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111화 맺음 (3)
시후는 슬슬 머리 꼭대기로 솟아오르는 달을 바라보다가 다가오는 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제갈려가 준혁의 부축을 받으며 걸어오고 있었다.
그녀는 마치 하늘에 떠오른 그믐달처럼 홀쭉하게 야위어 있었다.
“고생했어. 저녁은?”
“······.”
제갈려가 뭐라 말하긴 했지만, 웅얼거림에 가까웠기에 들리지 않았다.
하긴, 새파랗게 질린 안색과 비척거리는 모양새를 보면 저녁을 먹을 것 같지는 않았다.
사실 저녁보다도 침대가 급해 보였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최소한 확인한 것들을 이야기해 줘야 했다.
아니면, 준혁이 대신 이야기해 주던가.
“혹시······.”
“말해 준 것 없다.”
준혁은 시후의 질문을 예상이라도 한 듯 말을 끊었다.
제갈려는 어쩔 수 없이 가야 할 운명이다.
시후는 조금이라도 도와줄 겸, 준혁의 반대편에 서서 제갈려를 부축했다.
거의 끌고 가다시피 해서 어제 모였던 방으로 데려갔다.
일단 의자에 앉힌 뒤 준혁의 이야기부터 들었다.
“일단, 놈들의 경계가 그리 대단한 수준은 아니오. 일단 조잡하게나마 망루를 지어 놨는데, 섬의 남동쪽과 남서쪽에 지어졌소. 꼬락서니를 보아하니 남쪽으로밖에 못 들어가는 거 같고, 망루에서 지켜보는 인원은 각각 두 명이오. 한 시진 간격으로 교대를 하는 듯싶었는데, 이는 입 모양으로 보고 유추한지라 정확하지 않소.”
허무맹랑하기까지 한 말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다들 준혁의 말을 믿었다.
그가 봤다면 본 것이다.
뒤이어 몇 마디 살을 덧붙였지만, 별 영양가 없는 말에 불과했다.
다들 이야기를 흘려들으며 제갈려를 바라봤다.
들어올 때만 해도 시퍼렇게 질렸던 얼굴에 그나마 혈색이 돌았다.
“후······ 속이 안 좋아서 간단하게 설명할게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였기에 다들 신경을 곤두세우며 집중했다.
제갈려는 휘청거리며 탁자에 다가갔다.
곧 품에서 조그만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곧 밖으로 딸려 나온 손에는 새하얀 흰쌀이 한 소꿉 정도 쥐어져 있었다.
제갈려는 쌀 한 톨 한 톨을 모조도 근처에 흩뿌렸다.
“일단 독고 대협이 말한 대로, 남쪽으로만 접근할 수밖에 없는 건 맞아요. 그 이유는 이런 식으로 형성되어 있는 암초들 때문에 그래요. 정말 희귀한 경우긴 한데, 암초들은 진법이 형성될 때 가장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방위를 충족했어요. 그다음으로 건곤이 적용되었는데, 이 곤이 음수로 작용한 데다가 바다라는 이점까지 더해지니······. 이건 말해 봤자 모르실 테니 넘어갈게요. 아, 대부분의 설명은 필요 없을 테니 결론만 말할게요.”
말을 길게 한 탓인지 제갈려의 안색이 다시금 어두워졌다.
두 손으로 탁자를 짚고 숨을 가다듬는 사이, 손에 들려 있던 쌀들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귀를 간지럽혔다.
제갈려는 짧은 숨 고르기를 마친 뒤, 지도 위에 흩뿌려진 쌀들을 가리켰다.
“이 암초 중 어느 것 하나만이라도 제 역할을 못 하게 만든다면 남쪽이 아니라 북쪽으로 접근할 수 있어요. 그것도 밤에 말이죠.”
그 말을 기점으로 주변이 시끄러워졌다.
가장 큰 걱정은 정면으로 가다가 수로채주의 공격에 배가 박살 나는 것이었다.
하지만, 제갈려의 말대로라면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
아니, 오히려 밤에 선제공격할 수도 있었다.
안 그래도 우위에 있는 전력으로 먼저 공격권을 쥐게 된다는 건 엄청난 이점이었다.
이를 활용한다면 정의맹의 피해는 극도로 줄어들게 될 것이다.
다들 준혁에게 지형은 어떻고, 놈들이 어디에 자리 잡고 있는지를 캐물었다.
불과 조금 전까지 흘려들었던 것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시후는 눈치를 살피며 운허에게 다가갔다.
“쟤, 들여보내도 괜찮지 않을까요?”
