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59화 절반의 성공 (4)
흑련회 NPC들이 사용하는 ‘폭렬기공’이라는 건, 몸 곳곳에 잠들어 있는 힘을 끌어다 쓰는 것과 같았다.
다만, 이걸 사용하면 며칠간 전력의 70% 이상을 회복할 수 없게 되었다.
동귀어진(同歸於盡)보다는 조금 더 덜 위급한 상황에서 사용하는 기공이었다.
하지만, ‘개문’은 다르다.
말 그대로 ‘문을 연다’는 행위.
문이 열리면 진기의 소통이 원활해지고, 그 의미는 곧 강한 힘을 낼 수 있다는 것과 일맥상통했다.
다만, 문을 닫을 방법이 없다.
바닥에 쓰러진 파양도에게 가까이 다가가자 개문을 향한 시후의 의심은 더욱 확실해졌다.
바닥에 쓰러진 파양도는 팽팽하던 근육이 쭈글쭈글하게 변해 있었다.
“죽기 직전까지 선천진기를 끌어다 쓰는 경우는 봤어도, 죽을 때까지 끌어다 쓰는 미련한 놈은 본 적이 없거늘······.”
후괴는 개문을 선천진기를 끌어다 쓴 것으로 오해하는 듯했지만, 굳이 그의 생각을 정정해 줄 필요는 없었다.
시후는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봤다.
파양도라는 구심점을 잃은 탓일까.
악착같이 버티던 산적 무리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들의 공세가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마치 그물을 뚫고 나가기 위해 몸부림치는 물고기처럼.
순간적인 거친 움직임은 그물을 흔들어 놓을 수 있을진 몰라도, 그물을 찢어 놓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힘이 빠진 물고기들은 하나씩 바닥으로 몸을 뉘기 시작했다.
“끝나가네요.”
“도와주랴?”
“됐어요. 차분히 상대하면 무난히 이길 거 같은데요? 저기도 실전 경험을 겪어 봐야죠.”
시후의 대답에 후괴는 고개를 조금 삐딱하게 꺾으며 바라봤다.
“마치 자식을 강하게 가르치겠다는 듯 말하는구나. 제 앞가림 간수도 못 하면서 말이다.”
후괴의 신랄한 비판에 시후는 정곡을 찔렸다는 듯 가슴을 붙잡았다.
그 상태로 주위를 둘러보던 시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보다, 혼자 왔어요?”
“우리 혜아를 두고 내가 어떻게 혼자 올까?”
“그럼 어디에 두고 오셨어요?”
“지금 이곳으로 데려오기는 좀 그렇지 않으냐?”
후괴가 손가락을 뻗어 사방을 가리켰다.
하긴, 바닥에 끊어진 팔다리가 넘치고 선혈이 흘러내리는 이곳은 어린아이가 올 곳이 아니긴 했다.
후괴는 시후의 뒤편을 가리켰다.
조금 전, 파양도가 마구잡이로 도기를 날렸던 방향이다.
“쇠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서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는데, 시뻘건 도기가 막 날아오더구나. 그래서 두 사람을 남겨 두고 내가 달려온 것이지.”
“아······.”
그의 무식한 공격 덕분에 내공이 모두 소진됐 건만, 그 덕분에 후괴가 한발 먼저 도착할 수 있었다니.
시후는 숨이 끊어진 파양도를 다시 한번 바라봤다.
시후를 죽이려고 했던 행동이 되려 자신을 죽이고 말았다.
이 얼마나 모순된 결과인가.
“그보다 불과 한 달 사이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가?”
“무슨 일이라뇨?”
“내공 말일세. 텅텅 비어 있어서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단전의 크기를 그때와 비교하면 못해도 두 배는 훌쩍 커졌겠군.”
“아, 영약을 좀 먹었어요.”
시후의 말에 후괴의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그때 그?”
“아, 물론이죠.”
“내공 증진이 목적이었다면 물건을 팔아치우고 그 돈으로 다른 걸 구하는 게 나았을 텐데?”
“장물은 처리할 힘이 없으면 강탈당하는 법이고, 그걸 당장에 내놓을 수도 없는 일이잖아요?”
시후도 그 생각을 못 했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천양초 뿌리를 팔아치운다면 자연적으로 청일표국은 물론이고, 공동파의 추격 이벤트가 발생했을 것이다.
후괴도 시후의 말을 이해했는지 고개를 한차례 끄덕였다.
그 사이, 두 무리의 균형은 확 무너져 내렸다.
녹림의 산적들은 자신들의 무리가 걷잡을 수 없는 수준으로 무너지자, 조금 전까지 어깨를 맞대며 싸우던 동지들을 두고 도망치기 위해 사방으로 흩어졌다.
물론, 실패에 그쳤지만.
“저기도 끝났네.”
“그럼, 난 나중에 다시 찾아······.”
“어딜 가시려고요.”
