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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자의 클리어 공식-90화 (72/201)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90화 황릉으로 가는 길 (1)

시후는 해가 뜨기 무섭게 입궁했다.

다만, 그가 원해서가 아닌, 강제력에 의해서였다.

“왜?”

시후가 그렸던 그림과 다소 어그러져 있었다.

갑자기 이런 상황이 발생한 이유를 짐작하기 어려웠다.

아니, 짐작 가는 상황이 하나 있긴 했다.

어의.

최초에 설득이 먹히지 않는다면 그를 움직인다는 계획은 그럴싸했다.

황제와 허물없는 사이라고 들었으니 그의 한마디는 주효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의문이 들었다.

신의가 자신의 의도를 잘못 파악한 것일까.

그 의문은 자신에게 나인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탕약을 가져다주자 더욱 깊어졌다.

“설마······ 사약은 아니죠?”

“내공을 금하는 탕약입니다.”

나인의 무표정한 얼굴을 보니 왠지 거짓말 같았다.

하지만, 먹지 않을 수도 없었기에 눈을 질끈 감고 마셨다.

[신설폐를 복용하였습니다.]

······

이전에 복용했을 때와 같은 알람이 주르륵 떴다.

다른 점은 일원신공의 경지가 높아져서 중독 시간이 감소했다는 것이다.

시후는 어검대의 확인을 거친 뒤, 건청궁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단 하루 사이에 완전히 대우가 달라져 있었다.

“대 명 제국의 황제를 뵙습니다.”

시후는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금전(金塼) 바닥에 엎드렸다.

분명 옥좌에 앉은 모습을 봤는데도, 시후가 엎드린 이후 아무런 말이 없었다.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하는지 의문이 들 때쯤, 귀에 익숙하지만 들리면 곤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황제는 손끝으로 옥좌를 두들기기 시작했다.

“에······ 무슨 연유로 부르셨는지······.”

“놈들을 어떻게 처리하는지는 관여할 바가 아니지만······. 방면해 주었다고 들었다.”

‘천장에 물이 새는가?’

순간 시후는 그런 생각을 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등이 이렇게 축축할 수 있겠는가.

눈앞에 신의가 있다면 욕을 날렸을 것이다.

의도를 잘못 파악했다.

분명 설득이 실패하면 어의가 황제와 허물없는 사이니, 은근슬쩍 거들 수 있게 이야기 좀 해 달라고 했는데, 도대체 그 말을 어떻게 해석했기에 이런 결과를 초래한 것일까.

수만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지나갔다.

하지만, 신의의 호감도를 생각한다면, 아무런 생각 없이 이런 상황을 만들어 내진 않았을 것이다.

신의가 무슨 의중을 가지고 그 이야기를 했는지, 어의는 또 왜 곧이곧대로 그대로 전했는지 짐작해 봤다.

주변의 시선이 매서워졌다.

‘생각을 너무 오래 했다.’

“그렇습니다.”

“그 방면에 적룡 패주, 자네가 힘을 썼다고 들었는데······ 사실인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황제는 침묵했다.

시후가 고개를 들 수 없으니, 어떠한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책임을 회피하는 듯한 대답을 해야 했나? 선택이 틀렸나?’

식은땀이 줄줄 흘렀지만, 애써 태연한 척 자신을 포장했다.

일정하게 들려오던 소리가 멈췄다.

옥좌를 두들기던 손이 멈춘 것이다.

“고개를 들라.”

천천히, 아주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황제는 무표정을 유지했다.

시후는 자신의 선택이 맞았기를 기도했다.

“방면해 준 이유가 뭔가?”

“그의 과오를 바로잡을 기회를 주고자 했습니다.”

“기회를 준다? 적룡 패주가 무슨 권한으로?”

황제의 목소리에 스산함이 어렸다.

그와 동시에 몸이 땅으로 꺼지듯 묵직해졌다.

[황제가 적의를 드러냅니다.]

[적으로 인식됩니다.]

[황제의 권역으로 인해 모든 능력이 9할 감소합니다.]

[저항할 수 없습니다.]

신선폐를 마신 상황에서 모든 능력의 감소는 치명적이었다.

안 그래도 몸이 천근만근이었는데, 이제는 당장에라도 바닥에 드러눕고 싶었다.

시후는 바닥에 엎어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간 쌓아온 적룡 패주의 공을 봐서 과오를 용서해 줄 테니, 돌아가거든 그자의 목을 취해 오거라.”

“그······.”

순간 그러겠노라 말하려다가, 아주 이질적인 느낌이 들었다.

부자연스러웠다.

황제가 왜 그의 목을 원하는 것일까.

의심이 들기 시작하자 모든 것들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순간적으로 어의가 진류를 죽이라고 바람을 넣은 게 아닐까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절대 그건 아니다.

