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89화 다시 북경으로 (2)
날이 밝기가 무섭게, 철우에게 사람이 찾아왔다.
철우는 서찰을 전해 준 남자에게 돈을 조금 쥐여 사례하곤 서둘러 서찰을 펼쳤다.
시선이 아래로 내려갈수록 철우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했다.
“빈민촌에 있던 건 배교가 아니라, 이상한 혹세무민(惑世誣民)을 일으키는 사이비였다고 합니다.”
“이 시국에 그런 놈들이 있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네······. 도둑이라 적은 건?”
“이에 관해선 관청에 연락을 취하기로 했는데, 가는 도중에 누가 주창왕릉에서 사라진 물건을 들고 있었다고 하네요.”
“사라진 물건만으로 무영묘적이라 단정하긴 어렵지 않겠어?”
비령의 물음에 철우도 동의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무영묘적이 훔쳤던 물건을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 확신할 순 없죠. 장물아비거나 암시장 관련 인물일 수도 있을 테니 말이죠. 하지만, 형님들이 여태껏 돌아오지 않은 걸 보면 상대의 경공이 상당히 뛰어난가 봅니다.”
“말을 따돌릴 수 있을 정도의 경공이라면······ 무영묘적일 가능성이 있다?”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뭐, 모든 건 잡아 봐야 알 수 있겠지만요”
“그도 그렇네.”
비령과 철우의 대화를 들으며, 제갈려와 시후는 눈을 마주치며 어색하게 웃었다.
지난밤, 객잔 뒤편에서 제갈려가 해줬던 말에 따르면, 세 사람이 쫓고 있는 건 분서(鼢鼠)가 분명했다.
그는 필시 창주 근처의 땅굴에 숨어 있을 것이었다.
두 사람이 무영묘적에 관해 떠들자, 제갈려가 슬그머니 그 사이로 끼어들었다.
“너에게 어떻게 하라는 말은 안 적혀 있었어? 어디로 오라든지, 아니면 집으로 돌아가라든지.”
“적어 두셨습니다. 도주 방향이 쉬이 짐작되지 않아서, 만날 장소를 정하기도 어려우니 조심히 세가로 돌아가랍니다.”
“같이 가면 되겠네. 잘됐네! 그때도 같이 갔었잖아? 이번에는 나도 팽가 신세 좀 져야겠어.”
제갈려가 과할 정도로 부산을 떨었다.
철우도 딱히 거절할 이유가 없었기에 그녀의 말을 승낙했다.
아침을 먹고 북경으로 향하기 전, 시후는 급하게 어딘가를 다녀왔다.
“볼일이라는 게 뭐였어?”
“인신매매.”
“말해 주기 싫으면 됐어.”
제갈려는 시후에게 별 관심이 없었는지, 철우의 옆으로 말을 몰았다.
잡다한 말을 걸면서, 중간중간 무영묘적의 이야기를 섞어 가며, 팽가에서 어떻게 추적하고 있는지를 캐물었다.
창주 시내를 가로질러 가다 보니, 자연스럽게 빈민촌을 지나게 되었다.
시후가 옆을 흘겨보니 빈민촌을 쳐다보는 비령의 뒤통수가 보였다.
하지만, 그녀가 아이에게 해 줄 수 있는 건 없었다.
‘가난의 구제는 나라님도 할 수 없단다.’
“하오문에 눈썰미가 좋은 아이가 있다고 이야기해 놨어.”
시후는 흘러가듯 말했다.
비령이 관심을 준 것도 있지만, 확실히 밤중에 무림인들에게 접근하는 호기심 등을 생각하면 쓸 만한 녀석이었다.
물론, 바닥으로 치달리는 비령의 호감도를 조금 올리기 위함이 컸지만.
비령은 빈민촌에서 고개를 픽 돌리며 관심 따위 없다는 듯 말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하지만, 입가에 맺힌 옅은 미소는 숨길 수 없었다.
* * *
황제는 보고자 한다고 바로 볼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하지만, 적룡 금 패를 가지고 있고, 황제에게 부여받은 임무가 있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시후는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대 명 제국의 황제를 뵙습니다.”
“고개를 들라.”
고개는 들되 시선은 바닥으로.
시후는 예법을 충실히 지키며 고개를 들었다.
“소인, 지엄하신 황제의 명을 받들어······.”
“허례허식은 생략하여 간략하게 말하라.”
“사특한 술수로 강시를 부리는 배교 놈들의 본거지를 소탕했습니다.”
“들었다. 아직 뿌리를 전부 뽑은 건 아니라지?”
