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44화 자금성 (1)
“일어났는가?”
시후는 동이 트기도 전에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몸이 묵직한 게 영 일어나기가 힘들었다.
다만, 몸이 무거운 건 심적이나 추위 같은 문제가 아니라, 물리적인 측면에서 정말 무거웠기 때문이었다.
“윽, 언제 엉겨 붙은 거야?”
제법 떨어져 누워 있었거늘, 몸을 오들오들 떨던 제갈려가 어느새 시후에게 바짝 붙어 있었다.
바닥에 누워 있다가 저도 모르게 따뜻한 곳을 찾아온 듯했다.
시후는 붙들린 팔을 걷어내고 일어나서 발로 툭툭 건드렸다.
“야, 일어나.”
“으으······.”
“얼른 일어나, 그대로 더 누워 있다간 얼어 뒈지겠다.”
시후의 애정 어린 발길질 덕분이었을까.
제갈려도 얼마 지나지 않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은 졸린 듯 눈을 비비는 제갈려를 이끌고 응도전을 나오자, 병부상서와 그의 주변엔 수많은 나인이 서 있었다.
“잠을 잘 잤나?”
“대인이라면 이 날씨에 잘 잘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무림인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한겨울에 석묘(石墓)에서도 잘 자고 그런다던데······.”
“그건 한서불침(寒暑不侵)에 다다른 사람들이나 그런 거죠.”
제갈려가 퉁명스레 대꾸했다.
고작 일류에 불과한 제갈려는 아직도 입술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입이 돌아가지 않은 게 용했다.
병부상서가 멋쩍게 웃으며 손짓하자 뒤편에 있던 나인들이 앞으로 나섰다.
“그보다, 무슨 일이시길래 이 꼭두새벽부터 부르셨습니까? 저들은 또 누구고요?”
“명진제 전하께서 어젯밤 마음이 바뀌셨는지, 정식으로 자네들을 보겠다고 하셨네. 지금부터 바삐 움직여야 제시간에 명진제 전하를 뵐 수 있을 거로 생각하는데, 어떤가?”
“이 시간부터?”
사위를 둘러보았지만, 해가 뜨려면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시후의 의문에도 다들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진시에 뵈려면 지금부터 준비해도 시간이 빠듯할 걸세. 자, 어서 나인들을 따라가 준비하게나.”
그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나인들을 따라 도착한 곳에서 데워 놓은 물로 씻고, 예복으로 갈아입는 것만 하더라도 적잖은 시간이 소요됐다.
옷을 차려입자 본격적으로 명진제를 찾아갈 준비를 시작했다.
“예법에 관해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처음부터 설명해 주시죠.”
“기초적인 예법부터 가르쳐 드리지요. 일단, 가장 주의해야 할 점으로는······.”
기초적인 예법이라고 했지만, 현 황제가 총애하는 첫째이자 차기 황제로 가장 유력한 명진제를 보는데 소홀히 준비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시후는 복잡한 예법에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
“이해하셨습니까?”
“대충 숙지했습······.”
“대충이라뇨! 완벽히 숙지할 때까지 계속하겠습니다!”
대답을 잘못했다가 혼쭐이 난 시후는 그로부터 무려 다섯 번이나 예행연습을 해야 했다.
다만, 여기서 끝날 리 없었다.
“다음으로 뵈는 방법에 관해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우선, 명진제 전하께서 기거하고 계시는 양심전으로 모셔 드릴 텐데, 가시면 양심문의 양쪽으로 소문(小門)이 나 있습니다. 그중 좌측에 있는 소문으로 들어간 뒤, 영벽(影壁) 앞에 멈춰 읍하시어 명진제 전하의 허락을 받은 다음에······.”
나인을 통해 복잡한 궁중 예법과 알현 방식을 듣자니, 시후는 어떤 놈이 이렇게 고증을 철저하게 했는지 화가 치밀 정도였다.
머리가 아득해질 정도로 긴 설명이 끝이 나자, 나인은 시후에게 읊어보라는 듯한 시선을 보냈다.
‘망할 것.’
“양심문의 좌측 소문으로 들어가 영벽 앞에서 읍하고, 전하께서 허락할 때까지 기다린다. 이후 허락이 떨어지면 영벽을 지나 양심전으로 가는데, 기거하고 계시는 방문에서 네 척(尺)가량 떨어져 선 뒤······.”
시후는 나인이 말했던 예법을 다소 압축해서 대답했고, 나인은 흡족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하십니다. 그럼 이제 양심전으로 갈 채비를 하지요.”
이를 악물고 외운 보람이 있었다.
나인의 허락이 떨어지자 시후는 건물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오래도 걸리네.”
먼저 밖으로 나와 햇볕을 쬐고 있던 제갈려가 투덜거렸다.
시후가 천생 서생의 모습이었다면, 그녀는 대갓집 규수처럼 꾸며져 있었다.
“호박에 줄 몇 개 그어 놨네.”
“무슨 말이야?”
“아무것도.”
“뭔가 상당히 기분 나쁜 발언이었는데? 똑바로 말하지 않으면······.”
