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54화 진법 속으로 (2)
저 멀리 안개 너머 아른거리는 불빛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혹여나 관군을 돌파하려고 든다면, 시후가 제안했던 계획은 모두 물거품이 될 것이 뻔했다.
시후를 비롯한 모두는 숨을 죽인 채 모두 하늘을 올려다봤다.
신호탄은 쏘아 올려지지 않았고, 불빛이 아주 조금씩 커지기 시작했다.
무언가 다가오는 것이었다.
시후와 목일자는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동시에 내쉬었지만, 그 안에 담겨 있는 감정은 달랐다.
시후는 자신의 계획을 펼칠 수 있다는 안도감이었고, 목일자는 걱정이 가득 담긴 한숨이었다.
“가 보겠습니다.”
시후의 말에 목일자는 손을 맞잡곤 살포시 감싸 쥐었다.
시후를 바라보는 눈빛과 맞잡은 손을 통해 전해지는 목일자의 감정은 오로지 걱정뿐이었다.
“굳이 이래야 하나 싶지만······ 조심해서 다녀오게.”
“그럼.”
가벼운 인사를 한 뒤, 강변에 대놓은 조그마한 조각배 위로 올라탔다.
배 위에는 작은 노 두 개가 준비돼 있었다.
노를 양손에 쥔 채 물에 담갔다.
힘차게 노를 젓기 시작했지만, 어찌 된 일인지 배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의아한 기분이 들어 뒤를 바라보자, 배 귀퉁이를 붙잡고 있는 제갈려의 모습이 보였다.
‘시간 없는데 이 계집애가.’
“야, 너도 너 할 일······.”
“약속해.”
여태껏 보았던 제갈려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겉으로는 무뚝뚝한 듯 보였지만, 눈빛에는 감정은 시후를 향한 걱정과 염려가 담겨 있었다.
“우린 준비하러 가세.”
뒤에서 지켜보던 목일자가 자리를 비켜 주었다.
사람들을 이끌고 자리를 뜨던 목일자는 잠시 뒤돌아보더니 한쪽 눈을 깜박였다.
이제는 익숙한 오해에 시후는 체념하곤 제갈려를 쳐다봤다.
그런 시후를 향해 제갈려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긴장을 제법 했는지 제갈려의 입술은 바짝 말라 있었다.
“황릉에 가야 하는 거, 잊진 않았지?”
“그야 물론이지.”
시후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황릉을 핑계 삼긴 했지만, 제갈려의 성격상 죽지 말라고 걱정해 주는 것 같았다.
그런 시후의 즉각적인 대답에 제갈려의 얼굴에 어려 있던 불안감이 조금은 사라졌다.
고개를 끄덕인 그녀는 갑자기 요대를 풀었다.
시후는 놀래서 황급히 주위를 살폈다.
“미친, 뭐 하는 거야?”
“왜 그래? 이거나 가지고 가.”
제갈려는 요대에 묶여 있던 청홍검을 건네주었다.
받아들긴 했지만, 머릿속에 드는 생각은 오로지 하나였다.
‘도대체 왜?’
“네가 자운유성창은 청홍검과 공명을 일으킨다고 했잖아. 자운유성창을 잃어버리면 할아버지께서 가만히 있을 거 같아?”
‘그러다 청홍검까지 잃어버리면?’
물어보고 싶은 게 많았지만, 시후는 어제 추나행에게도 써먹었던 침묵이라는 녀석을 사용했다.
잠시 시후의 눈을 바라보던 제갈려가 뒤돌아섰다.
제갈려는 곧 안개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고, 시후는 노를 저어 동정호를 향해 나아갔다.
약 오 분여간 노를 저은 시후는 주변을 둘러봤다.
“이 정도면 중간은 왔으려나? 아, 지도.”
지도를 보니 상강과 동정호가 만나는 지점이었다.
좁은 강폭이 넓은 동정호와 만나 유속이 급속도로 줄어드는 지점이었기에, 배는 천천히 뒤편으로 밀려났다.
다만, 넋 놓고 가만히 있다간 계획된 지점보다 더욱 쭉쭉 밀려날 것이다.
부지런히 노를 저으며, 다가오는 불빛들을 감상했다.
“몇 척이나 띄운 거람?”
적룡 금 패의 위용은 대단했다.
‘도지휘사를 부릴 수 있다’라는 말을 시후는 ‘힘을 빌릴 수 있다’라는 말로 착각했었다.
개발 당시, ‘관’에 관한 내용에 시후는 완전히 무지했으니깐.
하지만, 적룡 금 패를 본 도지휘사의 반응은 상상을 초월했다.
“내가 모르는 기능이 더 있는 건가?”
손에 쥔 적룡 금 패를 허공에 던졌다 받았다 하는 사이, 안개 너머로 초록빛 불꽃이 피어올랐다.
허공에서 춤추던 적룡 금 패를 낚아채 품에 넣었다.
