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49화 도화선 (2)
시후가 하오문에 건네준 정보는 정의맹에서 하오문의 입지를 굳건히 다질 수 있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절세 무공을 받을 정도는 아니었다.
“‘흑창’은 안돼.”
전여린이 단호하게 말했다.
흑창은 군(軍)의 무공이었지만, 완성도에서 차이가 있었다.
일반적으로 가장 천시받는 무공은 거지도, 백정도 아닌 군의 무공이었다.
다수와 다수의 싸움을 주로 펼치는 그들의 무공은 옆 전우를 믿고 전방으로 몰아붙이는 무공이 대다수였다.
덕분에 군의 무공은 ‘백 명이 모이면 능히 천명을 상대할 수 있으나, 한 명으로는 두 명조차 상대하지 못한다’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특히나 창법은 더욱 심각한 수준이었다.
찌르기에 특화된 그들의 창은 심각할 정도로 전방 공격에만 편향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걸 깨부수고 완성한 창술이라 평가받는 게 바로 ‘흑창’이었다.
“그럼 참월창이나 귀곡단창은 가능한가요?”
“둘 다 줄 순 없지만, 하나라면 가능하지.”
하나라는 말에 시후는 두 무공을 저울대에 올려놨다.
둘 다 절정 등급의 무공이며 공격적인 무공이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참월창’이 정파의 성향이라면 ‘귀곡단창’은 사파의 성향이 강했다.
방어적인 색채가 뚜렷한 ‘십창’을 보조로 쓰고, 두 무공을 공격적으로 사용한다는 가정을 한다면, 귀곡단창이 조금 나을 것이다.
하지만, 정의맹에서 활동해야 하는데, 사파의 느낌을 풍기는 귀곡단창을 사용하기엔 조금 꺼림칙했다.
“참월창으로 주세요.”
“지금 바로 가져다 줘?”
“어차피 오늘 요양해야 할 것 같으니 내일까지만 가져다 주세요.”
“속 좁긴.”
피식 웃음을 터트린 전여린이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지만, 시후는 아직 물어볼 게 남아 있었기에 그녀를 잠시 붙잡았다.
“그보다, 요즘엔 특이한 일 없어요?”
“특이한 일?”
“아, 아니에요. 이건 하오문에서 모르겠네.”
자신의 말에 여린이 인상을 썼다.
“어쭙잖은 도발하지 말고 말해.”
속내를 간파당한 시후는 헛기침을 해댔다.
“흠흠, 최근에 녹림과 수로채의 채주가 바뀌었잖아요.”
“최근은 무슨, 거의 한 달은 됐지.”
“아무튼, 처음에는 다소 거칠던데 이젠 잠잠해졌나 봐요?”
“그럴 리가. 겨울이 오기 전에 바짝 활동해야 하는······ 데? 그러고 보니 별다른 피해가 있다는 소식은 안 들리네?”
시후의 말에 여린은 뭔가 이상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역시.’
시후의 기억은 틀리지 않았다.
오른손으로 관자놀이를 툭툭 두드리던 전여린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천벽!”
“예, 누님.”
어디에 있었던 걸까.
시후는 자신의 뒤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황급히 뒤돌아봤다.
그곳에는 일전에 제갈마혁과 독대하며 시후에게 전여린의 편지를 전해 줬던 노인이 서 있었다.
“최근 녹림과 수로채의 행보는?”
“쩝······. 저 아이의 말대로 녹림과 수적 놈들의 움직임이 심상치는 않습니다.”
“왜 나는 그 이야기를 못 들었지?”
“누님이 아이들을 가르친다고 정신이 없었으니 그렇지요.”
천벽이라 불린 노인의 대답에 전여린은 앓는 소리를 내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으니깐.
“얼마나 심상치 않길래 그래?”
“녹림채에선 각 채주들이 한곳으로 은밀히 모이고 있었습니다.”
그의 말에 여린은 뒤통수를 거하게 맞은 표정을 지었다.