“머리를 잘랐으니, 뿌리는 절로 곪아 문드러질 것입니다.”
시후의 말에 황제는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른 시일 내에 결과를 가지고 왔으면 좋겠구나.”
“그리될 것입니다. 다만······.”
시후는 의도적으로 말끝을 흐리며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번에 놈들을 상대하다 보니, 그 힘이 적지 않다고 판단하여 이리 황제 폐하를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바라는 게 있더냐?”
“그렇사옵니다.”
주변의 눈초리가 따가워졌다.
황제가 옥좌에 앉아 팔걸이에 손끝을 툭툭 두들겼다.
얼굴을 보지 않아도 심기가 불편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군의 지원이라면 내어 준 패로 충분할 텐데, 무엇을 더 바랄 셈이더냐?”
“군은 지금으로선 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짐의 군대가 형편없다는 소리더냐?”
“그런 뜻은 절대 아닙니다. 무림인을 상대하는 데는 다수의 인원보다는 소수의 강자가 필요합니다.”
“소수의 강자라······. 그래, 무림에는 건방지게도 짐에게만 허락된 글자를 사용하는 불온한 자들이 있다고 들었다. 그들에게 교지(敎旨)를 내려 도우라 하겠다.”
그랬다간 난리가 날 것이다.
시후는 다시 몸을 납작 엎드렸다.
“불온한 자들이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그들이 어찌 황제께 허락된 글자를 사용하겠습니까. 무지한 자들이 그들을 평가할 때 붙인 것에 불과합니다.”
“흠, 하긴 목이 달아나고 싶지 않고서야······.”
“게다가 그들도 황제를 돕고자 전심전력을 기울이고 있으니, 교지까지 내리지 않으셔도 충분하리라 생각합니다. 이번 배교의 본거지를 치는데 가장 큰 공을 세웠던 자도 그들 중 하나입니다.”
시후의 말에 황제, 영무제는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입에 꿀이라도 머금었는지 듣기 좋은 소리만 내뱉는구나.”
“사실을 말할 뿐입니다.”
“그만하면 되었다. 이리 열변을 토한 이유가 따로 있지 않으냐?”
침이라도 한 방 맞은 듯 뜨끔했다.
황제는 옥좌에 등을 기대며 느긋한 표정으로 내려다보았다.
시후는 팔을 펴며 서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미리 받고 싶습니다.”
“무엄한!”
황제의 용안을 똑바로 바라보는 건 크나큰 죄다.
시후는 그만큼 간절함을 드러냈다.
게다가 이 일로 화를 내지 않을 거라 판단했다.
아니나 다를까, 황제는 손을 들어 올려 시후를 노려보는 환관들을 제지했다.
“명을 받들어 간악한 무리를 상대하다 보니, 일신의 부족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죽음이 두렵진 않으나, 명을 이행하기 위해선 조금이라도 더······.”
“확실히, 짧은 기간 내 올린 성과가 적지 않음은 짐도 알고 있다.”
황제는 시후의 말을 끊으며 긍정 어린 말을 내뱉었다.
문제는 ‘짐도’라는 말이 묘하게 걸렸다.
보통 저런 말 뒤에는 부정적인 붙기 마련이다.
“다만, 아직 흑련회라 지칭하는 간악한 무리를 모두 처리한 건 아니니 상을 미리 내려 주긴 어렵다.”
아니나 다를까, 부정인 반응이었다.
최소한의 조건을 충족했다고 생각했는데, 황제의 기준은 그보다 조금 더 높았나 보다.
아쉬운 마음이 표정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러나, 적룡 금 패를 가진 패주의 부탁이니 조금 더 고심해 보겠다. 이만 물러가거라.”
시후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절반의 성공.
딱 그 정도로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절반으로 만족할 수는 없다.
확률을 끌어 올려야 했다.
시후는 궁을 빠져나온 뒤, 확률을 올릴 수 있는 패를 사용하기 위해 어딘가로 향했다.
* * *
늦은 밤, 건청궁에는 영무제와 명진제가 마주 보고 있었다.
“저는 주어도 무방하다 생각합니다.”
“그리 생각한 이유는 무엇이더냐?”
“주게 되면, 받을 수 있습니다.”
“목줄을 채우자는 말이로군.”
“충정의 말에 따르면, 기도가 더욱 올라갔다고 합니다. 그토록 짧은 사이에 성장하는 자는 본 적이 없다고 하니, 훗날을 생각해서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 득이 더 크리라 생각됩니다.”