눈엔 잘 보이지 않지만, 저 안개 너머로 배가 다가올 것이다.
노를 천천히 저으며 떠밀려 내려가지 않게 자리를 지켰다.
초록빛 불이 점멸하기 시작했다.
가림막으로 가렸다가 치우길 반복하는 것이겠지.
“어디냐.”
촤아아악. 촤아아악.
물살을 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노를 저었다.
소리가 점차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별원무곡진(別原無谷陳)에 들어왔습니다.]
[지도 확인이 불가능합니다.]
제갈려가 진을 펼쳤다.
시후는 노를 더욱 바삐 저었다.
하지만, 아무리 노를 저어도 소리는 가까워지는 듯하다가도 금방 멀어졌다.
“뭐야?”
소리 나지 않도록 조심조심 노를 저어서 그런가 싶어, 다소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내공을 실어 노를 저었다.
일 분이 넘게 저었지만, 들려오는 소리와의 거리는 좁혀지지도 멀어지지도 않았다.
“이런 멍청한!”
제갈려가 설명해 준 별원무곡진의 특징을 잊고 있었다.
시후는 다급한 마음에 성급히 움직였던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며 손에서 노를 놓았다.
물살 가르는 소리가 점차 찾아들기 시작하자, 시후의 인내심은 불붙은 심지처럼 조금씩 타들어 갔다.
조급한 마음이 또다시 성급하게 노를 쥘 뻔했다.
그 마음을 꾹꾹 눌러 노를 놓자, 갈라지던 물소리는 어느덧 저 멀리 사라졌다.
그리고 잠시 후, 시후는 자신의 뒤편에서 거대한 물체를 느낄 수 있었다.
“더럽게 크네.”
조각배 위에서 올려다본 것이라 그런지 몰라도, 배는 대단히 거대했다.
올려다보기에 목이 뻑적지근할 정도로.
하지만, 시후는 마냥 바라만 보고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
등에 창을 비스듬히 매고, 바닥에 놓인 짧은 겸(鎌) 두 자루를 집어 들었다.
배는 시후가 있는 방향으로 정확히 다가왔다.
시후는 배가 부딪치기 직전, 배에 겸을 틀어박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 * *
“채주님! 물이 이상합니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장강 전역을 누비고 다녔던 호철이었다.
무공은 수악채에서 그저 그런 정도에 불과했으나, 배를 모는 실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덕분에 수악채에서 그의 지위는 다섯 손가락 안에 꼽혔다.
그런 호철이 이상하다면 뭔가 문제가 생긴 것이기에, 수악채주는 서둘러 선미로 다가갔다.
“뭐가 이상하다는 거야?”
“이정도로 나아갔으면 상강에서 내려오는 물줄기가 배 정면에서 느껴져야 합니다. 하지만, 물이 조금 전부터 계속 좌측을 밀어붙이고 있습니다.”
호철의 목소리에는 초조함이 묻어났다.
아무리 배를 모는 능력이 뛰어나다고 한들, 이처럼 다급한 상황에서 쓸모가 없다면 목이 달아날 것을 모르진 않을 테니깐.
“그럼 타(舵)를 왼쪽으로 돌리면 그만이잖아?”
“이미 반 각이 지나도록 왼쪽으로 타병을 돌렸습니다.”
수악채주의 표정이 확 굳어졌다.
“지금도 계속 왼쪽으로 돌리고 있다고?”
“그렇습니다. 지금 타병을 끝까지 돌린 상태입니다.”
수악채주는 고개를 떨궈 바닥을 내려다보곤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 전혀 몸이 쏠린다는 느낌이 없는데? 헛소리는 아니겠지?”
그의 질문에 호철은 분명히 고개를 끄덕였다.
수악채주는 즉시 눈을 감아 내공을 극한으로 끌어 올렸다.
그의 옷이 펄럭이며 작은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속으로 숫자를 이십쯤 헤아렸을 때, 그의 눈이 번쩍 뜨였다.
삐이이이익!
입에서 나온 소리라곤 생각되지 않을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가 퍼져 나갔다.
소리는 곧 사방에서 울려 퍼졌고, 배는 점차 속도를 줄여나갔다.
저 뒤편에서 멈추는 게 일반적이진 않을 테지만, 현 상황을 타개하지 않고선 움직일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뒤에서 바짝 붙어 따라오던 등룡채의 배는 가까스로 충돌하지 않고 멈출 수 있었다.
등룡채주는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수악채의 배로 넘어왔다.
“뭐야! 선두를 맡겼더니 왜 가다가 멈춰!”
“말은 똑바로 해라, 네놈이 맡긴 게 아니라 우리가 가장 뛰어나니 맡은 거지.”
“저놈만 죽이면 네놈이 장강에서 배를 몰 수나 있을 거 같으냐? 물길조차 모르는 놈이 채주라고 거들먹거리는 꼴이라니.”
