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84화 추격 (6)
얼어붙은 강 위에 오롯이 서 있는 자는 남궁천이 유일했다.
생강시 일곱 구는 이미 목이 달아난 지 오래였다.
그들만으론 남궁천의 분노를 억누르기엔 역부족이었다.
“무공을 익히지 않았나?”
남궁천은 검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검 끝에는 막 얼어붙은 핏방울이 홍옥처럼 매달려 있었다.
완전히 얼어붙은 게 아니었는지, 손가락으로 건드리자 바닥에 떨어져 산산이 부서졌다.
남궁천의 행동은 네 목 또한 이렇게 떨어질 거라 의미하는 듯했다.
노인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탄식했다.
“······ 세간에 알려진 이야기를 너무 쉽게 믿었구나.”
“형님의 시신이 있는 곳을 말해라.”
“말하지 않는다면?”
노인의 말에 남궁천은 검을 내려다보는 것으로 대신 대답했다.
그에 노인은 피식 웃음 지었다.
“내 나이 예순둘이다. 그깟 죽음이 두려울쏘냐?”
자신만만하게 말을 내뱉었지만, 곧 그의 표정은 착잡하게 변했다.
“내 연구의 끝을 보지 못하는 점이 아쉽긴 하나, 내 유지를 이어받는 자가 나온다면 모두가 불사의 삶을 누리는 날이 올 것이다.”
“불사? 사자를 조롱하는 게 네가 말하는 불사인가?”
“조롱이 아니라, 삶과 죽음의 경계선을 허무는 것이라네.”
“궤변이다. 사자의 안식을 모독하는 행위일 뿐이다!”
“무지한 자가 무엇을 알겠는가.”
노인은 그 대답을 끝으로 더는 대꾸하지 않겠다는 듯 입을 닫았다.
남궁천은 분노로 이를 빠드득 갈면서도 그의 목을 취하진 못했다.
노인은 한눈에 보아도 배교에서의 위치가 대단했다.
남궁천은 개인적인 감정에 휘둘려 처리할 정도로 어리석지 않았다.
아니, 이성과 인내심의 승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네놈의 악행에 관한 처분은 정의맹에서 이뤄질 것이다.”
남궁천은 그대로 지풍을 날려 노인의 아혈과 마혈을 점했다.
노인의 몸이 뻣뻣한 통나무처럼 굳어졌다.
시후는 제갈려와 함께 남궁천의 눈치를 살폈다.
살기가 누그러들긴 했지만, 분노는 사그라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아직 분이 풀리지 않은 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 노인의 태도에는 죄책감이라곤 없었다.
게다가 남궁무의 몸을 되찾을 수도 없다니.
남궁천의 속이 말이 아닐 것이다.
“뭐라고 위로의 말이라도 건네 봐.”
제갈려가 귓속말로 낮게 속삭였다.
시후는 그제야 제갈려를 계속 안고 있었다는 걸 깨닫고 놓아주었다.
제갈려 또한 여태껏 안겨 있었다는 걸 깨달았는지, 귀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워낙 긴장하고 있는 터라 인지하지도 못했다는 반응이었다.
시후는 남궁천을 향해 다가가며 품을 뒤졌다.
“차 아우.”
남궁천이 뒤돌아보며 억지로 미소지었다.
미소라고 포장했겠지만, 씰룩거리는 입꼬리에는 분노와 슬픔이 공존했다.
“저자를 고문해서라도 형님의 시체를 한시라도 빨리 묘에 모시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네. 내가 이리도 편협한 인간이라곤 생각지 못했는데, 오늘에서야 내 본성을 깨달았어.”
그는 살짝 고개를 떨궜다.
속내를 털어놓으며 은연중에 동의를 구하는 것이었다.
고문을 해서라도 찾으면 안 되겠냐고.
하지만, 시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남궁천의 안색에 먹구름이 드리웠다.
시후는 그의 손을 꼭 붙잡으며 눈을 마주쳤다.
“편협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고문할 필요도 없습니다. 제가 실토케 하지요.”
남궁천과의 대화에서 이리도 무게를 잡는 건 처음이지 싶었다.
하지만, 부끄럽고 낯간지럽다는 생각보다는 힘이 되어 주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그의 바람을 이뤄 주기 위해, 그의 손을 놓고는 품에서 한 권의 책을 꺼내 들었다.
제목이 보이도록 들어 올린 채 노인에게 다가갔다.
“유지를 이어받는 자가 나오길 바란다고 했었지? 과연 이어받는 자가 나올까?”
노인의 눈동자가 급격히 요동쳤다.
칠동살이 죽을 때도 이렇게 감정 변화가 일어나진 않았었다.
눈을 열심히 굴렸지만, 아혈과 마혈이 점해졌기에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불.”
시후가 손을 뒤로 뻗으며 외치자, 제갈려가 황급히 품을 뒤적여 화섭자를 꺼내 들었다.
불태울 만한 물건은 부족했으나, 칠동살의 옷가지는 불쏘시개로 사용하기엔 충분했다.
