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36화 (18/201)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36화 무영묘적 (2)

시후는 자신의 목젖에 와닿는 차가운 비수의 감촉을 느끼면서도 전혀 불안하지 않았다.

오히려 불안감을 느끼는 건 제갈려였다.

비수를 들이민 제갈려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누가 이 사실을 알고 있지? 남궁? 팽가? 아니면 다 알고 있는 건가?”

“둘 다 모르니 진정해.”

“그럼, 너만 죽으면 아무도 모른다는 말이군.”

격양된 목소리로 윽박지르던 제갈려의 눈이 번뜩였다.

약간 위험해지고 있었다.

이건 이럴 때를 위해 꺼내놓은 거지.

시후는 즉시 자신 탁자에 놓인 자신의 손을 움직여 탁자를 툭툭 건드렸다.

곧 제갈려의 시선이 측천파흑선의 부챗살로 향했다.

제갈려의 얇은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죽일 수 있다면 말이야.”

곧 히죽거리는 시후의 귓가에 제갈려가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못 죽일 거 같아? 여기까지 나오면서 본 사람도 없는데?”

“죽이던가.”

“당장에 죽이고 세가로 돌아가서 모른 척 있으면, 낭인 나부랭이 하나 사라진 거 누가 신경이나 쓸까!”

“아, 그럼 죽여.”

말과 동시에 시후는 몸을 앞으로 들이밀었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시후의 목에는 가늘게 혈선이 그려졌다.

제갈려가 황급히 손을 내빼려고 했지만, 그보단 시후가 손을 붙잡는 게 더 빨랐다.

우습게도 칼은 제갈려가 쥐고 있었지만, 칼자루는 시후가 쥐고 있는 형국이었다.

“조금 더 깊게 누르면 내 숨을 끊을 수 있지 않겠어?”

“이, 이거 놔!”

손목이 붙잡힌 제갈려는 시후의 손을 떼어 놓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시후의 목에서 나온 피는 비수를 타고 흘러내려, 이미 그녀의 손목을 적시고 있었다.

점차 제갈려의 동공이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쐐기를 박을 때가 되었다.

“날 죽여서 비밀을 지키고 싶다면 그래도 상관없어. 하지만, 측천무후의 황릉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지 않아? 약 천 년 전부터 잠들어 있는 곳에 최초로 발을 디딜 기회가 다시 올까?”

결국, 시후의 마지막 말에 제갈려는 손에 쥐고 있던 비수를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시후는 곧바로 허리를 숙여 바닥에 떨어진 비수를 주웠다.

그 모습에 제갈려가 흠칫 몸을 떨었지만, 비수를 역으로 잡아 건네주자 눈빛이 복잡하게 변했다.

“내가 네 비밀을 발설하는 일은 절대 없을 거야. 혹시라도 그런 일이 생긴다면 날 죽여. 곱게 죽어 줄 테니까.”

[무영묘적 제갈려의 호감도가 반신반의(半信半疑)(47)에 도달하였습니다. 올바른 정보 전달로 관계 개선이 필요합니다.]

[특수 NPC ‘무영묘적 제갈려’와 협력 관계가 되었습니다.]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고작 반신반의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완전 적대적으로 돌아설 수 있던 관계에서 이 정도로 되돌린 건 매우 고무적인 성과였다.

제갈려는 혁대를 풀더니 받아든 비도로 조금 잘라서 건네주었다.

“그 전에 죽지 말고 지혈이나 해.”

이따위 상처야 기초 금창약을 살살 펴 바르기만 해도 나을 것이다.

하지만, 굳이 보여 줄 이유는 없었기에 자른 혁대를 받아 고분고분 목에 둘렀다.

“시간이 늦었어.”

어색한 침묵을 깨고 제갈려가 방을 나섰다.

그 뒤를 졸졸 따라서 넘었던 담에 도착했다.

시후는 단박에 담 위로 올라간 제갈려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혁대.”

* * *

“어제 늦은 시간까지 들어오지 않던데, 무슨 성과라도 얻었는가?”

아침 식사를 위해 식당으로 향하는 도중, 남궁천이 은근슬쩍 어젯밤 늦게 돌아온 이유를 캐물었다.

“산책하다가 비무에서 얻은 걸 정리 좀 하고 들어왔죠.”

“아! 어쩐지. 자기 전까지 시후 오라버니 돌아오는 소리가 안 들리더라고요. 하도 안 들어오셔서 찾으러 갈까 싶었는데 안 가길 잘했네요.”

찾았으면 큰일 났겠지.

시후는 등에서 흘러내리는 땀방울을 느끼면서도, 애써 태연한 척 걸음을 옮겼다.