“그건 네놈도 마찬가질 텐데? 타병이야 어차피 아랫것들이······.”
수악채주는 말을 끝까지 내뱉지 못했다.
뒤편, 저 멀리서 느껴지던 기운이 어느새 자신의 등 뒤에서 느껴졌으니깐.
황급히 뒤돌아보자, 수로채주가 싸늘한 얼굴로 서 있었다.
수악채주는 재빨리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설명.”
“상강에서 내려오는 물길을 거슬러 올라갈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타병을 돌려도 물살이 밀려오는 방향이 일정하게 느껴집니다.”
그와 동시에 수로채주는 얕게 발을 굴렀다.
단순한 동작과 달리, 짙었던 안개를 사방으로 흩어 버릴 정도였다.
수로채주는 혼자 온 게 아니었다.
그의 옆에는 어느새 광마패도가 서 있었다.
광마패도가 콧잔등을 긁적이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감각이 이상한데?”
“진이다.”
수로채주가 눈을 뜨며 나지막이 말했다.
그의 말에 광마패도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주변을 가리켰다.
“이 넓은 동정호에 진을 펼쳤다고? 어떤 미친놈이?”
“우리가 올 방향과 시간을 알고 있었다면 일부 지역에만 펼칠 수 있겠지.”
“젠장, 설마 천변기황(天變旗皇)은 아니겠지?”
광마패도는 팔황의 일원인 제갈마혁을 들먹였다.
그의 말에 수로채주는 가볍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가 움직였다는 소리는 못 들었다.”
“하기야, 그 인간이 골방에 틀어박힌 지 이미 몇 해가 되었다고 들었으니······. 그럼 누구지?”
“새싹을 키웠겠지. 그의 자손 중 하나일 것이다.”
그의 말에 광마패도는 인상을 구겼다.
그러곤 뒤를 돌아 저 멀리서 다가오는 관선을 바라봤다.
“빌어먹을, 지금 발목을 붙잡히면 곤란한데.”
“그리고 앞에서 쥐새끼 하나가 올라오고 있더군.”
수로채주의 말에 광마패도는 가볍게 발을 굴렀다.
조금 전, 수로채주가 일으켰던 기파(氣波)보단 한참이나 약했지만, 단순히 배에 붙어 있는 쥐새끼를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곧 그는 곧 피식 웃었다.
“고작 이정도 경지로 홀로 온다는 건 말이 안 되고······. 정의맹에서 대화를 원하는 건가?”
“그럴지도.”
“내가 가 보지.”
말과 동시에 광마패도는 선수로 몸을 날렸다.
덕분에, 두 사람을 피해 선수에 모여 있던 수적들은 오갈 데를 잃고 우왕좌왕했다.
광마패도는 말하기도 귀찮은 듯 뒤로 꺼지라 손짓했고, 그들은 선체 중앙에 쭈뼛거리며 서 있어야만 했다.
그는 그들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은 채, 한쪽을 계속해서 응시했다.
“고작 절정으로 홀로 올라온다는 건 정말 간덩이가 부은 놈일 텐데······. 팔 하나만 받고 보내 줘야겠군.”
겸이 나무에 푹푹 틀어박히는 소리가 조금씩 들려오기 시작했다.
광마패도는 미소를 지은 채 소리가 들려오는 반대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그의 시야에 스멀스멀 몰려오는 안개 사이로, 난간을 붙잡는 손 하나가 들어왔다.
그리고 익숙한 머리통까지도.
그가 놀라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지만, 시후는 그보다 더욱 놀랐다.
‘어떻게 마중을 나온 거지?’
난간에 몸을 반쯤 걸쳤던 시후는 천천히 넘어갔다.
그를 만날 생각으로 올라오긴 했지만, 기다리고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었다.
광마패도는 시선을 돌려 갑판 중앙에 서 있는 수적들을 바라봤다.
“뒤로 더 물러나라.”
며칠간 같이 지내며 그의 폭력적인 성격이 널리 퍼진 탓에, 수적들은 수로채주의 눈치를 보면서도 조금씩 선미로 물러났다.
[기막이 펼쳐졌습니다.]
“비영 이십삼 호. 증거를 보여라.”
그의 말에 시후는 증표를 꺼내 들었다.
처음에 왜 자신이 그에게 비영 이십삼 호라 둘러댔던 걸까.
게다가 황궁에서 이 증표를 보았을 때 왜 기시감이 들었을까.
이유는 명확했다.
이 증표는 훗날 구주신협이 흑련회와 접촉할 때 써야 했던 물건이었으니깐.
정독을 몇 번이나 했기에, 시후는 처음 광마패도를 속여 넘길 때 무의식중에 말을 내뱉을 수 있었고, 그로 인해 이렇게 기회가 찾아올 수 있었다.
‘지금은 그 기회를 이용할 때다.’
시후의 눈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 55화에 계속 -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