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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자의 클리어 공식-115화 (97/201)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115화 북풍이 불어오는 곳 (2)

“교지에 바로 올라오라는 말은 없었던 거로 기억하네.”

이어지는 침묵을 깨며 남궁천이 확인하듯 말을 건넸다.

시후는 기억을 짚어 보다가, 틀린 점은 없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긴 하네요.”

“그러니 봄이 오면 올라가는 게 어떻나?”

봄.

생명이 태동하는 계절이다.

남궁천이 이야기하는 바는 명확했다.

봄이 오면 얼어붙은 땅이 녹을 것이고, 전쟁이 일어날 것이다.

전쟁이 일어나면 암살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초원의 바람’ 자연적으로 소멸할 가능성이 컸다.

“으음······. 교지를 안 받았으면 모를까, 받은 이상 그러긴 힘들죠.”

틀린 말은 아니다.

교지를 내렸음에도 뭉그적거린다는 건 황명에 반하는 것으로 비추어질 수 있다.

“주화입마에 들었다고 둘러대면 될 일일세. 사람이 찾아온다면 내상이 심각해 만나기 어렵다고 돌려보내면 될 일이지.”

그럼에도 남궁천은 어떻게든 안 가는 방향을 권유했다.

여린이 전해 준 이야기가 확실하진 않았지만, 그럴듯한 근거에 기반했다.

만에 하나 정말로 암살을 명한다면, 여간 골치 아픈 게 아니었다.

“여기서 한두 달 머무르시면서 상황을 지켜보시는 게 어떠신지요?”

“남궁세가로 가요. 아버지께 말씀드리면 너끈히 한두 달은 숨겨 주실 수 있을 거예요.”

“하오문은 정보력도 뛰어나지만, 숨기는 것 또한 일품이죠. 어설프게 안휘까지 가는 것보다는 이곳에 머무르는 게 좋다고 봐요.”

“그 말은 지금 남궁세가보다 하오문이 더 안전하다는 말인가요?”

“남궁세가보다 안전한 곳이 세상 어디에 있을까요? 하지만, 은닉은 하오문의 최대 장점이죠. 숨기는 데 있어서 하오문을 따라올 곳은 세상 그 어디에도 없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답니다.”

이때를 기회 삼아, 남궁미와 홍설도 안 가는 게 좋겠다며 몇 마디 거들었다.

다만, 둘 사이에 묘한 기류가 흘렀다.

으레 이럴 때면 남궁천이 만류해 줬었지만, 지금은 어느 쪽이든 결정하라는 듯 지긋이 바라볼 뿐이었다.

그 반응에 시후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귀띔해 주고 걱정해 주신 건 고마운데, 북경으로 올라가도 별문제 없을 것 같은데요?”

“말귀를 못 알아들은 거야?”

“아뇨. 충분히 알아들었죠.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소리잖아요? 그리고 황제가 쿠빌라이의 목을 원하는 거 같다고 말씀하셨고.”

“알아듣는 놈이······.”

“저랑은 별 상관없지 않을까요? 상식적으로 암살을 지시하려면 동창을 비롯한 다른 곳도 있을 텐데, 그런 전문 인원을 놔두고 왜 저를 쓰겠어요? 정말 암살하고자 하면 제가 갈 이유가 없죠.”

여린의 표정이 굳어졌다.

시후가 말을 끊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미 정해져 있다? 아니, 이미 출발했을지도 모르겠어. 그렇다면······.”

여린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더니 순식간에 방을 나섰다.

어디를 가는지 말도 남기지 않았기에 홍설은 당황했지만, 이내 정신을 수습하곤 각자 방을 내주었다.

이 과정에서 홍설은 자신의 옆방에 시후를 안내해 줬고, 남궁미가 불같이 화를 내며 달려들었다.

시후는 그 방을 남궁미에게 양보하는 것으로 무난하게 두 여자의 신경전에서 빠져나왔다.

그 모습을 지켜본 남궁천이 피식 웃으며 시후의 어깨를 두들겼다.

“고생했네.”

“미아가 왜 저러죠?”

“낯선 여자에게서 내 남자의 향기를 맡으면 누구나 저럴 테지.”

“누가 내 남잡니까? 그리고 향기가 남아 있을 리가 있겠어요?”

“하하, 말하는 걸 보니 차 아우는 홍설이라는 여인을 이미······.”

시후는 급히 남궁천의 입을 틀어막았다.

남궁미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만에 하나 들었다간 여간 곤란한 게 아닐 것이다.

그 반응에 남궁천이 빙긋 웃었다.

“그냥 던져봤는데 덥석 물었군.”

그 장난기 어린 목소리에 시후는 한차례 몸을 흠칫 떨었다.

