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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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화 정의맹 (3)
“왜 똥이라도 씹은 표정이야?”
“내 얼굴이 어때서?”
“이러고 있는데?”
말과 함께 제갈려는 얼굴을 왕창 구겼다.
익살스러운 그녀의 표정 덕분에 시후의 기분도 다소 풀리는 것 같았다.
시후는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 한참이나 바닥을 내려다보느라 목이 뻐근했다.
‘어지간히도 오래 앉아 있었군.’
목을 가볍게 돌리는 시후의 옆에 제갈려가 앉았다.
자신이 목을 다 풀자 그녀는 자신의 소매를 끌어당겨 차가운 바닥에 다시 앉혔다.
“뭐 때문에 이러는 거야? 배우랑 소품이 안 와서?”
제갈려의 말에 쓴 웃음을 지었다.
‘기억하고 있었군.’
시후는 고개를 살짝 저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렸어.”
“뭐가 빠진 건데?”
“소품.”
“흐응······.”
제갈려가 콧소리를 내며 팔짱을 꼈다.
그러거나 말거나 시후는 한숨을 푹푹 쉴 수밖에 없었다.
점창파의 목일자와 그의 친우 독고준혁이 도착했지만, 그들이 원래 겪어야 했을 일들은 발생하지 않았다.
덕분에 시후가 끼어들 명분도 사라져 버렸다.
시후는 입안이 쓰게 느껴졌다.
분명 이쪽에는 별 타격이 없을 거로 생각했는데, 자신이 했던 행동 중에 뭔가 영향을 끼친 거겠지.
“소품이 없으면 찾거나 만들면 되잖아?”
‘속 편한 이야기나 하긴.’
피식 웃음이 나오려고 했지만, 찾으라는 말이 신경이 쓰였다.
‘찾을 수 있나? 장소도 멀고, 시간은 이미 흘러간 과거에 존재하는데?’
그런데, 왜 이렇게 묘하게 거슬리는 걸까.
“거봐. 어딘가에다 두고 못 찾는 거지?”
‘어딘가에다가 두었다?’
그 말에 시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 그런 거 같네. 고마워.”
“네가 고맙다는 소리도 할 줄 알아?”
비아냥거리는 기색이라기보단 뜬금없는 칭찬에 어색해하는 듯 보였다.
그런 제갈려를 뒤로한 채 시후는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얻었던 물건을 모조리 확인했다.
가장 최근에 얻었던 것부터.
홍설의 체취가 남아있는 누비 목도리를 필두로 수많은 물건이 쏟아져 나왔다.
“적룡 금 패, 증표, 서찰······. 이건 나중에 버려야겠네. 적행 패는 왜 안 돌려줬지? 무음필대도 있고······.”
무엇을 놓치고 있는 건지 명확히 알기 위해 닫았던 알람들도 일일이 다 확인했다.
“호감도······ 호감도······. 호감도도 더럽게 많이 올랐었네.”
반신반의에 불과했던 제갈려의 호감도가 이미 ‘가신지인’까지 올랐다.
지금 확인하려는 내용은 아니니 호감도 관련은 모조리 껐다.
알람이 순식간에 반으로 줄었다.
그 뒤로 한참이나 과거의 행적을 거슬러 올라간 뒤에야 이유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거였군.”
[‘흑련회의 비밀 지령(7)’을 사전에 차단했습니다. 보상으로 ‘무음필대’가 지급됩니다.]
알람을 읽던 시후는 이를 꽉 깨물었다.
“지령······. 이놈의 지령이 문제였어.”
강서성에 자신이 개입하면서 사전에 차단한 비밀 지령.
이게 문제였을 것이다.
이 지령이 자신이 생각하는 그 문젠진 모르겠지만, 어떻게든 톱니바퀴 물리듯 연계가 됐을 것이다.
왜 소품이 준비 안 됐는지 알았으니 수단을 취할 때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알람을 위로 쭉쭉 더 올렸다.
