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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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화 자금성 (4)
이튿날.
다시 마주한 명진제의 얼굴은 상당히 푸석푸석해 보였다.
다만, 자신을 불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말이 없었다.
덕분에 불편한 침묵을 이어가던 시후는 슬슬 저리기 시작한 허벅지를 엄지로 꾹꾹 찔렀다.
한참 동안 이어진 침묵을 깨트린 건 그의 손짓이었다.
곧 뒤편에 시립 중이던 팽충정이 고풍스러운 상자 하나를 시후 앞에 내려놓았다.
“보모상궁의 방에서 나온 물건 중 정체를 알 수 없는 물건이 나왔다. 한 번 살펴보거라.”
시후는 조심스럽게 상자를 열었다.
안에는 세 가지 철 패가 들어있었다.
눈치를 살피던 시후는 곧 손을 뻗어 패를 움켜쥐었다.
[‘흑련 팔십칠 호의 증표’를 얻었습니다.]
자세히 보니 철 패에 연꽃 그림이 새겨져 있었다.
혹시나 한 마음에 다른 것들도 손에 쥐어보았다.
[‘비영 이십삼 호의 증표’를 얻었습니다.]
[‘무영 칠 호의 증표’를 얻었습니다.]
[흑련회 등급의 정보를 손에 넣었습니다. 해당 패를 정의맹 측에 넘길 시 ‘준동’이 발생합니다.]
생각지도 못한 물건을 얻었다.
이 ‘준동’이 발생하면 수면 아래 잠들어있던 흑련회가 고개를 치켜들 것이다.
다만, 이 패를 정의맹 측에 넘기면 ‘준동’이 시작된다는 말이 마음에 걸렸다.
명진제가 준다고 말한 건 아니었으니깐.
패들을 유심히 살펴보는 척하며 어떻게 하면 이걸 받을 수 있을지 고민했다.
하지만, 자신을 바라보는 명진제의 시선이 제법 싸늘해졌기에 시간을 더 끌긴 어려웠다.
“확신은 못 하지만, 모종의 무리가 서로의 직위를 증명하는 패로 생각됩니다.”
“느낌이더냐? 아니면 확신이더냐?”
“반반입니다.”
“흠······.”
처음에 이렇게 말을 했다면 감히 농을 하는 것이냐 윽박질렀겠지만, 지금 시후가 쌓아 올린 공은 실로 대단했다.
명진제는 깊은 고민에 빠졌고, 충정은 옆에서 패를 다시 상자에 넣으라는 눈빛을 보냈다.
아쉬운 몸짓으로 하나씩 집어넣던 시후는 비영 이십삼 호의 증표를 넣으려다가 묘한 기시감에 빠졌다.
뭔가 떠오를 듯 떠오르지 않는 이 감각.
팽충정은 그런 시후를 향해 채근하듯 눈을 부라렸다.
어쩔 수 없이 손에 쥔 증표를 상자에 집어넣었지만, 빠져나온 시후의 손에는 나머지 두 개의 증표도 들려 있었다.
“이건 제가 가지고 있어도 괜찮겠습니까?”
팽충정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안된다고 말하기 전에 시후는 속사포처럼 말을 내뱉었다.
“첫째! 황궁에서 이 사건의 배후 세력을 찾기는 요원한 일이지만, 제가 강호를 종횡하다 보면 이들을 마주칠 일이 종종 발생할지도 모릅니다. 그때 이 패를 가지고 있다면 그들을 속이는 데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고민에 빠져 있던 명진제는 시후의 말에 흥미로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둘째는?”
“둘째! 첫째랑 비슷한 이유긴 하지만, 불온한 무리가 황실에만 있지는 않을 터! 이 증거를 정의맹에 들이민다면, 협과 의를 부르짖는 그들의 협력을 얻을 수 있을 겁니다.”
이야기를 듣던 명진제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세 번째는?”
“셋째! 제 촉이 이 물건은 제가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시후의 말에 팽충정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명진제는 희미한 웃음을 띠고 있었다.
“좋다. 이번 사건을 해결한 그대의 공이 적지 않으니, 본뜬 뒤 주도록 하마.”
시후는 곧장 손에 쥔 패들을 상자에 넣었다.
“그보다, 이걸로 입을 씻을 수는 없지 않겠느냐?”
보상이다.
시후는 입 밖으로 웃음소리가 흘러나올 것 같아, 땅에 넙죽 엎드렸다.
“백성으로서 보답을 바라고 한 행동은 아니······.”
“필요 없느냐?”
“······ 지만, 상을 주시는데 받지 아니하겠다는 것도 가당치 않다고 생각합니다.”
입에 발린 소리를 하려다가 식겁했다.
그런 시후의 뒤통수를 내려다보던 명진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어나거라. 뵐 분이 있다.”
명진제가 ‘분’이라고 칭하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을까.
