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55화 진법 속으로 (3)
시후는 증표를 꺼내어 광마패도, 파양도 양진두에게 던졌다.
증표를 낚아챈 파양도는 확인을 마친 후 다시 시후에게 던졌다.
안개로 인해 얼굴이 정확히 보이진 않았지만, 분명 그의 표정은 복잡미묘하게 바뀌었을 것이다.
“지금 이 시점에 회에서 접촉할 이유가 있는 건가?”
그건 그의 목소리에서도 알 수 있었다.
온갖 복잡한 심경과 짜증이 뒤섞인 어투였다.
의도적이라고 한들 쫓기고 있는 상황에서 한가로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게 불편할 것이다.
길게 이야기를 나눠 봤자 그의 신경만 거스를 테니, 대화는 최대한 짧고 간결하게 나누는 게 이로울 것이다.
물론, 대화가 길어지면 거짓말을 들킬 확률이 높으니 말이다.
“일이 매우 급하게 돌아가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지금 정의맹과 관이 협력하여 뒤를 쫓고 있습니다.”
시후의 말에 파양도에게서 풍기는 기운이 한층 사나워졌다.
시후는 자신도 모르게 무릎이 살짝 굽혀질 뻔했다.
무릎을 펴기 위해 내공을 일으키며 시후는 그의 기세에 대응했다.
“그럴 것 같더라니······ 그리고?”
“이곳 상강을 거슬러 올라가도 관군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곳은 완벽히 봉쇄해 놔서 배로 뚫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바로 배를 돌려야겠군.”
“안됩니다. 그에 관한 방책도 마련돼 있습니다.”
“완전히 포위당하기 전에 내려서 육로를 뚫어야겠다.”
그래선 곤란했다.
시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그렇게 하더라도 여기선 곤란했다.
“역시, 파양도 님께서는 통찰력이 뛰어나시군요.”
“아부해 봤자 떨어질 콩고물은 없으니······.”
“하지만, 이곳에선 곤란합니다. 어차피 여기를 뚫는다고 해도, 이곳은 에워싸이기 딱 좋은 지형입니다.”
말을 마친 시후는 손가락을 뻗어 서쪽을 가리켰다.
“차라리 상강, 상강을 올라가십시오.”
“네놈이 그곳은 절대 못 뚫는다고 하지 않았더냐!”
파양도가 짜증이 가득 담긴 소리를 내질렀지만, 시후는 확고한 표정을 지은 채 눈을 마주쳤다.
“내리더라도 그곳에서 내려야 합니다. 그곳에서 남서쪽으로 조금 더 간다면 산지가 나오기 때문에, 몸을 피하는데 더욱 쉬울 겁니다.”
“이정도 인원이 움직인다면, 산으로 가나 평지를 달리나 매한가지······.”
“가는 건 파양도 님과 녹림뿐입니다.”
움직였다는 낌새조차 느끼지 못했는데, 파양도는 어느새 자신의 코앞에 서 있었다.
2m 달하는 거구답게 그와 눈을 마주치기 위해선 고개를 제법 꺾어야 했다.
그가 상체를 슬쩍 숙이더니 얼굴을 바로 앞으로 들이밀었다.
‘더럽게 못생겼군.’
“그딴 말을 하는 이유는 무엇이냐?”
“수로채와 찢어져야 합니다. 두 분을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지금 모인 정의맹의 전력을 생각하면 찢어져야 합니다.”
“네 말은······ ‘빙검(氷劍)’을 미끼로 삼으란 말이더냐?”
“잃어야 한다면······.”
시후는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돌렸다.
뒤에 말을 하지 않으며, 그가 조금 더 오해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 놓았다.
“흠······.”
그가 고민하는 듯했지만, 미끼를 물것이라는 확신은 어느 정도 있었다.
흑련회에서 빙검과 파양도의 지위는 얼추 비슷했다.
물론 무공 수위도 비슷했지만, 회 내부에선 빙검의 차분한 성격을 조금 더 높게 사는 경향이 있었다.
그렇기에 이 미끼를 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파양도가 한 발짝 더 다가왔다.
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아니, 웃고 있었다.
“그렇지, 빙검보다는 내가 회에 더욱 큰 도움이 될 테지.”
“오래 대화를 나눠선 곤란할 것 같습니다. 뒤편에 다가오는 군선이 곧 불화살을 쏠 듯하니, 얼른 진을 깨고 탈출하시지요.”
지령서가 없는 지금, 시후가 그에게 신뢰를 조금 더 얻는 방법은 하나였다.
진을 해제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것.
“이 진은 급히 만들어진 것이라 완벽하지 않습니다. 파양도 님께선 분명, 이 진의 불안정한 부분을 찾으실 수 있을 겁니다.”
시후의 말에 파양도는 눈을 감고 주변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는 기막을 해제하지 않고서도 밖의 기운을 느끼는 묘기를 선보였다.
어차피 진은 곧 깨질 것이다.
