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42화 외성 (1)
“잠시 기다리십시오.”
아무리 옥룡 패와 병부상서의 직인이 찍힌 서찰을 들고 있다고 한들, 그것만으로 자금성에 들어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사람을 보내어 확인한 뒤에나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묵묵히 기다리는 가운데, 제갈려는 무엇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툴툴거리고 있었다.
“명 숙부를 만나지야 않겠지만, 만나면 뭐라고 둘러댄담?”
하북 팽가와 마찬가지로 제갈세가도 관직에 몸을 담고 있는 자들이 두루 있었다.
그중 제갈려가 말하는 제갈명은 내각 대학사로, 지금 만나야 할 정이품(正二品)의 병부상서와 비교하면 품계는 한참 낮다.
고작 정오품(正五品)에 불과하니 말이다.
하지만 그는 현 황제에게 거리낌 없이 직언을 날릴 수 있는 위치인지라, 황궁 내에서 그보다 입김이 강한 자는 몇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제갈려의 투덜거림을 들으며 기다리는 사이, 저 멀리 알아보러 들어갔던 내시가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병부상서께서 맞다 하옵니다. 두 분께서는 쇤네를 따라오시지요.”
간드러진 목소리에 시후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입구를 가로막은 병사들이 좌우로 물러서자, 시후는 닭살이 돋아오른 팔을 문지르며 그 뒤를 따라갔다.
다만, 엉덩이를 살랑거리며 걸어가는 내시의 뒷모습은 차마 보기도 힘들어, 좌우로 연신 눈알을 굴리며 황궁을 둘러보았다.
지나는 길 좌우로 펼쳐진 정원은 과연 자금성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수려하게 꾸며져 있었다.
그리고 곳곳에 숨어있는 자들까지.
불순한 의도로 숨어들었다기보다는 지킨다는 느낌이 강하니, 아마도 금의위(錦衣衛)일 가능성이 컸다.
다만, 시후에게도 쉽사리 발각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정식 금의위는 아닐지도 몰랐다.
서화문(西華門)에서 무영전(武英殿)으로 가는 길은 그리 길지 않았다.
무영전 주변은 1장 너비의 내금수하(內金水河)가 빙 둘러 지나가고, 그 위를 지날 수 있도록 석교가 놓여 있었다.
무영전의 입구라 할 수 있는 무영문(武英門)을 지나자, 고색창연한 무영관이 시후와 제갈려를 맞이해 주었다.
“두 분께서는 저 앞에 무영전으로 들어가신 뒤, 천랑(穿廊)으로 이어진 뒤편의 경사전(敬思殿)으로 가시면 됩니다. 그곳에 병부상서께서 기다리고 계실 겁니다. 그럼, 쇤네는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무관들이 업무를 보는 무영전에 있기가 껄끄러운 것인지, 안내를 마친 내시는 재빨리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무영문을 넘었다.
시후는 그 모습을 머릿속에서 지우기 위해 머리를 격렬하게 흔들었다.
관복이 아닌 무복을 입은 두 사람이 무영전에 들어서자 적잖은 시선이 꽂혔다.
다만, 각자의 일이 바쁜지 시후와 제갈려를 한 번 힐끔거리고는 관심을 거두었다.
내시가 읊어준 대로 천랑을 지나 경사전에 다다르자, 고집이 세 보이는 한 인물이 서 있었다.
적색 단령을 입은 그의 가슴에는 사자(獅子)가 그려져 있었고, 허리에는 화서대(花犀帶)를 둘러 2품에 있는 인물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자네들인가?”
“병부상서 대인을 뵙습니다.”
이런 예법에 어두운 시후를 대신해, 제갈려가 먼저 앞으로 나서며 인사를 했다.
시후는 품에서 통안파파에게 받은 서찰과 옥룡 패를 꺼내어 병부상서의 손에 올려 주었다.
병부상서는 서찰은 받았지만, 옥룡 패는 그대로 시후에게 돌려주었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서 이야기하지.”
그는 곧장 자신의 방으로 두 사람은 안내했고, 방에 들어서기 무섭게 큼지막한 창문을 하나씩 닫았다.
그래도 마음에 들지 않는지 잠시 고민하던 그는 손가락을 튕겼다.
“자네들 무림인이면 그, 소리가 빠져나가지 않게 할 수 있지 않나?”
기막을 이야기하는 듯했지만, 시후는 전음을 비롯한 기술은 전혀 할 줄 몰랐다.
시후는 곧바로 제갈려를 바라보았고, 병부상서의 시선 또한 그녀에게 향했다.
“절정을 웃돌면서 기막 하나 펼칠 줄 모른다면 누가 믿겠어?”
투덜거리던 제갈려는 품에서 천로수변을 꺼내 들었다.
갑자기 깃발이 등장하자 병부상서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바닥에 구멍 좀 뚫겠습니다.”
허락을 구함과 동시에 제갈려의 손에서 천로수변이 사방으로 휙휙 날아들었다.
손에서 벗어난 천로수변이 바닥에 모두 꽂히자, 조그맣게 들리던 새소리조차 끊어진 방에는 정적이 찾아왔다.
