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102화 열쇠 (3)
모든 결괏값은 특정 조건이 필요했다.
남궁천이 간장검을 얻기 위해선 막간산으로 간다든지, 비령이 검후를 찾을 때까지 장백산을 뒤진다든지 말이다.
‘난주혈사’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앞의 두 가지 일보단 경우의 수가 더욱 복잡했다.
난주혈사는 단순히 하나의 사건만으로 일어나는 게 아니니 말이다.
난주혈사는 대략 여덟 개의 복합적인 요인들이 겹쳐져 만들어 낸 참극이었는데, 가장 먼저 일어나야 할 일이 초설이 난주의 지부장으로 취임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건 이미 일어날 수 없는 일이 되었다.
고로, 첫 번째 단추는 이미 어그러졌다.
처음이 어긋났음에 두 번째 세 번째 단추가 어그러질 것이다.
그렇다고 한들 만약에, 정말 만약에라도 억지로 꿰어질지 모를 일이었다.
우리네 삶과 같이 우연에 우연이 겹칠지도 모르니 말이다.
그렇기에 시후는 반고의 모친을 찾아온 것이다.
반고의 모친이 난주에서 사라진다면, 적어도 마지막 단추는 채울 수 없을 테니 말이다.
그 역할은 비령이 담당할 것이다.
“사부님을 아시나요?”
비령의 질문에 반고의 모친은 두 눈을 꼭 감은 채 말이 없었다.
이어지는 침묵이 가슴을 묵직하게 짓눌렀다.
참지 못한 비령이 재차 물으려는 찰나, 반고 모친의 눈이 서서히 뜨였다.
“내게 이리 묻는다는 건 현송이 내 이야기를 꺼낸 적이 없다는 것이겠지. 하긴, 세월이 지났다고 한들 서운함이 잊히진 않았을 테니.”
“설마······.”
비령의 동공이 좌우로 요동쳤다.
그 모습을 본 반고의 모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설마가 맞을 거다.”
비령을 제외한 모두의 눈빛이 반짝였다.
대충 흘러가는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반고의 모친과 검후가 동문이라는 걸 모르긴 힘들었다.
그 말엔, 그녀가 비령의 사숙이란 의미를 담고 있었다.
비령이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취하려 했으나, 반고의 모친은 손을 내저으며 만류했다.
“그럴 필요 없다. 현송도 내 이야기를 안 해 준 것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지.”
“그렇다면······ 편하게 여쭐게요. 파문당하신 건 아니시죠?”
반고의 모친은 아무리 못해도 비령의 사숙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렇게 직설적으로 묻는다는 건, 역시 그 스승에 그 제자라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비령의 거침없는 질문에 다들 당황했지만, 반고의 모친은 도리어 옅은 웃음을 지었다.
처음으로 보이는 웃음이자 반가움이 어려 있었다.
“사매도 항상 그렇게 당돌하게 물었지. 그래, 파문당하진 않았단다. 그랬다면 네가 날 알아보지 못했겠지.”
“그럼 현월문도 아닌가요?”
“이미 사십 년도 더 전에······.”
“아니죠.”
비령이 칼같이 말을 끊었다.
이전 질문과 달리 이건 선을 넘었다.
아니나 다를까, 옅었던 미소는 금세 사라졌다.
“파문당하지도 않았는데 현월문도임을 부정하는 건 옳지 않죠.”
“그 말도 틀리진 않았지만······.”
“틀리진 않은 게 아니죠. 일단, 사숙이라 부를게요. 사숙께서는 현월문의 문도로서 의무를 다한 적 있나요?”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에 비령은 더욱 기세등등하게 가슴을 폈다.
“사십 년이라고 하셨죠? 그동안 현월문도로서 의무를 저버렸다면, 당장 무공을 폐한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은데 왜 내버려 뒀을까요? 누군가가 방패막이 되어 준 건 아니었을까요?”
비령의 말에 반고의 모친은 가슴이 저린 듯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떨궜다.
이 집을 둘러싼 드높은 담벼락처럼, 검후가 방패 역할을 해 주었다는 걸 모르긴 어려웠다.
검후는 기약 없는 기다림을 이어가고 있었을 것이다.
자신의 사저가 돌아오기를 말이다.
이후로 대화는 없었다.
밀실에 갇힌 듯 숨이 턱턱 막히는 와중에, 반고의 모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라도 의무를 이행해야겠구나. 따라 나오너라.”
아직 온전히 남아 있는 음식이 대부분이었지만, 어차피 먹을 상황도 분위기도 아니었기에 다들 그 뒤를 따라 나갔다.
반고의 모친은 연무장으로 향했다.