그의 말에 시후는 엉거주춤 일어나 뒤를 따랐지만, 걸음을 옮기면서도 불안한 마음을 숨기지 못했다.
그리고 곧 그 불안감은 현실로 바뀌었다.
여느 곳보다 경비가 삼엄했던 문 하나를 지나자 몸이 갑자기 무거워졌다.
[황제의 권역에 들어섰습니다.]
[황제의 휘하에 예속되어 있지 않습니다. 모든 능력이 9할 감소합니다.]
[일원신공의 능력으로 인하여 감소 효과가 5할로 줄어듭니다.]
곧 시후의 눈앞으로 황제가 기거하는 건청궁(乾淸宮)이 다가왔다.
‘드디어 황제를 만나는 건가.’
다만, 앞서 걸어가던 명진제는 건청궁이 아닌 그 옆에 있는 소인전으로 발길을 돌렸다.
의아함도 잠시, 시후의 곁으로 나인 한 명이 다가왔다.
말없이 건네준 사발에는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시꺼먼 용액이 담겨 있었다.
빌어먹을 정도로 쓰디쓴 신설폐를 복용한 다음, 어검대의 확인을 거쳐 소인전으로 들어섰다.
안에는 내시와 어검대가 즐비해 있었다.
‘이곳에 있구나.’
시후가 옷매무새를 다듬는 사이, 굳게 닫힌 방문 앞에 다다랐다.
“아버지, 소자 왔습니다.”
“들어오거라.”
말과 동시에 문이 양쪽으로 벌려졌다.
시후는 급히 절을 하려고 했지만, 명진제는 그냥 앞으로 걸어갈 뿐이었다.
‘망할.’
머쓱해진 시후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그의 뒤를 따랐다.
슬쩍 훑어본 방에는 아무도 없었기에 시후는 적극적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 사이, 좌측 문을 열고 누군가 나오자 명진제의 허리가 굽어졌다.
시후는 곧바로 바닥에 엎드렸다.
그제야 깨달았다.
황제를 봤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다는 걸.
이후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자, 공기가 싸늘하게 식어감을 느낄 수 있었다.
시후의 등에서 주르륵 식은땀이 흘렀다.
‘빌어먹을 나인들 같으니라고, 이런 건 설명해 줘야 할 거 아냐? 신설폐만 먹이면 단가?’
속으로 욕을 해대는 시후는 뒤통수가 따듯하게 데워짐을 느꼈다.
“기존에 숨어 있던 자들을 제거하면서까지 의도적으로 끈을 이으려고 했다면, 최소한 이렇게 어리바리한 모습을 보이진 않았을 겁니다.”
“최소한의 교육을 했겠지.”
“보모상궁을 제거하면서까지 이런 자를 집어넣을 이유는 없을 겁니다.”
“그 이야기는 전해 들었다. 어서 털어내거라.”
“예,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시후는 입을 살짝 벌렸다.
아직도 흑련회의 끄나풀일지도 모른다고 의심받고 있었구나.
자신이 예법을 잘 알고 있었다면 오히려 의심받았을지도 몰랐다.
“고개를 들라.”
시후는 명진제를 처음 봤을 때의 기억을 떠올려 고개를 단번에 치켜들지는 않았다.
“이 자리로 부른 이유는 조금 더 편하게 보기 위함이니, 허례허식을 신경 쓰지 말고 그냥 고개를 들 거라.”
‘그럼 나야 좋지.’
시후는 고개를 치켜들었다.
다만, 명진제의 경우를 생각하여 얼굴을 빤히 바라보는 실수는 하지 않았다.
[현 황제, ‘영무제’를 알현했습니다.]
게임 내 NPC들의 외모 중에는 간혹, 현실에서 보았던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었다.
얼굴을 무작위로 선정한다고 한들, 비슷한 사람 한둘이 없을까.
하지만, 지금 시후의 눈앞에 있는 영무제는 현실에 있는 사람의 얼굴을 그대로 사용했다.
그리고 그 얼굴은 시후도 익히 아는 얼굴.
바로, 입사 후 몇 번 본 적도 없었던, 회사의 회장이었다.
‘정말 똑같이 생겼군.’
“이번에 세웠던 공에 합당한 수준이라면 무엇이든 상을 내릴 테니, 가감 없이 말해 보아라.”
시후는 그 즉시 측천파흑선의 부챗살을 꺼내려고 했지만, 명진제가 그보다 한발 빨리 나섰다.
“아버지, 이자를 조금 더 활용함이 어떨까 싶습니다.”
“음? 더 쓸 곳이 있더냐?”
“이자는 무림인이고, 무림에는 정의맹이라는 무리가 있습니다.”
“들은 바 있다.”
“그들을 활용할까 합니다.”
“계속 말해 보아라.”
명진제는 조금 전 시후가 했던 말에 살을 잔뜩 붙여 영무제를 설득했다.
