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34화 용봉지회 (3)
“목일자라는 분을 어디서 들어본 건 같은데······. 도통 떠오르지 않네요. 오라버니는 기억나세요?”
연무장으로 이동하는 도중 남궁미가 낮게 중얼거리긴 했지만, 앞서 걸어가는 취하연의 귓가에 들리기엔 충분했다.
그녀가 힐끔 뒤를 돌아보자 머쓱해진 남궁미가 고개를 슬쩍 돌려 시선을 외면했다.
그 모습을 보던 남궁천이 남궁미의 팔을 붙잡아 걸음을 늦추었다.
“점창에서 가장 유명한 검법이 무엇이 있더냐?”
“그야 사일검법이죠?”
“다음은?”
“분광십팔수?”
“그다음은?”
계속되는 남궁천의 질문에 남궁미의 미간이 깊게 파였다.
걸음을 잠시 멈춘 남궁미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어느 순간 손바닥을 마주쳤다.
다만, 앞에 걸어가는 취하연을 의식한 것인지 목소리를 목소리는 지극히 작았다.
“유운검자라는 분이 그분이죠?”
“정답이다.”
남궁미의 말에 남궁천의 고개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취하연을 바라보는 남궁미의 눈빛에 연민이 어렸다.
“마음고생이 많았겠네요.”
“그럴 것이다. 그녀가 차 아우와의 비무에서 많은 걸 얻어 갔으면 좋겠구나.”
남궁미가 취하연을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이름이 같을 뿐이지만, 유운검법은 종남과 무당, 점창까지 세 곳 모두에 있었다.
‘유운(流雲)’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종남과 무당에는 부드러움이 어려있으나, 점창에는 구름이 사라져 거칠기 짝이 없었다.
목일자는 그런 점창의 잃어버린 구름을 뒤쫓는 자였다.
다만, 구름을 잃어 버린 만큼 점창의 유운검법은 불완전했다.
“만약, 그녀의 스승과 같이 유운삼절기 만으로 절정에 올랐다면, 그 재능이 아쉬워서라도 점창파에서 말이 많았겠구나.”
유운삼절기.
유운검법과 심법, 그리고 신법으로 이루어진 세 개의 무공.
종남과 무당이라면 모를까, 점창의 세 무공은 고작 일류에 불과하였다.
취하연을 안쓰럽게 바라보는 두 사람과 달리, 얼핏 그들의 대화를 엿들은 시후는 마냥 안쓰럽게 볼 수만은 없었다.
‘진(眞) 유운검법은 몰라도, 신법과 심법은 이미 완성했을 거야.’
시후의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분명 검법은 완성하지 못했을 것이다.
유운삼절기가 제대로 모습을 보이는 시점은 ‘난주혈사’의 직전이었으니깐.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돌아간 연무장은 깔끔하게 치워져 있었다.
한쪽에 놓여 있는 목봉을 집어 든 시후는 다가오는 취하연을 향해 목검을 던져 주었다.
목검을 가볍게 낚아챈 취하연은 곧 고개를 내젓더니, 곁으로 다가와 날이 없는 연검을 꺼내 들었다.
“연검으로 펼치는 유운검법이라······. 정말 구름을 꿈꾸는가.”
남궁천의 감탄과 달리 시후는 연검을 처음 보기에 조금 난감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장병기의 이점을 살려, 거리를 둔 채로 연검의 특성을 볼 수 있다는 점이었다.
연검을 이리저리 휘둘러보던 취하연은 준비가 됐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선공은?”
“제가 취하도록 하겠습니다.”
취하연의 대답에 시후는 발을 넓게 벌려 섰다.
곧 목봉을 허리춤으로 들어 올린 뒤, 몸을 비스듬히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시후가 들어오라는 듯 살짝 고개를 까딱였다.
취하연은 늘어트린 연검에 내공을 불어 넣었다.
그녀는 뻣뻣해진 연검을 치켜들곤 나지막이 말했다.
“갑니다.”
취하연이 앞으로 달려들었다.
연검을 잘 모르는바, 시후는 긴장을 늦추지 않은 채로 창을 앞으로 쭉 내밀었다.
검과 목봉이 닿은 순간.