[단견별청진(斷見別聽陣)에 들어왔습니다. 진법 외부와의 어떠한 의사소통도 불가능합니다.]
제갈려를 바라보는 병부상서의 눈이 묘하게 바뀌었다.
“신기하군. 이와 비슷한 재주를 본 적이 있는데······. 혹시, 제갈명 대학사를 아는가?”
“그 질녀인 제갈려라고 합니다.”
“어쩐지. 이런 재주를 펼칠 수 있는 곳은 흔치 않지. 그럼 자네도?”
그의 질문에 시후는 고개를 내저었다.
병부상서는 다소 아쉽다는 표정을 짓긴 했지만, 곧바로 감정을 털어 내곤 자리에 앉을 것을 권했다.
“이야기는 대략 듣고 왔겠지?”
“통안파파는 한 다리 걸쳐 듣는 것보다, 병부상서님께 직접 듣는 편이 좋지 않겠느냐 말하였습니다.”
시후의 말에 병부상서는 한 손으론 탁자를 두들기며, 또 다른 한 손으로는 수염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병부상서의 가늘게 뜬 눈은 시후의 대답이 마음에 차지 않는 듯했다.
‘그렇게 도끼눈으로 볼 거면 읽기 편하게 세 줄로 요약 좀 해 주던가.’
시후가 속으로 투덜거리는 사이,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읽기 쉽게 정리해 놓았거늘······.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최초 색출에 마흔 명가량을 잡아들였지만, 어차피 단박에 잡힌 거로 봐서는 꼬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네들이 그들의 머리를 찾아 줬으면 하네.”
[연계 임무 ‘숨어 있는 연꽃을 찾아라’가 발동합니다.]
[황실 곳곳에 숨어서 암약하고 있는 자들을 모조리 색출하십시오. 0/20]
시후는 자신이 잘못 본 게 아닌가 싶어 눈을 비볐다.
스무 명.
병부상서가 머리라고 칭했지만, 이정도 인원이라면 사실상 머리가 아니라 끽해야 몸통에 불과할 것이다.
“단서가 있긴 한가요?”
“잡은 녀석들이라도 만나볼 텐가?”
“그래야죠. 그리고 자금성을 한 바퀴 쭉 돌아봤으면 하는데, 가능하죠?”
“그건 어렵지 않지. 내 사람을 붙여 줄 테니, 자금성 안내는 그가 해 줄 걸세. 단, 외성만 둘러볼 수 있지.”
구역을 외성으로 한정해 준 덕분에 시후는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역시, 막막할 때는 대화를 통해서 정보를 캐내야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필요한.
“아, 그리고 무기를 소지할 수 있나요?”
무기.
입구에서 소지품 검사를 통해 두고 와야만 했던 무기가 절실했다.
근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던 병부상서는 시후의 질문에 난색을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황성에서 무기를 소지하는 건 금의위가 아니고서야 허락될 리 없었다.
다만, 일정 품계 이상의 관리는 무기 소지 허가증을 발급할 수 있었다.
문제는 이 허가증을 소지한 자가 만에 하나라도 불미스러운 일을 일으킬 경우, 발급자도 동일한 죗값을 치러야 했기에 꺼려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만약에 시후가 무기를 든 채 내성을 넘는다고 생각한다면, 그날로 병부상서와 그의 삼족(三族)은 목이 달아날 것이다.
“꼭 필요한가? 사람을 붙여 주는 것으로는 안 되겠는가?”
“혹시라도 걔들이 저희를 습격하면요? 여차하면 무력을 쓸지도 모르는데 목숨 걸고 하기엔 좀······.”
“음······. 그럼 조금만 기다리게.”
시후를 믿는다기보다는 옆에 있는 제갈려를 믿는 모양이었다.
시후가 만약이라도 회까닥 돌아 버린다면, 같이 책임을 져야 할 것이라고 요구하는 듯했다.
‘참 걱정도 많은 양반이야.’
* * *
병부상서의 ‘조금’이라는 기준은 대단히 높았는지, 사람을 불러오는데 상당히 오랜 시간이 소요됐다.
병부상서는 도착한 사람의 두 손을 꼭 붙잡았다.
“비번인데 번거로운 부탁을 해서 미안하게 생각하네.”
“아닙니다. 불온한 무리가 있는데, 어찌 발 뻗고 쉴 수 있단 말입니까. 이분들입니까?”
아무리 비번이라고 하지만, 정이품의 직위에 오른 병부상서가 이렇게 저자세로 나올 이유가 있을까.
시후의 의문을 해결해 주기 위해선지 몰라도 병부상서가 먼저 나서서 도착한 남자를 소개했다.
“금의위 어검대 소속의 팽충정이라고 하네. 자네들의 안내를 돕기도 하고, 혹시 모를 미연의 사태에는 힘이 되어 줄 걸세.”
뻔히 보이는 그의 속셈에 시후는 콧방귀를 뀌었다.
