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83화 추격 (5)
눈길에서 발자국을 숨길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답설무흔(踏雪無痕)의 수준에 다다른 경공을 펼치거나, 눈이 미친 듯이 쏟아질 때 움직이거나.
하지만, 그 정도 경지를 이룬 고수가 수백 명이 있다면 도망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눈이 미친 듯이 쏟아지지도 않았다.
발자국은 산 능선을 따라 길게 이어져 있었다.
문제는 중간중간 이탈인지, 아니면 추격하는 인원을 분산시키기 위해선지 몰라도, 샛길로 빠진 인원이 상당수 있었다는 점이었다.
모두 멈출 수밖에 없었다.
배교의 수뇌부가 능선을 따라 쭉 갔을 가능성도 있지만, 샛길로 빠졌을 가능성도 작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제법 높은 확률로 빠졌을 가능성도 있었다.
“머리를 잡아야 할 텐데······. 추 장로는 어느 쪽이라고 생각하오?”
“알 수 없소.”
“그래도 조금은 가능성이 커 보이는 쪽이 있지 않소이까?”
“그렇게 말씀하시는 주 장로께선 어디가 가장 유력해 보이시오?”
“어허, 저야 잘 모르겠으니 개방에 물어보는 것 아니겠소이까.”
추나행의 인상이 구겨졌다.
청성파의 장로인 주목은 은연중에 책임을 전가하려 들고 있었다.
놓친다면 개방을 탓할 것이고, 잡는다면 옆에서 거든 것으로 생색을 낼 것이 분명했다.
추나행이 옹졸한 소인배라면 싸움이 나도 이상하지 않았으나, 그는 자신의 감정보단 이성적인 판단을 중시했다.
“개방도 그 점에 관해서는 알 방법이 없으니, 고견이 있다면 말해주되 없다면 닥치고 있으시오.”
감성과 이성이 공존하는 대답을 한 추나행은 얼빠진 주목을 뒤로한 채 다시금 발자국을 살폈다.
아무래도 본대에 중요 인물이 있을 가능성이 컸다.
“일단, 추격하되 중간중간 샛길로 빠진 인원에 관해서는 숫자에 맞춰 인원을 배분하겠소.”
결국, 추나행은 모두 놓치지 않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최초, 다섯이 빠져나간 샛길에는 개방 인원 둘이 배분되었다.
샛길로 빠져나간 인원에 맞춰 그 절반에 해당하는 인원을 보내는 것이었다.
중간중간 빠져나간 정의맹 인원의 숫자가 서른에 달했을 때, 다시금 샛길로 빠져나간 발자국이 나타났다.
그 수는 일곱.
시후는 얼른 남궁천을 이끌고 앞으로 나섰다.
자연스럽게 제갈려가 따라왔다.
덕분에 모두의 관심이 쏠렸다.
검후와 함께 엄청난 수의 강시를 베었던 남궁천, 배교의 뒤를 쫓으며 혁혁한 성과를 냈던 제갈려, 그리고 마지막 비밀 통로를 발견하는 데 큰 역할을 했던 시후까지.
“아이들만 보내기는 좀 그렇지 않은가?”
“게다가 저 아이는 남궁세가의 셋째 아닌가? 첫째를 잃은 마당에 위험을······.”
“그보단 경험의 부재가 문제라고 보네만······.”
“제갈의 아이는 아무래도 이쪽에 있는 편이 좋지 않을까 싶네.”
아니나 다를까, 군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문제였다.
시후는 곧바로 남궁천의 옆구리를 찌르며 검후가 있는 방향을 바라봤다.
남궁천은 시후의 의도를 눈치챘는지 곧바로 검후에게 다가갔다.
“이쪽을 살펴보고 오겠습니다. 검후 님, 저희의 자리를 부탁드립니다.”
“네가 내 몸 걱정을 할 수준이더냐? 염려 말고 다녀오거라. 별거 아니거든 바로 뒤쫓아 오고.”
“네.”
남궁천을 향해 손을 휘젓던 검후는 뒤편에 있는 시후를 지긋이 바라봤다.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다만, 사람은 호기심의 동물인지라 슬그머니 검후가 있던 방향을 쳐다봤다.
눈이 마주쳤다.
검후는 씩 웃으며 입을 뻥긋거렸다.
‘약은 녀석. 다음에?’
입 모양을 전부 다 읽진 못했다.
어정쩡하게 아는 것만큼 찝찝한 게 없었지만, 직접 다가가서 물어볼 생각은 들지 않았다.
검후가 힘을 실어 줬다.
군소리는 언제 나왔냐는 듯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시후 일행은 함께 고생했던 준혁과 운허에게 다녀오겠노라 인사를 나눈 뒤 샛길로 빠졌다.
