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56화 절반의 성공 (1)
“아윽······.”
물에서 간신히 기어 나온 시후는 아무리 남쪽이라도 12월 밤에 물에 들어가는 건 아니란 걸 뼈저리게 느꼈다.
익사하지 않기 위해 열심히 헤엄칠 때는 몰랐으나, 땅에 올라서고 나자 욱신거리는 통증이 느껴졌다.
“죽이려고 했던 건 아니겠지.”
빙검을 속여 넘기기 위한 연기를 한다고는 했지만, 파양도가 날렸던 공격은 겉보기에만 화려한 게 아니라 상당한 힘이 실려 있었다.
하지만, 극성으로 끌어올린 일원신공과 참월창, 그리고 자운유성창과 청홍검의 상승효과는 정말 대단했다.
다소 속이 진탕되는 느낌은 있을지언정, 그 정도 폭발을 견디게 해 준 게 어딘가.
“차 소협! 거기 있나!”
머리를 흔들어 물을 털어내는 시후의 귓가로 저 멀리 목일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 여기에요.”
시후가 대답하는 것과 동시에 누군가 땅을 박차며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다만, 들려오는 발소리는 하나였다.
곧 안개 사이로 목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빠르게 눈동자를 굴려 시후를 훑어보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사지는 멀쩡하군.”
“멀쩡해야죠. 그러지 못 할 뻔하기야 했지만.”
목일자가 화들짝 놀라 시후의 몸을 더듬거렸다.
남자의 더듬는 손이 결코 달가울 수 없었기에 시후는 뒤로 물러났다.
“괜찮아요, 괜찮아요. 걱정해 주시는 건 알겠지만, 정말 괜찮아요.”
“괜찮다니 다행이지만, 옷은 전혀 괜찮지 않아 보이네만······.”
목일자의 말에 시후는 자신의 몸을 내려다봤다.
옷 이곳저곳이 마구 찢어져 있었다.
아니, 찢어진 정도가 아니라 어지간한 거지보다 더욱 추레했다.
지금 시후의 상태를 본다면 추나행이 개방에 가입을 권유할지도 몰랐다.
혹시나 몰라서 홍설의 누비 목도리를 인벤토리에 넣어 둔 게 천만다행이었다.
뻥 뚫린 앞섬을 들추다가 피식 웃었다.
“옷이 좀 낡았나 봐요.”
“다행이구나. 소리가 굉장하던데, 정말 다행이야.”
목일자가 연신 어깨를 두들기자 몸이 욱신거렸지만, 아픈 티를 내면 다시금 몸을 주무를지도 몰랐기에 시후는 애써 태연한 척을 했다.
대화 주제를 돌리기 위해 과장되게 주변을 둘러보는 시늉을 했다.
“그보다, 려는 어디에 있죠?”
“탈진으로 인해 정신을 잃었네. 아, 걱정하진 말게나. 진맥을 짚어보니 단순히 심력이 다해서 기절했을 뿐이니 말일세.”
목일자의 말에 절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동시에 속에서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러기에 못하겠다고 이야기하던가, 냉큼 할 수 있다고 말하더니······.”
시후는 발을 쿵쾅거리며 목일자가 가리킨 방향으로 걸어갔다.
멀지 않은 마른 땅에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제갈려가 누워 있었다.
요리조리 살펴봤지만, 일단 겉으로 드러난 상처는 없어 보였다.
시후는 제갈려를 지켜준 준혁에게 고개를 꾸벅 숙여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손톱만큼도 안 다친 제갈려와는 상반되게, 준혁의 하의는 보기 흉할 정도로 구멍이 숭숭 뚫려 있었다.
그 시선을 알아차린 것일까.
준혁은 다리를 움직이며 건재함을 과시했다.
“별거 아니네. 생채기 하나 없지.”
준혁은 별거 아니라는 듯 말하며, 턱짓으로 시후의 가슴을 가리켰다.
시후는 ‘입고 있다’라는 표현보다 ‘걸치고 있다’라는 말이 어울리는 자신의 상의를 살짝 들쳤다.
“저도 뭐, 옷이 살짝 찢어진 정도입니다.”
두 사람의 미약한 신경전을 바라보던 목일자는 목덜미를 붙잡았다.
삐이이익!
그 사이, 호각 소리가 울려 퍼졌다.
수로채 선박이 상강을 타고 올라갔다는 신호다.
신경전을 벌이던 두 사람은 목일자를 바라봤다.
“다녀오겠네.”
* * *
안개가 옅어지는가 싶더니, 어느 구간을 기점으로 거짓말처럼 사라져 버렸다.
동정호는 거대한 덩치에 걸맞게 흘러오는 강물과 안개를 모두 품고 있었다.
안개를 꼭 끌어안은 동정호의 모습은 마치 땅에서 솟아난 거대한 버섯구름 같았다.
히로시마가 떠오르는 광경을 뒤로한 채, 수로채의 배들은 끊임없이 강을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다.