제갈려가 따지고 들려 했지만, 평소완 달리 시후에게는 아주 유용한 방어벽이 있었다.
“시간이 그리 많지 않으니 이만 출발하겠습니다.”
시후는 앞장서 걷는 나인의 뒤에 냉큼 따라붙었고, 제갈려도 어쩔 수 없이 따라오게 되었다.
무영전에서 나와 삼대전(三大殿)이라 불리는 태화전(太和殿), 중화전(中和殿), 보화전(保和殿)을 둘러싼 담을 따라 걸었다.
삼대전의 권역은 어마어마하게 넓었고 그를 감싸고 있는 담을 길었지만, 그 끝은 존재했다.
그리고 그 끝에는 내궁 성벽이 있었다.
“많기도 해라.”
제갈려의 중얼거림에 시후도 고개를 끄덕였다.
상황이 상황인 만큼, 금의위가 곳곳에 깔려 있었다.
내궁으로 들어서는 데만도, 금의위 숫자가 어마어마했다.
가히 사람으로 벽을 세워도 될 정도로.
“패를 꺼내시지요.”
나인의 말에 따라 ‘홍옥사자 패’를 꺼내어 금의위에게 보여주자, 사납게 노려보던 그들의 눈빛이 조금 사그라들었다.
그래도 여전히 매서웠지만.
옷을 벗지 않는 수준에서 몸수색을 마친 두 사람은 비로소 내궁에 들어설 수 있었다.
“여자 금의위가 없었다면 난 절대 안 들어왔을 거야.”
“금의위가 아니라, 나인 중 한 명이 옷을 입은 겁니다. 그리고 내궁에 들어왔으니 입을 놀리는 데에 유념하시길 바랍니다.”
나인의 대답에 제갈려가 입을 다물자, 담장 사잇길에는 걸음 소리만 울려 퍼졌다.
그 말대로 내궁에 들어선 뒤부터는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를 조심해야 했다.
이른 시간인지라 마주칠 일은 없겠지만, 혹여나 공주와 황비들과 마주친다면 여간 곤란한 게 아닐 것이다.
그런 일이 발생하는 걸 반길 리 없는 나인들의 걸음이 조금 빨라졌다.
다행히 양심전에 도착하는 동안 금의위를 제외한 그 누구도 마주치지 않았다.
“잠시 기다리시면 곧 약을 내올 것입니다.”
약이라는 소리에 시후는 피식 웃었다.
지금 먹어야 하는 건 독약이라면 독약이지, 약은 절대 아니었다.
나인의 말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사발이 도착했다.
안에 들어있는 시꺼먼 용액을 보자 시후는 한숨이 절로 나왔다.
“어서 드시지요.”
나인의 재촉에 시후와 제갈려는 동시에 사발을 비웠다.
[‘신설폐’를 복용하였습니다.]
[24시간 동안 내공 사용이 불가능합니다.]
[일원신공의 해독 능력으로 인하여 중독 시간이 4시간으로 감소합니다.]
‘약은 개뿔.’
해독 능력이 작용하는데 이게 무슨 약이란 말인가.
한숨을 푹 내쉬는 두 사람의 곁으로 금의위가 다가왔다.
“확인되었습니다.”
금의위는 두 사람의 손목을 붙잡아 진기를 넣어 본 뒤, 내공이 다 흩어졌는지 확인을 마치곤 옆으로 비켜섰다.
시후는 항상 발동하고 있던 일원신공이 멈추자 왠지 모를 답답함을 느꼈고, 발걸음이 무거워진 것 같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제갈려는 피식 웃었다.
“처음 먹어 봐?”
“넌 이미 먹어 본 거야?”
“미연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서 먹는 경우가 종종 있을 텐데?”
그런 설정도 있었던가.
그에 관한 대화를 더 나누려 했지만, 뒤편에 서 있던 나인의 헛기침에 소문으로 들어가 영벽 앞에 섰다.
안으로 들어가기 위한 절차로 읍(揖)을 해야 했으나, 막상 하려니깐 낯이 뜨거워 미칠 지경이었다.
하지만, 읍을 하지 않곤 명진제를 볼 방법이 없었으니 하는 수밖에 없었다.
시후는 두 눈을 질끈 감고 앞으로 나섰다.
“명진제 전하! 차시후 외 일인(一人). 지금 당도하여, 용안을 뵙길 간곡히 청하옵나이다.”
시후는 마치 앞에 사람이 있는 것처럼 영벽을 향해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그건 옆에 있던 제갈려도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허락이 떨어질 때까지는 허리를 펼 수 없다는 예법 때문에, 안쪽에서 대답이 떨어지길 하염없이 기다렸다.
“들라 하십니다.”
보통 1각 정도 세워 둔다고 들었지만, 그보단 한참 이른 시간에 허락이 떨어졌다.
허리를 편 두 사람이 곧 양심전에 들어서자, 공기는 한층 더 무거워졌다.
‘도대체 몇 명이나 숨어 있는 거람.’
뒤통수와 정수리를 비롯해 어디 하나 시선이 안 꽂히는 곳이 없었다.
