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79화 추격 (1)
“지, 진이······.”
중년인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넋이 나간 듯 중얼거렸다.
‘됐다.’
반구 형태로 감싸고 있던 안개가 아래로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덕분에 시야가 잠시 좁아졌으나, 이내 하늘에 떠오른 달이 선명히 그 모습을 드러냈다.
살을 포동포동 찌운 꽉 찬 만월이었다.
이제 밖에 머무르고 있던 정의맹의 본대가 들이닥칠 것이다.
목표를 이뤘으니 이제는 그들을 기다리면 되었다.
“물러나면서 본대와 합류하시죠.”
힘겹게 싸울 이유는 없었다.
본대와 합류해서 아무런 피해를 보지 않는 게 더 중요했다.
하지만, 검후는 시후의 제안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혼자서도 충분하다.”
자신감 충만한 목소리.
하기야, 지금은 힘이 넘치다 못해 부글부글 끓어오른다고 느낄 검후였다.
그 심정도 이해했다.
더는 오를 곳이 없다고 생각했을 텐데, 급격한 힘의 상승으로 인한 고양감은 쉽사리 억누를 수 있는 게 아니니깐.
하지만, 저들이 끝이 아니다.
시후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한 곳을 가리켰다.
안개 속에 파묻혀 있던 산봉우리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곳에 지어진 웅장한 건물 몇 채.
배교의 내당이다.
진짜는 지금부터다.
내당 인원들이 달려오기 시작했다.
그 숫자는 적었지만, 속도와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검후도 그 사실을 인지했는지 검병을 꽉 움켜쥐었다.
“물러나시죠.”
검후는 재차 이어지는 시후의 제안까지 거부하진 않았다.
다만, 잡은 물고기를 놓아주는 멍청한 어부는 없다.
주위를 둘러싼 청강시와 백령강시가 조금 더 오밀조밀하게 거리를 좁혔다.
“검후! 이 자리가 네 무덤이 될 것이다!”
이전이라면 코웃음을 쳤을지 모르지만, 내당 인원이 합류하면 여간 귀찮은 게 아니다.
중년인의 얼굴에 미소가 짙어졌다.
검후는 주저 없이 앞으로 몸을 날렸다.
검후가 활로를 뚫고, 시후를 비롯한 네 명이 제갈려를 보호하며 그 뒤를 따랐다.
“크크큭, 상대해 줄 성싶으냐? 뒤에 놈들을 노려라!”
놈들은 영악했다.
청강시로 검후의 발목을 붙잡으며, 백령강시로는 뒤따르는 시후 일행을 공격했다.
자연스레 검후의 시선이 뒤로 쏠렸다.
덕분에 나아가는 속도는 현저히 늦어졌다.
베고, 베고, 또 베었지만, 내당에서 내려온 강시의 숫자가 더해지자 처음과 얼추 비슷해졌다.
“빌어먹을.”
도망은 글렀다.
내당에서 내려온 놈들에게 뒷덜미를 붙잡혔다.
다소 힘겹겠지만, 본대가 도착할 때까지 결사 항전이 답이었다.
시후는 주변을 둘러봤다.
사방을 에워싼 강시들 사이로 중간중간 놈들을 조종하는 강시 술사가 눈에 띄었다.
저놈들을 죄다 때려잡을 수 있다면 좀 편해지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놈들을 한 번에 잡는 건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무리였다.
“검후께서 저 피리를 물고 있는 놈들을 원거리에서 놀려 주실 수 있겠습니까?”
“이전부터 시도는 계속해 봤다. 다만, 강시 놈들이 몸을 던져서 막는 통에 성과가 하나도 없을 뿐.”
“술사를 처리하면 쉽게 갈 수 있을 텐데······.”
준혁이 아쉬운지 입을 쩝쩝 다셨다.
그 마음에 보답하는 것일까.
놈들이 무음필대를 불기 시작했다.
무슨 일인가 싶어 긴장하는 찰나.
대로를 막고 있던 강시들이 갑자기 옆으로 비켜나며 길을 텄다.
“지나가라는 건······. 아니군.”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길은 내준 건 아니었다.
트인 길의 반대편에서 누군가 다가왔다.
강시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새하얀 피부를 자랑하는 약관의 남성이었다.
비쩍 마른 몸을 보아하니 병약한 서생의 전형적인 표본이었다.
다만, 무감정한 눈빛을 보니 마침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무림맹에 투신했던 자아가 있는 강시인 천 씨 세가의 장녀 천지아.