“아! 녹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시후는 황급히 문을 열고 나섰다.
문 앞에는 제갈려가 기다리고 있었다.
시후는 그런 제갈려를 스쳐 지나갔다.
“어디가?”
재빨리 따라붙은 그녀의 머리를 강아지 만지듯 마구 헝클었다.
남궁미와 달리 그녀는 시후의 손을 가볍게 쳐냈다.
그럴 만도 했다.
남궁미야 호감도 70을 넘겼으니, 무엇을 해도 좋게 볼 테니까.
“내가 너보다 나이가······. 어디 가느냐고!”
다시 시후가 걸음을 옮기자, 제갈려도 곧바로 뒤에 따라붙었다.
평소라면 귀찮게 여겼을지 몰라도 자신에게 단서를 쥐여준 지금은 아니었다.
기분 좋게 웃으며 시후는 앞을 가리켰다.
손끝이 향한 곳은 다른 구파일방 중 ‘일방’에 해당하는 사람이 머무르는 방이었다.
* * *
빌어먹을.
이 단어를 사용하는 데 있어서 거지만큼 적합한 녀석들이 있을까.
평생을 구걸로 먹고사는 거지들에게는 딱 안성맞춤인 말이다.
개방은 그 ‘빌어먹을’ 놈들의 총집합이라 볼 수 있다.
다만, 개방이라고 모두가 다 빌어먹는 건 아니었다.
지금 시후의 눈앞에 있는 인물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의 행색을 보곤 누가 개방이라고 생각할까.
다채로운 색이 들어간 화려한 비단옷을 입은 그는 추나행이 그토록 싫어하던 비걸개였다.
시후는 그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 하여, 그걸 증거로 들이밀면 명분은 충분하겠죠.”
시후의 말을 들은 비걸개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일전에 얻었던 ‘흑련회의 비밀 지령(4)’은 증거로 사용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비걸개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지금 그에 관한 해독을 하고 있지만, 네가 한 말도 일리가 있군.”
그의 대답에 시후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됐다.’
하지만, 고개를 끄덕이던 비걸개는 팔짱을 끼며 몸을 뒤로 젖혔다.
갑자기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분명 그 정체 모를 세력과 녹림이 닿아 있다는 건 알겠지만······ 섣불리 건드렸다가 꼬리만 자르고 도망치면 더욱 골치 아프지.”
아니다.
이건 무조건 지금 막아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정파는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질 것이 분명했다.
수습하는 데 시간을 낭비할 여유가 없다.
“이게 시작이라면요?”
“그럼 조짐이······.”
“조짐을 느껴서 그 지령서를 얻었다고 생각하시나요?”
시후의 무례한 말투에 비걸개는 불쾌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관계가 소원해지더라도 어쩔 수 없었다.
‘어차피 개방에선 추나행 하나만 있어도 충분하거든.’
“제가 물어다 드린 정보란 것을 추나행 장로님도 말했을 텐데, 아닙니까?”
“음······.”
자존심을 긁자 비걸개의 심기는 더욱 불편하게 변했다.
기왕 똥물을 튀긴 거 확 들이붓기로 했다.
“지금 추나행 장로님은 어디에 있습니까?”
“동정호에 그들을 살피러 갔지.”
“직접 가지 않아도 충분할 텐데, 추나행 장로님이 직접 갔다는 건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 아닌가요? 만약, 일이 터지고 난 다음에 정보를 푼다면, 지금 이 자리에 왔던 비걸개 장로님께서 과연······.”
말끝을 흐렸다.
시후의 뒷말을 예상하지 못할 비걸개가 아니었기에 표정을 굳혔다.
“협박하는 건가?”
“설득하는 거죠. 제가 바라는 건 단 하나입니다. 강호의 안녕과 평화. 벌레라는 녀석들을 나타나는 족족 잡아 죽여야지, 알을 깔 때 일망타진하겠다는 생각을 하진 않잖아요?”