다들 침을 꼴깍꼴깍 삼키는 가운데 반고에게 검을 가져오라 했다.
그가 군말 없이 검을 가지고 오자, 반고의 모친은 비령을 중앙으로 불렀다.
“내가 제자를 새로 들이기는 늦었기도 했을뿐더러, 이후 족보도 꼬이게 될 것이니 내 심득은 오롯이 네게만 전하겠다.”
“강 소협은요?”
“내가 아무리 현월문을 등지다시피 했다지만, 사문의 무공을 임의로 가르치진 않았지.”
“그럼, 익힌 무공은······.”
“대부분 하오문에서 무공을 구하고, 내가 약간 손봐 둔 정도에 불과하다. 물론 무공이 막힌다면 어느 정도 도움을 줄 수 있겠지만······ 저 아이는 스스로 길을 찾는 걸 즐기는 편이기도 하고.”
그 말에 다들 경악을 금치 못했다.
얼핏 보기에도 반고의 경지는 절정에서도 완숙에 도달해 있었다.
아무리 손을 봐 두었다고는 하지만, 하오문에서 구할 수 있는 그저 그런 무공으로 말이다.
게다가 그녀의 말을 들어보면, 별다른 도움 없이 다다른 경지였다.
진짜 괴물은 저쪽에 있었다.
반고는 그런 시선이 부끄러운 듯 머리를 긁적였다.
“풀리지 않는 문제를 끙끙대다가 혼자 풀었을 때 더욱 기분 좋지 않습니까?”
괴물이 아니라 변태였다.
반고에게서 시선을 거둬 연무장 중앙을 향했다.
비령이 짧게 예를 차린 뒤 검을 뽑아 들었다.
“현월문 16대 제자 천비령이······.”
“연설련이다. 연 사숙이라 부르거라.”
“연 사숙께 가르침을 청합니다.”
설련은 고개를 끄덕이며 검을 뽑았다.
비령이 기수식을 취하려 했지만, 손을 내저으며 만류했다.
“기도가 불안정한 건, 최근에 깨달음을 얻어서겠지?”
“예.”
“그 깨달음을 다시 정리해 줄 테니 말해 보려무나.”
설련의 말에 비령은 잠시 뒤를 힐끔거렸다.
현월문의 정수가 담긴 이야기가 될 공산이 컸다.
“하나와 둘로 설명하겠습니다. 제가 깨달은 바는 하나는 둘이 아니되 둘은 하나로 귀결되니, 둘과 하나는 본래 하나에서 찢어진 갈래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는 둘이 될 수 없고 둘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는 둘이요, 둘은 하나이니. 고로, 하나를 세워 둘을 취하려 합니다.”
비령의 말을 들은 설련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곧 고개를 내린 그녀의 눈에 빗방울이 하나 떨어진 것일까.
눈매가 촉촉하게 변해 있었다.
“태사조를 뵌 적은?”
비령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에 설련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반고와 나이가 비슷해 보이니 뵀을 리 없겠구나. 네 깨달음은 어린 시절 나에게 스승님이 해 주셨던 말씀과 똑같았다. 난 그걸 스물넷에 이해했거늘······.”
설련은 비령을 괴물 보듯 바라봤지만, 남들이 보기엔 똑같은 괴물이었다.
고개를 끄덕이자 비령이 앞으로 한걸음 나섰다.
그와 동시에 연무장에 삭풍이 몰아쳤다.
“깨달음을 정립하긴 했으나, 몸이 그를 따라가지 못하는구나.”
“단전이 확장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마냥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 비어 있으면 쉽사리 흔들리는 법이니 말이다.”
“네 깨달음은 지고지순한 경지에 다다랐다. 의문을 가지지 본단 마음이 동하는 길을 따라라.”
설련은 비령의 검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가르쳐 주었다.
하나씩 맥을 짚으며 비령의 검에 부족한 부분을 더해 주었다.
이미 지나온 길이라 더 잘 아는 것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가르치는 것에 능했다.
하나하나 말을 던질 때마다 비령의 검 끝이 눈에 띄게 달라졌다.
* * *
“알고 온 거였어?”
비령이 난주를 돌아보며 물었다.
물론 난주에 계획적으로 오긴 했다.
다만, 반고와 천천히 친분을 쌓으며 천천히 접근하려던 계획이 실패했을 뿐이었다.
반고가 술이 약할 거란 생각은 못 했다.
덕분에 생각보다도 훨씬 빠르게 설련을 만났다.
그래서 고민했다.
그것이 득이 될지 실이 될지 몰랐으니깐.
하지만, 아침 식사에 부르는 걸 보고 깨달았다.
기회가 될 수 있다고.
틀리지 않았다.
가고 나니 뒤는 일사천리였다.
