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45화 자금성 (2)
이틀.
길다면 길 수 있지만, 이런 중대한 사건을 처리하기엔 터무니없이 짧은 시간.
시간을 더 달라고 말한다면 받아들여졌을지 몰랐으나, 시후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자신이 있었으니깐.
정확히 말하면, ‘숨어 있는 연꽃을 찾아라’를 해결할 때, 혁혁한 공을 세웠던 이 ‘무음필대’를 믿었다.
다만, 지금 그 믿음이 깨어지려고 했다.
[‘존재하지 않는 그림자’의 제한 시간이 04:12:14 남았습니다.]
“돌아 버리겠네.”
시후는 새벽부터 머리를 쥐어뜯고 있었다.
그림자는 튀어나오지 않았다.
하오문을 찾아 무음필주법(無音觱奏法)을 찾아낸 것까진 좋았다.
그 덕분에 연꽃이라 불리는 자들을 무영전의 뒤편으로 모을 수 있었으니깐.
이번 그림자도 그렇게 끌어낼 수 있을 듯했다.
“모스부호처럼 보내는 게 맞을 텐데······.”
‘연꽃’을 잡아들일 때 사용한 방법은 간단했다.
한 가지 음만 존재하는 이 무음필대를 이용해, 그들에게 무영전 뒤편 연무장으로 모이라는 지시를 내린 것.
시후의 추측은 틀리지 않았었고, 이번에도 먹힐 줄 알았다.
하지만, 상대는 요지부동 상태로 나타날 기미가 없었다.
“어떻게 할 거야?”
지켜보는 제갈려가 답답한 듯 가슴을 퍽퍽 치며 물어봤지만, 더 답답한 건 목을 걸었던 자신이다.
시후가 침묵을 지키자 제갈려의 어깨도 한없이 내려앉았다.
자리에 주저앉아 머리를 쥐어뜯던 시후는 뒤로 벌러덩 누웠다.
사형 집행을 기다리는 사형수의 마음이 이러할까.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절망감이 드리웠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고개를 돌려 제갈려를 바라봤다.
“어떻게 해야 할까?”
“네 말은, 듣고도 상대가 모른 척한다는 거잖아? 그럼 무조건 들을 수밖에 없는 환경을 만들면 안 돼?”
“무슨 수로?”
제갈려의 말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역으로 질문을 던졌다.
묘한 미소를 띠고 있던 그녀는 갑자기 정색하며 표정을 굳혔다.
“내가 어떻게 알아? 아, 한 명 한 명 귀에 대고 삐이이익 불기라도 하던가.”
제갈려의 말에 시후는 다시 뒤로 벌러덩 드러누웠다.
누운 채 머리를 쥐어뜯는 시후의 위로 제갈려가 불쑥 얼굴을 들이밀었다.
“포기하긴 이르지 않아? 목을 걸겠다고 했지만, 명진제 전하께서 그렇게 융통성이 없는 분은 아닐 거야.”
내궁을 외궁처럼 돌아보는 조건은 가혹했다.
비빈들의 거처 안까지 들어가진 못했지만, 건물 바로 바깥까지는 다가갈 수 있었고, 황태후의 거처까지 들어가는 조건으로 목을 걸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잡을 방법이 없었으니깐.
그렇기에 더욱 초조했다.
정말 실패 시 목을 친다면, 꼼작 없이 그 새하얀 공간으로 끌려가야 할 테니 말이다.
운이 좋다면 북방으로 쫓겨나서 오랑캐와 드잡이질을 시키겠지.
‘빌어먹을.’
그렇게 되면 끝이었다.
차라리 죽는 게 나을 것이다.
하지만, 죽기는 싫었다.
“걱정할 시간에 찾을 방법이나 마련해 봐.”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고 있는데, 또다시 제갈려의 얼굴이 불쑥 드리웠다.
시후는 공허한 눈으로 하염없이 제갈려의 얼굴을 바라봤다.
시후를 한참 동안 내려다보던 제갈려는 한숨을 내쉬었다.
“썩은 동태 눈깔이 따로 없네.”
평소라면 받아쳤겠지만, 시후는 여전히 말이 없었고, 제갈려는 그런 시후의 주변을 빙글빙글 맴돌았다.
자박자박 걸어 다니는 발걸음 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고, 걸을 때마다 바닥이 조금씩 울렸다.
“정신 사나우니깐 좀 가만히······.”
“이 광경 익숙하지 않아?”
그러고 보니 며칠 전에도 제갈려는 지금처럼 자리를 빙글빙글 맴돌았었다.
그 덕분에 무음필주법을 찾을 생각을 했었지.
제갈려 나름대로의 격려이자 응원이었다.
포기하긴 아직 일렀다.
시후는 바닥에서 벌떡 일어났다.
“소리를······ 너 뭐하냐?”