신의에게서 가장 선한 모습을 닮은 게 어의다.

그가 목숨을 해하려 든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필사적으로 황제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분명 나에게 바라는 게 있는 거다.’

뭘 바라는 걸까 고민을 하다 보니, 한가지 결론에 다다랐다.

시후는 온몸을 잠식해 오는 무기력감을 떨쳐 내며, 억지로 허리를 곧추세우고 가슴을 폈다.

“뒤늦게 허락을 구해서 죄송하지만, 그자를 용서해 줄 수는 없으시겠습니까?”

“적룡 패주는 그와 일면식도 없던 사이일 텐데, 왜 그를 두둔하려 드는가?”

“제가 본 바로는 그는 바뀔 수 있는 사람입니다. 바라옵건대 그가 자신의 과오를 뉘우칠 수 있도록 선처를 베풀어 주십시오.”

“황명을 거역하겠다는 건가?”

“부디 청할 뿐입니다.”

주사위를 던졌다.

그 결괏값이 얼마가 될지는 황제가 무엇을 의도했는지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시후는 고개를 천천히 들어 올려 황제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봤다.

황제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응시했다.

보통 때라면 환관들이 거품을 물었을 테지만, 다들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덕분에 심증이 확신으로 변했다.

“모두 물러가거라.”

미리 이야기돼 있었는지 환관과 나인들은 다들 군말 없이 물러갔다.

그와 동시에 황제가 적의를 거두었다.

[황제가 적의를 거두었습니다.]

[모든 능력 감소가 해제되었습니다.]

“휴······.”

신선폐 때문에 내공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근력이라도 돌아온 것에 만족했다.

최소한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무릎 꿇고 있어도 되지 않는 것에 감사했다.

시후가 호흡을 가다듬는 사이, 옥좌 뒤편 병풍에서 걸어 나오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발소리의 주인은 명진제였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황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물었다.

그 질문에 명진제는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충을 져버리지 않는 수준에서 의를 행하였으니 옳습니다.”

“의라······.”

황제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시후는 지금이 숙일 때라고 판단했다.

시후가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적룡 패주가 사람을 잘못 봤다면, 그는 물론이거니와 세자 본인 또한 곤란한 상황에 당면할 수 있다는 점을 인지하고 있는가?”

“의를 세우는 것은 어려운 법이지요. 폐하께서 국력을 탄탄히 쌓아 올리셨으니, 소자는 천하에 넓고도 높은 의를 세우겠습니다.”

“좋다. 세자의 생각이 그러하다면 그리하여라.”

자박자박 다가오는 발소리가 자신의 시후의 머리맡에서 멈췄다.

“따라오거라.”

시후가 고개를 들어 황제를 바라보자, 손을 휘저으며 물러나라는 시늉을 보냈다.

시후는 그의 손짓에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깊게 숙인 후 명진제를 따라 건청궁을 빠져나왔다.

월화문을 통해 양심전으로 이동하면서도 명진제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팽충정을 바라봤지만, 그는 전방을 주시한 채 시후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명진제는 양심전으로 들어서기 직전에 휙 뒤를 돌아 시후를 바라보았다.

“생각해 보면 그때도 적당히 원하는 것을 받고 돌아갈 수 있었을 텐데, 확신이 없음에도 현 황실을 위한 우국충정(憂國衷情)을 보여 주었지.”

틀렸다.

측천파흑선의 재료를 얻기 위해선 그 정도로는 부족했으니 도전한 것이었다.

하지만, 시후는 굳이 그의 착각을 정정해 주진 않았다.

명진제가 자기 좋을 대로 해석하는 게 시후에게 득이 되면 득이 되었지, 해가 되진 않았으니깐.

시후는 고개를 살짝 숙였다가 들었다.

그 모습을 본 명진제의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어렸다.

“충정.”

뒤에 대기 중이던 충정이 잠시 눈치를 보더니 밖으로 나갔다.

파격이었다.

정말 어지간한 상황이 아니고서야 명진제와 단둘이 두지는 않을 테니.

이 모습으로 시후를 향한 신뢰가 얼마나 올라갔는지를 알 수 있었다.

물론, 신선폐를 복용했기에 이러한 행동을 보이는 것이겠지만.

그를 내보내고 뭔가 할 말이 있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충정은 자리를 완전히 비운 게 아니었다.

곧 문이 열리며 그가 돌아왔다.

* * *

제갈려는 침을 꼴딱꼴딱 삼키며 눈을 끔벅였지만, 시후는 여유롭게 차를 홀짝일 뿐이었다.

“아, 빨리 좀 말해!”

“목 좀 축이고 있잖아.”

“벌컥벌컥 마시라고!”

“뜨거워.”

시후는 찻잔을 후후 부는 시늉을 했으나, 식을 대로 식어 버린 찻잔에선 김조차 올라오지 않았다.

