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48화 도화선 (1)
시후는 손에 들린 흑련, 비영, 무영의 세 증표를 손에 들고 고민에 빠졌다.
“뭘 고민해? 개방에 넘겨주는 게 더 좋지 않겠어?”
개방과 하오문.
무당과 소림이 정파의 양대 기둥이라 한다면, 개방과 하오문은 중원 각지에 흩어진 정파의 눈과 귀라고 할 수 있었다.
활동하는 영역이 겹치진 않지만, 하층민이 주를 이루는 하오문과 거지로 이뤄진 개방은 묘한 알력이 있었다.
아무리 두 문파가 정파라고 하더라도, 비슷한 두 집단이라면 앞서나가고자 하는 욕구가 있기 마련.
분명 넘겨주는 쪽과는 친분이 확 올라갈 것이다.
물론, 그와 반대쪽은 포기해야겠지만.
“개방이라······.”
“너 안 그래도 독안비객과 친분이 있다며? 그럼 더 잘됐지.”
개방은 으뜸 패라 할 수 있다.
정파에서도 열 손가락이라 칭할 수 있는 구파일방에 들어 있었으니깐.
게다가 개방과 친분을 쌓는다면, 질 높은 고수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물론, 하오문에는 불노괴 전여린이 있지만, 개방의 고수들을 생각한다면 당연히 무게는 개방 쪽으로 쏠릴 것이다.
이성적으로 생각한다면 그러했다.
한참을 고민하던 시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냐, 하오문에 줄래.”
“왜? 물론 하오문과 친분을 쌓아서 나쁠 건 없지만, 개방과 비교하면 급이 달리잖아.”
“하오문도 나쁘지 않아.”
여러 가지를 따져보았다.
하지만, 지금 여러 가지 사건들을 빵빵 터트리려고 하는 시점에서 가장 중요한 건, 개인의 무력이었다.
현재의 무공, ‘십창’만으로는 이번 사건들을 넘기기 힘들 것이다.
측천무후의 황릉으로 가기 전까지 사용할 만한 쓸 만한 무공을 확보해야 했다.
하지만, 제갈려는 다소 아쉬운 듯 인상을 찌푸렸다.
“네 생각이 그렇다면 말리진 않겠지만, 확실히 아쉬운 선택이야.”
“당장은 그렇겠지.”
“흥, 미래라고 다를까.”
‘다르다, 이것아.’
지금 성장하고 있을 홍설과 초설을 생각한다면, 추후 하오문은 시후에겐 개방 못지않은 도움이 될 것이 분명했다.
시후는 콧방귀를 끼는 제갈려를 뒤로한 채 말에 올라탔다.
“가자.”
말에 올라타지 않는 제갈려를 재촉했지만, 그녀는 뚱한 얼굴로 바라볼 뿐이었다.
“혼자 다녀와.”
“내가 어디 가는 줄 알고?”
“북경반점 가는 거 아냐?”
그녀의 대답에 시후는 피식 웃었다.
‘착각해도 참, 단단히 하고 있군.’
“내가 왜 총타에 바로 넘기겠어? 하오문은 정보를 얻어오는 사람이 대접받는 곳인데, 나와 친분이 있는 사람을 줘야지.”
“친분? 아, 그때 편지를 보낸 불노괴?”
“아냐.”
“그럼?”
“다른 사람이 있어.”
시후의 말에 제갈려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이전의 그녀에게선 한 번도 본 적이 없던 눈빛이었다.
“말이나 타.”
제갈려는 실실 웃으면서 말에 올라탔다.
마치 비웃는 것 같기도 하고, 놀리는 듯한 웃음에 시후는 살짝 기분이 나빠졌다.
“왜 웃는 거야?”
“그거 넘겨줄 사람, 여자지?”
“그런 거 아냐.”
“그런 게 뭐야?”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라고.”
“내가 뭘 생각하는 줄 알고?”
‘건수 하나 잡혔군.’
시후는 말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며칠간 마구간에만 있느라 제대로 달리지도 못했을 테지만, 시후의 흑마는 시원시원하게 앞으로 나아갔다.
제갈려도 곧바로 말에 올라타며 소리쳤다.
“어디까지 갈 건데!?”
“정주!”
* * *
“죽을 거 같다······.”
제갈려는 말 위에 엎어져 허리를 연신 두들겼다.
연이어 미골을 강타한 충격에 시후도 괴로운 건 마찬가지였지만,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침대가 그립지? 객잔으로 갈까?”
“아니, 일단 밥부터.”
제갈려의 말에 시후는 잠시 딴짓하는 척을 하며 지도를 열어 보았다.
곧바로 남궁천이 정주에 다시 들를 일이 있다면 꼭 가 보라고 했던 ‘일미각’을 찾았다.
“뭐 해?”
“어? 아, 날파리가 날아다니는 것 같아서. 밥 먹으러 가자.”
지도를 힐끔거리며 도착한 일미각의 규모는 매우 작았다.
