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57화 절반의 성공 (2)
시후는 파양도가 올라오길 기다리면서 혹여나 임무가 발생하진 않을지 기대했지만, 죄다 ‘준동’과 ‘발본색원’으로 묶였는지 나타날 기미가 없었다.
수풀에 숨은 채 창을 만지작거리는 사이, 멧비둘기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목표 지점에 도달한다는 신호.
조금 더 몸을 낮추었다.
어차피 파양도가 가까이 온다면 들키겠지만, 그가 오기 전까지 최대한 오밀조밀한 구축망을 펼칠 필요가 있었다.
잡생각을 이어가는 도중, 산 아래쪽에서 두런두런 이야기 소리가 들려왔다.
“이렇게 도망치는 거였다면 왜 모인 거람? 한바탕 쾅 붙으려고 모인 줄 알았는데.”
“니미럴, 그렇게 많이 모일 줄 몰랐겠지. 게다가 관군까지 동원할 줄 누가 알았겠어?”
거리가 제법 있는 듯했는데도 우악스럽게 떠드는 목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왔다.
슬쩍 고개를 들어 아래를 내려다보자, 첨병으로 보이는 두 녀석이 경계심을 푼 채로 산을 오르고 있었다.
“그보다, 수로채 놈들은 잘 빠져나갔으려나?”
“빠져나가긴 개뿔······. 뒤에 관선이 수십 척이었는데, 수로채 놈들 배는 죄다 가라앉았을걸?”
“으하하, 고놈들, 물 위라고 건방이란 건방은 다 떨더니 물고기 밥이 됐겠군.”
첨병이라는 개념이 전혀 없는지, 둘은 계속 시끄럽게 떠들며 시후의 앞을 지나갔다.
둘이 지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본대라고 할 수 있는 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곧 간헐적으로 들려오던 멧비둘기 울음소리가 뚝 끊겼다.
그와 동시에 나무 위에 숨어 있던 추나행이 바닥으로 내려섰다.
어차피 조금 더 다가오면 들킬 테니, 완전히 에워쌀 수 있게 시간을 끄는 것이다.
“광마패도, 잘 지냈나?”
“여태껏 주변을 알짱거리기만 하던 게 네놈이었나?”
“일전에는 그래도 선배라고 부르더니, 예의는 밥에 말아 먹기라도 했나 보군.”
광마패도, 아니, 파양도는 추나행의 말에 피식 웃었다.
그는 곧바로 도를 뽑아 앞으로 달려들었다.
파양도의 패악스러운 성정을 모르지 않는바, 추나행은 이미 자리를 벗어난 지 오래였다.
“성질 한번 더럽군. 그러니깐 같은 식구들 머리를 숭덩숭덩 잘랐겠지. 아니, 같은 식구가 아닌가?”
추나행이 히죽거리며 말하자 파양도가 안색을 굳혔다.
뭔가 이상함을 알아차린 것이다.
“이 개······.”
파양도가 욕설을 내뱉기 전에 정오 대사와 독고준혁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를 빠드득 갈던 그는 시뻘건 눈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지금 그의 눈에 띄었다간, 흰색 공간으로 끌려갈 것이 분명했다.
시후는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며 물러난 뒤, 그의 시야가 닿지 않는 반대편으로 빙 둘러 이동했다.
그 사이, 정의맹의 포위가 완성되었다.
“이들을 처단하여 무림의 정의를 세울 것이다!”
“더러운 정파의 위선자들을 죽여라!”
시후도 황급히 뛰어들었다.
조금이라도 눈에 띄는 활약을 해야 했다.
급히 전장에 합류한 시후는 앞으로 파고들며 자운유성창을 휘둘렀다.
“월광귀곡(月光鬼哭)!”
시후는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해 초장부터 가장 강력한 초식을 펼쳤다.
쏘아낸 창기는 전방을 휩쓸어 나가며 귀곡성을 내질렀다.
“끄윽······.”
팔다리가 날아간 건 예사.
그 자리에서 즉사한 산적들만 셋이었다.
모두 산채에서 손가락에 꼽히는 수준이란 걸 생각한다면 말도 안 되는 공격력이었다.
“역시······.”
파양도의 공격을 받아낼 때도 느꼈지만, 자운유성창은 정말 존재 자체가 사기였다.
모든 창술을 1성 더 높게 펼칠 수 있는 것도 그렇지만, 진기 소모가 조금 더해진 정도로 위력이 3할 상승한다는 건, 한 단계 높은 수준의 무공을 펼치게 해 주는 것과 다름없었다.
거기에 청홍검을 지닌 것 자체로도 모든 효과가 배가되었다.
즉, 절정 등급의 무공인 참월창으로도 절대 등급의 무공과 맞먹는 위력이 나오는 것이었다.
“구룡!”
지금 펼친 십창도 마찬가지였다.
초기에 펼쳤던 구룡이 지렁이였다면, 이제는 이무기처럼 상대의 목을 물어뜯었다.