결국, 제갈려는 앙증맞은 주먹으로 시후를 두들겼다.

그녀의 정성 어린 안마를 받던 시후는 뒤로 달아나며 방구석을 가리켰다.

“야야, 저거 봐.”

제갈려의 목이 휙 돌아갔다.

바닥에는 목함 두 개가 놓여 있었다.

하나는 한 뼘만 하고, 남은 하나는 성인 몸통만 한 크기였다.

일반적인 목함은 아니었다.

한 뼘만 한 목함은 흔히 볼 수 있는 형태였지만, 다른 하나는 기형적으로 납작했다.

그렇기에 들어 있는 물건을 짐작하기가 쉽지 않았다.

제갈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데?”

시후는 대답하지 않았다.

묘한 웃음만 지을 뿐.

그 웃음에 제갈려는 인상을 찌푸리다 말고 황급히 상자로 달려갔다.

아니, 달려가려고 했다.

뒷덜미를 붙잡은 시후의 손만 아니었다면.

“나도 안 봤어.”

“내가 보여 줄게!”

제갈려는 뒷덜미가 붙잡힌 채 낑낑대며 앞으로 나아갔다.

하지만, 제갈려가 아무리 용쓴다고 해도 시후가 막고자 하면 나아갈 도리가 없다.

결국, 제갈려는 시후를 바라보며 울상을 지었다.

“그래, 열어 봐라. 열어 봐.”

그 모습이 귀엽게 보여 손을 놓아주었다.

제갈려는 황급히 달려가 두 목함을 번갈아 보더니 작은 목함부터 열었다.

홍옥과 녹옥이 어우러져 조각된 이쁜 장신구였다.

노리개인가 싶었지만, 노리개는 또 아니었다.

“선초(扇貂)네.”

시후가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을 보내자 제갈려는 손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부채 끝에 달아 두는 물건이야. 노리개처럼 꾸미긴 용도로 쓰긴 하는데, 이건 단순히 꾸미기 위한 건 아닌 거 같네.”

제갈려는 선초를 만지작거리더니, 매달려 있는 홍옥과 녹옥을 서로 겹쳤다.

그리곤 촛불로 다가갔다.

두 옥은 완벽히 맞아떨어진 게 아니라 틈이 벌어져 있었는데, 촛불을 비추자 벽면에 지도가 떠올랐다.

일렁이는 촛불 때문에 정확한 내용을 알 수는 없었지만, 어느 위치를 가리킨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제갈려는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커다란 목함을 바라보며 눈을 반짝였다.

그 기대감 가득한 눈빛에 시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갈려는 천천히 뚜껑을 열었다.

얼핏 본다면 단순히 부챗살에 붙일 한낱 천에 불과할 것이었다.

하지만, 손을 대 보면 보통 천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세상에······.”

천잠사(天蠶絲).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얇으나, 검에도 쉬이 끊기지 않을 정도로 질기다.

오죽하면 천잠사로 짜인 옷을 신선들의 옷이라 부르겠는가.

부채에 붙이는 천은 그 천잠사로 만들어져 있었다.

“측천무후의 필체야.”

다만, 제갈려가 놀란 부분은 다른 곳이었다.

제갈려가 놀랐듯 천에는 글자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글자 크기는 동일했다.

부채 특성상 위가 넓고 아래가 좁은 만큼, 글자는 아래로 내려갈수록 행간을 줄이는 방식으로 적혀 있었다.

시후는 두 물건을 지켜보더니 품에서 사북과 부챗살을 꺼냈다.

제갈려가 침을 삼키며 뒤로 물러나자 천을 들어 올렸다.

천은 이중으로 되어 있었다.

글자가 적혀진 부분이 얇게 벌어졌다.

딱 부챗살이 들어갈 정도의 너비였다.

시후는 방향에 맞춰 부챗살을 하나하나 집어넣었다.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쑥쑥 들어가며 부챗살 끝이 정돈되기 시작했다.

시후가 마지막 남은 부챗살마저 넣자, 부챗살 가장 아래에 뚫려 있던 구멍은 마치 먹이를 기다리는 새끼 새처럼 입을 벌리고 있었다.

시후는 사북까지 마저 끼워 넣었다.

태어날 때부터 한 몸이었던 것처럼 단단히 틀어박혔다.

남은 건 마지막 하나.

시후는 잠시 고민하더니 제갈려를 향해 선초를 건넸다.

“너도 거들어야지.”

마지막은 제갈려가 장식할 수 있도록 넘겨 주었다.

제갈려는 선초를 받아들곤 떨리는 손으로 조심스럽게 묶었다.

단단히 떨어지지 않도록 매달자, 고풍스러움을 간직한 측천파흑선이 완성되었다.

- 91화에 계속 -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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