제갈려가 스스로 말했듯, 이정도 규모의 배와 인원이라면 그리 오래 버티진 못한다고 했으니깐.
자연적으로 깨질 바에야 진을 파훼할 기회를 주고 그의 신뢰를 얻는다.
“저기군.”
눈을 뜬 그가 한쪽을 응시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안개 너머의 무엇을 보는 듯했다.
자신이야 느낄 수 없지만, 아마도 저곳에서 제갈려가 진의 중심을 맡아 이 별원무곡을 유지하고 있을 것이다.
파양도가 자신을 바라보자 시후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곳으로 적당한 수준의 도기(刀氣)를 날려 보십시오. 아마도 진이 깨질 것입니다.”
* * *
목일자는 제갈려의 얼굴을 바라보며 발을 동동 굴렀다.
그건 무뚝뚝한 척 자신을 포장하고 있는 독고준혁 또한 마찬가지였다.
지금 제갈려의 얼굴은 안색이 새파랗게 질리다 못해, 살아 있는 사람의 몰골이라고 보기엔 어려울 정도였다.
“이제 일각쯤 지난 건가?”
“반 각도 안 지났네.”
사람을 가두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거늘, 대궐만 한 십수 척의 배와 천이 훌쩍 넘는 사람을 억제한다면, 그 반발력은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천로수변의 힘을 빌리고도 모자라서 제갈려 또한 진법의 한 축을 담당해야 했다.
덕분에 제갈려는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 휘청거렸다.
“그만하는 게 어떻겠나?”
목일자의 질문에 제갈려는 반발력을 온몸으로 견디면서도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갈려는 땀을 비 오듯 흘리면서도, 천천히 몸을 움직여 손에 들린 천로수변을 남에서 동쪽으로 다시금 가리켰다.
미약하게 흐르던 바람의 방향이 바뀌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목일자는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떨궜다.
어차피 강제로 떼어 낼 수는 없었다.
지금 제갈려의 몸을 건드린다면, 어떠한 결과가 초래될지 알 수 없었으니깐.
쿵.
멀찍이 뭔가 울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공기가 사방으로 출렁거렸다.
덕분에 제갈려의 몸도 버드나무 가지처럼 휘청휘청했다.
“무시무시한 고수군.”
“준혁, 자네와 비교하면 어떤가?”
“필패.”
목일자와 달리, 독고준혁은 서장에서 엄청난 위상을 가졌던 고수였다.
불과 십여 년 전만 해도 서장에는 수많은 마적단이 있었다.
그 시기에 가장 유명했던 마적단으로는 금악마적단과 혈풍단이 있었다.
준혁이 모습을 드러내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는 삼 년 동안 금악마적단을 쫓아다니며 그들을 지워 버렸고, 그 빈자리를 차지하려던 혈풍단까지 모조리 지워 버렸다.
비록 무공은 팔황에 비해 한참 아래지만, 서장에서 그의 위명은 팔황에 근접했을 정도였다.
그 때문에 오죽하면 그가 활동하던 시기에는 마적들이 말 편자를 뽑아 엿으로 바꿔 먹었다는 우스갯소리가 떠돌았을까.
그런 그의 입에서 ‘필패’라는 말이 나오자 목일자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준혁이 목일자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겼다.
“계획대로 단 한 수 정도는 쉽게 받아낼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말게.”
“자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만, 너무 자만하진 말게나. 추나행 장로도 녹림 총채주의 무공이 최소 자신보다 두 수 위라고 말했네.”
“자존심을 생각한다면······.”
“세 수는 위라고 봐야지.”
준혁이 말끝을 흐리자 목일자가 뒷말을 이어받았다.
잠시 짧은 침묵이 이어지는 사이, 준혁이 도를 붙잡았다.
미약한 기파가 퍼지더니, 미약하던 존재감이 급속도로 거대해지기 시작했다.
“뒤로!”
자욱한 안개를 헤치고 붉은 강기가 쏜살같이 날아왔다.
준혁은 그 자리에서 강기를 날려 맞받아치려고 했지만, 바로 곁에서 휘청거리는 제갈려가 충격을 견뎌낼 수 있을지 미지수였다.
준혁은 곧 이를 꽉 깨물더니 앞으로 달려가 허공으로 도약했다.
“흡!”
짧은 기합 소리와 함께 준혁의 도가 긴 호선을 그렸다.
간결한 움직임이 만들어낸 묵빛 강기는 붉은 강기를 집어삼킬 듯 휘감았다.
콰앙!
허공에서 부닥친 두 강기는 엉키고 설키더니 굉음과 함께 터져 나갔다.
허공에 뜬 채로 피할 방법이 없던 준혁은 폭발력에 그대로 몸이 뒤로 날아갔다.
허공에서 몸을 뒤집은 그는 바닥에 긴 고랑을 만들어내며 멈춰 섰다.
고랑은 당장에라도 농사를 지을 수 있을 정도로 깊숙이 파였다.
