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37화 별(別) (1)
마지막 비무를 치르기 전, 그에 앞서 할 일이 있었다.
바로 일원신공을 가다듬는 것.
[일원신공 2성을 달성했습니다.]
[일원신공 3성을 달성했습니다.]
[업적 ‘신화를 계승하는 자’가 ‘신화를 뒤쫓는 자’로 변경됩니다. 내공의 한계치가 30 상승 합니다.]
거의 내공 한계치에 다다른 상황이었지만, 일원신공이 3성에 다다르자 시후의 내공 한계치가 상승했다.
수용할 수 있는 공간이 늘어나자, 고이 간직하고 있던 천양초 뿌리가 생각났다.
이전에야 낭비될 내공이 아쉬워 먹지 않았지만, 내공의 한계치가 늘어난 이상 아낄 이유가 없었다.
[천양초 뿌리를 복용하였습니다.]
[내공이 30 상승합니다.]
상태창을 확인하던 시후는 내공을 확인하곤 고개를 끄덕였다.
내공은 이미 한계치인 100년에 근접해 있었다.
무려 98.2년.
갑자로 환산하면 한 갑자 반이었다.
내공으로만 따진다면, 남궁천은 물론이거니와 소림의 견적보다도 높을 것이다.
점검을 마친 시후는 꼬박 하루 만에 방을 나섰다.
“허, 일일신우일신(日日新又日新)이라는 말은 차 아우를 두고 하는 말이군.”
전각 앞에서 가볍게 검을 휘두르던 남궁천은 시후를 발견하곤 혀를 내둘렀다.
그도 그럴 것이, 하룻밤 새 내공이 반 배는 늘어났는데 놀라지 않을 사람이 어디에 있을까.
시후는 대답 대신 가볍게 웃어 주었다.
대청에 기대어 놓았던 창을 잡은 손을 멈칫한 시후는 곧 창을 바닥에 내려놓곤 목봉을 쥐었다.
남궁천이 눈을 반짝였다.
‘아쉽게도 상대는 댁이 아니네요.’
시후는 곧장 남궁천을 스쳐 지나갔다.
곧 그의 얼굴에 아쉬움이 가득 차올랐다.
“어디를 가나?”
“아미파요.”
“설마, 소검후에게 가는 건가?”
“에이, 그럴 리가요.”
시후의 말에 남궁천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금세 손바닥을 내리쳤다.
누구에게 향하는 것인지 알아차린 듯했다.
남궁천은 섭섭한 표정을 지었지만, 끝까지 시후의 뒤를 따라왔다.
비무의 결과를 보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시후는 기억을 더듬거리며 처음 소검후를 만났던 장소를 찾아갔다.
기억은 틀리지 않았는지, 중간에 아미파 여승들을 만날 수 있었고, 그들을 따라 머무르는 전각 앞까지 다다를 수 있었다.
“잠시 기다리시면 정현 사태 님을 불러드리겠습니다.”
다만, 아무리 불제자라고 한들 아미파는 여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 때문인지 몰라도 아미파가 머무르는 전각은 주변에 조금 높은 담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담벼락을 만지작거리며 기다리는 사이, 곧 문 너머로 사람의 기척이 느껴졌다.
정현 사태는 문을 열더니 반가운 미소와 함께 합장을 취했다.
“차 시주께선 어인 일로 이곳을 찾아오셨는지요.”
“에······ 첫날에 도움을 받곤 인사도 제대로 못 드렸던 것 같고, 저와 소검후의 비무로 피해를 보신 점을 사죄드리러 왔습니다.”
낯간지러운 예를 차리며 입에 발린 말을 꺼냈지만, 정현 사태는 다 알고 있다는 듯 묘한 미소를 지었다.
“불교에서는 오계(五戒)가 있는데 들어보셨습니까? 그중 불망어(不妄語)라는 게 있는데······.”
“사실 부탁드릴 게 있어서 왔습니다.”
정현 사태의 말이 길어지려는 기미가 보이자, 시후는 머리를 긁적이며 자진 납세를 했다.