운허는 제갈려의 상태를 보곤 어서 데리고 나가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시후는 연신 휘청거리며 앉아 있는 제갈려를 일으켜 세웠다.
힘을 쭉 빼고 있는 게 측천무후의 황릉에 갈 때와 비슷했다.
하지만 그때보다는 부축하기가 한결 편했다.
최소한 걸으려는 시늉이라도 했으니 말이다.
“바로 방으로 갈 거지?”
시후의 물음에 제갈려는 대답 대신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시후는 제갈려를 방으로 끌고 간 뒤 침대에 대충 던져두었다.
제갈려는 구겨진 상태로 잠시 꾸물거리더니, 온전히 누워 그대로 코를 골기 시작했다.
시후는 혀를 차며 이불을 덮어 줬다.
감기라도 걸리면 귀찮아질 테니까.
* * *
해가 고도를 낮출수록 바다는 해를 머금듯 더욱 붉게 타올랐다.
한없이 붉어지던 바다였지만, 곧 놓아 주기로 했는지 삽시간에 그 빛을 잃었다.
“저기 배가 오는군.”
시후는 남궁천의 말에 고개를 돌렸다.
사그라지는 붉은 바다를 뒤로한 채 네 척의 중형 선박이 다가왔다.
중간중간 철편을 대놓은 걸 보니, 서문세가에서 혹시 모를 준비를 단단히 한 듯했다.
“함께하지 못해 송구합니다.”
“아닙니다. 한 가문의 기둥이 앞장서서 나서는 일은 지양해야지요. 이토록 철저히 준비해 주신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운허의 말에 옆에 있던 진소문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가 옆에 있는줄 몰랐던 운허로선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진소문은 신경 쓰지 않는다는 태도로 배에 올라탔다.
다들 배에 올라타는 와중에 시후는 가장 뒤에서 품을 뒤적였다.
“가주님.”
시후의 부름에 서문주옥이 뒤를 돌아봤다.
그는 무슨 일로 부르냐는 듯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시후는 말없이 웃으며 그의 손에 조그만 주머니를 쥐여 줬다.
“선물입니다.”
“무슨······.”
서문주옥이 뭐라 말하기 전에 시후는 배에 올라탔다.
시후가 올라타자, 곧 배가 출발했다.
뒤에 눈이 달리진 않았지만, 서문주옥의 따갑다 못해 뜨거운 시선이 느껴졌다.
그렇기에 시후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시후는 모른 척 선수로 향했다.
“역시 큰 배가 좋아.”
제갈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가가 보니, 선수 가장 앞 난간에 기대어 차가운 바람을 온몸으로 받아 내고 있었다.
하긴, 배는 클수록 파도에 영향을 덜 받으니 오늘은 별 탈이 없을 것이다.
시후는 배가 적당히 멀어지자 뒤를 돌아봤다.
서문주옥은 여전히 어둑어둑해진 부둣가에 서 있었다.
“애가 타겠지.”
“응? 무슨말이야?”
“아무것도.”
시후는 제갈려의 물음을 대충 흘린 뒤, 난간에 등을 기대어 앉았다.
출발할 때야 긴장감에 다들 서서 수평선 너머를 지켜봤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다들 편히 이곳저곳에 흩어져 쉬고 있었다.
배는 고요한 바다를 헤치며 나아갔다.
중간중간 자리에서 일어나 찌뿌둥한 몸을 푸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대체로 다들 긴장감을 지우기 위해 명상을 선택했다.
갑판 아래서 연신 노 젓는 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일정한 소리에 스르륵 졸음이 몰려오는 찰나, 낮은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다들 자리에서 일어나 선수 쪽을 바라봤다.
새까만 어둠만이 자리했다.
시후는 눈이 욱신거릴 정도로 안력을 돋았다.
한계에 달하는 수준까지 집중하자, 저 멀리 희미하게나마 빛이 보였다.
“저게 맨눈으로 보인다니······ 쯧.”
주변에서 혀 차는 소리가 들렸다.
다들 극도로 집중해야 볼 수 있는 걸 준혁은 대충 맨눈으로 보고 종을 울린 것이다.
어차피 저 정도 거리면 조금 더 가야 했다.
배는 일 각 정도 더 나아간 다음에야 속도를 줄였다.
잠시 후, 찰박찰박 노 젓는 소리 사이로 뭔가 바다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가장 선두 배에서 조그만 쪽배 하나가 무조도로 나아갔다.
“자······ 길을 뚫어야지.”
모두의 염원을 담은 쪽배는 쭉쭉 나아갔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배는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곧 쪽배 위에 있는 세 사람은 주저 없이 바다로 뛰어들었다.