“아무리 무공 수련이 좋다고 해도 최소한의 잠은 필요해요. 일단, 잠을 자지 못하면 신경이 곤두서고, 그로 인해서······.”

남궁미의 잔소리가 귀찮기는 했지만, 쓸데없이 어젯밤 이야기가 나오는 것보단 나았기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잔소리의 끝은 식당 입구에 서 있는 제갈지현을 보고 나서야 멈추었다.

“오늘은 많이 늦었군.”

“우리 차 아우가 어제 늦은 시간까지 깨달음을 정리하느라 조금 늦었네.”

남궁천의 말에 지현은 식당을 둘러보았다.

그의 시선을 따라 둘러본 식당 내부에는 앉아 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곧 지현의 입가에 웃음이 맴돌았다.

“조금이라······. 기준이 아주 관대하군? 역시 대 남궁세가야. 그런 의미에서 밥도 조금만 먹게.”

“대 남궁세가의 조금이라는 기준을 제갈세가가 감당할 수 있을지 모르겠군?”

“흰소리 말고 밥이나 들게.”

투덕거리는 두 사람을 뒤로하곤 시후는 남궁미와 함께 얼마 남지 않은 음식을 담았다.

아침 식사시간 막바지라 그런지 먹을 만한 음식은 동이 나 버렸고, 남아 있는 것들도 서늘한 아침 기온에 온기를 잃은 지 오래였다.

“윽······. 밥이 꼬들꼬들한 정도가 아닌데요?”

볶음밥을 푸던 남궁미의 투덜거림에 시후가 멋쩍게 웃었다.

그 와중에 팽철우는 접시를 내려놓곤 볶음밥을 통째로 자리에 가져오는 무식함을 선보였다.

어마어마한 식탐에 혀를 내두르는 사이, 남궁미가 갑자기 손을 들어 흔들었다.

“려 언니, 이리 와서 같이 먹어요!”

남궁미의 외침에 시후의 고개가 절로 휙 돌아갔다.

입구에는 복면을 쓰지 않은 제갈려가 서 있었다.

제갈려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돌렸고, 시후는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원래 소식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최대한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은 것인지 몰라도, 제갈려의 접시에는 담긴 음식보다 빈 곳이 더욱 많았다.

“언니, 어디 바닥에서 잤어요? 이쪽 입꼬리가 전혀 안 움직이는데요?”

연신 어색한 웃음을 짓고 있는 제갈려를 향해 남궁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질문했다.

걱정스러운 어투와 달리, 역시 남궁미의 말은 다소 거칠었다.

덕분에 제갈려의 얼굴에 자리 잡은 어색한 웃음은 더욱 이질적으로 바뀌었다.

“잠을 설쳐서 그래.”

“그래요? 아, 언니는 처음 보죠? 얘는 팽가의 철우라고 하고, 여기는 차시후 오라버니라고 해요. 요즘 용봉지회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죠. 여기, 려 언니는······.”

“내 동생이지. 려야, 매번 이렇게 아슬아슬하게 올 테냐.”

주절주절 이어지는 남궁미의 소개를 뒤에서 다가온 지현이 가로챘다.

그 또한 아침을 먹지 않았는지 접시에는 음식이 담겨 있었다.

그는 곧 시후의 옆에 의자를 빼 앉았다.

“혼자 먹기는 적적하니, 같이 좀 들겠네.”

“지현, 앉기 전에 허락부터 구해야 하지 않겠나?”

“어허, 내가 불편하다면 자네가 우리 집에서 나가게.”

지현의 말에 남궁천이 한 대 맞았다는 듯 이마를 짚었다.

손을 뗀 그는 짐짓 노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언제 남궁세가에서 용봉지회를 연다면 두고 보게나.”

“두고 볼 일이 있겠는가? 우리 모두 올해가 마지막 용봉지회 아닌가?”

“······ 나이를 먹는다는 건 슬프기 짝이 없군.”

“나이를 먹는 것보다 나에게 한 방 먹이지 못하는 게 슬픈 건 아니고?”

“사실은 그게 더 슬프네.”

두 사람이 말장난을 주고받는 사이, 제갈려가 슬쩍 시후를 흘겨보았다.

그건 곁눈질로 제갈려를 바라보고 있던 시후도 마찬가지였다.

문제는 항상 시후를 주시하는 남궁미가 두 사람의 묘한 기류를 알아차린 데 있었다.

“두 분, 서로 본 적이라도 있어요?”

“아니.”

“그래.”

제갈려와 시후의 엇갈린 대답에 시시덕거리던 남궁천과 지현의 얼굴이 오묘하게 변했다.