덕분에 정현 사태의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사실 지금 시후의 행보를 볼 때 할 행동은 정해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깐.
“아이들에게 좋은 경험이 될 것입니다. 아무래도 복호창을 익힌 아이가 좋겠지요? 그렇다면 연정이나 연화가 적당할 듯하니, 연무장에 가 있으면 아이들을 데리고 가겠습니다.”
“아뇨. 제가 비무하고 싶은 사람은 따로 있는데······.”
“안될 것 없지요. 혹 아미파에서 아는 아이들이라도 있습니까?”
“네. 이름만 알고 있지만······. 저는 연청 스님과 비무를 하고 싶습니다.”
시후가 누구에게 비무를 청할지 할지 알고 있던 남궁천은 별다른 표정의 변화가 없었지만, 정현 사태의 굵은 눈썹은 크게 꿈틀거렸다.
“잠시만 기다리시지요.”
표정이 제법 굳어진 정현 사태가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섰다.
반 각 정도의 시간이 지난 뒤, 다시 열린 문 너머에는 정현 사태와 함께 추현 사태가 서 있었다.
“연무장 대신, 이 안에서 비무를 치렀으면 합니다.”
“물론이죠.”
“그리고 연청이 아직 무공을 완성하지 못하여 미숙한 부분이 많습니다. 혹여 불미스러운 일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위험하다 싶으면 언제라도 저희가 개입할 것입니다. 이에 응하십니까?”
“네.”
시후의 대답이 간결해서일까.
정현 사태와 추현 사태의 표정은 불안해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연청은 아미파에서 가장 주목받는 아이 중 하나였으니깐.
열여섯의 나이로 절정에 이른 소검후에 비하면 부족하지만, 열여덟이라는 나이에 절정에 올랐던 연청에게 거는 기대는 매우 클 것이다.
팔황이라 불리는 이들은 죄다 십 대 무렵 절정에 발을 디뎠기에.
정현 사태가 몇 번이고 주의를 시키는 사이, 추현 사태가 전각 뒤편으로 돌아가 젊은 여승 한 명을 데리고 왔다.
연청은 다소 위축되어 있었다.
“아, 아미의 연청입니다.”
“차시후라고 합니다.”
미래의 팔황의 일인이 될지도 모른다는 수많은 사람의 기대감, 소검후를 꺾고 ‘검후’라는 이름을 아미로 되찾아올 것이라는 희망.
연청의 어깨에는 이 모든 것들을 짊어지고 있는듯했다.
게다가 수련에 수련을 거듭하느라 같은 문파를 제외하면 사람을 많이 만나지 못한 것도 그 한몫했을 것이다.
“집중하거라!”
추현 사태의 호통에 연청은 자신의 뺨을 몇 차례 두들겼다.
곧 두 주먹을 불끈 쥔 채, 두 눈을 부릅뜨고 시후를 바라보았다.
‘그 뜻이 아니었을 텐데.’
시후가 뒤편으로 고개를 돌리자, 이마를 짚으며 고뇌에 빠진 정현 사태를 볼 수 있었다.
“보다시피 이러니······. 차 소협이 잘 조절해 주시길 바랍니다.”
이야기가 퍼진 것인지, 전각 앞으로 젊은 여승들이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 사이로 천비령의 얼굴도 보였다.
그들을 바라보던 추현 사태는 손을 휘휘 내저었다.
“눈먼 검기를 피할 거리는 확보해야 하니, 조금 더 뒤로 물러나거라.”
물러나는 여승들과 다르게 천비령은 그 자리에 고고히 서 있었다.
자신감의 표현이었고, 추현 사태도 그런 그녀를 제지하지는 않았다.
다들 거리를 벌리자 정현 사태가 고개를 끄덕였다.
“감숙의 차시후가 아미파의 연청 스님에게 비무를 신청합니다.”
“바, 받아들이겠습니다.”
시후를 따라 포권을 취했다가, 정현 사태의 눈짓에 냉큼 합장을 취하는 모습이 맹하기 그지없었다.
