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38화 별(別) (2)
똑똑.
문을 두들기는 소리에 시후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그러나 인기척의 주인공은 시후가 열어 주기도 전에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그 너머에는 낭궁미가 헤헤거리며 웃고 있었다.
“비······. 아니 시후 오라버니, 제갈려 언니가 찾아왔어요.”
장난스레 별호 이야기를 꺼내려던 남궁미는 시후의 매서운 눈빛에 말을 얼른 집어넣었다.
그 모습에 시후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긴, 남궁미가 무슨 죄가 있겠는가.
시후는 문을 지나가며 다소 신경질적으로 그녀의 머리를 헝클였다.
대청으로 나가자 제갈려가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둘이 있을 때야 말을 놓아도 상관이 없는 협력 관계였지만, 주변에 그 사실이 알려지면 안 되니 말을 높였다.
“할아버지께서 보자고 하시네요. 따라오세요.”
제갈려는 일방적인 통보에 가깝게 말하곤 뒤돌아섰다.
얼떨떨함도 잠시, 제갈마혁이 보자는데 거부할 수도 없었으니 서둘러 그녀의 뒤를 따랐다.
곧 주변을 살피던 시후는 주위에 지켜보는 사람이 없음을 확인하곤, 제갈려의 옆으로 다가섰다.
“왜 나를? 뭐 때문에?”
“할아버지께 손님이 오셨는데, 네게 전할 물건이 있으시다네?”
“누가?”
“난들 알겠어?”
다소 퉁명스러운 대꾸에 시후는 머릿속을 마구 뒤집어 봤지만, 딱히 떠오르는 인물은 없었다.
추나행에게 적행 패도 받았는데 누가 자신을 찾아오겠는가.
열심히 머릿속을 헤집는 사이, 제갈마혁이 있는 청심각의 근처에 다다랐다.
아직 청심각 담장을 넘으려면 서른 걸음은 남았지만, 껄껄거리면서 웃는 제갈마혁의 웃음소리가 벌써 들려오고 있었다.
‘노친네 목소리도 크군.’
소리는 안쪽 방이 아니라 뒤뜰에서 들렸기에 전각을 빙 둘러 이동했다.
뒤편 툇마루에는 제갈마혁과 연배가 비슷해 보이는 노인이 나란히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고년이 제자를 들였다니, 고생하는 모습을 내가 보지 못하는 게 천추의 한이군.”
“두 아이 모두 똘똘하여 고생이랄 것도 없습니다. 오히려 가르치는 맛이 쏠쏠한지, 저에게 이런 잔심부름까지 부탁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놈이 저기 왔군. 왔으면 냉큼 다가올 것이지, 뭘 그리 멀뚱멀뚱 서 있누?”
말을 나누는 데 방해가 될까 봐 멀찍이 떨어져 있었거늘, 오히려 들려오는 건 제갈마혁의 호통이었다.
냉큼 앞으로 다가가자 제갈마혁의 옆에 앉아 있던 노인이 편지 하나를 건네주었다.
“누님이 전해달라고 한 서찰이다. 나중에 읽어 보아라.”
[‘전여린의 서찰’을 받았습니다.]
그제야 시후의 머릿속에 초설과 홍설이 떠올랐다.
‘만났구나.’
편지를 건네준 노인이 언급한 두 아이는 아마도 홍설과 초설이 맞을 것이다.
그렇다는 건 자신의 계획대로 홍설이 전여린의 제자가 되었겠지.
다만, 노인의 말에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었다.
‘누님이라니.’
아무리 불노괴가 늙지 않는다고 해도, 눈앞의 노인은 여든은 훌쩍 넘어 보였는데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싶었다.
시후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 제갈마혁의 눈빛이 게슴츠레하게 변했다.
“요 녀석, 며칠 사이에 기세가 확 늘어났군? 뭐 좋은 거라도 먹은 게냐?”
“뭐, 그렇다고 해 두죠.”
“그리고 들리는 이야기에 네 녀석이 ‘비무광자’라 불린다던데, 그동안 얼마나 치고받고 싸운 게냐?”
‘그게 다 천비령의 비무를 제한한 당신 때문이잖아.’
톡 쏘아 대고 싶었지만, 시후는 대답 대신 애꿎은 뒤통수만 긁어댔다.