당했다.

아니라고 부인하면 될 일을 쓸데없이 격하게 반응했다.

남궁천은 곧 싱글벙글 웃으며 방을 나섰고, 시후는 그런 남궁천의 등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다가 곧장 그의 뒤를 따라 나갔다.

“아니,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면요······.”

구질구질한 변명을 위해서.

* * *

아침이 되도록 여린은 돌아오지 않았다.

하오문 지부에 갔다는 연락을 전해 받긴 했지만, 아침이 되도록 돌아오진 않았다.

남궁천은 말 고삐를 건네받으며 홍설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하룻밤 잘 묶고 간다고 인사라도 드리고 가고 싶은데 어쩔 수 없군요. 덕분에 하루 잘 머물다 갑니다.”

“아닙니다. 갑작스러운 방문에 부족함이 많았으니, 다음에 연락을 주신 뒤에 찾아오시면 제대로 준비해서 맞이하겠습니다.”

“하하, 말씀만이라도 고맙습니다.”

남궁천이 웃으며 대답하곤 말 위에 훌쩍 올라탔다.

시후 또한 뒤따라 말에 올라타려 했지만, 쭈뼛거리며 다가오는 홍설의 모습에 다시 바닥으로 내려왔다.

남궁천과 남궁미의 시선이 느껴졌다.

한쪽은 재밌는 구경거리가 생겼다는 듯 관망하는 눈치였고, 한쪽은 살기마저 느껴질 정도로 매서웠다.

시후는 그런 두 시선에 어색하게 웃으며 홍설을 마주했다.

“위에는 상당히 춥겠지요? 목도리만으로는 조금 부족할 거 같아서 준비한 게 있는데······.”

홍설은 쭈뼛거리면서도, 따스해 보이는 털모자를 건네주었다.

털모자를 받아들자, 푹신하면서도 부드러운 촉감이 시후의 손끝을 간지럽혔다.

금사박투 덕분에 한서불침을 넘어 수화불침에 이른 시후에겐 무용(無用)한 물건이었다.

그렇기에 시후는 곧장 말 안장 옆에 메어 둔 봇짐에 넣으려 했지만, 홍설의 은근한 눈빛을 외면하진 못했다.

머리에 푹 눌러쓰자 보들보들한 감촉이 귓가를 간지럽혔다.

“딱 맞네.”

시후의 간략한 소감에도 홍설은 발그레해진 뺨을 가리며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했다.

그 모습을 보니 머리라도 쓰다듬어 주고 싶었지만, 옆에서 노려보는 시선이 한층 더 강해졌기에 참아야 했다.

대신 털모자를 쓴 채로 말에 올라탔다.

“다음에 또 올게.”

“기쁜 맘으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지는 홍설을 뒤로 한 채, 눈이 질척질척 녹은 정주 시내를 가로질러 선착장으로 말을 몰았다.

뒤에 있던 남궁미가 슬쩍 말을 옆으로 붙였다.

“따뜻해 보이네요?”

무슨 대답을 해야 할까.

시후는 극도로 정신을 집중했다.

이 정도로 집중했던 적은 최근 빙검과의 싸움이 유일했을 정도였다.

시간을 너무 끌면 오히려 독이다.

“토끼털을 써서 그런지 따뜻하긴 하네.”

하긴 하네.

저 말에는 여러 가지 뜻이 담겨 있었다.

시후의 발언은 정답에 가까웠기에 남궁미의 얼굴이 한결 밝아졌다.

시후가 어서 얘를 남궁세가로 돌려보내야지 숨통이 트이겠다는 생각을 하는 찰나, 골목길에서 한 소동이 앞으로 다가왔다.

말 속도를 줄이자 소동은 까치발을 들어 쪽지를 건네주었다.

남궁천은 허리를 깊게 숙여 아래로 팔을 뻗었다.

곧 소동에게서 건네받은 쪽지를 읽더니,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북경에 가시면 바로 하오문에 들리라는군.”

뭔가를 알아낸 것일까.

아니면 시간이 더 필요한 것일까.

정답은 알 수 없었다.

알고 싶으면 북경에서 하오문을 들리는 수밖에.

* * *

오랜만에 찾은 북경반점은 이전과 똑같았다.

노인은 여전히 구석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는 시후의 뒤에 있는 남궁천을 보곤 눈을 살짝 찌푸렸다.

뭔가를 고민하는 눈빛이었다.

“남궁세가의 삼공자라······.”

“차 아우를 채근하여 하오문 총타를 따라온 점 사과드립니다. 남궁천이라······.”

“소개는 되었다.”

노인은 남궁천의 말을 단칼에 끊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 비밀 통로의 정체를 들켜도 상관없다고 판단했는지, 식탁을 옆으로 밀었다.