자금성이 발칵 뒤집혀 몸을 웅크리고 있어도 모자랄 판에, 몰래 움직인다는 말은 도무지 믿기 힘들었다.
하지만, 그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수적 놈들은 배로 이동하여 정확히 파악이 힘들긴 하지만, 기(旗)도 걸지 않은 배가 몇 척씩 움직이고 있습니다.”
“겁도 없군.”
“무슨 일을 벌일 것인지 몰라서 예의 주시만 하는 실정입죠.”
“자금성에서 생긴 일을 모르는 게 아닐까?”
“그렇다고 생각하기엔 녹림과 수로채의 선물을 받는 관리들이 한둘이 아니잖습니까?”
썩은 관리는 어디에나 있기 마련이다.
그중 녹림과 수로채에게 금품을 받으며 정보를 제공해 주는 관리도 한둘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이번 사태로 숨을 죽이라고 먼저 경고해 줬을지도 몰랐다.
그런데도 겁 없이 움직인다니.
믿기 힘든 이야기가 분명했다.
“골치 아프네. 그래서 모이는 지점은?”
“동정호로 예상됩니다.”
“두 세력 모두?”
여린의 질문에 천벽은 고개를 끄덕였고, 여린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손을 잡았군.”
가볍게 내뱉은 말이었지만, 그 말의 무게는 절대 가볍지 않았다.
전여린과 천벽, 두 사람은 곧장 일미각을 빠져나갔고, 열린 문틈 사이로 차가운 바람이 들어왔다.
마치, 이번 겨울은 조금 더 빨리 찾아올 것이라 말하는 것처럼.
* * *
“가끔 정주로 찾아와서 얼굴이나 비춰.”
“시간 나면요.”
“없는 시간을 내서라도 와야 할 거 아냐? 어휴, 저렇게 여자 맘을 몰라서야······. 이거나 받고 꺼져.”
[참월창을 획득했습니다.]
시후는 자신을 향해 던진 비급을 낚아챈 뒤 품에 넣었다.
비급을 던진 전여린은 곧바로 옆에 서 있던 홍설의 등을 떠밀었다.
갑자기 시후의 앞으로 성큼 다가오게 된 홍설의 얼굴은 홍시처럼 빨갛게 달아올랐다.
‘이렇게 수줍음이 많은데, 용케도 그런 도발을 날렸던 거군. 그보다, 기녀 생활은 어떻게 한 거람?’
허튼 생각을 하는 시후에게 홍설은 쭈뼛거리며 다가가, 허리 뒤편에 숨겨 놓았던 누비 목도리를 건네주었다.
“날이 제법 쌀쌀한데 걸치신 옷이 얇아 보여서, 어젯밤 잠시 시간을 내어 준비해 봤어요.”
‘그럴 리가.’
당장에라도 날아갈 듯한 용이 수놓아진 모습을 보니, 하룻밤 사이에 준비할 물건은 절대 아니었다.
하지만, 따져서 무엇 하겠는가.
“안 그래도 말 위에서 제법 추웠는데······. 고마워.”
시후는 목도리를 받아들자마자 목에 둘둘 감았다.
목을 감싸자 옷깃 사이로 빠져나가는 열기가 줄어듦이 확연히 느껴졌다.
“이제 어디로 가시나요?”
“음, 일단 무강으로?”
“그다음은요?”
“상황 봐서 움직이겠지만, 아마도 남쪽으로 내려갈 거 같아.”
시후의 대답 이후에 딱히 이어나갈 말이 없는지 홍설은 쭈뼛거리고 있었다.
보다 못한 전여린이 다시금 끼어들었다.
“무강은 왜?”
“고칠 게 있어서요.”
시후의 대답에 그녀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그 창을 손볼 곳이 있을까? 그 창은 더 고칠 만한 게 없을 거 같은데?”
“아, 이 친구 말고, 다른 친구가 있거든요.”
“다른 친구?”
“있어요. 오랫동안 자느라 힘을 잃은 친구.”