정의맹 본대는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차 아우, 이제 말해 주게.”
남궁천이 슬쩍 물어왔다.
옆에서 걷는 제갈려도 궁금한 눈치였다.
시후는 발아래를 가리켰다.
“발자국 보이죠?”
“선명하게 보이네.”
“약간 이상한 건 없나요?”
남궁천이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이대로 두면 몇 분은 잠잠할 것이다.
예상대로 남궁천은 꽤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모르겠군.”
남궁천이 전문적으로 추적술을 배우지 않았으니 어찌 알겠는가.
시후는 오랫동안 고민한 그가 스스로 알아차릴 수 있도록, 몇 가지의 정보를 주었다.
“발자국의 간격과 들어간 깊이를 보시죠.”
시후의 말에 남궁천은 앞장서 걸으며 발자국을 살폈다.
몇 가지의 정보를 주자, 그의 명석한 두뇌는 제 일을 하기 시작했다.
“아이로군.”
남궁천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눈 앞에 펼쳐진 발자국은 단 하나를 제외하곤 모두 아이들의 발자국이었다.
“성벽 위에서 준혁 대협이 했던 이야기 기억나요?”
“애들이 없다고 하셨지.”
“그럼 애들은 내성에 있던 애들이겠죠.”
“내성에서 아이를 기를 정도로 지위가 높은 인물이겠군?”
“십중팔구는요.”
남궁천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표정은 썩 좋지 않았다.
머릿속이 복잡할 것이다.
‘아이들이라.’
아무리 배교라고 하지만, 아이들이 무슨 죄가 있을까,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남궁천의 얼굴을 보자마자 읽을 수 있었다.
그의 걸음이 자연스레 느려졌다.
제갈려도 눈치를 살피더니 속도를 맞춰 가며 걸었다.
“제가 앞장설게요.”
시후는 그런 두 사람을 제치며 앞장섰다.
걷는 수준이 아니라, 달렸다.
덕분에 뒤에 있는 두 사람이 당황했지만, 시후는 그들의 감정에 동조하며 연민을 가질 때가 아니었다.
제 코가 석 잔데 누가 누구에게 연민을 가진다는 말인가.
시후는 발목까지 쑥쑥 잠기는 눈길을 헤치며 거침없이 달렸다.
“아이들은······.”
“일단 붙잡고 봐야지요. 놓아 주자는 허튼소리 하지 않겠죠?”
시후의 단호한 태도에 남궁천도 그건 아니었는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당연히 아니네. 다만, 죽이는 건······.”
“제가 살인마도 아닌데 애들을 무작정 죽일 이유는 없죠······. 이유만 없다면 말이죠.”
* * *
큼지막한 산이라면 작은 지류(支流)가 있기 마련이었다.
시후의 앞에도 작다면 작고, 크다면 큰 지류가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는 총 여덟 명이 서 있었다.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한 명.
그는 다섯 살 정도로 보이는 아이를 안고 있었다.
주변 아이들의 나이는 다양했다.
노인의 품에 안긴 아이가 가장 어렸고, 가장 큰 아이가 열다섯은 되어 보였다.
“아슬아슬했네.”
[추적을 통해 ‘준동-숨어드는 그림자’를 완료하십시오. 00:17:15]
얼어붙은 강을 이용해 도망쳤다면 더욱 골치가 아플 뻔했다.
시후가 창을 겨누며 질문하려 했지만, 남궁천이 한발 빠르게 앞을 가로막았다.
“내가 이야기해 보겠네.”
시간이 얼마 없었다.
그렇다고 남궁천의 말을 무시하고 밀어붙이자니, 그의 간절한 시선이 가슴에 걸렸다.
“······ 간결하게 설명해요.”
시후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자, 남궁천은 노인에게 곧장 포권을 취했다.
“남궁세가의 삼남, 남궁천이라고 합니다. 배교의 잔당을 뒤쫓다 보니 이렇게 앞을 가로막게 되었는데, 하실 말씀 있으신지요.”
“보내 줄 수는 없겠는가? 내 비록 배교에 몸을 담고 있긴 했으나, 부모 잃은 아이들을 돌볼 재간이 없어서 그랬네.”
“······ 그럴 순 없습니다. 죄가 없으시다면, 조사하면서 위해를 가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저희를 믿고 따라와 주십시오.”
“아무도 없지 않나? 내가 배교에서 뭔가 중요한 사람이거나 직책을 맡고 있었다면, 아이들과 이리 떨어져 나왔겠는가? 못 본 척해 주게. 부탁허이.”
노인의 부탁에 남궁천이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그는 곧 뒤로 물러났고 노인의 얼굴은 밝아졌다.
하지만, 기쁜 마음도 잠시.
시후가 창을 들이밀자 노인은 겁먹은 얼굴로 뒷걸음질 쳤다.
