비한 아름다움을 선사했다.

다만, 그보다도 더욱 눈에 띄는 건 그녀의 뒤에 있는 남자였다.

마치 곰과도 힘을 겨룰 것 같은 덩치의 소유자였는데, 눈 한 번 끔벅이지 않고 바라보는 게 예사롭지 않았다.

그는 허리를 숙여 곁에 있는 여인에게 귓속말을 속닥였다.

잠시 뒤, 여인의 눈매가 살짝 휘어지더니 계단을 내려왔다.

“누가 내 이야기를 하는가 했더니······. 여기서 만날 줄은 생각도 못 했구나.”

대뜸 반말이었지만, 그를 지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여인은 분명 ‘내 이야기’라고 말했다.

- 117화에 계속 -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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