아리송한 말을 내뱉은 시후는 방긋방긋 웃고 있었고, 그와 반대로 제갈려는 잔뜩 굳은 얼굴로 말에 올라탔다.
시후는 말을 타고 가면서 연신 뒤를 힐끔거렸는데, 홍설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다음에는 혼자 몰래 찾아와야겠다.’
그런 음흉한 생각을 하는 사이, 앞에서 말을 몰던 제갈려가 속도를 늦추었다.
시후도 고삐를 슬쩍 잡아당기며 속도를 늦추었다.
“언제부터 알았어?”
“눈치를 못 채는 게 이상하지 않아? 이렇게 대놓고 티가 나는데?”
시후의 손가락이 향한 곳은 제갈려의 말 옆에 매어 둔 봇짐이었다.
보통 필요할 때마다 물건을 산다고 해도, 급할 때 입어야 할 여벌의 옷 등은 가지고 다녀야 했다.
다만, 그렇다고 생각해도 제갈려의 봇짐은 제법 컸다.
그리고 쓸데없이 길었다.
마치 기다란 물건이라도 들어있는 것처럼.
“계속 저대로 둘 것도 아니잖아?”
“신경 쓰지 마!”
“내가 달라고 한 것도 아니고,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 깨우자는 건데 그게 싫어?”
“싫어!”
“그럼 평생 저대로 보관할 거야?”
시후의 질문에 제갈려는 맹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떼쓰는 다섯 살짜리 조카 같군.’
시후는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럴 거면 조운지묘를 왜 턴 거야?”
“쉿! 쉿!”
시후의 퉁명스러운 말에 제갈려는 입 앞에 검지를 세우곤 다급히 주변을 둘러봤다.
사람은커녕 개미 새끼 하나 보이지 않았지만, 제갈려는 그 이야기를 꺼내지 말라는 듯 눈을 부라렸다.
“진짜 평생 저대로 둘 거야? 아니잖아. 그럴 거면 꺼내올 이유가 없었을 테니깐.”
“누구한테 저걸 맡겨?”
“무강에 가면 방법이 있을걸?”
“연철장이라고 이걸 깨울 수 있을 거 같아?”
“연철장?”
“흥, 모르는 척하긴. 연철장에 들러서 이걸 보여 주니, 녹슨 상태만 보고 바로 고개를 내젓던데?”
‘아, 무강에 있는 가장 유명한 대장간을 말하는 거군.’
제갈려의 말에 시후는 고개를 내저었다.
“내가 생각한 곳은 연철장이 아닌데?”
“그럼? 무강에서 가장 기술이 좋은 곳이라면 연철장밖에 더 있어?”
“있어.”
시후의 대답에 제갈려는 두 눈썹이 닿을 정도로 인상을 찌푸렸다.
그 반응에 시후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객잔 안 가봤지?”
“그 조그마한 마을에 객잔이 있어? 아니, 이게 중요한 게 아니지. 객잔을 왜 간다는 거야?”
난데없는 이야기에 제갈려가 짜증을 부렸다.
하기야, 자신이 그녀의 입장이라면 마찬가지겠지.
“객잔에 저걸 깨울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어떡할래?”
“내가 네 시녀라도 하면 되잖아!”
유들거리는 시후의 태도에 제갈려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좋아, 시녀로 부려주지.’
* * *
근 500리에 달하는 거리를 하루 만에 주파하는 건, 말을 탄 사람뿐만 아니라, 말 못 하는 말들도 힘이 들 수밖에 없었다.
이를 증명하듯 제갈려가 타고 있는 말은 온몸에 흰 거품 같은 땀을 흘리고 있었다.
“시녀 씨, 나중에 말 목욕 좀 시켜 줘야겠어.”
“쓸데없는 헛소리 말고 안내하기나 하지?”
두 사람의 신경전은 무강까지 이어졌다.
해가 저물어버린 뒤라 그런지 무강은 고즈넉했다.
천천히 말을 몰아 무강 안쪽까지 쭉 들어서자, 예의 그 호수를 끼고 있는 객잔이 눈에 들어왔다.