옷에 묻은 똥물을 닦듯 살살 달래주기도 하면서 비걸개를 설득했다.
“어르고 달랜다고 넘어갈 정도로 허투루 살진 않았네. 하지만, 자네의 진심은 확실히 와닿았어.”
“그 말씀은?”
“날이 밝는 대로 사람을 모아 달라고 정진에게 말하지.”
‘다행이다.’
비걸개의 방을 나온 시후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잘 해결됐다’라는 안도감과 함께 불안감도 찾아왔다.
사소한 일 하나도 이렇게 거대한 줄기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것.
지금의 일로 인해 뒤에는 어떠한 일이 벌어질지, 시후는 짐작도 할 수 없었다.
중반을 넘어 후반까지 간다면, 아주 큰 틀만 빼고 다 비틀어질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런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 매번 이렇다면 여간 귀찮을 게 아닐 터.
시후에게도 게임 속에서의 목표가 생겼다.
“최소한 구주신협이 차지했던 위치 정도는 필요하겠어.”
* * *
다음날, 비걸개는 자신이 한 말을 지켰다.
하오문에서 시후가 건네준 증표를 들이민 것도,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던 자들을 돌리는 데에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덕분에 반나절도 걸리지 않아 각 문파에 소식이 전해졌고 소림과 무당, 종남과 화산은 사람을 먼저 보내기로 했다.
이게 불과 이틀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정의맹에 가입하셨습니다.]
[소속이 ‘현무단’으로 배정됩니다.]
시후도 비록 임시지만, 정의맹에 가입했다.
그 말인즉슨, ‘활약할 여지가 있다’라는 뜻이었다.
표면적으로는 그랬다.
“우린 이게 전부야?”
모인 현무단의 인원을 바라보던 제갈려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시후도 덩달아 주변을 둘러봤다.
현무단에 속한 문파는 많았다.
곤륜파, 점창파, 아미파, 청성파, 사천 당가, 광동 진가, 마지막으로 제갈세가까지 총 일곱.
하지만, 멀리 떨어져 있는 곤륜파나 점창파에선 사람이 올 수 없었다.
그리고 광동 진가도 해적들의 수탈이 심해진바, 해남파와 같이 해적 소탕에 여념이 없다고 했다.
결과적으로 아미와 청성 그리고 사천 당가가 전부였다.
그마저도 거리가 문제가 되어, 소림사가 아닌 동정호로 바로 오도록 했다.
덕분에 소림사에 모인 현무단은 각 문파에서 대표로 온 인물들과 두 사람이 전부였다.
“그런데 왜 제갈세가도 안 온 거야? 이유를 알고 있어?”
“왔는데?”
“어디?”
시후의 질문에 제갈려는 길쭉한 손가락으로 자신의 가슴께를 가리켰다.
그리고 이어지는 특유의 저 우쭐거리는 표정.
뭐라 딴지를 걸고 싶었지만, 이런 집단전에서 제갈려의 진법이라면 분명 자신보다도 더 큰 도움이 되긴 할 것이다.
인정하기 싫었다.
그렇기에 시후는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쯧.”
다만, 습관적으로 혀를 가볍게 찼다.
그 소리를 들은 제갈려가 도끼눈으로 시후를 바라봤다.
“뭐야 그 반응은?”
“아무것도.”
“혀 찼잖아!”
“혀 찬 게 아니라······. 아, 그래. 아침에 먹었던 고기가 이 사이에 꼈나 봐. 쓰읍, 이거 잘 안 빠지네.”
새끼손가락으로 이를 후볐지만, 그건 시후의 실수였다.
“절밥에 고기가 어딨어!”
“그럼 나물인가?”
시후가 천연덕스럽게 대꾸하자 제갈려는 정강이를 걷어찼다.
“윽······. 야!”
