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81화 추격 (3)
“이야, 주목경도(住木景道)가 여기에도 있었어? 고조할아버지께서도 말년에야 구하셨다는 책인데 이곳에도 있을 줄이야······. 민본주해(民本注解)? 우리 세가에도 반쯤 불탄 사본밖에 없는데······.”
제갈려가 아무리 무영묘적으로 이름을 떨쳤다고 한들, 제갈세가에서 나고 자랐다.
태어나 읽었던 책들을 모은다면, 이 서고에 모인 책보다 많으면 많았지 적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에는 세상의 온갖 진귀한 책들이 모여 있었다.
이름만 들었던 희귀한 책들을 살펴보는 제갈려의 눈은 초롱초롱하게 빛났다.
“집중, 집중!”
시후의 호통에 제갈려는 흥분에서 빠져나와 다시 책장을 살피기 시작했다.
물론, 그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그녀의 관심은 수시로 귀한 책들로 쏠렸으니깐.
남궁천도 그와 비슷했다.
시와 그림을 좋아하는 그도 중간중간 책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덕분에 시후는 생각과 달리 홀로 골머리를 썩여야 했다.
시후는 도움이 안 되는 두 사람을 머릿속에서 지우곤 책장을 차근차근 훑었다.
다만, 책에 관해 아는 것이 전혀 없었다.
국내, 최소한 현대의 책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질 것이다.
독서량이 적지 않으니깐.
하지만, 이곳에 있는 책들은 죄다 시대를 반영했다.
제갈려가 감탄했던 주목경도나 민본주해 등은 난생처음 들어보는 책들이었다.
천금보다 아까운 시간이 속절없이 흘러가는 와중, 밖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곧이어 독고준혁이 들어왔다.
그는 안에 있는 세 사람의 얼굴을 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세 사람 중에 추적술을 배운 사람이 있었나?”
남궁천과 제갈려가 동시에 고개를 가로저었기에 시후는 모호한 표정을 지으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 반응에 준혁은 채근할 생각은 없었는지 바닥을 훑었다.
“신성들이 이곳에 다 모여 계셨구려.”
뒤를 이어 그의 단짝이라고 할 수 있는 목일자가 들어왔다.
가볍게 인사를 하자, 그들도 곧 사방으로 흩어졌다.
서고는 그다지 크지 않았다.
슬쩍 곁눈질만 해도 옆에서 뭘 하는지 알 수 있을 정도로.
“확실히 뭔가 있는 거 같은데······.”
준혁은 뭔가 이상한 점을 느꼈는지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수년간 마적들을 쫓아다니던 야생의 감은 여전히 매서웠다.
그에게는 본능에 따르는 짐승과도 같은 그 무엇인가가 있었다.
따로 추적술을 배운 것도 아니지만, 여기까지 쫓아온 걸 보면 확실히 대단했다.
준혁은 책장을 두들기고, 바닥의 나뭇결까지 놓치지 않겠다는 듯 세심하게 살폈다.
바닥의 먼지 한 톨조차 놓치지 않겠다는 듯한 모습은 일말의 기대감을 안겨 주었다.
그 모습을 곁눈질로 살피고 있는 사이, 얼마 지나지 않아 추나행까지 도착했다.
덕분에 모두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이곳에 뭔가 있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하기 시작한 것이다.
제갈려가 눈치를 살피며 다가왔다.
“그러고 보니 뭔가 이상한 점이 있어.”
“뭐가? 어떤 게 이상한데?”
“이 정도로 희귀한 책들을 보관했다면 관리가 아주 철저했을 텐데, 책 몇 개가 중구난방으로 꽂혀 있었단 말이야? 일단은 건드리기 뭐해서 그대로 뒀는데······. 이건 아닌가?”
“아냐, 아냐. 말 잘했어. 그런데 중구난방으로 꽂혀 있다는 게 무슨 말이야?”
“일반적으로 서적들을 관리할 때 가장 기본적으로 자모(字母)순에 따라 보관한단 말이야? 그런데 몇 개는 보다가 대충 꽂아둔 것처럼 제 위치가 아닌 곳에 있단 말이지. 완전 엉뚱한데라면 귀찮아서 그랬다고 생각하겠지만, 거의 바로 옆에 놔둘 이유는 없지 않겠어?”
시후는 눈에 불을 켜고 찾자, 제갈려가 바로 위치를 알려 주었다.
확실히 자모순이 어긋나 있었다.
목민심서 옆에 있는 무민주해와 여러 권으로 이뤄진 탕평진경 사이에 놓인 탕평주결이 그러하였다.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기에, 시후도 우선은 그대로 두었다.
“그런 거라면 나도 발견했네.”