일 층짜리 건물에 고작 식탁 열 개가 전부인 음식점이었다.
그마저도 딱 두 자리만 남아 있었다.
“창가 쪽 괜찮으십니까? 이쪽으로 오시죠. 오늘 정말 잘 오신 겁니다. 이맘때 딱 한 번만 들여오는 재료가 있는데, 그게 바로 오늘이지 뭡니까? 들어는 보셨습니까? 해삼을 이용해서 만든 총폭해삼(蔥爆海蔘)은 맛은 물론이고, 기력 회복에 탁월합니다.”
“그럼 그거랑 동파육 한 접시, 그리고 만두 세 접시.”
시후가 주문한 양은 아무리 배고프다고 한들, 둘이서 먹기엔 터무니없이 많은 양이었다.
주문을 받은 점소이가 주방으로 들어가자 제갈려는 인상을 찌푸린 채 말을 걸었다.
“철우가 있다고 착각하는 건 아니지?”
“너도 배고픈 거 아냐? 충분히 먹겠지.”
“내가 먹어 봤자 얼마나 먹는다고.”
“웬만한 성인 남자보다 더?”
시후가 제갈려를 이죽거리며 놀리는 사이, 찜기에서 꺼내기만 하면 되는 만두가 가장 먼저 나왔다.
수북이 쌓인 만두를 보니, 조금 많이 시켰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 생각은 만두를 한입 베어 물자 싹 사라졌다.
연신 뜨거움 김을 뿜어내며 허겁지겁 먹어 재끼자, 제갈려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시후를 바라봤다.
“쓸데없이 맛있는 척하긴. 이런 가게에서 파는 음식이야 다 똑같지.”
콧방귀를 뀌던 제갈려는 만두를 반으로 찢어 입안에 넣었다.
그리고 제갈려의 침묵이 이어졌다.
하지만, 그 침묵은 짧았다.
서로 경쟁하듯 입으로 만두를 쑤셔 넣던 두 사람이었지만, 마지막 만두만큼은 사이좋게 반으로 나눠 먹었다.
“만두가 이렇게 맛있다면, 다른 음식을 얼마나 맛있는 거지?”
“천이 형님이 만두는 꼭 먹으라고 하셨거든.”
“아······ 그렇구나.”
남궁천의 이야기를 꺼내자 제갈려의 표정이 다소 머쓱해졌다.
하기야, 들려오는 소식에 의하면 아직 남궁무의 몸을 찾지 못했다는 말이 있었다.
덕분에 두 사람의 대화는 멈추었고, 긴 침묵이 이어졌다.
“와! 사부님, 여기 이 말 좀 봐요. 엄청나게 커요.”
그러는 와중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목소리가 창문 너머로 들려왔다.
어디서 들어봤는지 고민하는 사이, 사부라는 자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한혈마의 피가 섞인 말이구나. 상당히 비싼 말일 텐데, 겁도 없이 이런 곳에 묶어 두다니.”
문제는 이 사부라는 작자의 목소리를 시후가 확실히 알고 있다는 점이었다.
끼이익.
시후가 앉은 창가 쪽 자리는 입구에서 그다지 머지않았기에 들어오는 사람을 바로 볼 수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총 세 명이었고, 모두 시후가 아는 인물이었다.
전여린은 고개를 갸웃거렸고, 초설은 깜짝 놀란 표정이었다.
그리고 넋이 나간 듯 시후를 바라보던 홍설은 환하게 웃으며 곁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세 사람의 등장을 모르는 제갈려는 허리가 땅기는지 연신 허리를 두들기고 있었다.
“아휴, 빨리 먹고 침대에 누워야지. 너 때문에 허리가 아파 죽겠어. 정주에 왔으니 당분간 허리 아플 일은 없겠지?”
다가오던 홍설이 우뚝 멈춰 섰다.
딱딱하게 굳어진 표정을 보아하니, 제갈려의 말을 다소 오해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총폭해삼 나왔습니다.”
해삼은 바다에 나는 삼이라 불릴 만큼 기력 회복에 좋다.
정주까지 쉼 없이 달리면서 소진한 기력을 회복하고자 시켰지만, 홍설의 얼굴을 보니 오해가 더욱 커진 듯했다.
눈물이 그렁그렁해진 홍설이 몸을 돌려 가게를 뛰쳐나갔다.
갑작스러운 홍설의 반응에 초설이 뒤늦게 가게를 빠져나갔다.
그와 동시에 자신을 내려다보는 전여린의 싸늘한 시선에, 시후는 모든 것을 내려놓은 듯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 * *
오해를 푸는데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그 시간 동안 얻은 건, 몸과 두 눈에 새겨진 시퍼런 멍이었다.
그 원흉이라 할 수 있는 전여린은 시후의 앞에서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삶은 달걀을 건네주었다.
“이걸로 문지르면 조금 나을 거다.”
