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53화 진법 속으로 (1)
시후는 눈을 잔뜩 찌푸렸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런다고 짙은 안개를 뚫고 반대편을 볼 수는 없을 테니깐.
“슬슬 움직일 때가 된 거 같은데······.”
“그 말, 반 시진 전에도 했던 거 같은데?”
“시간이 그렇게 지났나?”
“아마도.”
둘은 나란히 주저앉은 채 물과 땅의 경계를 지워 버린 안개를 하염없이 바라봤다.
동정호에 생긴 안개는 짙었다.
먼저 도착한 청룡단과 백호단의 말로는 도착 당일부터 안개가 꼈다고 말했다.
그렇다는 건 오늘로 나흘째 되는 날이었다.
“이미 도망친 거 아냐?”
“장강은 물론이고, 동정호의 수계(水系)라고 할 수 있는 상강과 원강으로 올라가는 건 못 봤다고 들었어.”
“강으로만 가야 한다는 법이 있나? 호숫가 근처에 배를 가져다 댄 다음에 내렸을 수도 있잖아. 물에 쫄딱 젖기야 했겠지만, 이정도로 많이 모였는데 상대하고 싶겠어?”
그건 아니다.
지금 정의맹에선 제갈려와 마찬가지로 다들 안일한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뒤에 미지의 세력이 있긴 하지만, 고작해야 산적과 수적 무리가 아니냐며 그들을 경시하고 있을 것이다.
뒤편 저 멀리서 흙 밟는 소리가 들려왔다.
제갈려가 반 시진 정도 지났을 거라고 했으니, 이번에도 목일자가 지나갈 확률이 높았다.
미끼를 던질 때였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응?”
“생각을 해 봐. 과연 그들이 우리가 오는 걸 몰랐을까?”
“음······. 아니겠지?”
“그런데 왜 버티고 있었을까? 수적들의 배라면 우리가 도착하기 전에 진작 떠났을 텐데? 아니, 청룡단과 백호단이 도착한 시점에도 이미 떠날 수 있었을걸?”
다가오던 발소리가 멈췄다.
제갈려와 시후의 대화를 들은 것이 분명했다.
의문은 원래 불씨를 지폈을 때 더욱 장작을 많이 넣어야 하는 법.
“그 정체 모를 세력을 믿고?”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다른 쪽도 생각해 봐야지. 일어날 수 있는 경우의 수를 다 생각해 봐야 하지 않겠어? 가령, 녹림과 수로채의 힘이 상상외로 대단하다던가?”
크게 기대하지 않았던 제갈려가 반응해 주자 시후는 신이 났다.
다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더는 모른 척하기도 곤란하니,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니나 다를까, 목일자와 그의 곁을 지켜 주는 독고준혁이 함께 있었다.
“차 소협, 이곳은 볼 만한가?”
“뭐, 볼 것도 없습니다. 사방을 둘러봐도 온통 안개밖에 없으니깐요.”
시후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꾸했고, 목일자는 주변을 둘러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야, 어느 곳을 보더라도 안개밖에 보이지 않았으니깐.
“그도 그렇군······. 그런데, 조금 전 나누던 이야기를 들었는데 말이야······.”
“아, 그냥 제 추측일 뿐입니다.”
“추측이라······. 그럴싸하네. 저들이 왜 아직도 버티고 있는지 나도 의문일세. 아, 잠시 앉아도 괜찮겠는가?”
“이미 반쯤 앉으셨는걸요?”
“하하하, 맞네. 앉고 나서 허락을 맡은 꼴이군.”
목일자는 자리에 철퍼덕 주저앉더니 시후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봤다.
‘음, 남자가 얼굴을 빤히 바라보는 건 싫은데 말이야.’
“불편한가?”
“아뇨, 불편하기보다는······.”
시후가 말끝을 흐리자 목일자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옆에 있는 제갈려를 바라보곤 씩 웃었다.
“내, 시간을 길게 뺏지 않을 테니 이야기 좀 나눔세.”
“······ 그 오해 어린 시선은 불편하네요.”
“흥, 누가 할 소릴?”
“자자, 내가 잘못했네. 이거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야겠군. 차 소협은 저들이 왜 여기서 우릴 기다렸다고 생각하나?”
‘바로 정답을 던져 줄까?’
잠시 고민했지만, 이야기를 바로 꺼낸다면 의심을 살 게 분명했다.
차라리 여러 가지 가설을 마구잡이로 던지다가 사실을 가미하는 게 나을 것이다.
“가정은 몇 가지 해 본 게 있는데, 첫 번째로는 그들이 추가로 올 지원 병력을 기다렸을 수도 있다는 거예요. 하지만, 추가 지원은 없을 거예요.”
“왜지?”