속으로 열을 세었을 때쯤, 바다가 뒤집혔다.
시후와 제갈려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반발력이 조금 있나 봐.”
“조금?”
“······ 솔직히 말해서 저 정도일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어.”
시후는 제갈려를 더 책망하려다가 말을 삼켰다.
가장 속이 타들어 가는 건 제갈려일 테니까.
속으로 열을 세고 스물을 세어도 세 사람이 나오지 않자, 앞에서 쪽배를 한 척 더 내리기 시작했다.
“저기!”
뛰어들었던 곳과 조금 떨어진 곳에서 세 사람의 머리가 솟구쳤다.
버둥거리는 모습을 보니 살아는 있는 것 같았다.
다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 *
“날짜를 뒤로 미루는 게 좋지 않겠나?”
추나행의 제안에 다들 말이 없었다.
전체로 볼 때 세 명은 별 게 아니었다.
하지만, 내상을 입은 세 사람 중에 운허가 포함되어 있다는 게 아주 큰 문제였다.
“적당히 휘두를 만하네.”
“이 사람아, 일전에 보지 않았나. 상대가 어디 호락호락하던가?”
“시간을 끄는 정도라면······.”
“전력으로 자네를 치우려 한다면 어쩌겠는가? 그래도 막을 수 있겠나? 검을 맞부딪히는 것만으로 자네의 몸이 온전치 못하다는 걸 알아차릴 텐데?”
목일자가 운허를 만류하고 나섰다.
운허는 고심하는 듯 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뒤로 물러났다.
문제는 지금부터였다.
그가 빠지고 나면 단독으로 빙검을 상대할 사람이 없었다.
정의맹에서 사방에서 몰아친다면, 빙검은 처음부터 전력을 다할 것이다.
운허가 빠진 이상, 그의 발을 확실히 묶어 둘 사람의 부재가 뼈아팠다.
“최대한 그와의 교전을 피하면서 수적들부터 처리한다면······.”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면 최대한 한 명이라도 더 데려가려고 할 걸세.”
운허가 의견을 내봤지만, 추나행이 단칼에 쳐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그가 갑자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고 보니, 네 녀석이 광마패도의 신경을 긁으면서 어느 정도 공격을 받아 내지 않았더냐?”
추나행의 말에 시후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아니길 빌었지만, 저 빌어먹을 늙은 거지는 도통 도움이 되지 않았다.
[돌발 임무 ‘저항을 잠재워라’가 발생합니다.]
‘돌발 임무’가 뜬 이상, 이미 시후에게 넘기기로 작정한 것 같았다.
하지만, 이건 아무리 비천보어검이 있다고 한들, 혼자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시후는 손가락 두 개를 펼쳤다.
“둘. 두 사람만 붙여 주세요.”
“두 사람이라······ 누구와 손발을 맞출 텐가?”
“일단 남궁천 형님과······.”
남궁천은 무조건 사용해야 하는 패였다.
지금 그가 들고 있는 간장검으론 다소 부족할 테지만, 막야검을 빌려준다면 시후보다 월등한 능력을 뽐낼 테니까.
다음으로, 시후는 마음 같아선 추나행을 지목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일전에 파양도를 상대로도 상당히 밀렸었다.
이번에 싸워야 할 빙검은 그보다 반 수 더 강했다.
그렇다는 건, 추나행과 같이 싸운다는 건 자충수라는 의미였다.
개인적인 능력이 출중한 우송 진인도 괜찮을 테지만, 손발을 맞춰 보지 않은 사람과의 협공은 되려 불편함만 가져다줄 것이다.
그렇다면, 남은 선택지는 몇 없었다.
시후는 준혁과 정오 대사를 번갈아 바라봤다.
둘 중 파양도를 상대로 끝까지 버텼던 건 정오 대사였다.
하지만, 그는 주로 공격을 받아 내는 역할이라 가장 마지막까지 남은 것이었다.
남궁천과 함께 빙검을 묶어 둘 때, 뒤에서 치명적 일격을 넣을 수 있는 사람은 정오 대사보단 준혁이 적격일 것이다.
시후와 눈이 마주친 준혁이 한숨을 깊게 내쉬며 다가왔다.
“망할. 아직도 그때 당한 등이 욱신거리는데······.”
“이번에는 한결 편할 거예요. 저랑 천이 형님이 앞에서 상대할 테니, 뒤에서 한 방 세게 먹여 주시죠.”
“둘이서? 가능하겠어?”
준혁의 질문에 시후는 자신만만한 듯 씩 웃었다.
- 112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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