그런 시후의 반응에 혀를 차던 제갈마혁은 품에서 서찰 하나를 꺼내 휙 던졌다.
“아직 이걸 줄 만한 상황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전해 주지 않았거늘, 지금 정도면 가능할지도 모르겠구나. 한번 읽어 보고 생각이 있거든 가 보거라.”
[‘하오문주의 서찰’을 받았습니다. 개봉 시 하오문 총타의 위치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시후의 손에는 두 개의 서찰이 들어와 있었다.
이게 끝인가 싶어 제갈마혁을 바라본 시후는 그의 축객령에 군말 없이 물러났다.
서둘러 서찰을 확인하기 위해 전각으로 돌아가자, 이곳에서도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하나는 남궁미의 웃음소리가 분명했지만, 나머지 하나는 불명확했다.
당가가 같이 숙소를 쓰는 동안 남궁미가 방에서 저리 웃었던 적이 있었던가?
의문을 품고 도착한 숙소 대청에는 보기 힘든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남궁미가 그리도 싫어했던 사천 당가의 쌍둥이 남매, 그중 누나인 당시연과 남궁미가 마주 보며 차를 홀짝이고 있는 게 아닌가.
“아, 시후 오라버니. 차 한잔 드실래요?”
“어? 어, 그래.”
방긋방긋 웃는 모양새가 차가 아니라 술을 마시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기분이 좋아 보였다.
‘잠깐 청심각을 다녀오는 사이에 이렇게 사이가 좋아졌다고?’
당시연을 바라봤지만, 어색한 웃음을 짓고만 있었다.
남궁미가 차를 따라주는데 자세가 묘하게 앞으로 쏠려 있었다.
제법 쌀쌀한 날씨에도 겉옷은 어디에 집어 던졌는지, 깊은 쇄골이 선명하게 보였다.
그녀의 쇄골에 한참 동안 정신이 팔린 시후의 눈에 남궁미의 목에 걸린 목걸이가 뒤늦게 들어왔다.
‘저걸 자랑하려고 이 날씨에도 겉옷을 벗어 던졌군.’
그런 시후의 시선을 알아차렸는지 남궁미가 고개를 들어 헤벌쭉 웃으며 목걸이를 매만졌다.
“이거 뭐냐고요? 흠흠! 여기 우리 시연이가 선물해 준 거랍니다. 이 목걸이 하나면 대부분의 벌레 접근을 막아줄 수 있대요. 보실래요?”
‘그렇게 말하면서 가슴 들이밀지 마라.’
염불보단 잿밥에만 관심이 있는 땡중처럼, 시후의 시선은 목걸이와 다른 한 지점을 끊임없이 오갔다.
눈을 떼지 못하던 시후는 뒤편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돌아보았다.
갑작스러운 남궁천의 등장에 지은 죄가 있었던 시후는 살짝 눈을 내리깔았다.
“볼일을 벌써 다 봤는가?”
제갈마혁과의 일은 다 봤지만, 지금 보던 건 아직 제대로 못 봤다.
하지만, 그렇게 대답할 수 없으니 고개를 가볍게 까딱거렸다.
“사람을 통해서 전해 줘도 괜찮았을 텐데, 얼굴 볼 핑계를 찾으셨나 보군.”
‘그럴 리가.’
남궁천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시후를 바라보며 미소짓다가, 남궁미의 복장을 보더니 잠시 눈살을 찌푸렸다.
잔소리하려고 입을 열던 남궁천의 눈이 곧 남궁미의 목에 걸린 목걸이에 닿더니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방충(防蟲) 패?”
“맞아요.”
대답은 옆에 있던 당시연의 입에서 나왔다.
덕분에 남궁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방충패라면 독분(毒粉)이 들어 있지 않나?”
남궁천의 말에 남궁미는 놀라서 당시연을 바라봤다.
한 번 독에 목숨이 오락가락한 적이 있었기에 더욱 겁을 먹은 것이다.
하지만, 당시연은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가 쓸 물건이라면 독으로 벌레를 퇴치할 테죠. 하지만, 당가의 인물도 아닌 언니께 독분을 넣었을 리가 있나요.”
“그럼 어떻게 방충 패의 역할을 하는 건지도 설명이 가능한가?”