명진제의 말에 영무제는 인상을 찌푸렸다.
“좋은 관계라니 당치도 않다. 어차피 내 백성이니라.”
“무림인이라는 족속은 줄을 채우면 끊고자 달아난다고 합니다. 굳이 줄에 얽매이지 않더라도 그를 이용할 방법은 많습니다. 한 번 큰 먹이를 주고 나면, 자잘한 먹이를 주는 것으로 통제할 수 있습니다.”
“기대감을 이용하자······. 나쁘진 않은 생각이다. 그러나, 줄에 묶이지 않는 개는 이리와 같다. 고기를 물고 달아나면 어찌할 셈이더냐?”
명진제는 대답하지 못했다.
만에 하나라도 시후가 무책임하게 달아날 경우, 책임은 그에게 쏠릴 테니까.
시후를 위해 긁어 부스럼을 만들 이유가 없었다.
“그 녀석을 얻는다면 나보단 네가 더 쓸 일이 많을 텐데, 너 역시 주저하는구나.”
“소자가 아직 그를 온전히 믿지 못하는 거 같습니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너도 이 자리에 오르면 알겠지만, 그 누구도 쉬이 믿을 수 없는 자리이니라. 항상 의심하는 습관을 기르도록 해라.”
“예, 명심하겠습니다.”
시후에 관한 이야기가 끝나자, 대화는 곧 다른 주제로 바뀌었다.
최근 공격이 잦아지고 있는 북방 이민족에 관한 이야기였다.
주로 황제인 영무제가 질문을 던지면, 명진제가 대책을 내놓는 방식으로 대화가 이어졌다.
“폐하, 어의가 탕약을 대령하였습니다.”
“벌써 시간이 그리되었는가. 들라 하여라.”
어의가 탕약을 직접 들고 건청궁으로 들어섰다.
기미 상궁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탕약을 시음했다.
어의는 반 각이 지난 뒤에야 탕약을 황제 앞으로 가져갈 수 있었다.
“살날도 그리 많이 남지 않은 듯한데, 이 탕약 좀 끊으면 안 되겠소?”
“이리도 정정하신데 무슨 말씀이십니까. 어서 드시지요.”
황제는 탕약을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단박에 들이켰다.
“크으, 날이 갈수록 더 쓴 것 같구려.”
“본디 몸에 좋은 게 쓴 법입니다.”
“어의께선 내 괴로움이 즐겁나 봅니다. 어찌 그리 웃으시오?”
“쓴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는 건 건강하다는 증거지요.”
“그뿐만은 아닌 거 같은데······. 혹시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소?”
황제의 말에 어의는 빈 그릇을 건네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폐하의 눈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최근, 죽은 줄 알았던 막내를 찾았습니다.”
“오, 축하할 일이오. 그런데 어의에게 형제가 있다는 소리는 처음 듣는 거 같은데, 내 기억이 틀렸소?”
“폐하의 기억력은 정확하십니다. 다만, 제가 설명을 올바르게 하지 못한 죄지요. 같은 스승을 모셨던 막내 사제를 말하는 거였습니다.”
“그자도 의술이 뛰어나겠구려.”
“부끄러운 말이지만, 제가 하나를 가르치면 하나를 알았고, 막내 사제는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알았습니다.”
“이런, 그 말이 사실이라면 그자를 당장 황궁으로 불러야겠군. 어의보다 뛰어나다면 이런 쓰디쓴 탕약 말고, 달콤한 탕약을 만들 수 있지 않겠소?”
“제 스승님이 만든다고 하여도 달콤한 탕약은 만들 수 없을 겁니다.”
황제는 어의와 격식 없는 대화를 나누며 잔잔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어의는 그가 편히 대하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으니깐.
다만, 그런 어의가 갑자기 무릎을 꿇으며 오체투지를 했다.
갑작스러운 어의의 행동에 황제는 명진제를 제외하고 모두 물렸다.
“어의께서 아무런 이유 없이 이런 행동을 할 리는 없고······. 혹시 방금 먹은 탕약에 독이라도 넣으셨소?”
“그럴 리 있겠습니까. 다만, 용서를 구하고자 할 뿐입니다.”
“말해 보시오.”
“폐하께선 길게 말하는 걸 좋아하지 않으시니 짧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어의는 숨을 고르며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제 막내 사제는 배교에 투신했었고, 이번에 사로잡은 배교 수뇌부 중 한 명에 속해 있습니다.”
어의의 말에 황제는 탄식을 내뱉었다.
“이 이야기는······ 길게 들어야 할 것 같구려.”
- 90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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