남궁천이 다시금 앞을 막으려 했으나, 시후는 오히려 그를 뿌리치며 한 걸음 더 내디뎠다.
“그가 있어서인가? 하긴, 세월이 지났어도 한눈에 알아봤겠지.”
노인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 남궁천을 바라보며 눈알을 굴렸다.
도움을 청하는 눈빛을 외면하기도 그렇지만, 시후의 행동에는 다 이유가 있었던 점을 떠올렸는지 막아서진 않았다.
시후는 덜덜 떨고 있는 노인의 가슴에 창을 겨눴다.
“신의. 셋째.”
순간적으로 노인의 떨림이 멈췄다.
시후는 피식 웃으며 남궁천을 바라봤다.
“봤죠? 다 말할 수는 없지만, 세상에 나쁜 놈들이 자기는 아니라고 하는 건, 믿을 게 못 돼요.”
한 번 의심이 들기 시작하면 끝이 없는 법이었다.
남궁천의 눈빛이 변하자 노인은 손사래를 치며 뒤로 물러났다.
“아이가, 아이가 아파서 놀란 걸세. 이 아이는 선천적으로 심장이 약해서 살날이 길지 않았는데, 신의가 있다는 말에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영감, 아이가 어디에 있는데?”
“여기 품에······.”
노인이 조심스럽게 품에 안은 아이를 내려다봤지만, 시후는 눈 하나도 깜짝하지 않았다.
“아이가 몇 살이지?”
“다섯 살이라네.”
“아이가 태어난 연호는?”
“건치(建治)······.”
노인이 급히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뒤에서 지켜보던 남궁천이 검을 빼 들었다.
“건치라······. 놀랍구려. 그 아이가 나와 동년배일 수도 있겠소. 아니, 오히려 많을 수도 있겠구려. 내가 건치 2년에 태어났으니 말이오.”
건치라는 연호는 2년밖에 사용되지 않았다.
황제가 워낙 병약했기에 그의 어린 아들에게 물려줄 수밖에 없었으니깐.
노인은 한숨을 내쉬더니 팔을 풀었다.
심장이 약해서 살날이 길지 않다던 아이는 바닥에 내려섰다.
그의 말이 사실인지 몰라도 혈색이 좋아 보이진 않았다.
“정말 제자의 앞길에 일평생 도움이 안 되는 늙은이군. 이런 애송이들에게 주저리주저리 떠들었을 줄이야.”
“본인이 쓰레기 같은 제자라곤 생각한 적 없나? 그렇게 지극정성으로 가르쳤는데 뒤통수를 쳐?”
“길이 다르면 보내 주면 될 것인데, 자기의 길을 끝까지 고집한 건 그 빌어먹을 늙은이지. 애초에 쉬이 가르쳐 주지 않아서 날려 버린 시간이 얼마인 줄 아느냐?”
“그 시간을 갉아먹은 게 네놈이란 건 알고 있어?”
시후의 거친 말에도 노인은 쉽사리 동요하지 않았다.
노인은 귀찮은 듯 손을 휘저었다.
“노인네 관련한 귀찮은 이야기는 집어치우고, 날 알고도 이렇게 나섰다는 건 자신감의 반증이더냐?”
“물론.”
“좋아. 안 그래도 칠동살(七童殺)의 능력을 시험해 보고 싶었는데 잘 됐군. 게다가 남궁세가의 셋째라고 했나? 첫째에 이어 좋은 표본이 되겠어.”
노인의 말에 시후는 쓴웃음을 지었다.
곧 창을 거두며 뒤로 물러났다.
그 모습을 본 노인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이제라도 겁이 나느냐? 그렇다고 한들······.”
지독한 살기.
노인은 말끝을 흐리며 뒤로 물러났다.
시후는 남궁천의 눈치를 살피며 곁을 지나쳤다.
아무런 말도 건네지 못했다.
시퍼런 안광을 마주하기도 힘들었으니깐.
곁을 지나치자 뒤편에 있던 제갈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살기에 짓눌려 숨도 제대로 못 쉬는 듯했다.
시후는 혀를 차며 제갈려의 어깨를 끌어안아 뒤로 끌어냈다.
얼어붙은 강변까지 데리고 가자, 제갈려는 그제야 숨을 급하게 몰아쉬었다.
“네놈도 연관이 있는가?”
남궁천의 목소리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낯설었다.
오히려 차가운 바람이 따스하게 느껴질 정도로 그의 목소리에는 한기가 맴돌았다.
남궁천은 자신의 분노를 가감 없이 드러냈다.
시후는 오들오들 떨고 있는 재갈려의 어깨를 끌어안은 채, 남은 시간을 확인했다.
11분.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충분하겠네.”
- 84화에 계속 -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