일반 금의위도 아니고 어검대 소속의 팽충정이 이 자리에 왔다는 건, 시후를 믿지 못한다는 방증이나 마찬가지였다.
팽충정의 시선은 시후를 지나 제갈려의 얼굴에서 멈추더니, 한참을 빤히 쳐다봤다.
‘뭐야, 한눈에 반하기라도 했나?’
그런 의문도 잠시, 팽충정의 두꺼운 입술이 천천히 떨어졌다.
“어디서 본 듯한 얼굴인데······. 소저, 혹시 어디선가 저를 본 적이 있소?”
작업을 거는 거라면 너무 진부하지 않은가.
시후는 콧방귀를 뀌려고 했지만, 그런 의문을 가지기엔 충정의 표정이 너무 진지해 보였다.
그런 팽충정을 빤히 바라보던 제갈려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여전히 기억력이 나쁘구나? 7년 전 무당산이라고 하면 기억이 나려나?”
“7년 전 무당산······. 아!”
“허허, 두 사람이 아는 사이라니 이것 정말 다행······ 아닌가?”
두 사람이 아는 척을 하자 병부상서의 얼굴이 밝아졌지만, 팽충정이 고개를 획 돌리자 그는 어색하게 웃었다.
이유를 모르는 시후도 마찬가지였다.
“속 좁긴. 아직도 마음에 담아 두고 있는 거야?”
“어디부터 둘러 보실 겁니까?”
그는 제갈려의 말을 무시하기로 했나 보다.
덕분에 중간에 끼인 시후만 귀찮게 됐다.
제갈려는 팽충정을 바라보고, 팽충정은 시후를 바라보고, 시후는 계속 쫑알대는 제갈려를 노려보는 삼각 구도가 이뤄져 있었다.
‘시작부터 엉망이군.’
시후는 한숨을 내쉬었고, 병부상서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나머지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시끄러워. 잡담은 나중에 사적인 자리에서나 해.”
시후는 남자답지 못하다느니, 속이 좁아서 어디 큰일을 하겠느냐느니 하는 막말을 내뱉던 제갈려를 제지했다.
기분이 상한 듯 고개를 홱 돌린 제갈려를 바라보던 시후는 그녀의 뒤통수를 후려갈기고 싶었지만, 간신히, 아주 간신히 그 욕구를 참아 냈다.
“일단 잡아들인 죄수들을 본 다음에 외조(外朝)를 다 둘러봤으면 하는데요.”
“따라오시죠.”
팽충정의 뒤를 따라가는 동안에도 뒤에서 구시렁거리는 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제갈려를 데리고 오는 게 쓸모 있는 선택이었는지 고민을 하는 찰나, 앞에서 걸어가는 팽충정이 주먹을 꽉 움켜쥐는 모습이 포착됐다.
두 사람이 싸우는 건 매우 곤란했다.
“혹시, 철우와는 어떤 관계이신가요?”
“철우의 사촌 형입니다. 철우를 아십니까?”
“그럼요. 저기 악양에서부터 같이 다녔고, 오늘 아침에도 얼굴을 보고 나왔는걸요.”
시후의 말에 팽충정의 눈빛이 이채를 띠고 있었다.
“아, 팽가에 몸을 의탁하고 계시는 겁니까?”
“의탁이라긴 좀 그렇고, 악양부터 같이 다녔으니 정이 좀 붙었죠.”
“혹시, 강서성?”
“오, 아시네요?”
화제를 돌리는 데 성공했다.
덕분에 뒤에서 따라오는 제갈려의 중얼거림은 좀 더 커졌지만, 두 사람의 목소리는 제갈려의 혼잣말을 묻기에 충분했다.
아무도 상대해 주지 않자, 제갈려는 혼잣말을 멈추었다.
덕분에 좀 더 쾌적한 분위기 속에서 옥(獄)에 다다를 수 있었다.
다만, 취조가 이뤄지는 만큼 옥의 분위기는 결코 좋다고 할 수 없었다.
잔뜩 쉬어 버린 목으로 끊임없이 내지르는 비명과 스멀스멀 올라오는 고약한 냄새는 역하기 그지없었다.
옥 입구로 들어서려던 팽충정이 걸음을 멈춰 제갈려를 바라보았다.
“여기부터는 안 들어가는 게 좋을 거다.”
그가 처음으로 제갈려에게 말을 걸었다.
“흥, 쓸데없는 걱정 하지 말고 들어가기나 해.”
“난 경고했다.”
두 번은 없었다.
팽충정은 단호한 태도로 옥으로 들어갔고, 제갈려는 움츠러든 어깨를 억지로 쭉 펴며 그 뒤를 따랐다.
물론, 십 분도 지나지 않아 입구로 나온 그녀는 바닥에 엎어져 아침 식단을 확인하고 있었다.
“우웁! 우웨엑!”
그런 제갈려를 바라보는 팽충정의 입가에는 보일 듯 말 듯한 미소가 어려 있었다.
두 사람의 신경전을 지켜본 시후는 관자놀이를 꾹꾹 문질렀다.
‘이 임무 포기할까.’
- 43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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