옆에서 듣던 시후가 ‘내가 저런 의도로 말했었나?’ 싶을 정도로, 명진제는 이 나라를 향한 마음을 구구절절 표현하기도 했다.
한참 동안 이어진 명진제의 말이 끝나자, 영무제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그렇게 된다면 폐쇄적인 무림에도 접근할 수 있겠구나.”
“허락하시겠습니까?”
“좋다.”
[연계 임무 ‘발본색원’이 발동됩니다.]
‘설마 보상을 다음으로 미루는 건 아니겠지?’
시후는 다소 불안한 표정을 지으며 명진제와 영무제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 * *
“받았어?”
“보자마자 그거부터 물어보냐.”
“그럼 진짜 물어 줘?”
시후의 말에 제갈려는 팔을 물어뜯을 듯 입을 크게 벌렸다.
‘아오, 저 화상.’
급히 팔을 뿌리친 시후는 받은 측천파흑선의 재료(3)를 보여 주었다.
“이건······ 사북?”
“잘 알고 있네.”
사북은 부챗살을 모아 고정하는 용도였다.
부챗살이나 그 위에 바르는 종이와 달리, 그리 눈에 띄는 부분은 아니었다.
하지만, 사북이 없으면 부챗살을 고정하지 못하기 때문에 없어선 안 될 물건 중 하나이기도 했다.
“이제 이 위에 종이만 바르면 되는 건가?”
‘그럴 리가.’
측천파흑선의 재료가 ‘3’이라고 나온 걸 봐선, 최소 두 번째의 재료 하나는 남아 있다는 의미였다.
시후는 고개를 내저으며 제갈려의 기대를 산산이 부쉈다.
제갈려가 아쉽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축 늘어트리자 시후는 기분이 좋아졌다.
“아니, 줄 거면 다 주던가 고작 이거 하나만 주면 어디다 써.”
“주는 대로 받아야지. 아니면 네가 가서 따져보던가.”
“좋아. 내가 잠시 명진제 전하를 만나서 이야기를······.”
“명진제 전하가 아닌데?”
당장에라도 달려갈 듯했던 제갈려의 몸이 덜컥 멈추었다.
마치 기름칠이 덜 된 문처럼, 삐걱거리며 그녀의 목이 돌아갔다.
검지를 펼친 그녀가 천천히 하늘 위를 가리켰다.
시후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그 모습을 본 제갈려는 한숨을 푹 내쉬더니 사북을 돌려주었다.
“그래도, 그 고생을 하고도 고작 이거 하나면 좀 그렇네.”
“다른 거 더 있어.”
“한 번에 보여 주면 어디가 덧나?”
“네가 재촉했잖아.”
시후의 말에 반박할 여지가 없던 제갈려는 입을 꾹 다물었다.
시후는 곧바로 네 개의 패와 주머니 두 개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올려진 물건들을 유심히 관찰하던 제갈려는 네 개의 패 중 황금빛으로 번쩍이는 금 패를 움켜쥐었다.
“이거 뭐야? 보통 물건은 아닌 거 같은데?”
금 패의 앞면에는 용이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었고, 눈은 붉디붉은 홍옥으로 만들어져 마치 살아 숨 쉬는 듯했다.
“‘적룡(赤龍) 금 패’라고, 관의 힘을 빌릴 일이 있으면 쓰라고 주셨지.”
“어느 정도 위치까지 먹히는데?”
“도지휘사.”
1개 성을 책임지는 도지휘사를 부릴 수 있는 물건이라는 말에 제갈려는 입을 쩍 벌렸다.
슬쩍 자신의 품으로 가져가려고 하는 제갈려의 모습에 시후는 냉큼 그 손을 잡았다.
“단, 악용할 시 참수.”
“그야 당연하겠지······. 그럼 이건?”
“이 철 패들은 정의맹에 넘겨 줄 물건들.”
“주머니는?”
“내야 할 돈.”
시후의 말에 제갈려의 볼이 잔뜩 부풀어 올랐다.
“뭐야, 그럼 결과적으로 우리한테 떨어진 건 사북 하나랑, 쓸 시점이 애매한 적룡 금 패 하나야?”
“정답.”
시후의 대답에 제갈려는 이마를 짚었다.
“내가 갔어야 했는데, 그래야지 하나라도 더 받아 왔을 텐데.”
“어차피 똑같아.”
“아, 이래서 언제 다 구해! 나 이번에 집 돌아가면 언제 나올지도 모른단 말이야.”
짜증을 부리는 제갈려의 모습에도 시후는 유유자적한 태도를 보였다.
오히려 거만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살짝 뒤로 젖혔다.
“그래서 확답을 받아 왔지.”
“무슨 확답?”
“이번 일만 잘 처리한다면 측천파흑선의 나머지 재료들을 다 주겠다는 확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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