그녀는 연검에 불어넣은 내공을 거두었다.
촤르륵.
귓가에는 마치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연검은 하나의 쇳덩이에 불과하다.
하지만, 취하연의 연검은 철편(鐵鞭)이라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연검 특유의 낭창거리는 움직임은 목봉과의 불필요한 접촉을 피하게 해 줬고, 시후의 목봉은 유운신법으로 인해 허공을 찔렀다.
틈을 벌렸다.
봉을 내지른 시후의 눈에 몸의 중심을 아래로 옮기는 취하연의 모습이 들어왔다.
안으로 파고들 것이다.
생각을 떠올리는 순간.
“비룡영운(飛龍泳雲)!”
그녀는 구름을 헤엄치는 용처럼 시후의 목봉을 거슬러 다가왔다.
뒤로 물러나며 봉을 찔렀지만, 단순한 찌르기로는 저 유운신법과 연검을 막을 방법이 없다.
게다가 연검의 특성상, ‘오나’ 같은 초식은 하등 쓸모가 없어 보였다.
그렇다면.
“사폐!”
‘일단 방어다.’
시후는 연검의 공격 범위를 파악한 뒤, 자신의 사방을 점했다.
시후가 그녀의 공격을 물샐틈없이 틀어막자, 취하연의 연검은 잠시 주춤거렸다.
잠깐의 망설임이었지만, 시후에게는 공격의 발판으로 바뀌었다.
“팔랑!”
낭창거리는 움직임은 연검의 전유물이 아니다.
목봉이 만든 그림자가 허공을 뒤덮었다.
“산운취명(散雲取明)!”
그러나 취하연의 연검은 허공에 드리운 목봉의 그림자를 흩트리기 시작했다.
얇디얇은 연검은 힘이 부족할지언정 정교했다.
그리고 쾌속했다.
순식간에 허공에 드리운 그림자를 절반쯤 지운 그녀가 바닥을 힘껏 참과 동시에, 몸을 빙글 돌리며 공중에서 연검을 찔러왔다.
“농운암천(濃雲暗天)”
자신이 목봉으로 허공에 그림자를 뒤덮었다면, 취하연은 연검으로 먹구름을 만들어 냈다.
‘뚫어야 한다.’
“칠회!”
시후의 선택은 훌륭했다.
칠회는 상대방의 공격을 튕겨냄과 동시에 중심을 흩트려 역공을 노리기에 좋은 초식이었다.
문제는 손바닥은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
취하연은 다시금 초식을 변경하였다.
“운봉집산(雲峯集散)”
취하연의 연검과 시후의 봉은 전혀 닿지 않았다.
닿을 듯하면 멀어지고 멀어지면 다가오는 취하연은 봉우리를 감싸는 구름과 같았다.
그렇다고 몸을 노리자니 그녀의 보법은 시후의 봉이 닿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비무를 지켜보던 남궁천은 혀를 내둘렀다.
“취 소저는 분명 자신의 장점을 잘 파악하고 있군.”
“그렇네요. 시후 오라버니가 조금 끌려다니는 게 보여요.”
시후와 달리 취하연은 자신의 장점을 극대화하며 비무에 임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시후도 모를 리 없었다.
이렇게 밀릴 이유는 없었지만, 밀리는 이유는 분명했다.
시후는 억지로 거리를 벌린 뒤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백후원보 활성화.”
일류 수준의 무인을 상대할 때는 괜찮았지만, 절정에 오른 취하연을 상대로 백후원보를 숨긴 건 자만이었다.
그리고 부끄러움보다는 ‘증명’이 우선이었다.
무거운 추를 달고 있던 것 같은 발이 홀가분하게 땅에서 떨어졌다.
마치 제천대성이 근두운을 타고 하늘을 누비듯, 시후도 취하연의 공세를 가볍게 휘젓고 다녔다.
취하연의 장점이었던 부드러운 움직임은 백후원보 앞에선 더는 장점이 아니었다.
유운의 장점이 사라진 이상, 시후의 장점이 빛을 발할 때가 왔었다.
“큭.”