시후는 턱짓으로 눈에 보이는 객잔을 가리켰고, 제갈려는 의심쩍은 눈초리로 건물로 다가갔다.
말에서 훌쩍 뛰어내린 그녀가 건물 이곳저곳을 둘러봤지만, 현판조차 없는 곳이 객잔이라 생각되지 않는지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갈려의 의구심 어린 표정은 문을 두들기면서도 계속 이어졌다.
“누구슈?”
문 너머로 목소리와 함께 발소리가 들려오더니, 주인아주머니가 문을 벌컥 열고 나왔다.
그 열린 틈새로 보이는 광경은 아무리 보아도 일반 가정집과 흡사했다.
승리를 확신한 제갈려는 방긋방긋 웃으며 질문을 던졌다.
“아, 여기가 객잔이 맞나요?”
“맞으니 어여 들어와요. 아, 말은 묶어 둬야 할 테니 따라와요. 요기 뒤로 돌아가면 헛간이 하나 있는데······. 그보다 여기 이 잘생긴 총각은 어디서 본 거 같은데?”
“한 달 정도 전에 이곳에서 하루를 묵었죠.”
“어쩐지! 이 무강 촌구석에는 인물이 없는데, 이리 훤한 총각이 왜 눈에 익나 했어! 그땐 혼자더니 참한 아가씨도 하나 데려왔네? 아가씨도 이리 따라와요.”
객잔이라는 아주머니의 말에 힘이 빠진 제갈려가 발을 터덜거리며 따라왔다.
아주머니가 말했던 헛간은 이전에 시후가 무기를 받았던 창고였다.
문이 활짝 열려 있는 헛간에는 여전히 무기들이 걸려 있었다.
“이 양반이 문을 또 안 닫아 놨네······. 자, 여기 묶어 두면 말들이 알아서 먹고 마실 수 있겠지.”
제법 기다란 줄까지 건네주었기에, 말들을 묶여 있기보다는 거의 방치된 수준으로 헛간 주변을 맴돌았다.
제갈려는 시후의 눈짓에 면포를 빌려 말들의 땀을 닦아 주었다.
“먼저 들어갈 테니까 말들 감기 안 걸리게 잘 닦아 주고 와.”
대답이 없었지만, 대답한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생긴 건 영락없는 규수 집 아가씨 같은데, 총각 말을 기막히게 잘 듣는구먼?”
“그럴 일이 있었거든요.”
시후는 씩 웃으며 객잔으로 들어섰다.
잠시 안을 둘러본 시후는 주인아저씨가 보이지 않자 입구에서 들어오면 잘 보이는 위치에 자운유성창을 내려놓았다.
곧이어 잔뜩 젖은 면포를 손에 쥔 제갈려가 객잔으로 들어섰다.
시후의 옆에 털썩 앉은 그녀는 잠시 후 애처로운 눈빛을 보내기 시작했다.
“없던 일로 하면 안 될까?”
“못 깨울 수도 있잖아. 희망을 잃지 마.”
하지만, 제갈려가 그런 생각을 하지 않으리란 것은 잘 알고 있었다.
창고에 일반 농기구처럼 걸려 있는 무기들을 봤으니 말이다.
주방에선 저녁을 준비하는 아주머니의 칼질 소리가 들려왔다.
톡톡톡 채소 써는 소리에 슬슬 졸음이 몰려올 지경이었다.
다소 나른한 표정으로 객잔 입구를 바라보는 사이, 문 너머 인기척이 느껴지더니 주인아저씨가 문을 벌컥 열었다.
“헛간에 웬 말들이 묶여 있나 싶더니, 손님이 왔군?”
그는 식탁에 앉아 음식을 기다리는 두 사람을 보고 호쾌하게 웃으며 외투를 벗었다.
하지만, 그는 벽에 외투를 걸어둘 수 없었다.
그곳에는 자운유성창이 놓여 있었으니까.
- 50화에 계속 -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