시후는 제갈려를 아미파에 맡긴 뒤, 준혁과 그 뒤를 쫓고 있었다.
“현무단은 다 매복하러 갔나요?”
“목일자가 본대에 가면서 지시를 내렸을 거다.”
준혁의 대답에 시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목일자는 시후가 살아 돌아온 것만으로도 계획이 성공할 것을 예감했으니깐.
하지만, 시후의 얼굴을 그리 밝지 못했다.
이 계획을 성공시키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게 갖춰지진 않았다.
“그보다 목 장로님이 잘 설득할 수 있을까요?”
바로 모두의 동의.
현무단을 이끄는 목일자를 설득하긴 했지만, 나머지 세 단주의 허락까지 구한 건 아니었다.
그들에게 허락을 구할 시간도 없었거니와, 애초에 파양도가 미끼를 덥석 물지 않는 이상 실현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없었기에.
하지만, 이렇게 미끼를 물었다면 낚아 줘야 하지 않겠는가.
“가장 큰 문제는 화산인데······.”
“교초혼 장로 말이죠?”
시후의 물음에 준혁이 한숨을 내쉬었다.
대답하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한 것과 진배없었다.
목일자에게 사사건건 시비를 걸던 그가 이번에도 딴지를 건다면, 절반의 성공에 불과할지도 몰랐다.
“상식적으로 이런 일에도 딴지를 걸리는 없겠지.”
“그렇······ 겠죠?”
시후는 불안한 눈빛으로 준혁을 바라보며 질문했지만, 그는 시선을 외면할 뿐이었다.
계획을 세우면서 가장 우려했던 부분이 이것이었다.
‘내부 의견이 일치할 것인가.’
피해를 줄이기 위해 두 세력을 갈라놓을 생각을 했거늘, 나눠서 공격하자고 한다면 시후가 노력한 게 헛수고가 될 공산이 컸다.
“게다가······ 공격을 받아본 바로는 확실히, 각개격파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상대를 못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준혁은 광마패도의 공격을 받아 봤기에 파양도의 수준을 대략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주먹을 꽉 움켜쥐며 말하던 중, 옆에 있는 시후를 의식해서인지 황급히 사족을 덧붙였지만.
피식 웃은 시후는 고개를 돌려 강 상류를 바라봤다.
굽이치는 저 부분을 지나면 배를 돌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쿵. 쿵. 쿵. 쿵.
낮은 북소리가 들려왔다.
그와 동반된 비명까지.
“충각선(衝角船)이 있는 것도 아니니, 사슬로 묶어 놓은 관선을 뚫은 건 불가능하단 걸 모를 린 없고······.”
수로채의 배는 약탈을 주로 일삼기 때문에 빠를지언정 충격에 약했다.
튼튼한 관선에 부딪히면 배는 제 기능을 못 할 것이다.
게다가 무리해서 접근한 뒤 관선을 점령해 봤자, 쇠사슬로 엮인 배를 풀고 출발할 때쯤이면 뒤를 잡히기 마련이었다.
차라리 양쪽으로 둘러싸일 바에 한쪽을 뚫으려고 하겠지.
뿌우우. 뿌우우우.
얼마 지나지 않아 나팔소리가 짧게 두 번 울려 퍼졌다.
수로채가 배를 돌렸다는 신호.
시후와 준혁은 서로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곧 파양도가 녹림 인원을 이끌고 강변으로 내려올 것이었다.
그리곤 자신이 말한 방향으로 도주하겠지.
관군에겐 적룡 금 패를 들먹이며 절대 쫓지 말라고 지시했으니, 쓸데없는 사상자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늦는군.”
하지만, 가장 중요한 목일자가 아직 오지 않았다.
손에 땀이 나기 시작했다.
현무단만으로 녹림채를 상대할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녹림을 무조건 쳐야 하는데······.”
지금 녹림과 수로채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무조건 녹림을 쳐야 했다.
빙검의 판단하에 모인 십여 개의 수로채와 달리, 파양도는 각 산채에서 내로라하는 인원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채주와 부채주는 물론이고, 그 아래 손꼽히는 인원들을 죄다 끌어모았기에 둘이 싸운다면 무조건 녹림의 손을 들어 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지금이 녹림을 정리하는 게 적기였다.
“그런데, 만약에······. 정말 만약에······.”
천천히 입을 여는 준혁을 향해 시후는 손바닥을 들어 올렸다.
“잠깐만요. 그 ‘만약’이라는 단어가 정말 듣기 싫은데요.”
“최악을 산정해야 하는 법. 본대에서 저들이 둘로 찢어졌으니깐, 우리도 찢어져서 상대하자고 결론을 내렸다면 어떻게 하나?”
“그건 곤란한데요.”
곤란한 정도가 아니었다.
시후가 기억하기로, 정의맹은 본래 스토리에서 이들을 처리할 때 전멸에 가까울 정도의 피해가 발생했었다.
녹림과 수로 총채주를 상대할 만한 고수의 부재가 가장 큰 문제였다.
무당제일검이라는 운허조차 그들을 상대로 비등비등할 뿐이었다.