무기를 부닥칠 때마다 취하연의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장점이 사라지자, 연검 특유의 단점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얇은 만큼 무기에 실린 힘은 적을 수밖에 없고, 그 충격은 모두 취하연의 손목에 가해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손목에 무리 없이 받아낼 수는 있는 방법은 있다.
그 충격을 연검에게 미룬다면 말이다.
다만, 연검은 일반적인 도검과 달리 내구성이 터무니없이 약했다.
쨍.
어느 순간 실금이 가는가 싶더니, 연검은 순식간에 수십 조각으로 바닥에 흩어졌다.
손잡이만 남은 연검을 내려다보던 취하연은 고개를 떨구었다.
[진행률이 4% 상승하였습니다.]
“졌습니다.”
알람과 동시에 취하연이 패배를 시인했다.
무인에게 무기가 부서진다는 건 어떤 의미가 있을까.
비록 자신의 본 무기는 아닐지라도, 자존심이 부서진 것과 다름없을 것이다.
이래선 곤란했다.
유운삼절기의 완성을 위해서라도 취하연에겐 자신감이 필요했다.
곧바로 남궁천을 향해 도움의 눈길을 보냈다.
잠시 고민하던 남궁천이 곧바로 취하연의 곁으로 다가왔다.
“취 소저, 한가지 여쭤볼 게 있는데 괜찮겠습니까?”
“아, 예.”
“혹시 원래부터 연검을 쓰기 시작했는지요?”
“음······. 본래는 일반 검을 사용했다가, 근래 들어 연검으로 펼치는 유운검법이 본연에 가깝다고 생각되어 바꿨습니다.”
그 말을 들은 남궁천의 표정이 묘하게 바뀌었다.
뭔가 말하고 싶지만, 이걸 말해도 괜찮은지 고민하는 듯했다.
시후는 어서 말하라는 눈빛을 보냈고, 그건 취하연 또한 마찬가진 듯했다.
“아무런 말씀이나 해 주셔도 괜찮습니다. 가감 없이 조언 부탁드립니다.”
취하연이 허리를 깊게 숙였다.
덕분에 남궁천이 다급하게 그녀의 어깨를 잡아 일으켜 세웠다.
“일어나십시오. 제가 일대종사에 다다른 노 선배님들도 아니고, 별 도움이야 안 되겠지만······. 제 생각을 말씀드리자면, 유운검법을 완성하려면 병장기의 이점에 기대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병장기의 이점······.”
“연검 특유의 낭창낭창한 움직임은 분명 유운검법이 추구하는 바가 맞을 겁니다. 하지만, 과연 유운검법이 연검으로 펼치는 무공이었는지는 돌이켜보아야 할 거 같습니다. 물론, 이건 제 개인적인 의견일 뿐이지만요.”
남궁천의 말에 취하연의 눈빛이 깊어졌다.
뭔가 깨달음을 얻은 듯하였다.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은 모두 조용히 그녀를 지켜봐 주었다.
덕분에 시후는 속으로 만세를 불렀다.
단순히 자신감을 주기만 해도 괜찮았는데, 유운검법을 완성할 실마리를 안겨 주다니.
반개하였던 취하연이 눈을 번쩍 뜨더니, 곧장 남궁천에게 다가가 머리가 땅에 닿도록 숙였다.
“남궁세가에 큰 빚을 졌습니다. 언젠가 이 빚은 제가 어떻게든 갚아 드리겠습니다.”
“빚이라뇨. 제 헛소리에 깨달음을 얻으신 걸 보니, 언제든 그 벽을 넘을 때만을 기다리고 계셨던 거 같습니다.”
“벽을 넘고 못 넘고의 차이는 천지 차이죠. 아무쪼록 남궁천 공자님의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서로 네 덕이라며 서로를 치켜세우는 광경을 따스한 눈으로 지켜보았지만, 시후는 이런 광경이 영 거북하였기에 두 사람에게서 다소 떨어졌다.
서로에게 공을 떠넘기는 사이, 연무장으로 한 무리가 들어왔다.
복장을 보아하니, 취하연과 같은 점창파의 제자로 보였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남궁천과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던 취하연의 얼굴이 한순간 굳어졌다.
덕분에 남궁천의 시선도 입구를 향했다.