자신의 기억이 정확하다면, 놈은 배교의 부교주를 맡고 있을 것이다.
“부교주님을 뵙습니다.”
자신의 기억은 정확했다.
부교주는 중년인의 인사에도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그는 지나온 길을 가리켰다.
진의 핵을 이루던 목탑이 있는 곳이었다.
“진이 깨졌군.”
부교주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중년인은 머리를 조아렸다.
“죄, 죄송합니다. 생각보다 검후가······.”
“누가 변명하라 했지?”
중년인은 파리하게 질린 얼굴로 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이쪽은 안중에도 없는 듯한 광경이 펼쳐졌다.
시후가 슬쩍 검후의 눈치를 살피니, 본대가 올 수 있는 시간이 늘어나는 걸 다행이라 여기는 것 같았다.
다들 비슷한 생각을 하는 듯했다.
시후는 상황을 더 지켜봤다.
“당장이라고 쳐 죽여야 함이 마땅하나, 도망치는 데는 네놈만 한 녀석이 없지. 당장 올라가서 교주를 모셔라.”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중년인은 이마가 깨질 때까지 땅에 찧어 댔다.
이마에선 피가 철철 흘렀지만, 지혈할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부교주가 손을 내젓자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아쉽게도 허비되는 시간은 길지 않았다.
부교주는 검후를 빤히 바라보더니 생기가 느껴지지 않는 입술을 뗐다.
“골칫덩어리 검후구려.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군.”
“실컷 봐 두어라. 저승에 가거든 누가 보냈는지 물어보지 않겠느냐?”
“그 반대가 될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가 보군.”
“전혀.”
당당한 자신감이 담긴 말에 부교주의 입가에는 미소 비슷한 그림자가 어렸다.
다만, 부자연스러운 웃음이라는 건 시후만이 느낀 게 아니었다.
“차 아우.”
남궁천이 말을 걸었다.
뒷말은 없었지만, 무엇을 묻고자 하는지는 명확했다.
시후는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묵언의 대답을 들은 남궁천은 얕은 신음을 흘렸다.
제갈려가 눈치를 살폈지만, 그녀는 알아차리지 못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만, 준혁은 둘의 대화를 들으며 깨달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강시군.”
준혁의 중얼거림에 주변의 분위기가 일변했다.
특히 조금 전까지 부자연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던 부교주의 얼굴에선 표정이 사라졌다.
“놀랍군. 어떻게 알았나?”
“그야······ 큭!”
시후가 그의 옆구리를 주먹으로 때렸다.
불시의 일격을 맞은 준혁은 옆구리를 감싸며 주저앉았다.
뭐라 소리치려던 그는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는지 황급히 입을 닫았다.
입을 닫는다고 닫았지만, 늦었다.
부교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뿌려 놓은 씨앗 중 개화한 게 있나 보군.”
고저 없이 무감정한 목소리와 아무런 변화 없는 표정이었지만, 그 속에 담긴 말의 의미로 말미암아 그의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기쁨.
부교주는 기뻐하고 있었다.
죽은 사람의 얼굴 가죽을 뒤집어쓴 듯,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었지만 시후는 알 수 있었다.
“정의맹에 있겠군.”
“어디에 있는지 알면? 데리고 가기라고 하려고?”
시후의 이죽거림에 부교주는 대답 대신 손을 한번 휘저었다.
그와 동시에 주변을 감싸고 있던 강시와 그 술사들이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검후가 곁을 스쳐 지나갔다.
“놈!”
검후는 말릴 틈도 없이 부교주의 가슴에 막야검을 찔러 넣었다.
옷이 꿰뚫렸다.
아니, 옷만 꿰뚫렸다.
쾅!
“뭣?”
살이 꿰뚫리는 게 아니라 쇠라도 두들긴 소리.
검후는 당황하여 뒤로 몸을 훌쩍 날렸다.
부교주는 뒤로 몇 걸음 밀려나긴 했지만 멀쩡했다.
그는 옷에 먼지라도 묻은 것처럼 툭툭 털어 냈다.
“놀랐군.”
죽일 심산으로 찌른 건 아닐 테지만, 가벼이 찌른 공격은 더욱이 아니었다.
검후의 표정이 그 사실을 대변해 주었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검후는 금방 정신을 차리곤 검에 검강을 둘렀다.
얼마나 내공을 불어넣었는지 검강은 타오르는 불길처럼 넘실거렸다.
