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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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화 측천무후의 황릉 (4)
쾅!!
“젠장!”
석상들의 움직임은 단순했다.
신속하지도 않았다.
일정한 틀 안에서 움직였기에 처음에 다소 곤란함을 느낀 적은 없었다.
하지만, 허투루 상대할 순 없었다.
석상은 공격을 도끼로 막든 몸으로 때우든 상관없었지만, 시후가 그랬다간 말 그대로 양단될 것이 분명했다.
“뒤!”
“알아!”
시후는 급히 창을 돌려 막아냄과 동시에 땅을 굴렀다.
시후가 일어나려는 찰나, 놈이 제갈려를 향해 몸을 돌렸다.
부질없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대로 가게 내버려 둘 순 없다.
놈의 등허리에 십창의 초식인 일섬을 찔러 넣었다.
창에 부딪힌 석상의 몸에서 돌 부스러기가 흩날렸다.
그 덕분에 놈은 등을 다시 돌려 시후와 마주했다.
똑같은 상황이 이어지자 답답함이 몰려왔다.
시후는 석상에게 한 방을 더 먹인 다음, 제갈려를 잠시 돌아봤다.
여전히 벽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직이야?”
“기다려봐!”
모든 것에는 의미가 있기 마련이었다.
그렇기에 제갈려는 벽에 빼곡히 그려진 벽화를 관찰했다.
그곳에서 의미를 찾는다면, 석상을 멈출 수 있을지도 모르니 말이다.
문제는 확실히 찾는다는 보장이 없었고, 시후의 내공은 무한하지 않았다.
“일각 안에 못 찾으면 그냥 부숴야 해!”
시후 혼자서 두 석상을 상대한 지 이미 한 식경이 훌쩍 넘었다.
최소한의 내공으로 둘을 상대했지만, 제갈려에게 향할 때마다 제법 내공을 쏟아부어야 했다.
“아오, 부수지 말라는 말만 아니면······.”
아무리 단단하다고 한들 돌이다.
8척을 뛰어넘어 9척에 다다르는 석상이라고 한들, 시후가 못 부수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전력을 다하면 일수에 자갈로 흩어질 놈들이다.
하지만, 제갈려의 만류에 그러지 못했다.
단순히 침입자를 막기 위해서라면 고작 두 마리를 세우진 않았을 테니깐.
반복이 반복되어 가는 가운데 시후의 귓가에 제갈려의 탄성이 들려왔다.
귀를 쫑긋거리며 말을 기다렸다.
“서로 마주 보게 해 봐!”
“말은 쉽지.”
시후는 투덜대면서도 두 석상 사이로 파고들었다.
피하지 않고 멈춰서자, 놈들은 미친 듯이 도끼를 휘둘렀다.
“초식을 유도해!”
“어떤 초식?”
“통로에서 가장 앞에 있던 초식!”
시후는 도끼를 튕겨 내며 고민했다.
기억나지 않는 건 아니지만, 어떻게 해야 초식을 유도할 수 있을지 머리가 복잡했다.
도끼를 튕겨 내는 방향을 조금씩 달리했다.
창을 사선으로 휘둘러 앞에 놈은 팔을 위로, 놈과 부딪쳤던 반동을 이용해 몸을 돌리며 다른 한 놈은 아래로.
공격이 거의 동시에 들어올 수 있도록 힘을 조절했다.
단번에 조절할 수 있는 게 아닌지라 비슷한 행동을 몇 번이나 반복한 뒤에야 얼추 견적이 나왔다.
“유도한 다음에 옆으로 빠져 봐!”
제갈려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창을 휘둘렀다.
처음은 강하게, 그 뒤는 가볍게.
힘의 배분은 정확했다.
튕겨낸 시간은 달랐지만, 놈들은 동시에 도끼를 휘둘렀다.
시후는 자신의 몸에 도끼가 닿기 직전 옆으로 몸을 날렸다.
재빨리 일어나 창을 부여잡았으나, 무의미한 행동이라는 걸 깨닫기까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쾅!!
두 석상은 서로 무기를 맞댄 채 힘 대결에 들어갔다.
긴장을 풀지 않고 지켜봤지만, 놈들은 단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물러나지 않았다.
시후는 슬금슬금 제갈려에게 다가갔다.
“왜 저래?”
“이리 와 봐.”
하지만, 제갈려는 두 석상의 대결엔 관심 없는 듯 시후를 이끌고 벽으로 다가갔다.
벽에 그려진 수많은 벽화 중 하나를 가리켰는데, 도끼를 들었다뿐이지 지금 이 상황을 유추할 수 있는 단서는 전무했다.
시후의 의문 어린 시선에 제갈려는 손가락을 옆으로 뻗었다.
“옆으로 가 봐.”
“그냥 말해 주면 안 돼? 귀찮게······.”
시후의 대꾸에 제갈려가 인상을 확 구겼다.
제갈려의 입장에서는 게으르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시후에게는 제법 근거 있는 요구였다.
보는 눈이 다르니까.
전문가와 일반인.