“어? 어, 아무것도 아냐.”
시후가 갑자기 일어난 것에 놀란 것일까.
제갈려는 저 멀리까지 물러나 있었다.
시후는 그녀에게 향했던 관심을 거뒀다.
“제기랄, 안 들리는 척하는 걸 어떻게 해야 해야 하지? 정말 귀에 대고 바람이라도 불어야 하나?”
“그런데 소리 낼 줄만 알고 들을 줄 모른다면 어떻게 해?”
“그냥 하는 소리야, 시간도 얼마 안 남았는데 어느 천년에 모아서 언제 다······.”
모아 놓고 뭘 할 것인가.
머릿속을 스치는 한 가지 방법.
시후는 곧장 눈을 감고 생각을 정리했다.
시간은 없었지만, 지금 생각을 정리하는 건 그 무엇보다 중요했다.
남은 시간의 앞자리 숫자가 4에서 3으로 바뀌었다.
그 순간.
번쩍 뜨여진 시후의 눈은 더는 썩은 동태 눈깔이라 부를 수 없을 정도로 초롱초롱했다.
시후는 눈앞에 있는 제갈려를 바라봤다.
“방법이 떠올랐어.”
“헛짚은 건 아니겠지?”
“물론, 분명 통할 거야.”
시후는 말과 함께 손에 들린 무음필대를 꽉 움켜쥐었다.
곧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자신이 떠올린 방법은 분명 통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 못 듣는 게 아니라면 말이지.”
시후는 즉시 제갈려에게 계획과 그 계획에 필요한 물건들을 귓속말로 건넸다.
제갈려는 시후의 계획을 들으며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지금은 의문을 가질 시간이 없었다.
그녀는 짧지만 분명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팽가에 도움을 구해서 만들어 보도록 할게.”
“사람을 구하는 건 하오문을 통해서 달라고 하면 될 거야.”
“알겠어. 그런데 넌?”
걸음을 옮기려던 제갈려는 가만히 서 있는 시후를 향해 물었다.
그런 제갈려의 물음에 시후는 저 멀리 양심전을 바라봤다.
“명진제 전하를 깨우러 가야지.”
아직 해가 뜨지도 않은 새벽에 명진제를 찾아간다는 건 미친 짓이었지만, 이 계획을 성공시키기 위해선 미친 짓을 감행할 수밖에 없었다.
새벽에 자금성 내를 돌아다니는 건 금의위밖에 허락되지 않았으나, 시후는 밖에서 기다리는 팽충정을 설득하여 양심전으로 갔다.
“정말 지금 봬야겠소? 동이 트고 나서도 충분할 거 같소만.”
“그럼 늦습니다.”
“목이 달아날지도 모르오.”
“이미 목을 걸었는데 한 번 잘리나 두 번 잘리나, 그게 그거죠.”
팽충정이 재차 만류하려고 했지만, 고집부리기 시작한 시후는 앞만 보고 달리는 황소와도 같았다.
한숨을 내쉬던 팽충정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이내 양심전으로 들어갔다.
곧 양심전 안에서 나인 하나가 쪼르르 다가왔다.
“뵙겠다고 하시니, 따라오시지요.”
새벽 중에 몰래 찾은 거라 그런지 복잡한 예법은 모두 생략되었다.
다만, 단잠을 깨운 탓인지 촛불 아래 보이는 명진제의 표정은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새벽에 내 침소에 들어오는 건 자객밖에 없으리라 생각했는데······.”
살 떨리는 그의 말에 시후는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송구합니다.”
“일단 들어나 보겠다. 말해 보아라.”
“방법을 찾았습니다.”
비스듬히 몸을 뉘고 있던 명진제가 몸을 바로 일으켰다.
“그러나, 그 방법을 행하기 위해서는 전하의 명이 필요합니다.”
“내 단잠을 깨운 거로 모자라서 내 명이 필요하다?”
시후는 목덜미가 오싹오싹했다.
하지만, 시후는 이마를 바닥에 쿵쿵 찧으면서도 말을 거두진 않았다.
“그렇습니다.”
짧은 침묵이 이어졌다.
“좋다. 불온한 무리를 발본색원할 수 있다면, 내 한마디쯤이야 무엇이 어렵겠는가.”
“감사합니다.”
“하나, 내 이름을 거론하고도 찾지 못할 시엔 각오를 단단히 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하고도 못 찾는다면 정말 답이 없었다.
꼬리를 말려면 지금이 적기였다.
하지만, 시후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확신에 차 고개를 끄덕일 뿐.
“그럼 계책을 말해 보아라.”
“사람들이 듣지 못하도록 다른 이들을 내보내 주십시오. 듣는 귀는 없을수록 좋습니다.”
시후의 말에 충정이 낮게 발을 굴렀다.
하지만, 명진제는 더 말해 보라는 듯 오른손을 들어 올려 그를 제지했다.