시후는 그런 검후의 팔을 붙잡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부교주는 지금의 검후가 유일하게 죽일 수 없는 상대였다.
그러나, 자신이라면 다르다.
“맡겨 주시죠.”
검후는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냐는 듯 바라봤지만, 시후는 물러나지 않았다.
놈은 물리적으로 죽일 수 없다.
그렇기에 시후가 나서야 했다.
검후는 흔들림 없는 시후의 눈빛을 보곤 검강을 거두었다.
“위험하다 싶으면 바로 나서마.”
검후의 허락이 떨어지자 시후는 창을 들어 올렸다.
처음에는 별 대수롭지 않게 바라보던 부교주가 뒤로 물러났다.
시후의 한걸음에 부교주는 뒤로 두 걸음씩 물러났다.
다가갈수록 점점 멀어졌기에 걸음을 멈춰 섰다.
부교주는 한참이나 더 뒤로 물러난 다음에 멈췄다.
“사령배임을 어떻게 뚫었는지 알겠군.”
시후는 한눈에 자운유성창의 효과를 꿰뚫어 본 부교주를 향해 씩 웃어 주었다.
“역시, 주술로 이뤄진 놈이다 보니 민감한데?”
“그 저주받은 천령목을······.”
“반대 아냐? 저주받은 건 네 몸뚱이잖아.”
순간 부교주가 멈칫거렸다.
시후는 부교주를 더 도발하려고 했으나, 그는 손을 머리 위로 들어 올리더니 손가락을 튕겼다.
강시들이 미친 듯이 달려들기 시작했다.
“뒤로!”
준혁이 제갈려를 끌어당기며 보호했다.
운허와 남궁천 또한 그 곁을 지키며 손을 보태 주었으나, 천에 달하는 강시는 말 그대로 압사시킬 듯 달려들었다.
검후는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부교주에게 달려들려 했지만, 강시는 거의 벽을 쌓듯 앞을 가로막았다.
부교주는 다시 한번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강시 술사들이 칼을 뽑아 들더니 자신의 목을 베었다.
“이 무슨 천인공노할!”
운허가 시뻘게진 얼굴로 소리쳤지만, 놀라긴 아직 일렀다.
그들은 머리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곳저곳을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참혹하고도 기괴한 광경에 제갈려의 얼굴이 시퍼렇게 질렸다.
이리저리 뛰어다니던 시체는 피를 다 쏟자마자 바닥에 픽 쓰러졌다.
그 순간, 부교주는 웅얼거리기 시작했다.
“검후 님!”
“알아!”
검후가 안다고 말했지만, 발이 묶여 있었다.
강시를 베면, 또 다른 강시가 그 자리를 메웠다.
검강을 일으키며 휘저었지만, 천에 달하는 숫자는 그리 쉽게 줄일 수 있는 게 아니다.
허공으로 몸을 띄워도 마찬가지다.
강시는 하나의 유기체처럼 서로를 던져가며 악착같이 검후를 붙잡고 늘어졌다.
바닥에 흩뿌려진 강시 술사들의 피가 밝은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술법이다.’
“이리로!”
시후는 급히 검후를 불러들였다.
검후가 자운유성창의 반경 내에 들어오자, 부교주의 술법이 완성됐다.
강시들의 움직임이 변했다.
이전에도 격렬히 움직였지만, 이제는 완전히 성난 황소처럼 미친 듯이 날뛰고 있었다.
“미친!”
부교주의 술법의 대상은 시후 일행이 아닌 강시였다.
자운유성창의 존재 때문에 직접적인 사술을 거는 대신, 술사의 목숨을 제물 삼아 강시들을 강화한 것이다.
평범한 청강시가 백령강시 보다도 더욱 강력해졌으니, 백령강시는 오죽하랴.
급격히 강해진 강시에 당황한 순간, 부교주는 뒤돌아 달아났다.
‘붙잡아야 한다.’
하지만, 사방을 에워싼 강시의 벽을 뚫기엔 요원한 일이었다.
멀어지는 그 뒷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젠장.”
시후의 자만이었다.
아니, 오만에 가까웠다.
차라리 기습으로 단번에 죽여야 했다.
아주 잠깐의 판단 실수로 인해 놈이 도망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 주었다.
부교주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준동-숨어드는 그림자’가 발동됩니다. 그림자가 어둠으로 잠기기 전, 최후의 끝자락을 붙잡으십시오. 03:59:59]
- 80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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