“괜찮은가?”
“귀가 조금 먹먹한 것 치고는 괜찮군.”
준혁은 찢어진 바지춤을 추스르며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말했다.
낭패한 기색이 역력했는데도, 역시나 무인의 자존심은 꺾일 줄을 몰랐다.
“그보다, 날아온 거리를 보면 못해도 이십여 장을 훌쩍 넘는 듯한데······ 믿기지 않는군.”
준혁은 붉은색 강기가 날아온 곳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폭발의 여파로 안개는 사방으로 흩어져 있었다.
비록, 흩어진 안개는 그 자리를 메우기 위해 뭉실뭉실 몰려들었지만, 그 찰나의 시간 속에 두 사람은 배 위에서 이곳을 바라보는 한 남자를 확인할 수 있었다.
준혁이 칼자루를 꽉 움켜쥐었다.
“우린 여기까지네.”
목일자는 그런 준혁의 팔을 잡아당겼다.
그의 만류에 준혁이 못 이기는 척 칼자루를 놓자, 그와 동시에 제갈려가 뒤로 쓰러졌다.
* * *
[별원무곡진이 사라졌습니다.]
[진으로 인해 적용되었던 상태 이상 효과가 해제됩니다.]
[지도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아쉽군.”
파양도의 말에 시후는 하마터면 욕을 내뱉을 뻔했다.
아무도 안 죽었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제갈려가 그대로 몸이 찢겨 죽을 뻔했다.
그녀가 죽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무엇을 상상하던 그 이상을 보았을 게 분명했다.
안 좋은 쪽으로 말이다.
“강기까지 날리실 필요가 있으셨나 합니다. 오히려 저들에게 더욱 경각심을 주는 게 아닐지······.”
“시끄럽다.”
‘그렇다면 조용히 해 드려야지.’
시후가 꾹 입을 다물자, 그는 재차 도를 들어 올렸다.
“제가 말씀드린 건 전부 기억하십니까?”
“흥, 그 정도 기억력도 없을까 봐. 걱정하지 말고 이만 가 보거라.”
“살살 부탁드립니다.”
시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파양도는 가라앉혔던 기운을 끌어올렸다.
[기막이 해제되었습니다.]
“네놈이 이중 첩자 질을 해!”
그는 어지간한 성인 몸통만 한 대도를 장난감처럼 가볍게 휘둘렀다.
조금 전 제갈려를 향해 날아갔던 붉은색 도강이 이번엔 시후를 노렸다.
입을 맞췄던 것과 달리, 시후의 예상을 한참을 웃도는 기운.
하지만 따지고 들 시간이 없었다.
시후도 기운에 맞춰 일원신공을 극성으로 끌어올리며 몸을 가볍게 만들었다.
기회는 한 번이다.
일원신공 특유의 금빛이 자운유성창에 모여들었다.
코앞까지 도강이 다다랐다.
내공을 몸에 두른 채 몸을 허공으로 띄웠다.
다소 뒤로 젖혀졌던 허리를 앞으로 숙였다.
“참월(斬月)!”
창대를 짧게 잡음과 동시에 위에서 아래로 강하게 휘둘렀다.
단순한 베기 공격이라 생각할지 몰라도, ‘참월창’의 이름을 담고 있는 무공인지라 그 위력은 녹록지 않았다.
반달 모양의 참월이 파양도의 도강과 정면으로 맞부딪혔다.
콰아아앙!
굉음과 동시에 시후는 실이 끊어진 연처럼 허공을 훨훨 날아갔다.
어찌나 폭발이 강했는지, 안개 속으로 모습을 감추는 데는 눈 깜박할 시간조차 걸리지 않았다.
그 사이, 빙검은 어느새 난간 위에 서서 검병을 붙잡고 있었다.
그는 당장이라도 시후가 날아간 방향으로 검을 휘두를 법한 자세였다.
파양도는 급히 그의 곁으로 다가가 그를 밀쳤다.
“됐어. 죽었을 거야.”
“힘이 부족해 보이던데······.”
“내가 죽었다면 죽은 거지, 웬 말이 많아!”
눈이 붉어질 대로 붉어진 파양도의 외침에 빙검은 시후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다가 손을 거뒀다.
“그래서 무슨 일로?”
“정의맹 쪽에 심어 둔 녀석이었는데,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중 첩자로 돌아섰더군. 정보를 캐내려고 해서 죽였다.”
“첩자?”
빙검은 말의 진의를 파악하듯 눈매가 가늘어졌다.
하지만, 파양도도 그리 호락호락한 인물은 아니었다.
“야 이 개자식들아, 진법 박살 냈으니깐 빨리 출발해!”
그는 빙검의 시선을 피해 배를 뛰어넘으며 타병을 붙잡고 있는 조타수들을 닦달했다.
빙검은 그런 그의 뒷모습을 싸늘한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곧 본선으로 돌아갔다.
- 56화에 계속 -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