가장 앞에서 산적들을 베어 넘겼지만, 아직 이것만으론 부족했다.
시후는 추풍낙엽처럼 쓰러지는 산적들을 지나 안쪽으로 파고들어 고립을 자청했다.
가장 앞에 있는 것과 사방으로 포위당한 건 또 달랐다.
하지만, 사방에서 찔러오는 공격에도 당황하지 않았다.
‘가장 가까운 것부터 차근차근.’
옆구리를 찔러오는 박도(朴刀)를 육망으로 휘감아 바닥에 내리꽂은 뒤, 참월창의 월선일도(月線一圖)를 가슴팍을 새겨 주었다.
시후는 휘둘렀던 창을 당기지 않고, 오히려 몸을 빙글 돌리며 창대 중간을 붙잡았다.
그 상태로 허리를 숙인 뒤 몸을 옆으로 회전시키며 창을 크게 휘둘렀다.
시후를 향해 찔러오던 무기들이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끄아악······. 손바닥이야.”
물론, 시후도 창을 바닥에 꽂은 채 손바닥을 주물러야 했지만.
산적들은 틈을 보이는 시후를 향해 달려들려 했지만, 그들의 상대는 시후 혼자만이 아니었다.
시후가 파고 들어간 쪽에 있는 산적들은 뒤편에 적이 있다는 불안감으로 전투에 집중하지 못했다.
그 결과 대열이 무너졌고, 시후가 꼭짓점이 되어 쐐기꼴 모양으로 돌파가 이루어졌다.
“비무광자가 적들을 갈라놨다!”
“누가 비무광자야!”
누군가의 외침에 시후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소리치는 와중에도 시후는 연신 창을 휘둘렀다.
일단 대열을 무너트렸으니, 이들을 정리하는데 탄력이 붙을 것이 분명했다.
상황을 보니 자신이 빠져도 이길성 싶었지만, 시후는 조금이라도 더 명성을 올리기 위해 하나씩 산적들의 숨을 끊었다.
하지만, 파양도를 피해 반대편으로 이동했는데, 쐐기꼴로 산적들을 돌파했다면 근처에 누가 있을진 뻔한 이야기였다.
“이 노옴!”
시후는 뒤에서 들려오는 고함에 고개를 돌리자, 눈에서 불을 뿜고 있는 파양도의 모습이 보였다.
그와 눈이 마주쳤다.
파양도가 손을 놀려 자신의 몸 이곳저곳을 짚었다.
‘아차!’
그의 기세가 갑자기 흉포해졌다.
덕분에 정오 대사와 추나행, 준혁은 섣불리 달려들지 못했다.
파양도는 그들이 눈치를 살피는 틈을 타 몸을 돌렸다.
시후를 향한 것이었다.
“네 상대는 우리다!”
추나행이 급히 뒤따라 붙으며 공격을 날렸지만, 이는 파양도가 노리는 바였다.
핑계가 아니라, 추나행의 무공은 뒤를 점할 때 효과적이었다.
동급이라면 모를까, 세 수가량 뒤처지는 상대에게 정면으로 맞선다면?
결과는 정해져 있었다.
“크헉!”
추나행이 입에서 피를 토하면 뒤편으로 날아갔다.
하지만, 파양도도 무사하진 못했다.
공격하느라 틈을 보인 그의 옆구리에 정오 대사의 아라한신권이 틀어박혔다.
덕분에 파양도의 허리가 직각으로 꺾였다.
그 틈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준혁이 그의 어깻죽지를 향해 도기를 날렸지만, 파양도는 그 거대한 덩치로 땅을 한 바퀴 구르며 공격을 피해 냈다.
정오 대사와 준혁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한 방 먹였다고 한들, 셋이서도 버거웠던 파양도를 둘이서 막기는 불가능에 가까울 터.
파양도가 다시 시후를 향해 달려들었다.
“대화! 이런 젠장!”
주변에선 난리가 났다.
기껏 갈라놨던 녹림 무리는 하나로 뭉치기 위해 발악을 시작했다.
게다가, 파양도가 달려오자 정의맹의 진열은 흐트러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시후는 이를 악다물며 파양도를 향해 달려들었다.
시후가 다가가자, 그의 얼굴엔 웃음이 생기고 있었다.
시후는 절로 소름이 끼쳤지만, 두려움을 숨긴 채 최대한 본대와 멀어졌다.
시후와 파양도의 거리는 삽시간에 좁혀졌다.
“뒈져라!”
파양도와 부딪히기 직전, 시후는 창을 고쳐잡았다.
시후는 짧은 순간이나마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지만, 달려드는 모습을 보니 자신의 방어 따윈 씹어 삼킬 것 같았다.
시후는 그의 공격을 정면으로 받을 것처럼 행동하다가, 백후원보를 이용해 옆으로 몸을 피했다.
파양도의 몸이 앞으로 쏠린 이 순간이 기회였다.
시후는 주저 없이 앞으로 내달렸다.
정오 대사와 준혁을 향해.
“이, 이놈이?”