‘증명’을 손쉽게 끝낼 수 있겠다는 생각도 얼핏 들었다.
연청이 목검을 쥐기 전까지는.
“음······.”
조금 전까지 어리바리했던 그녀의 모습은 머릿속에서 순식간에 지워졌다.
목검에 불과하지만, 그녀가 검을 쥐자마자 뿌리는 예기는 뼛속까지 저릿하게 파고들었다.
다만, 불제자치고는 예기가 너무나도 날카로웠고 방향성 또한 문제였다.
자신뿐만 아니라 사방으로 흩뿌리고 있었으니깐.
“갈무리하거라!”
정현 사태의 외침에 연청은 천천히 기세를 가라앉혔다.
그녀의 기세가 어느 정도 가라앉을 무렵, 시후는 목봉을 들어 올렸다.
연청의 눈이 번뜩였다.
“복호검으로 가겠습니다.”
연청은 중단세를 취했다.
가장 기본이 되는 자세이며, 공수 어느 방향으로도 적합한 자세였다.
어느새 흩뿌리던 예기는 모조리 몸 안으로 갈무리한 듯 기세가 사그라들었다.
더불어 움직임까지도.
바람에 펄럭이는 옷자락만 아니라면, 마치 시간이 멈춘 것이라 착각할 만큼 조그만 움직임조차 없었다.
지루한 대치가 이어졌다.
끝없는 적막감이 이어지는 사이, 두 사람의 얼굴 높이로 낙엽 한 장이 스쳐 지나갔다.
낙엽이 두 사람의 눈을 가렸다.
그 순간, 연청은 태산을 짓누를 기세로 땅을 박찼다.
“호두참격(虎頭斬擊)!”
두 손을 높이 들어 올린 뒤 아래로 내리그었다.
단순한 내려치기 공격.
하지만, 단순하기에 힘을 싣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시후도 상대가 하고자 하는 걸 고스란히 내버려 둘 정도의 바보는 아니었다.
달려드는 기세를 꺾기 위해 봉을 가볍게 찔러 넣었다.
가벼운 행동과 달리, 시후가 찌른 봉 끝의 위치는 실로 절묘했다.
그대로 목검을 휘두른다면 스스로 봉 끝에 목을 가져다 댈 것이다.
그녀는 반걸음 뒤로 물러나며 휘두르던 팔을 몸쪽으로 바짝 당겼다.
결과적으로 목봉의 끝과 목검의 끝은 허공에서 정확히 맞닿았다.
시후는 손목에서 느껴지는 저릿한 통증에 숨을 들이켰다.
“흡.”
“큭.”
그건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눈빛을 잠시 주고받은 두 사람은 거리를 벌린 채 손목을 주물렀다.
눈을 찌푸린 시후화 반대로 연청은 미소를 지었다.
저걸 미소라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다시 갑니다.”
회복이 끝난 연청은 발바닥을 땅에 붙인 채, 바닥을 미끄러지듯 움직였다.
복호검이 얼마나 강하고 용맹함을 중시하는 무공인지를 알고 있었기에, 시후는 무기를 정면으로 맞대는 게 꺼려졌다.
시후는 봉 끝을 짧게 잡았다.
어깨를 향해 찔러 넣자, 연청은 상체를 숙이며 조금 더 안으로 파고들었다.
그녀의 모습에 시후는 봉을 끌어당김과 동시에 옆으로 휘둘렀다.
연청은 검을 비스듬히 눕힌 뒤 사선으로 쳐냈다.
그 사이, 시후는 백후원보를 이용해 뒤로 몸을 뒤로 내뺐지만, 연청은 이 기세를 놓치기 싫은지 집요하게 따라붙었다.
목검이 허리를 강타하기 직전.
시후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덕분에 연청의 목검은 머리 위를 아슬아슬하게 지나갔다.
허공을 가른 목검은 곧바로 머리를 쪼갤 듯 아래로 내려쳤지만, 이미 시후는 뒤로 한 바퀴 굴러 자리를 벗어난 지 오래였다.
졸지에 땅을 구른 시후는 다소 얼굴이 붉어졌다.