이전에 지났던 계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노인이 횃불을 들고 앞장에서 내려갔다.

시후와 남궁천 또한 그 뒤를 바짝 따랐다.

노인을 뒤로한 채 철문을 밀자, 이전과 달리 자리에 앉아 있는 통안파파의 모습이 보였다.

“남궁가의 셋째가 이 아이를 따라다닌다는 소리는 들었다만, 예까지 따라올 줄 몰랐구나. 선유가 충격이 제법 컸다고 들었는데 괜찮느냐?”

남궁천의 낯빛이 살짝 굳어졌다.

남궁세가의 가주를 친근하게 이름으로 부른다.

통안파파의 말에 남궁천은 그가 누구인지 바로 파악했다.

“무림 말학 남궁천이 하오문주를 뵙습니다. 걱정해 주신 덕분에 제법 심마를 떨쳐 내셨습니다.”

“그럼 다행이구나. 통안파파라 부르거라.”

둘이 인사를 나누는 사이, 시후는 냉큼 자리에 앉았다.

남궁천이 당황해서 뭐 하는 거냐는 눈빛을 보냈다.

이곳의 주인이라고 할 수 있는 통안파파가 아직 앉으라 권하지도 않았다.

그의 시선으로 본다면 무례한 태도였다.

하지만, 통안파파는 일전에 허례허식 따위는 중요치 않다고 말했으니 상관없었다.

되려 자리에 앉지 않는 남궁천을 의아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남궁천이 서둘러 자리에 앉자 통안파파는 몇 개 남지 않는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이 자리에 온 이유를 찾아야겠지?”

시후와 남궁천의 눈이 반짝였다.

귀를 쫑긋거리며 집중했다.

통안파파가 탁자 옆을 두들기자 조그만 서랍이 튀어 나왔다.

“연락을 받고 알아보니, 이 주 전 황궁을 몰래 나온 한 인물이 있었다.”

서랍에서 꺼낸 물건을 탁자 위로 툭 던졌다.

곱게 접은 종이를 펼치자 한 인물의 초상화가 나타났다.

사십 대 전후로 보이는 무뚝뚝해 보이는 얼굴.

“이름은 없고, 주변에서 부르길 망(忘)이라 하였다.”

“망······. 뭔가 의미심장하군요.”

남궁천이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기가 무거워지니 덩달아 표정도 굳었다.

“부르는 별칭이야 신경 쓸 바는 아니지만, 아무도 그의 이름을 모른다는 점은 특이하더구나. 보통 성을 버리는 경우는 있어도, 이름을 버리는 경우는 흔치 않으니 말이다.”

“모두에게 잊히고 싶은 사람이었나 보죠. 그래서 그자는 어디로 갔는데요?”

“그게 중요하더냐?”

통안파파는 갑자기 끼어든 시후에게 타박을 주었다.

하지만, 시후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 이야기를 꺼내려고 한 거잖아요? 황궁을 몰래 나왔다. 그렇다면 어디 몰래 갈 곳이 있어서겠죠. 아주 중요한 무엇인가를 하기 위해서.”

“으허허허. 정확하다, 요놈아. 우리도 망이란 놈을 찾기 위해서 며칠간 날린 전서구만 천 마리가 넘는다.”

전서구 천 마리.

돈으로 환산하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비용이 소모되었을 것이다.

하오문에서 이번 일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는지 알 수 있었다.

“그를 사람은 발견하지 못했지만, 최근 이련호특(二連浩特)에서 홀로 보부상 길을 떠나는 이를 발견했지.”

통안파파의 말에 두 사람의 얼굴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그를 발견하지 못했다면서 왜 보부상 이야기로 빠지는가.

하지만, 통안파파의 설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 시기에 북으로 올라가는 보부상은 극히 드물고, 그마저도 무리를 이루기 마련이지. 보부상이 홀로 저 폐쇄적인 초원의 부락에 들린다는 건 자살하겠다는 것과 같으니 말이야.”

북부 초원의 겨울은 가혹하다.

겨울을 지내기 위해선 많은 식량이 필요했다.

보부상은 그들이 원하는 식량을 가지고 간 뒤, 유목 생활로 얻은 양질의 털과 가죽을 식량과 교환했다.

분명 서로에게 만족할 만한 거래.

하지만, 만약 홀로 찾은 보부상이 있다면, 그 물건을 빼앗으면 그만 아닌가.

그렇기에 북부 초원을 찾는 이들은 무리를 짓기 마련이었다.

최소한의 무장을 해야 목숨을 보전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럼?”

모든 설명이 끝나자 남궁천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고 통안파파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자가 망이다.”

- 116화에 계속 -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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