그런데 반으로 나뉜다면?
그렇다면 어느 한쪽은 전멸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온다.”
준혁의 말에 생각에서 빠져나온 시후는 동정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희끄무레한 안개 너머로 수십의 인영이 아른거리기 시작했다.
“목일자가 설득했군!”
준혁이 주먹을 불끈 쥐며 소리쳤지만, 시후의 가슴속에는 불안감이 슬며시 고개를 들고 있었다.
다가오는 인원은 생각보다 너무 적었으니깐.
곧 햇빛 아래 반짝이는 수십의 민머리가 눈에 들어왔다.
“소림이군.”
무당과 소림은 청룡과 백호단으로 갈라졌으니, 이쪽 상황은 더욱 최악으로 치닫게 됐다.
운허가 없었다.
이쪽에는 파양도를 상대할 사람이 없게 됐다.
이렇게 된 이상, 어떻게든 이 전력으로 그를 상대해야 했다.
시후는 곧바로 준혁을 바라봤다.
“상대하지 못 할 정도는 아니라고 하셨죠?”
“거짓말이야.”
시후의 질문에 준혁은 재빨리 대답했다.
너무나도 빠른 대답에 오히려 시후가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합공(合攻)으로 하시죠.”
시후의 말에 준혁은 똥 씹은 듯 얼굴을 구겼다.
* * *
호남성의 안화현, 신화현에 걸쳐 있는 료가산(廖家山)은 경치가 멋들어지게 좋은 산도 아니었고, 주변에 볼거리도 없는 그저 그런 산중에 하나였다.
평소라면 아주 가끔 벌목하러 오는 나무꾼을 제외하면 사람이 찾지 않는 산이었지만, 오늘은 달랐다.
“산 초입에 올라왔다고 합니다.”
이결 제자의 말에 추나행은 고개를 끄덕였다.
유일하게 이 사달에 속하지 않은 개방이 여기저기 흩어져 도움을 주고 있었다.
추나행이 이쪽으로 왔다는 건 분명 호재였다.
파양도의 칼을 받아 낼 수 있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더 있다는 건 엄청나게 든든한 보험이었다.
목일자는 소림의 정오와 독고준혁을 불렀다.
“그의 칼을 받아 낼 수 있는 사람은 세 분이 전부니, 최대한 그를 억제한다는 생각으로 버텨 주십시오. 구심점이라고 할 수 있는 그자만 잘 묶어 둔다면, 이 싸움은 우리가 이길 수 있을 겁니다.”
그의 말에 준혁과 추나행은 서로 눈치를 살폈다.
최초의 공격은 준혁으로부터 이어졌다.
“제 무공은 상대의 사선을 점할 때 가장 큰 위력을 발휘합니다. 끊임없이 사선으로 파고들며 움직여야 하는데, 제가 정면에서 상대하면 운신의 폭이 제한되어 본신의 실력을 보이기 힘듭니다.”
“확실히 내 추혼비각도 상대의 뒤를 점할 때 빛을 발휘하지. 그런 점에서 나도 정면에 서는 건 별로 좋지 않군.”
“소림의 무공은 광명정대(光明正大)하여, 뒤나 옆을 노리는 것보다 정면에서 공격을 받아넘기는 편이 좋지 않습니까?”
“확실히 소림의 무공이라면 그렇긴 하겠지. 게다가 정오 대사의 아라한신권(阿羅漢神拳)과 철심수(鐵心袖)는 상대를 찍어누르기에 적합하지 않습니까?”
둘은 쉴 틈 없이 정오를 몰아쳤다.
파양도의 공격을 직접 받아본 준혁은 그를 정면에서 상대하기 싫을 것이 분명했다.
시후와 함께 마주치기도 했거니와, 그 주변을 맴돌았던 추나행도 파양도의 경지를 모를 리 없었다.
덕분에 자연스럽게 정면을 강요당한 정오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소승이 그자를 상대할 터이니, 두 분께선 그자의 사각을 노려 주십시오.”
“과연 정오 대사! 내 그자가 앞으로 칼 한번 휘두르지 못하도록 하겠소이다!”
“뒤에서 날아오는 추혼낙인에 놈은 정신을 못 차릴 것이오.”
정오가 받아들이자 두 사람은 확연히 밝아진 얼굴로 엄지를 추켜세웠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시후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찌도 이리 약아빠졌을까.’
시후와 눈이 마주친 준혁과 추나행은 슬쩍 고개를 돌렸다.
“제갈의 아이가 왔다면 좋았을 텐데······.”
추나행의 중얼거림에 시후도 동의했다.
하지만, 진을 해제하는 걸 알려 주지 않았다면, 파양도의 신뢰를 얻을 수 있었을까?
모르는 일이다.
게다가, 어차피 지나간 일을 가지고 고민해 봤자 의미 없는 짓이었다.
목일자는 짧게 손뼉을 치며 시선을 끌어모았다.
“이제 그를 맞을 준비를 하세.”
- 57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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