뭔가 재밌는 상황이 일어날 걸 느낀 것이다.

제갈려는 적잖이 당황한 얼굴로 시후를 바라보았다.

그런 제갈려와 달리, 시후는 별 대수롭지 않은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용봉지회 첫날, 지현 형님 뒤편에 있지 않았던가요? 게다가 유일하게 책 한 권을 쥐고 있어서 기억에 남는데······.”

“아하.”

뭔가 재미난 이야기가 나올 거로 기대했던 남궁천과 지현이 다소 아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덕분에 제갈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남궁미는 다소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제갈려를 흘겨보았다.

마치 자신의 먹잇감을 호시탐탐 노리는 승냥이를 바라보듯.

가운데 끼인 시후는 왠지 모를 오한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 * *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차 소협의 창술을 보니, 제 부족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뇨, 별말씀을. 주 소협이 펼치는 대청강검법이야 말로, 제 감긴 눈을 번쩍 뜨게 해 주었는걸요.”

[진행률이 4% 상승하였습니다.]

[‘증명’의 진행률이 90%에 달했습니다. 아래의 인물 중 한 사람에게 비무를 신청하여 승리하십시오.]

[곤륜파 진소랑, 개방 주잔, 남궁세가 남궁천, 무당파 청우, 소림사 견적, 아미파 연청.]

종남의 새로운 날개라고 불리는 주기린을 꺾자 ‘증명’이 갱신되었다.

한 사람이라고 하는 거로 봐선, 이 비무만 승리한다면 ‘증명’이 끝이 날 것 같았다.

하지만, 중간에 들어간 남궁천을 포함해서 어느 하나 만만한 사람이 없었다.

현 무당제일검의 제자 청우, 그리고 역대 최연소 나한승으로 들어간 소림사의 견적은 남궁천과 비교해도 밀리지 않았다.

그나마 상대하기 편하다면 곤륜파와 개방, 아미파가 나을 테지만, 그마저도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그렇기에 비무에서 이겼어도 표정이 좋을 수가 없었다.

세 사람을 이기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아니, 처음부터 죽일 각오로 일원신공을 극성으로 운용한다면 이길 수는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죽어서도 곤란한 인물이기도 했거니와, 비무에서 죽이고자 달려들 수도 없었다.

“축하하네. 기린이 결코 약한 상대는 아니었는데, 마지막에 펼친 그 수법에 하체가 흔들린 게 크게 작용한 듯하네. 나날이 발전하는 모습을 보니, 나 또한 설레는군.”

말을 건네는 남궁천의 눈빛에 은근한 감정이 어렸다.

마치 자기와 손을 섞어 보겠느냐는 듯한 시선이었기에 시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천이 형님과는 비무 안 할 거예요.”

“하하, 어디 승패가 중요한가? 한번 겨뤄 본다는 게 중요한 것 아니겠나?”

‘이 양반아, 나한테는 승패가 중요해.’

남궁천이 말을 꺼냈음에도 시후의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일단, 들어가서 방금 있었던 비무를 복기해야겠네요.”

“아, 복기만큼 중요한 게 없지. 그래 들어가 보게. 이런 모습은 우리 큰 형님과 닮았군.”

남궁천의 말에 머릿속에 남궁세가의 장자, 남궁무가 스쳐 지나갔다.

그의 이름을 남궁천도 적잖이 거론했기에, 여기서 애써 모른 척하는 것보다는 대화를 이어나가는 게 나을 것이다.

“아, 일전에 말씀하셨던······.”

“그렇지. 이렇게 끊임없이 비무를 하는 모습과 열정을 보니 문득 생각났어.”

그렇다, 이제 용봉지회는 얼마 남지 않았었다.

그렇다는 건 이제 남궁세가에서 연락이 올 때가 다가옴을 의미했다.

남궁천의 얼굴을 바라보는 시후의 마음이 다소 불편해졌다.

“아! 어서 가보게. 이 남궁천이 눈치 없이 붙잡고 있었군.”

시후가 난처한 표정으로 서 있자, 남궁천은 황급히 손을 저으며 어서 가보라 손짓했다.

다소 오해를 한 듯했지만, 시후는 해명 대신 고개를 꾸벅 숙인 채 전각으로 향했다.

잠시 뒤돌아보자, 환하게 웃으며 손을 휘젓는 남궁천의 모습이 보였다.

시후는 죄책감이 들어, 고개를 돌려 그를 외면했다.

곧, 남궁천에게 연락이 갈 것이다.

남궁천에게는 비극이겠지만.

곧 남궁천의 성장의 비료가 되어 줄 계기가.

- 37화에 계속 -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