남궁천의 눈빛에 의심이 어리자, 남궁미도 자신의 목에 걸린 방충 패를 떨떠름하게 바라보았다.
독분이 아니라고는 말했지만, 우물쭈물하는 당시연의 모습은 남궁미에게 불안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분명, 말하기 어려운 재료로 만든 게 분명했다.
당시연은 곧 남궁천에게 ‘말하지 않으면 안 되냐’는 시선을 간절히 보냈지만, 남궁천은 단호한 눈빛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눈치를 살피던 당시연은 어깨를 축 늘어트린 채 입을 열었다.
“벌레들은 포식자에 관한 냄새는 기가 막히게 알아차려요. 그래서 독에 내성이 없는 사람들에게 선물하는 방충 패는······ 포식자의 냄새가 배게 만들어요.”
“그 포식자의 냄새를 어떻게 배게 만드는지 알려 줄 수 있소? 분명 그 포식자의 무엇인가가 들어갈 것 같소만.”
남궁천의 말에 남궁미가 흠칫흠칫 떨었다.
당시연은 그런 남궁미를 바라보지 못하고, 여전히 고개를 푹 숙인 채 말을 이어나갔다.
“사실······ 언니가 목에 걸고 있는 건 홍각오공(紅角蜈蚣)의 배설물을 물에 풀어서 불린 뒤······.”
당시연의 말이 이어질수록 남궁미의 안색은 하얗게 질려갔다.
뒷이야기는 보지 않아도 뻔했기에 시후는 슬쩍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들어갔다.
아니나 다를까.
대청에는 남궁미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진실은 괴로운 법이지.”
다만, 말의 내용과는 달리 시후의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맴돌고 있었다.
밖의 상황에 관심을 끊은 시후는 두 개의 서찰을 꺼내 들었다.
어차피 두 개 다 확인해 봐야 할 내용이니, 먼저 받은 전여린의 것을 확인해 보았다.
「애당초 초설만 데리고 가려 했지만, 네 의견대로 홍설의 재능을 살펴보곤 생각이 바뀌었다.
일단, 고맙다고 인사하마.
두 아이를 가르치며 가기가 버거워 이렇게 서신으로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나중에 시간을 내서 정주에 들르거라.
홍설이 너를 무척이나 보고 싶어 하더구나.
이 점 해명이 필요하겠지?
빨리 오는 게 좋을 거다.
내 인내심은 길지 않고, 내 제자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만큼, 네가 흘릴 피가 많아질 테니.」
살벌하기 짝이 없는 서찰이었다.
순간적으로 용봉지회가 끝나면 곧바로 정주로 갈까 고민이 들 정도로.
물론, 다음에 일어날 일을 생각한다면 약간의 기간이 있기에 가도 상관은 없었다.
“하지만, 일단 보류.”
곧장 하오문주가 보내온 서찰을 펼쳤다.
「명진제 전하께서 명하신 강소성 지휘 동지 사건을 해결한 걸 잘 보았다.
다만, 관에서 그 배후를 추적하다 보니 끈이 자금성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이에 관한 문제를 해결할 자신이 있다면 북경에 들러 북경반점으로 오라.」
* * *
열흘 동안 이어지는 용봉지회가 그 끝을 고하기까지 이틀이라는 시간이 남았다.
덕분에 이곳저곳에 불려 다니며 술을 마시고 있는 남궁천은 초췌한 얼굴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으······. 죽겠군.”
“내공으로 주독을 날리면 될 것을 저렇게 고집을 부린다니깐.”
“내 누차 말하지만, 그 뒤에 밀려오는 숙취까지 참아내는 것까지가 진정한 주도(酒道)라고 하지 않았느냐?”
“네네, 내일도 똑같은 소리 하시겠죠.”
남궁미의 잔소리에 남궁천이 부스스한 머리를 긁적였다.
다소 힘겨운 걸음을 옮기며 식당으로 향하던 남궁천이 고개를 뒤로 돌렸다.
누군가 달려오고 있었다.
“천!”
제갈지현이었다.
어찌나 급한지 경공까지 펼치는 그의 모습에 남궁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는 곧 남궁천의 앞에 멈춰 섰다.
“어제 먼저 자리를 파하고 들어간 지현 아닌가. 술을 마시지 않더라도, 끝까지 자리에······.”