문 앞에 다다른 시후는 예법대로 거리를 벌린 뒤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문을 열겠사옵니다.”
안에서 대답이 흘러나오진 않았지만, 속으로 다섯을 세고 난 뒤 좌우 동일한 속도로 문이 열렸다.
시후는 즉시 오체투지를 하며 바닥을 노려보았다.
“대 명 황실의 여의주, 명진제 전하를 뵙습니다.”
일반적으로 용은 황제를 뜻하고 여의주는 용의 권능을 담은 물건을 말했다.
차기 황제로 낙점받은 명진제는 여의주라 칭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안으로 들라.”
낮고 울림이 강한 목소리.
시후와 제갈려는 명진제의 명에 따라 아주 천천히 일어났지만, 시선은 여전히 바닥을 향해 있었다.
허리를 펴지도 못한 채 문을 넘어, 다시금 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시후는 답답함에 한숨이 절로 나오려 했지만, 입안에 꾹 가둬 두었다.
‘귀찮아 죽겠군.’
“그대들은 고개를 들라.”
바닥에 손을 떼지 않은 채 팔을 펴되 쭉 펴지 않고, 시선은 손끝보다 조금 더 먼 곳을 바라본다.
시후는 전해 들은 예법을 그대로 행하였지만, 갑자기 주변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틀렸나? 아냐, 분명 맞는데?’
시후가 머릿속을 열심히 뒤적거리는 사이,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더 들라.”
“전하!”
목소리는 코앞에서 들렸고, 시선을 조금 더 위로 올리자 누군가의 발이 보였다.
아마도 목소리가 들린 방향과 높이를 볼 때 명진제가 분명했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듣지 못했는데······.’
곁눈질로 제갈려를 바라봤지만, 그녀도 시후처럼 눈동자만 좌우로 굴리고 있었다.
“내 말이 들리지 않는가?”
‘될 대로 되라지.’
명진제의 말에 시후는 바닥에서 손을 떼고 고개를 번쩍 치켜들었다.
[‘명진제’를 알현했습니다.]
[연계 임무 ‘존재하지 않는 그림자’가 발동합니다.]
[내궁 안에 숨어 있는 그림자를 색출해서 명진제의 목숨을 구하십시오. 0/1]
시후는 이왕 고개를 들었으니 자신감을 보여 주고자 명진제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다만, 너무 대놓고 바라봤는지 뒤편에 있던 나인들이 시후를 죽일 듯 노려보고 있었다.
“과연······. 자금성 내에서 무기를 휘두를 정도로 배포가 큰 자답구나.”
명진제의 말에 즉시 눈을 다소 내리깔았지만, 다소 늦은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곁에서 지켜본 바로는 저와 비견될 만한 고수입니다.”
“자네와?”
“그렇습니다.”
어딘가에서 익숙한 팽충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명진제를 바라보느라 그가 안에 있는 줄도 몰랐다.
‘나중에 술이라도 사줘야지.’
명진제의 시선이 다시금 시후를 향했다.
“차시후라고 했던가?”
“그렇습니다.”
“성내 숨어든 사특한 무리를 잡아들인 공이 절대 작지 않으니, 원하는 바가 있으면 가감 없이 말해 보아라.”
“아닙니다.”
“허허, 이토록 욕심 없는 자를 보았나. 관직을 원한다면 내 적당한 자리를 내어줄 테고, 제물을 원한다면 금 오십 관을 내리겠노라.”
명진제는 시후의 행동을 오해했다.
시후는 말은 ‘보상이 필요 없다’라는 게 아니라, ‘지금 보상을 받으면 임무가 끝나 버릴 테니 받아선 곤란하다’라는 의미였다.
명진제의 목숨값이면 측천파흑선의 재료는 물론이고, 그보다 더 뜯어낼 수 있지 않겠는가.
“아닙니다.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시후의 대답에 웃음이 가득하던 명진제의 낯빛이 확 굳어졌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주변의 분위기도 삽시간에 얼어붙었다.
명진제는 잠시 눈을 감았고, 다시금 뜨인 그의 눈에는 차가운 서리가 뿜어져 나오는 듯했다.
“나일 것 같으냐, 아니면 아버지일 것 같으냐?”
“지금 그들의 눈엣가시는 전하일 것 같습니다.”
“무엄한!”
시후의 대답에 뒤편에 있던 팽충정이 가볍게 발을 굴리며 눈을 부라렸지만, 명진제는 오른쪽 손을 들어 올리며 그를 제지했다.
“불온한 무리가 나를 노리는 것 같다는 말인데, 그에 관한 책임을 질 수 있겠느냐?”
“예.”
시후에게 임무 창이 말해 주지 않았던가?
그 사실을 알 턱이 없는 제갈려를 비롯한 자들은 의구심 가득한 눈으로 시후를 바라보았다.
“그 말, 결과로 보여 주거라.”
시후는 명진제의 말에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다만, 들어 올린 그의 오른손에서 손가락 두 개가 펴지자,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이틀 주마.”
- 45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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