아니, 제갈려를 단순한 전문가로 평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그 격차는 더욱 클 것이다.
다만, 제갈려는 그런 시후를 이해하지 못했다.
뿔난 표정으로 뭐라 말하려는 찰나, 마주한 두 석상에게서 변화가 일어났다.
쩍, 쩌저적.
돌이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두 석상에 균열이 번지기 시작했다.
가슴에서부터 시작된 균열은 거미줄처럼 잘게 온몸으로 번졌다.
그와 동시에 두 석상은 서로 한 걸음씩을 내디뎠다.
몸에서 떨어져 나온 돌 부스러기가 뿌옇게 흩날리기 시작했다.
거기서 다시금 한 걸음을 더 내딛자, 두 석상은 거의 맞닿다시피 했다.
균열은 더욱 가속화됐다.
두 석상도 더는 자신들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무릎을 꿇었다.
들고 있는 도끼는 땅으로 힘없이 떨어졌다.
몸을 똑바로 세우기 힘들었는지 서로 기대고 있었다.
그렇게 계속 바닥으로 가라앉듯 부서지고 있었다.
“빛이다.”
깨어진 틈 사이로 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마치 물처럼 흐르는 빛은 둘 사이에서 뭉치기 시작하더니 형상을 갖추기 시작했다.
흘러나온 양에 비해 한없이 작은 형상이었다.
최초의 사람 머리만 한 크기에서 주먹보다 작아지는 데까지 걸린 시간은 한 호흡에 불과했다.
빛은 곧 사그라질 듯 껌뻑이더니 사방으로 순식간에 흩어졌다.
시후와 제갈려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라 몸을 움츠렸다.
천만다행으로 시후가 있는 쪽으론 날아오지 않았다.
빛이 닿았던 벽에서 어떤 변화라도 있을까 싶어 관찰했으나, 그 어떤 반응조차 없었다.
“열쇠?”
대신 빛이 사라진 바닥엔 금빛 열쇠가 놓여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제갈려가 후다닥 달려갔다.
잔해로 남은 두 석상을 힐끔거렸지만, 호기심이 더 강했는지 열쇠 앞에 쪼그려 앉았다.
잠시 살펴보는 듯하더니, 위험이 없다고 판단했는지 손을 뻗어 열쇠를 주워들었다.
“진짜 금인가?”
그 말에 시후의 입에선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게 중요하냐?”
“농담이야. 그보다 어디에 쓰는 거지? 문도 없는데······.”
말이 끝나기 무섭게, 빛이 닿았던 벽이 흐물흐물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말 그대로 ‘녹아’내렸다.
녹아내린 돌은 그대로 다시 바닥으로 변했다.
돌이 녹아내리고 남은 뒷공간에는 문이 있었다.
문은 열 개가 넘었지만, 둘의 시선은 한곳으로 향했다.
별다른 점은 없었다.
열쇠 구멍이 있다는 것만 제외한다면 말이다.
제갈려는 손에 들린 열쇠와 문을 번갈아 바라봤다.
열쇠와 문에 나 있는 구멍의 크기는 얼핏 보아도 일치하는 듯했다.
두 사람은 기대감에 부풀어 문으로 다가갔다.
구멍에 열쇠를 찔러넣자, 부드럽게 들어가며 철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 * *
문을 열면 통로가 이어지는 건 이제 익숙했다.
게다가 눈에 익은 동상까지.
신도를 걸으며 보았던 무관이 좌측에 문관이 우측에 있었다.
좌우를 둘러보며 나아가던 제갈려는 문득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뒤를 돌아 시후를 바라봤다.
“다른 문으로 갔으면 어떻게 됐으려나?”
“그야 모르지.”
제갈려에게는 모른다고 말했지만, 사실 시후는 대략적이나마 알고 있었다.
다른 문으로 갔다면 지나는 길이 힘들어졌거나, 얻을 수 있는 보상의 격이 내려갔을 것이다.
전자의 경우는 갈림길에서 뒤를 돌아봤을 때와 같은 경우일 테고, 후자는 두 석상을 힘으로 제압했을 경우였을 것이다.
전자는 문제가 안 되지만, 후자는 정말 이를 악물고 피해야 했다.
제갈려가 눈치챈 건 천운이었다.
하긴, 제갈려가 이쪽 방면의 눈치는 천하제일이라 칭해도 부족함이 없었다.
어지간하면 잘못된 선택을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저 야명주가 이상한데?”
제갈려의 말에 바로 걸음을 멈췄다.
곁으로 다가가 시선을 나란히 하자, 주변에 비해 다소 빛이 약한 야명주가 눈에 들어왔다.
단순히 빛이 바랜 것일지도 모르지만, 두 사람은 이미 많이 겪었다.
의심은 합당했다.
다만, 천장까지의 높이는 아무리 적게 봐 줘도 1장은 훌쩍 넘었다.
“내가 네 어깨 위에 올라탈까?”
“곡예단도 아니고······.”
시후가 투덜거렸지만, 그 방법 이외엔 딱히 다른 수가 없어 보였다.