“여기서 인원이 더해진다면, 정말 군대가 움직일걸요?”
시후는 첫 번째 가정의 문제점을 정확히 짚었다.
아무리 무림인이라고 한들, 수십만 대군을 상대할 수는 없었다.
시후의 말에 목일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 번째는?”
“어차피 도망친다고 해도 아등바등 쫓아올 걸 아니깐 결사 항쟁을 하자. 이럴 확률은 첫 번째 가정보다 더 낮죠.”
“그건 내 생각도 그렇네.”
“세 번째로는······ 뭔가를 기다리는 게 아닐까요?”
“응? 추가 병력을 기다리지는 않을 거라고 하지 않았나?”
“병력이 아니라······.”
시후는 목일자의 뒤편을 응시하며 말끝을 흐렸다.
목일자도 다소 불안한 표정으로 뒤를 힐끔거렸다.
‘이 아저씨, 잘 속는군.’
“사건을 기다린다면?”
“사건?”
“예, 사건이요. 이쪽으로 시선을 모아두고 다른 곳에서 사건이 터지면, 몸이 이쪽으로 쏠린 우리는 다른 쪽에 손쓰기 힘들지 않겠어요?”
* * *
목일자가 떠나간 뒤 반시진도 지나지 않아 추나행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진정하세요.”
“무슨 말도 안 했다, 이놈아!”
“봐, 진정하시라니까.”
시후의 말에도 추나행은 대꾸하지 않은 채 주변을 살폈다.
사람이 눈에 보이진 않았지만 안심되지 않는지, 시후를 으슥한 곳으로 데리고 가 기막까지 펼쳤다.
“네 생각이냐, 아니면 천기자 어르신의 생각이냐?”
일전에 추나행에게 천기자를 언급한 것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지만, 실제로 이렇게 먹히자 내심 뿌듯했다.
만약 목일자가 교초혼과 같은 부류였다면 자기 생각이라고 떠벌렸을지 몰라도, 그의 성격상 절대 그럴 리 없다고 확신했다.
“일단은 제 생각인데······ 천기자 어르신도 생각이 크게 다르지 않을걸요?”
마음 같아선 천기자의 이름을 들먹이고 싶었으나 그렇지 못했다.
비걸개를 설득하지 못했다면, 힘을 실어 줄 하오문에게 증표를 전하지 않았다면.
녹림과 수로채를 치기 위해 이렇게 빨리는 오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확신이 없었다.
이 일을 앞당김으로써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날 일들이 발생하지 않을까 봐.
“그렇게 포장한다고 한들, 결과적으로 오롯이 네 생각인 것 아니더냐?”
추나행이 눈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가 오기 전까지 뭐라고 말해야지 설득할 수 있을지 많은 고민을 했었다.
하지만, 시후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때론, 백 마디 말보다 침묵이 더 나은 법이니깐.
“후······.”
긴 한숨을 내쉬던 추나행이 머리를 벅벅 긁적이며 자리를 떠났다.
그를 붙잡아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침묵이라는 패를 사용했는데 경거망동할 수는 없었다.
말없이 제자리에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볼 뿐.
기막을 해제한 뒤, 한참을 걸어가던 추나행이 제자리에 우뚝 섰다.
“물 위에 있는 수적들을 잡을 방법이 없으니 배를 구해야겠군.”
“그 말은······.”
“도지휘사사(都指揮使司)로 찾아가 도지휘사에게 관선(官船)을 내어 줄 것을 묻거라. 난 목 장로와 함께 다른 사람들을 설득할 테니.”
‘됐다.’
추나행과 목일자, 두 사람은 공(功)을 탐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수로채와 녹림을 치고 난 뒤에도 연쇄적으로 일이 발생한다면, 시후의 발언에 힘을 실어 줄 것이 분명했다.
추나행의 모습이 사라지자 시후는 얼른 말에 올라탔다.
녹림과 수로채가 나타나진 않겠지만, 이런 일은 얼른 다녀오는 게 나았다.
지금 시후가 있는 상음(湘陰)에서 장사(長沙)까진 한 시진도 안 걸리는 거리였으니깐.
시후는 몸에 힘을 뺀 채 말에 몸을 맡겼다.
“피해를 덜 보는 방법이 없나?”
녹림과 수로채를 일망타진하려면 못할 것도 없었다.
숫자도 그렇고 확실히 전력의 우위는 정의맹에게 있었으니깐.
다만, 피해가 적지 않게 발생할 거란 게 문제였다.
다른 것들은 다 제쳐놓고 가장 큰 문제는 두 무리의 우두머리였다.
‘무당제일검’ 운허가 있다고 한들, 하나를 상대하기도 벅찼다.
“반반씩 나눠서 상대하면 편한데 말이야.”