다른 쪽 책장을 확인하던 남궁천의 말에 얼른 다가갔다.
제갈려와 확인한 것처럼, 잘못 꽂아 둔 책들이 눈에 띄었다.
시후는 잘못 꽂아 둔 게 아니라, 일부로 꽂아 두었다는 확신을 했다.
한두 권이라면 모를까 이 정도라면 무슨 의미가 있기 마련이다.
눈이 마주친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뒤섞여 있던 책들을 하나씩 뽑았다.
추나행과 준혁도 호기심 어린 눈길로 지켜봤다.
시후는 마지막으로 남은 한 권의 책을 손에 쥐었고,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마지막 책을 책장에서 뽑았다.
숨 막히는 적막감 속에서 다들 침을 삼키며 주변을 둘러봤다.
하지만, 횃불 일렁이는 그림자만이 끊임없이 움직였다.
“이건 아닌가 보군.”
남궁천이 양손에 책을 쥔 채로 아쉬운 듯 중얼거렸다.
시후도 마찬가지였다.
제법 그럴듯하다고 생각했기에 들고 있는 책을 놓지 못했다.
“자모순에 맞춰서 똑바로 꽂아 놓자.”
그렇기에 제갈려의 말에 후다닥 책장을 정리했다.
기존에 한두 칸씩 밀려 있었기에 정리는 어렵지 않았다.
책장에 마지막으로 책을 꽂아 넣었다.
“어, 음······. 이것도 아닌 거 같은데?”
시후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책장을 쭉 훑어보았다.
여전히 잘못 꽂아 둔 책은 없는지 살폈지만, 최소한 시후의 눈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제갈려와 남궁천도 고개를 가로저었다.
시후에게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추나행을 비롯한 인원들은 세 사람이 하는 짓을 지켜보다가 밖을 둘러보겠다며 나갔다.
북적거렸던 서고가 순식간에 한적해졌다.
제갈려는 시후의 눈치를 살피더니, 들뜬 표정으로 고서를 탐닉했다.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절로 머리가 아플 것 같았다.
괜한 짜증이 일었던 시후는 고개를 돌려 제갈려를 외면했다.
“그러고 보니 별의별 귀한 책들은 많은데, 정작 가장 유명한 책이 없네요?”
“그 말을 들으니 그렇군. 모인 책들의 종류를 보면 없을 리 없는데 말이지.”
“예기와 춘추도 있는 거로 봐서는 유교 경전을 배척한 건 아닌 듯한데 말이죠.”
서고의 내부가 워낙 조용한지라 두 사람의 대화는 너무나도 잘 들렸다.
“유명한 책? 그게 뭔데?”
시후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묻자, 제갈려는 정말 모르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시후가 어서 말하라는 눈짓을 보내자, 제갈려는 어깨를 으쓱이며 입을 열었다.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모른다고는 하지 않겠지?”
“알기야 하지만······.”
‘논맹’으로 통하는 논어(論語)와 맹자(孟子)를 시후도 모르진 않았다.
대학(大學)과 중용(中庸) 또한 이름을 들어본 적은 있었다.
삼경에 관해서는 잘 모르지만, 분명 들으면 기억이 날 것도 같았다.
하지만, 사서삼경과 이곳의 관계에 관해서는 구체적인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다.
“사서삼경······ 사서삼경······.”
시후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책장을 빤히 바라봤다.
아리송했다.
짙은 안개에 뒤덮인 호수 위에서 작은 풀잎 하나를 찾는 게 쉬울 것 같았다.
그사이, 서고 주변을 둘러보던 추나행이 안으로 들어왔다.
“뭔가 찾은 게 있는고?”
“찾은 건 없고, 없는 건 발견했죠.”
그의 질문에 제갈려가 사서삼경에 관한 이야기를 하자, 추나행은 고개를 끄덕이며 보면 가져오겠노라 말하고 자리를 떠났다.
그가 떠나고 얼마 후, 시후는 책장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리곤 거침없이 책을 뽑아 들기 시작했다.
“뭐해?”
제갈려가 물었지만, 시후는 무시로 일관하며 한 권 한 권 책을 뽑을 뿐이었다.
그러던 순간.
쿠르르르릉.
발밑으로 진동과 쇠 맞물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뭔가 아래쪽에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제갈려와 남궁천은 놀란 눈으로 시후를 바라봤다.
그사이 진동은 건물이 살짝 흔들릴 정도로 거세지기 시작했다.
세 사람은 밖으로 빠져나왔다.
“무슨 일이냐?”
가장 먼저 도착한 검후와 그 뒤를 이어 운허 등이 도착했다.
다들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을 보냈고, 제갈려와 남궁천은 시후를 힐끔 바라봤다.