“그리고 기막을 펼쳐 말이 새어 나가지 못하도록 해 주십시오.”
“좋다. 충정을 제외하곤 모두 밖으로 나가거라.”
“전하!”
“충정이 있는데 무엇이 걱정이겠는가. 두 번 말하게 하지 마라.”
곁을 지켜야 하면서도 그의 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었기에, 완강히 거부하는 듯했음에도 모두 밖으로 나갔다.
[기막이 펼쳐졌습니다.]
시후는 팽충정을 향해 고맙다는 눈빛을 보내곤 숨을 길게 내쉬었다.
“최근 며칠간 양심전을 드나들었던 자들을 모두 다 불러, 한곳에 모아 주십시오.”
“그중에는 공주마마도 계시다!”
명진제가 노하기 전에 다행히도 팽충정이 먼저 나서 주었다.
이번에는 명진제가 말리지 않는 것을 보니, 그도 제법 화가 난 듯했다.
“미천한 소인, 공주마마께서 다녀가신 줄 몰랐습니다.”
“무지가 죄는 아니니 용서해 주마. 내 누이를 제외한 나머지 인원을 모두 불러 주겠지만, 요구가 과한 만큼 실패 시 극형을 면치 못할 것이다. 지금이라도 발언을 철회하려면 하라.”
어차피 각오를 굳혔는데 여기서 물러날쏘냐.
게다가 시후는 확실한 자신이 있었다.
“반드시 색출하겠습니다.”
“자신감인가, 아니면 치기인가.”
명진제는 바닥에 납작 엎드린 시후를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다 손을 내저었다.
“이야기해 놓을 터이니, 이만 물러나거라.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동이 트고 나서 하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전하.”
명진제의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시후는 후다닥 뒤로 물러났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명진제는 기막을 거두려는 팽충정을 만류했다.
“어떤 거 같나?”
“모든 문제가 자신감으로 해결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저자의 자신감과 달리,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한 법이 아닙니다.”
명진제의 질문에 팽충정은 부정적인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도 그럴 것이, 사람을 모아서 무얼 하려는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와 반대로 명진제의 입가에는 얕은 미소가 지어졌다.
마치 재미있는 장난감을 손에 쥔 아이와 같았다.
“혹시, 실패하시면 무슨 벌을 내리실 것인지 여쭤봐도 괜찮겠습니까?”
“불온한 무리를 색출한 공을 봐서 목숨은 보전해 주어야지. 다만······ 내공을 폐한 뒤 북방의 전장으로 보낼 것이다.”
시후가 명진제의 계획을 들었다면 실패 시 바로 자살을 할 것이다.
내공을 폐한다는 말은 무인에게 죽음보다 더한 형벌이었으니깐.
명진제의 이름값은 그보다 무거웠으니깐.
하지만, 그는 시후의 재능을 아쉽게 여겼다.
“외람되지만, 한마디 간언을 드려도 괜찮겠습니까?”
“허하노라.”
“차라리 밑으로 거두어들이심이 좋지 않겠습니까? 저 나이에 이토록 놀라운 수준에 다다랐다면······.”
“불가. 녀석의 눈빛을 보니 어디 묶여 있을 녀석이 아니다. 저 정도 녀석에게 고삐를 채우려면 다리를 부러트려야 할 것이다.”
내공을 폐한다는 건, 다리를 부러트리는 정도가 아니라 이빨까지 다 뽑아 버리는 행위다.
팽충정은 다시 한번 더 그를 설득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달리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말입니까?”
“달려도 내 눈에 보이는 곳에서 달리고, 기더라도 내 눈앞에서 기어야 할 것이다.”
“그토록 위험한 인물로 보인다면······.”
“아니, 목숨을 걸고 일을 벌이는 거로 봐선 황실과 척을 질 녀석은 아닐 테지.”
“그렇다면 더욱이 아쉽지 않습니까? 숨겨진 검으로 키우실 수도 있을 겁니다.”
계속되는 팽충정의 설득에 명진제는 더 듣기 싫은 듯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아직 시도하지도 않았는데 실패에 관한 이야기는 그만하고, 일단 출입 명부를 파악하여 모두 다 불러들이거라. 그리고 채비를 하거라.”
이 이상 말하는 건 명진제에 반하는 행동이었다.
팽충정은 밖에서 대기 중인 나인과 환관들에게 명진제의 명령을 전했다.
덕분에, 해가 뜨기도 전부터 밖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환관들은 시후의 부탁대로 양심전을 드나들었던 인물을 추리고 있었고, 나인들은 새벽부터 명진제의 채비를 위해 움직였다.
기다리던 명진제의 입가에 맺혀있던 미소는 한층 더 짙어졌다.
“녀석이 무슨 일을 벌이는지 직접 눈으로 보겠다.”
- 46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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