“시답잖은 이야기를 할 때가 아니네!”
그는 아직 술이 덜 깬 남궁천의 말을 단칼에 잘랐다.
그의 목소리에 담긴 감정이 심상치 않음을 느낀 남궁천의 몸에서 김이 모락모락 올라왔다.
내공으로 주독을 빼낸 남궁천은 다시금 제갈지현을 바라봤다.
지현은 떨리는 손으로 남궁천을 향해 서찰을 건네었다.
마주한 지현의 눈은 손보다 더욱 거칠게 요동치고 있었다.
다소 거칠게 묶은 실을 뜯어낸 남궁천은 서둘러 서찰을 펼쳤다.
언제나 밝게 빛나던 그의 동공이 탁하게 변했다.
“질 나쁜 농은······ 아니겠지.”
“어서 돌아가게. 바로 갈 수 있도록 말을 준비해 놓았네.”
지현의 말에 남궁천의 손에 들린 서찰은 꾸깃꾸깃하게 접혔다.
구겨진 서찰 끝자락에 보이는 글자는 ‘사(死)’였다.
“미야, 집으로 돌아갈 채비를 하거라. 차 아우, 함께하지 못하겠네. 다음에 기회가 생기면 보세.”
말을 빠르게 내뱉은 남궁천은 남궁미의 팔을 붙잡아 걸어온 길을 되돌아갔다.
짐을 챙기러 가는 것이었다.
시후는 그 뒷모습을 안타까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지현 형님, 무슨 일인지 말해 주시면 안 됩니까?”
팽철우의 질문에 지현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자리를 떠났다.
그런 철우의 시선은 시후를 향했다.
“형님은 짐작 가시는 거라도 있습니까?”
시후도 모른 척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만, 팽철우는 워낙 궁금했는지 식당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돌렸다.
“시후 형님, 저는 잠시 어디 좀 다녀오겠습니다.”
철우가 어지간히 궁금했는지 그토록 좋아하는 밥을 마다하고 떠났다.
덕분에 혼자 남은 시후는 식당에 외롭게 들어섰다.
안에는 많은 사람이 앉아 있었고, 시후를 향해 꽂히는 시선은 적지 않았다.
수군거리는 목소리와 ‘비무광자’라는 말을 애써 무시한 채 음식을 담아 자리에 앉았다.
“다른 사람들은 다 어디 가고 혼자 식사하세요?”
아미파의 틈바구니에서 식사 중이던 천비령은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앞에 앉으며 말을 걸었다.
“다들 볼일이 있어서요.”
“전부 다?”
“살다 보면 이런 날도 있고, 저런 날도 있는 법이죠.”
시후의 대답에 천비령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다가, 이내 젓가락을 움직여 접시를 비워 갔다.
다만, 그녀의 접시에 담긴 음식은 그리 많지 않았다.
곧 식사를 마친 천비령이 턱을 괴고 시후를 빤히 바라보았다.
“안 가요?”
“밥 다 먹을 때까지 기다려요.”
시후는 혼자 밥 먹는 것에 익숙했다.
학창 시절에는 공부에 치였고, 입사 후에는 일에 치이며 식사를 제때 한 적이 많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혼자 먹는 게 익숙했고, 별다른 거부감도 없었다.
시후가 뚱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천비령이 피식 웃었다.
“자리에 혼자 앉아서 밥 먹으면 외롭잖아요. 같이 먹는 건 아니지만, 이렇게 누군가 지켜봐 주는 것만으로도 좋지 않아요? 저도 사부님이랑 둘이 살면서 밥은 항상 같이 먹었어요. 혼자 밥을 먹으면 내가 밥을 먹는 것인지, 외로움을 삼키는 건지 알 수 없잖아요.”
쓸데없는 배려심이라 치부하려고 했지만, 문득 천비령의 설정이 떠올랐다.
시후가 기억하기로, 그녀는 고아였다.
그렇기에 외로움에 민감한 것이겠지.
천비령의 따스한 마음을 받은 탓일까, 시후는 고개를 돌려 남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떠나간 일행을 향해 짧은 기도를 해 줬다.
부디 남궁천이 이 시련을 잘 이겨내기를.
- 39화에 계속 -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