후괴가 엉거주춤한 자세로 엉덩이를 내빼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그의 팔은 이미 시후에게 붙잡혀 있었다.
“난 이런 자리가 영 불편한데······.”
후괴, 아니 쌍괴는 일평생 남들과 어울리지 않으며 살았기에 이런 자리가 불편할 것이다.
하지만, 앞으로는 쌍괴도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야 했다.
혜아를 위해서라도.
* * *
부상자를 챙겨서 청룡단과 주작단 쪽으로 갔을 땐, 이미 상황이 종료된 뒤였다.
“놓쳤다고요?”
좋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갔지만 말이다.
시후는 주변을 둘러봤지만, 청룡단과 주작단은 별다른 피해를 본 것 같지도 않았다.
목일자는 의아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시후를 향해 쓴웃음을 지었다.
“가로막은 배를 수로채주가 박살 냈다고 하더군.”
목일자의 말에 시후는 파양도가 선보였던 그 무지막지한 공격을 떠올렸다.
확실히 그렇게 광범위한 공격을 날린다면, 자신들의 몸은 지킬 수 있을지 몰라도 배는 어쩔 수 없을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옷이 저렇게 다들 말끔하군요.”
“젖었으니 갈아입어야 하지 않겠나.”
“피해는요?”
시후의 질문에 목일자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익사자가 나오지는 않았지만, 물에 빠진 자들을 건지느라 적지 않은 시간이 소요되는 바람에 골치 아프게 됐다네.”
정말 골치가 아픈 듯, 목일자는 오른손 중지와 엄지로 관자놀이를 주무르고 있었다.
녹림은 찢어발겼고, 수로채는 꽁지가 빠지도록 내뺐다.
결과적으로는 그랬다.
하지만, 단순히 녹림과 수로채를 치기 위해 모인 것은 아니지 않은가.
파양도가 그렇게 허무하게 죽은 이상, 빙검은 어떻게든 사로잡아야 했다.
물론, 파양도처럼 폭렬기공을 사용할 가능성도 있었지만, 처음부터 그럴 여지를 주지 않고 몰아치면 문제가 없을 것이다.
다만.
“거리가 많이 벌어졌나요?”
“상당히. 마지막 연락으론 여산(廬山)의 아래를 지난다고 했으니, 지금쯤이면 안휘성에 막 들어갔을 거네.”
“······ 너무 빠른데.”
저들이 도망치는 도중인지라 피해가 적었던 건 천만다행이었지만, 그사이 벌어진 거리는 생각보다 상당했다.
이래서야 쫓을 수 있겠는가.
시후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고 목일자는 연신 헛기침을 했다.
“당장에 뒤를 쫓는 것보단, 확실히 정비한 다음에 쫓기로 했네.”
도망갈 곳이 한정돼 있다는 판단을 했으니 상관없다는 말투였다.
그러나 시후에겐 상관이 있었다.
“아, 그럼 당장에 움직이는 건 아니네요?”
“짧아도 반나절, 길면 하루는 여기서 머무를 거네.”
“그럼 개인적인 볼일보다도 괜찮은 거죠?”
목일자의 고개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어디로 갈 건지 알려만 주게.”
“쌍괴를 잠시 보러 갔다가······ 악양루로 갈 생각이에요.”
“음······. 두 분껜 정말 고마웠다고 다시금 감사 인사를 전해 주게나. 이건 약소하지만, 두 분의 도움에 감사함을 담은 표시일세.”
목일자는 다소 어색하게 웃으며 품에서 주머니를 건네주었다.
손에 쥔 주머니의 무게가 묵직한 걸 보니, 정의맹에서도 신경을 쓴 티가 나는 듯했다.
시후는 곧장 쌍괴와 혜아가 머무르는 풍문객잔으로 찾아갔다.
점심을 막 먹었는지, 2층의 세 사람은 식탁에 앉아 차를 홀짝이고 있었다.
곧장 2층으로 올라간 시후는 쌍괴를 향해 먼저 가벼운 인사를 했다.
그리고 이 무리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을 한 소녀를 바라봤다.
이제 막 열두 살이 되었을 혜아는 다소 경계심 어린 눈으로 시후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맘때 어린아이들이 좋아하는 건 반짝거리고 예쁜 물건이지.’
시후는 미리 사 두었던 노리게 하나를 탁자 위에 올려놨다.
“이건 선물이야.”
그러자 경계심이 가득했던 눈빛이 조금이나마 사그라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은 호의적이지 않았다.
‘이 늙은이들이 말을 안 해 준 건가?’
시후는 혜아의 좌우에 앉아 있던 서괴와 후괴를 한 번씩 노려봤다.
그러자 서괴가 자신의 이마를 딱 소리 나게 내리쳤다.
“깜박하고 있었구나. 혜아야, 요 녀석이 그 꼬장꼬장한 늙은이를 소개해 준 아이란다.”
“당·화·준 할아버지! 절 살려 주신 신의 님께 꼬장꼬장한 늙은이라뇨!”