가장 만만한 게 생각했던 연청에게 밀리자, 자존심이 다소 상한 탓이었다.
시후는 급한 마음을 벗어 던지고, 시간을 들이면서 차근차근 복호검을 파악하기로 마음먹었다.
“육망!”
“대호신망(待虎伸網)”
시후가 연청을 가두기 위해 그물을 펼쳤다면, 연청은 시후의 공격을 막기 위한 그물을 쳤다.
그물이 서로 마주친다면 서로 얽히고설키는 법.
두 사람의 무기가 맞닿으며 엉켜 들어가기 시작했다.
시후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분명 강(姜)을 기반으로 삼는 무공은 유(柔)하지 못했으니깐.
다만, 본래 강과 유는 떨어질 수 없는 법이었다.
시후의 그물에 금방 땅으로 내다 꽂을 수 있을 것 같았던 연청의 검이 집요하게 매달리고 있었다.
시후의 손목엔 당장이라도 바스러질 듯 통증이 밀려들었다.
두 사람은 다시금 눈빛을 주고받았다.
이전과 동일한 상황.
둘은 눈빛으로 잠시의 휴식을 타협했고, 동시에 뒤로 물러났다.
뒤로 물러난 연청은 인상을 찌푸리더니 기수식을 바꾸었다.
시후가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연청이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이번엔 난피풍검(亂披風劍)으로 가겠습니다.”
기초라고도 할 수 있는 복호검이 아니라, 아미파의 얼굴이라고 할 수 있는 ‘난피풍검’을 펼친다는 말에 시후는 입맛을 다셨다.
비슷하게 내공을 맞추어 주었지만, 이렇게 된 이상 힘으로 밀어붙이는 수밖에 없었다.
시후가 내공을 아낌없이 끌어올리자, 주변에 낙엽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이를 지켜보던 정현 사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연청의 내공은 갓 한 갑자에 달했을 정도로 보잘것없었기 때문이다.
고작 스물둘의 나이에 한 갑자라면 대단하지만, 그보다 반 갑자를 더 가지고 있는 시후에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내공이라는 건 많을수록 쌓기가 어려운 법이니깐.
다만, 비무를 중단시키진 않았다.
“열편(裂片)!”
“오나!”
아니나 다를까, 시작부터 거친 공격이 이어졌고, 시후는 검을 붙잡기 위해 오나를 선택했다.
현대 사회에서 권투나, 유도등의 스포츠에서 가장 중요한 건 체급이다.
그리고 이 체급을 무공에 적용한다면 바로 내공이 될 것이다.
한 갑자의 내력과 한 갑자 반의 내력은 뿜어내는 힘 자체가 다르다.
시후는 목검이 닿자마자 압도적인 내공을 이용해 목검을 강제로 땅에 꼬라박았다.
콰앙!
곧 연청의 목검은 산산조각이 나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연청은 손목을 붙잡으며 뒤로 몸을 날렸고, 정현 사태는 급히 앞으로 뛰어들었다.
“연청이 무기를 잃었으니 여기서 그만하겠습니다.”
정현 사태의 말에 시후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기교를 기르기 위함도 있었는데 이렇게 끝나다니.
‘감각’이라는 건 내공처럼 시간이 지날수록 영약을 먹어도 오르지 않는 것이기에 아쉬운 마음이 컸다.
나중을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종종 비무를 해야겠다는 다짐을 하는 사이, 눈앞에 반투명한 알람이 떠올랐다.
[‘증명’을 완료하였습니다.]
[보상으로 별호가 주어집니다.]
[별호 ‘비무광자(比武狂子)’의 명성이 중원으로 널리 퍼집니다.]
시후는 바닥에 목봉을 내려놓곤 눈을 비볐다.
눈두덩이가 약간 붉어질 정도로 눈을 비볐지만, 잘못 본 게 아니었다.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누르며 고개를 떨구었다.
몇 번을 다시 봐도 ‘광’이라는 글자는 미칠 광(狂)이 맞았다.
“정말 미치겠네.”
- 38화에 계속 -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