비쩍 마른 외모에 얄팍하게 난 수염이 시선을 잡아끌었다.
게다가 볼에 난 점은 왜 저리도 큰 걸까.
한눈에 보아도 꼴 보기 싫은 외모였다.
“엇, 남궁천 공자 아닙니까? 혹시 저를 기억하시는지요?”
“음, 3년 전 용봉지회에 봤던 거 같은데, 이름이······. 조숭심 소협 맞소이까?”
“맞습니다. 그때 잠시 들렸다가 해남에 볼일이 있어서 곧바로 떠났었죠.”
“아! 그때 해남에서 나타난 대규모 해적······.”
“하하, 그때 사부님과 함께 해적 수십을 베었지요. 무수히 쏟아지는 해적들 사이로 저와 사부님은 거침없이 파고들며······.”
조숭심의 혓바닥이 참 길었다.
물어보지도 않은 이야기를 막 꺼내는 거로 봐서, 자랑하고 싶은 듯 보였다.
한참을 떠들던 그는 바닥에 떨어진 연검 조각을 보곤 발로 툭툭 건드렸다.
“응? 이게 뭡니까? 우연히 떨어진 쇳조각은 아닐 테고······. 연검이군.”
곧 그의 시선이 취하연에게 꽂혔다.
“아, 그렇지. 취 사매가 식당에서 비무를 청했다는 소리를 들었어. 그런데 여기 연검이 박살 나 있다는 건······ 후. 정말 그놈의 유운검법 사랑은 답도 없군.”
이죽거리는 말투를 보아하니, 필시 이곳에 의도적으로 찾아온 게 분명했다.
목표가 시후라기보다는 취하연을 노리는 듯했다.
아니나 다를까, 취하연의 안색이 점점 어두워졌다.
간신히 자존심을 올려놨는데 웬 망둥이 같은 놈이 분탕을 치고 있지 않은가.
시후의 마음이 급해졌다.
“얼마나 우리 점창파의 위신을 깎아 먹어야 정신을 차릴지 원······.”
“그쪽이라고 다를까?”
갑작스러운 시후의 말에 조숭심은 얼빠진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마치 헛것을 들은 게 아니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눈이 마주친 시후는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뭐? 소협, 나보고 그랬소?”
“그래, 지금 내 앞에서 이 이야기를 들먹이는 건, 내가 별 볼 일 없다고 깔보는 거랑 뭐가 달라? 점창파의 욕은 지가 다 먹이고 있는 거 모르나?”
“이, 이······.”
“얼씨구, 말도 제대로 못 하네.”
조숭심의 몸에서 살기가 확 피어올랐다.
우스꽝스럽게 생긴 외모와 달리, 해남에서 해적을 베었다는 말이 사실인 듯 살기가 보통이 넘었다.
하지만, 후괴가 내뿜었던 살기에 비하면 이 정도는 조족지혈에 불과했다.
“주둥이만큼 실력이 있는지 보지. 내공을 회복해라.”
“남은 내공으로도 충분할 듯한데?”
시후의 도발에 조숭심의 인내심이 끊어진 듯 보였다.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검을 뽑아 들려고 했지만, 바로 곁에 있는 남궁천이 이를 제지했다.
“비무는 무조건 목검일세.”
“아, 알겠습니다.”
조숭심은 곧바로 처음에 취하연이 내려놓았던 목검을 주워들었다.
기세를 잡을 생각인진 몰라도, 그는 심기가 불편하다는 듯 바닥에 누런 가래침을 뱉었다.
그 광경에 다들 눈살을 찌푸렸지만, 시후는 오히려 싱글벙글 웃었다.
“바닥 닦으려고 미리 침이라도 뱉어 놓는 건가?”
“그 말,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나?”
“당연하지. 그럼, 주둥이는 그만 털고 시작할까?”
그와 동시에 조숭심의 손에 들린 목검에서 다소 혼탁한 푸른빛 내공이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제법이네.’
하지만, 재롱에 불과했다.
“간다!”
조숭심의 외침과 동시에 시후는 내공을 전력으로 끌어 올렸고, 곧 휘황찬란한 금빛이 사방을 밝혔다.
- 35화에 계속 -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