전여린이 준 달걀로 눈두덩이를 문지르자, 아릿한 통증이 몰려왔다.
제갈려에게 받은 동경(銅鏡)으로 얼굴을 확인하자, 시후의 입에선 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한숨을 푹푹 내쉬며 제갈려에게 동경을 다시 돌려주었다.
“내일 아침에 눈도 못 뜨겠네.”
“달걀만 잘 문질러도 눈은 떠질 거야.”
“불난 집에 부채질해요?”
“오해해서 미안하다고 하잖아.”
“사람을 죽여 놓고도 사과하면 끝인가? 세상 참 편하게 사시네.”
여린의 계속되는 사과에도 시후 계속해서 그녀를 몰아붙였다.
마음의 빚을 만들기에 딱 좋은 기회였으니깐.
하지만, 시후의 생각보다도 그녀는 훨씬 뻔뻔했다.
“진짜 죽여 줘?”
그러나 피부를 저릿하게 눌러 오는 살기에도 시후는 고개를 빳빳이 들었다.
여기서 물러서면 이전과 같이 얕보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뭐, 사람이 살다 보면 오해할 수도 있죠.”
악양루에서도 그렇고, 맞은 게 억울하지만 어쩌겠는가, 약자가 참아야지.
시후의 빠른 태세 전환에 그녀는 실소를 흘리며 꽉 움켜쥐었던 주먹을 폈다.
곧 시후의 맞은편 의자에 앉은 그녀는 남은 삶은 달걀을 탁자에서 빙글빙글 돌렸다.
“자금성에서의 이야기는 잘 들었어. 제법 머리를 굴렸던데?”
‘벌써 여기까지 이야기가 퍼진 건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바라보자 전여린은 피식 웃었다.
“우리 하오문 총타가 북경에 있다는 사실을 잊으면 곤란해.”
얼굴에 감정이 드러났던 탓일까.
시후는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계속 달걀을 문질렀다.
“덕분에 우리 아이들도 다섯이나 잡혀갔지.”
“응? 왜요?”
“직접적은 아니지만, 단순 운반책으로 얽힌 아이들이 있었어. 일반적인 사건이라면 조사가 끝나면 풀려났을지도 모르지만, 워낙 큰 사건인지라······.”
고개를 가로젓는 전여린의 모습에서 그들이 살아남긴 힘들다는 걸 알아차렸다.
시후가 북경으로 달려가 첨언이라도 한다면 살아날 수 있겠지만, 생면부지인 그들을 위해 그럴 필요가 있을까.
시후는 그녀의 말을 못 들은 척 외면했고, 그녀도 그 이야기를 더 꺼내진 않았다.
“그보다 왜 정주까지 왔어? 내가 보낸 서찰을 보고 왔을 거 같진 않은데.”
“아, 홍설 앞으로 줄 게 있어서요.”
“앞으로? 말하는 게, 선물이 아니라 정보를 주겠다는 거 같은데?”
전여린의 말에 시후는 고개를 끄덕이며 세 개의 패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이번 일에 가장 핵심 인물이 가지고 있던 물건이에요. 이 물건들을 홍설의 이름으로 제공하도록 하죠. 아, 그리고 이 패는 제가 가지고 있어야 하니 탁본만 뜨고 넘겨주세요.”
시후는 자신이 써야 할 비영 이십삼 호의 증표를 가리켰다.
여린은 증표에 당장이라도 코를 박을 것처럼 가까이 가져댔다.
조심스럽게 증표를 확인하던 그녀의 눈이 반짝거렸다.
[복합 임무 ‘준동’이 발생합니다.]
[불노괴 전여린의 호감도가 가신지인(可信之人)(52)으로 올랐습니다.]
[하오문의 정식 문도로 가입할 수 있는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하오문 지부 방문 빛 고위 간부와 대화 시 ‘만민의 눈과 귀’ 하오문에 가입할 수 있습니다.]
“하오문에 들어오는 게 어때? 요런 이쁜 짓 하는 걸 보면, 마음이 없는 건 아니지?”
“좋게 봐 주시는 건 감사하지만······.”
‘댁처럼 폭력적인 사람이 있는 곳에 들어가긴 싫네요.’
이 말을 입 밖으로 내보냈다간 끔찍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 분명했다.
싫다는 티를 내지 않는 수준에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게다가, 어디라도 한 곳에 얽매이면 조직의 흐름에 이끌려가기 마련이다.
“그보다는 살펴보고 싶은 무공이 있는데 가능할까요?”
“음, 적당한 수준의 무공이라면 가능하겠지만······.”
손에 쥔 철 패를 만지작거리는 모습을 보니, 무공을 위해 치러질 값은 자신이 전해 준 정보 값으로 될 것도 같았다.
예상했던 반응에 시후는 미리 생각해 둔 무공의 이름들이 적힌 쪽지를 건네주었다.
「흑창(黑槍), 참월창(斬月槍), 귀곡단창(鬼哭斷槍).」
- 49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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