물론, 정의맹의 전력은 이게 전부가 아니고 드러나지 않은 힘도 아주 많았다.
하지만, 알고도 당해 줄 필요는 없지 않을까?
“반반이라······.”
시후는 말 위에 탄 채로 수만 가지 방법을 떠올려 보았다.
과연 둘을 떨어트릴 방법이 없을까.
같이 상대해야 한다면 어떻게 해야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을까.
고민에 고민을 더하는 사이, 저 멀리 호남성의 성도인 장사가 성큼 다가왔다.
* * *
“묘시까지 반 시진 남았나?”
시작까지 한 시간도 남지 않았다.
여전히 짙은 안개는 달빛조차 먹어치웠기에 시야는 터무니없이 좁았다.
옆에 앉아 있는 제갈려가 말이 없자, 시후는 혹시 그녀가 자는 건 아닌가 싶어 고개를 돌렸다.
제갈려는 두 손을 앞으로 모은 채 입술을 잘근잘근 씹고 있었다.
‘긴장했군.’
“긴장했냐.”
“아······. 그냥, 뭐······.”
제갈려가 우물쭈물하며 말끝을 흐렸다.
평소라면 아니라고 말했을 테지만, 아니라고 말하기엔 부담감이 너무 컸을 것이다.
계획은 단순했다.
장강을 타고 올라온 군선들이 동정호에 넓게 퍼져 그들을 한곳으로 몰아 둔다.
당장에라도 불화살을 쏘아 보낼 것처럼 압박한다면, 필시 다른 강을 거슬러 올라가려고 할 것이다.
상강과 원강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것이지만, 상강은 장사와 통하는 도시인만큼 절대 가지 않을 것이다.
물론, 혹시나 가게 될 걸 생각해서 방비도 해 놨지만.
“준비는 다 됐다며?”
“그렇긴 한데······. 할아버지 수준이면 모를까, 내가 과연 할 수 있을까······.”
“어제만 해도 당당하더니.”
“그럼 못한다고 잡아뗄까?”
제갈려가 입꼬리를 삐쭉거리며 투덜거렸다.
“어차피 네가 진법을 안 펼칠 수도 있지 않겠어? 저쪽이 정면돌파를 선택하면 우린 뒤쫓기 바쁠 텐데 말이야.”
사실 그럴 가능성은 적었다.
수십의 군선이 불화살을 날리며 다가오는데, 제정신이면 돌파한다는 생각을 못 할 것이다.
제갈려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막 던지는 말에 불과했다.
“······ 워.”
“뭐?”
제갈려가 뭐라고 웅얼거렸지만, 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았기에 시후는 고개를 가까이 들이밀며 물었다.
시후가 고개를 돌린 채 들이밀었던 탓일까, 제갈려의 다리 움직임을 놓치고 말았다.
“고맙다고!”
“윽.”
시후는 정강이를 붙잡은 채 한발로 껑충껑충 뛰어다녔다.
‘고마우면 고마운 거지 왜 정강이를 걷어차? 저 망할 것.’
이미 저 멀리 도망친 제갈려를 향해 욕설을 내뱉던 시후는 그녀를 뒤쫓진 않았다.
바닥에 주저앉더니, 품을 뒤져 ‘비영 이십삼 호의 증표’를 꺼내 만지작거렸다.
“잘 먹혀야 할 텐데 말이야······.”
이들에겐 가장 중요한 이야기를 아직 안 했었다.
수로채와 녹림채를 떨어트릴 수 있는 중요한 계책(計策).
성공한다면 정의맹에서 입지를 공고히 다질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이 계획은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기에, 허락이 떨어질 가능성은 현저히 낮았다.
그래서 시후는 시간이 촉박해지면 알려 줄 생각이었다.
“뼈 맞았어?”
자리에 계속 앉아 있는 자신이 걱정됐는지, 제갈려가 쭈뼛거리면서 다가왔다.
“미안하긴 하냐? 그럼 목일자 장로님 좀 모셔와.”
“목일자 장로님께는 왜?”
“이쪽으로 몰이에 성공하면 내가 배 위에 올라갈 거야.”
진지한 시후의 얼굴에선 장난기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제갈려는 그 말이 장난처럼 들렸다.
아니, 그렇게 들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적진 한가운데로 들어가겠다는 말을 누가 곧이곧대로 믿겠는가.
“내가 일전에 대벌산맥에서 광마패도를 만나 거짓말을 한 적이 있는데, 그때의 거짓말을 진실로 만들어 줄 물건이 있지.”
시후는 손에 들린 증표를 손에 들고 제갈려의 눈앞에서 흔들었다.
그리곤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웃었다.
“이걸로 난, 잠시나마 진짜 비영 이십삼 호가 돼서 놈을 배에서 끌어 내릴 거다.”
- 54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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