파양도의 얼떨떨한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다소 늦은 감이 있었지만, 정오 대사와 준혁이 이미 그의 뒤를 쫓아오고 있었기에 가까스로 둘에게 도착할 수 있었다.
“추 선배님의 상태는요?”
“미처 확인하지 못했네.”
“젠장, 저는 그 빈자리 절대로 못 메꿉니다. 아시죠?”
“알고 있네.”
대화를 나눌 시간도 없었다.
그가 달려들었으니깐.
“놈!”
시후는 분노로 번들거리는 그의 시선에 슬쩍 한 걸음 물러났다.
그런 그를 대신해 정오와 준혁이 앞으로 나서며 파양도의 공격을 받아 내었다.
그 와중에 시후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을 했다.
“쯧쯧, 역시 너처럼 생각 없이 움직이는 놈은 이렇게 속여 넘기기 쉽다니깐.”
“그거밖에 못 하냐? 에라, 이럴 줄 알았으면 빙검이나 잡으러 가는 건데.”
“얼씨구? 급해? 요놈아, 받아라!”
시후는 주변을 알짱거리며 그를 도발하는 동시에, 장병기의 이점을 살려 뒤에서 창을 찔러 넣었다.
파양도는 당장이라도 시후를 찢어 죽일 듯 노려보고 있었다.
그런 그가 어느 순간부터 입에 거품을 물기 시작했다.
조금 전 그가 사용했던 잠력폭주(潛力暴走)의 부작용이 오는 것이었다.
파양도의 눈빛에 불안감이 맴돌았다.
도를 크게 휘둘러 거리를 벌리더니 가슴으로 손을 가져갔다.
‘그렇게 둘 수는 없지.’
“도망치려고? 역시 소인배는 뒤를 보이는 걸 부끄러워하지 않는단 말이지. 빙검이라면 달랐을 텐데 말이야.”
시후의 말에 가슴으로 뻗어가던 파양도의 손이 멈췄다.
도발이 먹혔다는 생각에 시후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하지만, 시후는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는 말이 왜 생겼는지 알아야만 했다.
“네놈이······ 정녕 죽고 싶어 작정했구나. 좋다. 내가 이 자리에서 죽는 한이 있더라도 네놈은 죽이겠다.”
파양도는 가슴으로 향하던 손을 머리로 옮겼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시후는 뭔가를 잊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폭렬기공(爆裂氣功)을 사용한 다음에 머리? 머리에 뭐가 있었나?’
시후의 고민은 길게 이어질 수 없었다.
파양도는 어느새 준혁의 앞까지 다가왔다.
단박에 거리를 좁힌 그는 초식이랄 것도 없이 대도를 가로로 휘둘렀다.
다만, 조금 전까지는 그의 도에 기가 살짝만 맺혀 있었다면, 지금은 흘러넘칠 것처럼 넘실거리고 있었다.
“크아악!”
준혁은 가까스로 몸이 두 동강 나는 걸 막았지만, 나무를 세 그루나 부수고 처박힌 그가 당장 일어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시후가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는 사이 정오 대사가 움직였다.
“아······ 미타불!”
누가 소림이 공명정대하다고 했는가.
정오 대사는 뒤를 보인 파양도를 향해 아라한신권 최후의 절초인 척마불립(斥魔不立)을 펼쳤다.
피륙으로 이루어진 몸에 적중한다면, 아무리 내공이 심오하다고 한들 속이 진탕될 것이 자명했다.
“어딜.”
다만, 파양도가 두꺼운 대도를 방패처럼 이용해 잘 막아 냈을 뿐.
회심의 일격이 실패하자 정오 대사의 얼굴이 흙빛으로 물들었다.
물러난다고 해도 아무도 뭐라 할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정오 대사는 기수식을 취하며 재차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 모습에 파양도는 히죽 웃었다.
“뒈져라. 땡중.”
그의 대도가 허공을 갈랐다.
정오 대사는 정수리를 쪼갤 듯 내려꽂히는 도를 막기 위해 붕천방타(崩天防打)를 펼쳤지만, 일수에 무릎이 땅에 닿았다.
정오 대사의 입에서 울컥 선혈이 튀어나왔다.
하지만, 파양도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정오 대사의 머리 위에 짙은 그늘이 졌다.
파양도의 도가 떨어지는 것이다.
정오 대사가 눈을 질끈 감았다.
“마아아악창!”
꽈아아아앙!
그런 둘 사이로, 일원신공 특유의 금빛을 사방으로 뿌리며 시후가 파고들었다.
막창에 소모된 내공은 시후의 절반에 달했다.
한 갑자의 내공이 초식 하나로 단번에 소실된 것이다.
눈앞이 캄캄했지만, 억지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시후는 뿌옇게 피어오른 먼지 사이로, 자신을 노려보는 파양도의 시선을 마주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항복······ 안 받아 줄 거지?”
시후의 말에 파양도는 이를 드러낸 채로 웃으면서 도를 휘둘렀다.
‘망할.’
- 58화에 계속 -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