모두의 시선이 쏠리자, 시후는 손에 들린 책을 들어 올렸다.
“정답을 맞힌 거 같죠?”
시후의 손에는 총 일곱 권의 책이 들려 있었다.
제갈려는 주변의 눈치를 살피더니 궁금한 듯 제목을 살폈다.
곧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기준이야?”
“사서삼경”
시후의 대답에 제갈려는 다시금 제목을 훑었다.
아무런 관계가 없는 책들이었다.
제갈려는 자신을 놀리는 것이냐며 따지려 했으나, 뭔가 알아차린 듯 입을 쩍 벌렸다.
시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남궁천도 다가와 제목을 확인하곤 손가락을 튕겼다.
“그렇군. 사서삼경이야.”
“그렇죠. 다른 의미지만 사서삼경이 분명하죠.”
제갈려는 허탈한 목소리로 남궁천의 말에 동의했다.
시후의 손에는 서(書)가 들어간 책이 네 권, 경(經)이 들어간 책이 세 권 있었다.
발상의 전환.
그것이 비밀 통로를 여는 열쇠가 되었다.
곧 진동이 멈추었다.
열린 문 너머로 서고 내부에 변화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안으로 들어가자, 이전과 달리 뻥 뚫린 바닥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눈에 들어왔다.
[‘배교 총타의 최후의 비밀 통로’를 발견하였습니다.]
“내공으로 훑었을 때 비어 있는 걸 느끼지 못했는데······.”
추나행이 당황스러운 어조로 중얼거렸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가 느끼고 못 느끼긴 게 아니다.
비밀 통로를 찾아냈고, 배교의 뒤를 쫓을 수 있는 끈이 끊기지 않았다는 게 중요했을 뿐.
“이곳은 분명 위험할 겁니다.”
목일자가 경계를 가득 담아 말했다.
최후의 탈출을 위해 만들어 놓은 비밀 통로인 만큼,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추적을 통해 ‘준동-숨어드는 그림자’를 완료하십시오. 02:44:12]
시후는 시간을 확인했지만, 시간이 많이 남은 건지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배교 놈들이 어디까지 달아났는지 알 수 없으니 말이다.
그 사이, 준비된 횃불을 들고 조심스레 계단을 내려갔다.
아래로 이어지는 계단은 시후의 고민만큼 깊었다.
긴 계단을 내려오자, 뿌연 먼지 위에 아로새겨진 수많은 발자국이 보였다.
시후는 추적술을 배운 적이 없었으나, 한눈에 보아도 수백에 달하는 인원이 지나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바닥엔 수백 쌍의 발자국이 어지러이 새겨져 있었으니 말이다.
가장 앞선 추나행은 발자국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 지어진 건물들의 숫자를 대략 파악해 보면, 죄다 빠져나갔다고 보는 게 맞겠군. 다만, 너무 발자국이 많이 겹쳐서 정확한 인원을 파악하기는 어려워.”
“뒤따라가다 보면 확인할 수 있지 않겠나.”
추나행은 운허의 말을 듣곤 제갈려에게 다가오라 손짓했다.
분명 더 위험할 것이다.
그렇다는 건, 고집을 부리며 홀로 앞장설 상황이 아니라는 말이었다.
추나행은 검후까지 불렀다.
“통로가 좁으니 검후께서 앞을 지켜주십시오.”
추나행의 무공도 결코 달리는 수준은 아니다.
그의 추혼비각은 천근의 바위도 부술 만큼 강했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검후를 앞세워야 했다.
새로운 비밀 통로는 배교 총타를 찾아올 때 이용했던 비밀 통로와 비슷하면서도 사뭇 달랐다.
“한 번 발동시키면 해제는 염두에도 두지 않을 기문진식들이네요.”
“그야, 뒤따라오는 자들을 막을 목적일 테니 당연하지 않겠나. 통로를 붕괴시키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지.”
“그렇기야 하죠.”
결과적으로, 기문진식은 몸으로 해결해야 했다.
화살이 쏘아지면 막아야 했고, 바닥이 뒤집히면 벽을 타고 넘어야 했다.
무식한 방법이었지만, 해제할 방법이 없는 이상 별다른 수가 없었다.
문제는 이십여 분쯤 나아갔을 때 일어났다.
가장 앞서 있던 검후가 연이어 뒤집히는 바닥을 뛰어넘어 바닥에 내려서자, 일순간 모두 사라졌던 것이다.
“어?”
시후는 얼빠진 목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
[간불무로진(間不無路陣)이 발동되었습니다.]
[1인 미궁 ‘심처의 끝자락’에 들어오셨습니다.]
- 82화에 계속 -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