바닥에 주저앉아 정강이를 문지르던 시후는 재갈려를 붙잡기 위해 엉거주춤 일어났다.
하지만, 제갈려는 어느새 목일자의 곁에 서 있었다.
“두 사람은 사이가 좋군.”
“차라리 지옥에 가라고 악담을 하세요.”
“껄껄껄, 그렇게 말할수록 사이가 좋은 법 아니겠나? 뭐 자네가 그렇게 우긴다면 그렇다고 하세.”
“우기다니요······.”
목일자의 대답에 시후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한숨을 내쉬는 겉모습과 달리, 시후는 이 상황이 너무나도 좋았다.
지금의 목일자는 약했다.
남궁천은커녕 자신보다도.
하지만, 목일자는 좋은 카드다.
남궁천이 남궁무의 죽음이라는 비극적인 장치로 각성한다면, 목일자는 유운삼절기를 익히며 자연적인 각성을 하는 인물이니깐.
시후는 그런 목일자의 마음을 얻기 위해 노력해야 했지만, 용봉지회에서 취하연과 했던 비무가 아주 큰 도움이 됐다.
정확히는 남궁천이 조언이지만.
시후는 슬쩍 동남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남궁천은 잘 견디고 있을까.
“곧 화산과 종남이 도착할듯하니 잠시 기다리게.”
시후의 정신이 다른 곳에 팔렸음을 알아차린 것인지, 아니면 본래 자리를 뜨려고 했는지, 목일자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주작단이 있는 곳으로 가자 시후는 제갈려를 바라봤다.
지은 죄가 있으니, 제갈려는 눈동자를 굴리며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야! 네가 먼저 시작했어! 소리 지를 거야! 오지 마!”
“지금도 소리 꽥꽥 지르고 있는 거 알고는 있냐? 안 때릴 테니까 이리 와 봐.”
“때리면 넌 삼대가 고자야!”
고자라.
‘홍설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했지.’
그래서 시후가 본때를 보여 줬지만.
“매운맛을 보여 줘야 정신을······. 아니지. 어휴, 쓸데없는 소리에 나까지 휘말리네.”
시후는 머리를 뽑아낼 듯 흔들며 쓸데없는 생각을 털어냈다.
그 사이, 제갈려의 손에는 천로수변이 들려 있었다.
“야, 집어넣어.”
“무슨 맛을 보여 줘? 너도 맛 좀 볼래?”
“그래, 내가 잘못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시비도 시후가 걸었으니, 순순히 잘못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에 제갈려는 입술을 잠시 삐쭉이더니, 천로수변을 품에 집어넣었다.
그 모습을 보니 일전에 펼칠 수 있는 진법만 물어보고 어영부영 넘어갔던 일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네가 제대로 된 진법을 펼치는 걸 본 적이 없네.”
“뭐? 지금 바로 보여 줘?”
제갈려가 다시금 눈을 부라리며 천로수변을 꺼내 들었다.
그에 시후는 급히 양손을 내저었다.
“아니, 네 능력을 정확히 알고 싶어서 그렇지. 그래야 나중에 도움이라도 청할 거 아냐?”
“흥, 네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다 할 수 있으니깐 걱정하지 마!”
또 나왔다.
특유의 저 우쭐거리는 표정.
시후는 제갈려의 엉덩이를 걷어차 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인내심을 발휘하며 꾹꾹 눌러 담았다.
“그럼······. 사람뿐만 아니라 배도 가둘 수 있냐?”
“못할 건 없지.”
가벼운 어투였지만, 눈빛과 태도를 보아하니 진심인 듯했다.
덕분에 시후의 머릿속에선 수만 가지 계획이 나타났다 지워지길 반복했다.
“야, 그럼······.”
시후는 생각이 정리되자 제갈려에게 귓속말을 건넸다.
잠시 고민하더니, 제갈려는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시후는 환하게 웃으며 제갈려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너, 나랑 일 하나 같이 하자.”
- 53화에 계속 -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