처음부터 설련의 기세를 읽은 비령의 위축된 태도가 득이 되었다.
“알고 온 거냐니깐?”
말해 줄 필요는 없었다.
시후는 대답을 피하고자 고개를 돌렸지만, 비령은 고개를 돌린 쪽으로 말을 몰아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저 집요한 성격상 분명 며칠이고 귀찮게 굴 것이다.
이를 해결하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시후는 달콤한 맛과 매운맛 중에 고민하다가 효과가 빠른 매운맛을 택했다.
“그래.”
“어떻게? 무슨 수로?”
“난주에 살고 계신 거 보면 모르겠어? 언제든지 찾아올 수 있도록 자리 잡은 거지.”
“그게 아니라, 네가 어떻게 연 사숙을 알고?”
“맨날 우리 스승님, 우리 스승님 하면서, 정작 스승님이 걸어온 길에는 별로 관심이 없나 봐?”
비령의 낯빛이 확 굳어졌다.
몇 번이나 이런 소리를 들었지만, 이번에는 유달리 가슴에 와닿은 듯했다.
뭐라 입술을 달싹였지만, 끝내 말은 흘러나오지 않았다.
비령은 몸을 한차례 부르르 떨더니 고개를 푹 떨궜다.
시후는 너무 매웠나 싶었지만, 이미 내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었다.
자리를 피하고자 살짝 고삐를 잡아당겼다.
말 속도를 늦추어 반고 옆으로 말을 붙였다.
“그보다, 얼마쯤 걸릴까요?”
“어머니 말씀입니까?”
반고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 기한이라도 알면 좋을 것 같아서요”
“음, 제가 집안 재산은 어느 정도나 있는지 알지 못해서 말씀드리기가 좀······.”
반고는 난처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흐렸다.
설련은 재산을 정리하고 오겠다면 난주에 남았다.
시후는 걱정 없었다.
대신 반고를 따라붙게 했으니깐.
설련에게서 반고는 가장 확실한 보증이었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 이상, 반고는 그녀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 반고를 곁에 두지 않고 따라 보낸다는 건, 무조건 뒤따라오겠노라 말하는 것과 같았다.
그 사이, 남궁천이 곁으로 다가왔다.
“하루 이틀 만에 처분하긴 힘들어서 먼저 보냈을 테니, 아무리 못해도 닷새는 걸리지 않겠나?”
“닷새나 걸릴 정도로 재산이 많다면······.”
“아닐세. 재산이 많고 적고를 떠나서, 바로 사겠노라 말하는 사람을 구하기가 얼마나 힘든 법인 줄 아는가? 닷새도 최단기간으로 정리했을 때나 가능할 걸세.”
“음······ 길게 잡으면요?”
“길게 잡으면 한도 끝도 없지 않겠나? 산다는 사람을 구하기 힘들다면 대리인을 내세워 일을 처리해야 할 텐데, 재산을 처분하고 맡길 만큼 믿음직한 사람을 구하는 게 쉽지는 않지.”
남궁천의 현실적인 이야기에 시후는 한숨이 절로 나왔다.
어차피 당장에 설련이 필요하진 않겠지만, 추후 일을 벌이다 보면 언제 도움의 손길이 필요할지 몰랐다.
시후의 한숨을 들은 반고가 민망한 듯 머리를 긁었다.
“어디 가야 할 일이 생긴다면, 어머니께 연락을 남기면 되지 않겠습니까?”
“어차피 낙양에 제법 오랫동안 머무를 생각이니, 몇 달이 걸리지 않는 이상 그럴 필요까지는 없을 테고······. 그보다 모친께서 대리인을 구할 가능성은 없나요?”
“에, 어머니께서 그다지 사교적이지 않으셔서 믿고 맡길 만한 분은 없을 겁니다.”
반고는 말을 마친 뒤, 잠시 고개를 갸웃하더니 얼굴이 붉어졌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모친의 성격이 좋지 않노라 흉본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보다 차 아우, 낙양에 무슨 볼일이라도 있는가?”
남궁천의 세심한 배려가 엿보였다.
필시 반고가 무안하지 않도록 화제를 전환한 게 분명하다.
시후는 그의 따뜻한 마음씨에 미소지으며 동쪽을 바라봤다.
쌍괴도 언제까지 놀게 둘 순 없었을뿐더러, 혜아도 귀 선생과 만날 때가 됐다.
확인이 필요했다.
“애 좀 보러 가려고요.”
시후의 말에 남궁미가 갑자기 말 고삐를 잡아당겨 말을 세웠다.
의아한 눈빛으로 바라보자, 남궁미는 입술을 파르르 떨며 물었다.
“시후 오라버니 애는 아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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