확인 안 하고 넘어갈 수도 없는 노릇이기에 시후는 한숨을 내쉬며 한쪽 무릎을 땅에 꿇었다.
제갈려도 아주 예의가 없진 않았기에 신발을 벗고 어깨 위에 올라섰으나, 그게 더욱 시후를 괴롭게 했다.
“야, 이 취두부 냄새는 뭐야?”
“빨리 일어서기나 해!”
서안에서부터 신나게 뛰었으니 발에서 냄새가 나는 건 당연했다.
다만, 냄새라고 부르기엔 코가 화를 낼 것 같아 죄스러웠다.
냄새라 표현할 수 없는 악취가 코를 갈기갈기 찢어 놓았다.
“흔들거리지 마!”
‘이 썩어 빠진 냄새 때문에 정신이 혼미하다고!’
시후는 숨을 참느라 입을 열 수 없었다.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숨을 참은 뒤에야, 제갈려는 시후의 어깨에서 내려왔다.
시후는 마음 같아서는 뭐라 한소리 쏘아내고 싶었지만, 땅에 내려선 제갈려의 귓가가 터질 듯 달아올라 있었기에 관두게 되었다.
대신, 냄새가 밴 어깨를 거칠게 털었다.
제갈려의 귀는 이미 새빨갰지만, 그보다 더 붉어질 수 있다는 걸 증명하듯 색이 점차 짙어졌다.
“뭐라도 발견했어?”
시후의 질문에 제갈려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손가락을 위로 가리켰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색바랜 야명주를 떼어 낸 빈 곳이었다.
하지만, 그건 중요치 않았다.
그보다 안쪽엔 주먹의 반만 한 크기로 둥근 공간이 비어 있었다.
단서는 주어졌다.
그 조각을 맞추는 일만 남은 상태였다.
시후는 주변을 둘러봤다.
“비슷한 크기가······.”
아래부터 쭉 훑었다.
발끝에서부터 각대까지 쭉 올라갔지만, 딱히 둥그스름한 물건은 눈에 띄지 않았다.
앞은 물론이거니와 뒤쪽도 마찬가지였다.
가슴을 지나자 남은 건 머리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눈에 띄는 건 하나다.
“눈?”
“비슷할 거 같은데······.”
다만, 구멍은 하나고 늘어선 석상은 족히 이백은 넘었다.
석상 하나에 눈은 두 개씩 있었으니, 확인해야 할 눈의 개수는 총 사백.
시후는 제갈려의 어깨를 두들겼다.
“난 내 눈썰미를 못 믿으니깐, 네게 맡길게.”
“개수작 집어치우고, 너도 훑어.”
“내 눈은 나도 믿지 못할 때가 많아서······.”
“어차피 네가 훑고 지나간 건 나중에 내가 확인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
전혀 신뢰하지 않는다는 말에 할 말을 잃었다.
제갈려는 그런 시후의 반응에 신경조차 쓰지 않고 좌측을 가리켰다.
“난 이쪽부터 훑어볼 테니까, 넌 반대편을 봐.”
“······ 네가 재차 확인할 거면 내가 보는 의미가 없지 않아?”
“나도 사람이니 놓칠 수도 있고, 네가 의외로 찾아낼지도 모르잖아?”
“솔직히 내가 쉬는 게 꼴 보기 싫다고 말하지 그래?”
“응, 싫어.”
“······ 망할.”
정말 도움을 바라는지 아니면 짓궂은 장난인지 모르겠지만, 원한다면 그에 응해 줄 수밖에 없다.
사실 지금 엄청난 심력을 쏟아붓고 있을 테니, 도와줄 수 있으면 도와주는 게 맞다.
과연 시후 자신이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런데 어떻게······.”
어떻게 찾게 된 것일까.
시후는 뒤에 말을 삼키며 재차 확인했다.
외견은 아주 비슷했다.
하지만, 자세히 바라보자 흑요석(黑曜石)이 아니라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흑요석은 특유의 광택이 흘러나오긴 하지만, 이렇게 가슴 섬뜩할 정도로 깊은 어둠을 선사하진 못했다.
분명 한철, 그것도 만년한철이 분명했다.
“이리 와 봐!”
시후는 성량을 높여 제갈려를 불렀다.
제갈려의 확인하는 속도는 시후보다 월등히 빨랐기에 이미 저 앞까지 나아가 있었다.
시후가 부르자 제갈려가 눈을 비비며 다가왔다.
적잖이 피곤한 것처럼 보였다.
사실, 시후도 피곤이 몸에 중첩되는 걸 느끼고 있었다.
그 사이, 제갈려는 석상 앞으로 다가와 시후가 가리킨 눈을 확인했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바로······.”
“아니, 좀 쉬자. 시간은 정확히 몰라도 아무리 적게 잡아 하루는 꼬박 넘게 움직였어. 우리가 시간에 쫓긴다고는 하지만, 이렇게 한계까지 몰아붙일 필요는 없어.”
황릉을 터는 일은 하루 만에 끝날 일이 아니었고, 끝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지금은 잠시 꿀맛 같은 휴식을 취할 때였다.
- 97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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