시체에서 옷을 벗기는 건 곤욕이지만, 이미 목불인견(目不忍見)의 참상을 보아온 제갈려는 침착하게 옷가지를 모았다.
불을 추위를 꺼트리기 위함인지 순식간에 피어올랐다.
“아혈을 풀어 주세요.”
시후의 부탁에 남궁천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아혈을 풀어 주었다.
“놈! 그것을 어디서 얻었느냐!”
“오다 주웠다. 그것보다 네가 지금 질문할 처지는 아닌 거 알지? 시신이 있는 위치나 말해.”
노인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어찌나 세게 물었는지 피가 주르륵 흘러내릴 지경이었다.
곧 마음의 결정을 내린 듯, 노인은 찢긴 입술을 움직였다.
“어차피 네놈이 정혼대법을 가지고 있는 이상, 내 유지는 이어지기 힘들 것이니 죽어도······.”
“조건을 걸지. 시신이 있는 곳을 알려 준다면, 그곳에 이 책을 놓겠다. 훗날 누군가 그곳을 발견한다면, 네 빌어먹을 유지는 이어질 수 있을지도 모르지.”
“네놈을 어떻게 믿고!”
“맹세하지. 그리고 믿지 않는다면 손해 보는 건 누굴지 생각해 봐. 저 불이 꺼지기 전까지 결정을 못 내린다면, 이 저주받은 책을 태울 테니 알아서 판단해라.”
아이 일곱의 옷가지로 불을 피워 봤자, 그게 얼마나 오래가겠는가.
이미 말하는 사이에 불은 추위를 이기지 못해 몸을 움츠린 지 오래였다.
시후는 미약하게 타오르는 옷가지 위로 손을 뻗었다.
불이 사그라드는 속도를 볼 때 주어진 시간은 이십여 초가 되지 않을 것이다.
“별생각 없나 보군. 오래 기다릴 필요가 없겠어.”
“······ 오태산.”
시후가 슬쩍슬쩍 책을 놓는 시늉을 하자 그가 입을 열었다.
문제는 그곳이 어딘지를 시후가 모른다는 점이었다.
제갈려와 남궁천을 바라보니 둘은 아는 눈치였다.
“산서성에 있는 산으로, 불교의 사대 성지로 유명한 곳이라네.”
설명하는 남궁천의 눈시울은 살짝 붉어져 있었다.
그는 곧 시후가 그랬듯이 손을 붙잡으며 눈을 마주쳤다.
말은 필요하지 않았다.
이 순간만큼, 언어는 사치에 불과했다.
“지도를 그려줄 테니, 약속을 지켜라. 일구이언은······.”
“지켜, 지킨다고.”
시후는 다음 말을 지겹도록 들었었기에 그의 말을 끊었다.
남궁천이 마혈까지 풀어 주자, 그는 불이 꺼진 옷가지들을 뒤적이더니 가장 아래 타지 않은 천을 주워들었다.
먹과 붓은 없었으나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먹 삼아, 손가락을 붓 삼아 지도를 그렸다.
건성건성 그리는 듯했으나, 제갈려는 알아볼 수 있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그림 아래 몇 글자를 더 적어 넣었다.
“안으로 들어가는 방법이다. 들어가면 정면에 가장 큰 석실에 그의 시체가 있다. 책은 그 석실 안에 놓아 주고, 나올 때······.”
“참고로 시신을 밖으로 온전히 옮긴 다음에 다시 들어가서 이 녀석을 놓을 거야.”
“······ 문을 꼭 닫아 주길 바란다.”
어딜 수작을 부리려고.
시후는 코웃음을 치며 정혼대법을 남궁천의 손에 넘겼다.
“개수작 부리려는 거 봤죠? 조심하고 또 조심해도 모자라니, 혼자 갈 생각은 말고 세가에 연락해요.”
“남궁세가에서 어떻게 이 은혜를 갚아야 할지······.”
“에이, 그런 소리 마세요. 우리가 남이에요?”
“차 아우······.”
남이다.
아무리 좋은 형, 동생으로 지낸다고 한들 남이다.
하지만, 남이 아니게 되는 방법이 한가지 있었다.
남궁천은 결의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시후는 몸을 한차례 떨었다.
찬 바람이 불어와서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엄습했지만, 별거 아닐 거란 생각으로 금세 떨쳐 냈다.
* * *
정의맹 본대의 성과는 썩 좋지 않았다.
스스로 생강시가 되었던 배교의 부교주는 샛길로 빠져나갔는지 없었고, 교주는 전황이 어두워지자 동귀어진으로 폭사(爆死)를 택한 탓이었다.
검후가 막아 준 덕분에 사망자는 없었지만, 수뇌부를 붙잡는 데는 실패했다.
죄다 사망했으니깐.
목탑을 지켰던 외당(外堂)의 당주를 사로잡긴 했지만, 다들 그가 영양가 있는 정보를 알지 못할 거라는 것 정도는 눈치를 챘다.