“어이쿠, 요놈의 주둥이가 문제구나. 내가 실언을 했어. 이 못된 주둥이!”
혜아의 말에 서괴가 과장된 손짓으로 자신의 입술을 툭툭 내리쳤다.
하지만, 정작 그 모습을 봐야 할 혜아는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나 시후의 앞에 서 있었다.
열둘이라는 나이가 전혀 믿기지 않을 정도로 혜아는 왜소했다.
그간 병을 앓느라 제대로 된 성장하지 못한 것이 확실해 보였다.
그런 혜아는 고개를 들어 시후의 눈을 바라보더니, 바닥에 넙죽 엎드리며 절을 올렸다.
“감사합니다.”
“어? 어······.”
짧지만 진심을 담은 감사 인사에 시후는 얼떨떨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혜아가 바닥에서 일어나자 쌍괴는 부산스럽게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 주었다.
‘팔불출이 따로 없군.’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시후는 조용히 빈 의자에 앉았다.
“식사는 했나?”
“별로 허기지진 않아서요.”
혜아의 옷에 묻은 먼지를 다 털어 줬는지, 후괴가 자리에 앉으며 시후에게 넌지시 물었다.
시후는 점소이를 불러 철관음(鐵觀音) 한잔을 부탁했고,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차를 한 모금 홀짝이며 후괴에게 은근한 눈치를 주었다.
“혜아야, 옷이 많이 더러워졌는데 갈아입고 오는 게 어떻겠느냐? 게다가 요 녀석······ 아니, 차 소협이 준 노리개까지 달고 온다면 더욱 보기 좋을 것 같구나.”
‘요 녀석’이라는 말에 혜아가 눈을 부라리자, 후괴는 빠르게 말을 정정했다.
혜아는 자신의 옷을 내려다보곤,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먼지를 털어내긴 했지만, 치맛자락에 얼룩이 묻어 보기 좋지는 않았다.
그 옆에 있던 서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을 하려던 순간, 몸이 움찔하더니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두 사람이 방으로 올라가자 후괴는 몸을 돌렸다.
“저놈에게 시간을 끌어달라고 했으니, 빨리 내려오진 못할 게다.”
서괴가 몸을 움찔한다 싶더니 전음을 보냈나 보다.
고개를 짧게 끄덕였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야겠네요. 아까 말했던 거 있죠?”
“우리가 정의맹의 일을 도와주는 게 어떻게 혜아에게 도움이 된다는 게냐?”
“두 분께서 혜아를 데리고 나온 목적이 뭐죠?”
후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는 얕게 헛기침을 하며 표정을 숨겼다.
“크흠, 병 때문에 반평생을 집에 갇혀 살았으니 얼마나 답답했겠느냐? 몸도 나았으니 강호 유람이라도 시켜줄 요량으로······.”
“돈도 얼마 없잖아요?”
후괴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시후는 피식 웃으며 목일자가 건네준 주머니를 탁자에 내려놓았다.
“정의맹에서 이번에 도와주어 감사하다는 성의라고 하던걸요.”
“성의를 안 받으면 곤란하지.”
냉큼 주머니를 챙기는 모습을 보니, 정말 돈이 없는 듯했다.
‘하긴,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다 쓰러져가는 객잔에 머무를 필요는 없겠지.’
당장에 궁핍한 여행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 때문인지, 후괴의 얼굴에 밝은 웃음꽃이 피었다.
그런 후괴를 바라보던 시후는 탁자 위에 팔을 올린 뒤, 자신의 턱을 괴었다.
“그런데······ 정말 강호 유람이에요?”
활짝 웃으며 주머니를 열어 보던 후괴의 움직임이 덜컥 멈췄다.
시후는 그가 말해 주길 바랐지만, 그의 입은 달싹거리기만 할 뿐 끝끝내 열리지 않았다.
그 사이 서괴와 혜아가 방에서 계단을 내려오기 시작했다.
시후는 아쉬운 마음에 속으로 혀를 찼다.
노리개가 잘 어울린다는 둥 칭찬하던 시후는 차를 홀짝이며 넌지시 입을 열었다.
“유람을 다닐 거라면 낙양으로 가 보시죠. 낙양에 볼거리가 많잖아요?”
“뜬금없이 웬 낙양이냐?”
“제가 관상을 좀 보는데, 그쪽으로 가면 귀인을 만날 것 같거든요.”
그 말에 서괴는 콧방귀를 뀌었다.
“귀인은 개뿔. 이 나이에 귀인을 만날 일이 뭐가 있겠느냐? 귀신을 만나면 만났지.”
“전 두 분에게 말한 게 아닌데요?”
그 말에 쌍괴의 시선은 혜아를 향했다가 다시 시후에게로 돌아왔다.
시후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가자마자 당장 만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낙양에 오랫동안 머무른다면 언젠가는 만날 것이 분명했다.
귀선생(鬼先生)을.
- 60화에 계속 -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