그 와중에 남궁천이 끌고 온 노인의 존재는 이목을 끌 만했다.
생강시를 만드는 데 핵심 인물이었다는 점을 말하진 않았지만, 생강시 일곱이 호위하고 있던 인물이라는 말에는 다들 기겁을 했다.
하지만, 놀람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남궁천은 모두가 놀라 뒤집힐 정보를 주고, 급히 볼일이 있다며 남궁세가 인원을 모두 이끌고 떠나갔다.
도대체 지금 상황보다 급한 볼일이 무엇인지 일언반구조차 없었다.
그렇기에 다들 시후와 제갈려에게 캐물었지만, 알려 줄 이유도 없었고 알려 줄 수도 없었다.
시후가 했던 행동을 나쁘게 보면, 배교와 거래한 것과 무방했다.
물론,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남궁세가를 위해서이고, 이해하려면 이해해 줄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정혼대법이었다.
제2의 배교를 만들어 낼 수 있는 물건인 만큼 없애 버려야 했다.
하지만, 남궁천은 시후가 했던 맹세를 지키기 위해 산을 무너트릴지언정, 정혼대법을 없애 버리지는 않을 것이 분명했다.
“세가 사람들과 같이 가긴 하나, 그 뒷모습이 외로운 한 마리 늑대와 같군. 기존 별호보다 오히려 독랑(獨狼)이라는 별호가 어울릴 것 같은데?”
준혁은 멀어지는 남궁천의 모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의 말에 추나행을 비롯해 많은 사람이 동조해 주었다.
남궁천은 저도 모르게 별호가 바뀐 것도 모른 채 능선 너머로 모습을 감췄다.
“그보다 정말 안 알려 줄 텐가?”
“저한테 그러지 마시고 본인한테 직접 물으시지 그랬어요?”
“안 알려 주니 그렇지 않겠나.”
“본인이 말하기 싫다는데 제가 무슨 염치로 떠들고 다닙니까? 다른 데 가서 알아보시죠.”
추나행은 단호한 시후의 태도에 입맛을 다시며 물러났다.
그가 떨어져 나가자 앞에서 걷던 제갈려가 속도를 늦추며 다가왔다.
“아흐, 추워 죽겠네. 겉옷 좀 줘.”
제갈려의 투정에 시후는 군말 없이 겉옷을 벗어 주었다.
그 행동에 오히려 제갈려가 당황했다.
“말 걸려고 그냥 한 소리야.”
“한서불침······.”
시후의 손에 들려 있던 겉옷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제갈려의 빠른 태세 전환에 시후는 실소를 흘렸다.
“그보다 왜?”
“아, 그게······.”
제갈려가 앞을 힐끔거렸다.
시선이 향했던 곳에는 신의의 마지막 제자이자, 자신을 배교의 ‘광명주교’라 소개한 노인이 있었다.
이야기를 나누기엔 적합하지 않았다.
대열의 중간쯤에 있었으니깐.
“다리라도 주물러 줄게. 여기 앉아 봐.”
시후는 주변에 충분히 들리도록 소리친 뒤, 제갈려를 주저앉혔다.
지나치는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간지러운지 연신 꿈틀거리는 제갈려의 종아리를 주물러 줬다.
가장 후미에 있던 청성파 장로가 지나치자 제갈려는 상체를 앞으로 숙였다.
“저자가 아무 말이나 막 하면 어떡하게? 오해받을 수도 있잖아.”
시후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제갈려가 상체를 숙인 탓에 두 사람의 얼굴은 제법 가까워져 있었다.
시후도 곧 다리 주무르는 걸 멈추고 제갈려의 옆에 앉았다.
“그건 별걱정 안 하는데?”
“왜?”
손을 뻗어 능선을 오르는 광명주교를 가리켰다.
“저자가 바라는 건 뭐였어?”
“모두가 불사의 삶을 누리는 것?”
“그러기 위해선 자신의 모든 것이 담긴 그 책이 누군가의 손에는 들어가야 하잖아? 그런데 그 사실을 말하면 그 책은 어떻게 될까?”
“없어지겠······ 지?”
“그래. 게다가 지금 걱정해야 할 건 그쪽이 아니라, 도망친 부교주와 연결 고리가 끊어진 분타 쪽이지.”
시후는 북쪽으로 올라가는 대열도 아니고, 남궁천이 떠나간 동쪽도 아닌 달이 매달려 있는 남쪽 봉오리를 바라봤다.
제갈려는 뭘 보는지 싶어 시후와 고개를 나란히 했다.
덕분에 심각한 분위기를 잡던 시후는 피식 웃으며 제갈려의 머리를 헝클었다.
“몸체와 끊어진 꼬리는 미친 듯이 날뛰기 마련이지.”
시후는 읽지 않고 넘어갔었던 알람을 확인하며 중얼거렸다.
[‘준동-숨어드는 그림자’를 완료하였습니다. 이제 배교는 그림자 속에 숨지 않을 것입니다.]
- 85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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