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33화 용봉지회 (2)
용봉지회에 참석한 인원 중 일류 미만의 무인을 얼마가 있을까?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끽해야 각 문파에 한 명 정도일까.
그렇다는 건 최소한 다들 일류에는 발을 디뎠다는 이야긴데, 손쉽게 ‘증명’을 마무리할 수 있지 않겠는가?
단순히 생각한다면 그럴지도 모르지만, ‘증명’의 내용을 곰곰이 생각해 본다면 단순히 여기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시후는 문구에 있는 ‘그녀를 대신해’라는 내용이 마음에 걸렸다.
무려 소검후를 대신하여 비무를 행하는 것인데, 과연 일류 무인들 이기는 것으로 끝이 나겠는가.
필시 절정에 다다른 자들까지 이겨야 할 것이 분명했다.
“졌습니다.”
[일류 미만의 무인을 상대로는 진행률이 상승하지 않습니다.]
‘젠장, 알고 있다고.’
다시금 떠오른 알람을 보곤 시후는 혀를 가볍게 찼다.
혹시나 해서 비무를 받아들였지만, 아니나 다를까 진행률은 오르지 않았다.
시후의 앞에는 몇 안 되는 중소 문파 중 하나인 ‘북송문’의 막내 제자가 분통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보통 비무에 패배했다고 한들 이토록 감정을 보이진 않겠지만, 검을 놓쳐 버린 게 상당히 분한 듯했다.
귀까지 새빨개진 그의 어깨를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북송문의 둘째 사형이라는 자가 두들겨 주었다.
곧 시후가 봉을 거둬들이자 그가 포권을 취했다.
“손속에 사정을 두어 감사합니다. 좋은 공부가 되었을 겁니다.”
“아뇨, 저도 제 무공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어 기쁩니다.”
남궁천의 조언에 따라 이렇게 가식적인 말들을 하기는 했지만, 입에 발린 소리를 하느라 손발이 오그라들 지경이었다.
뒤를 슬쩍 쳐다보자 남궁천이 흡족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안 할 수도 없고······.’
시후는 정말 골치가 아파져 왔다.
“제 사제의 검이 차 소협의 옷자락도 스치지 못하였거늘······. 그리 말해 주시니, 이 녀석의 어깨에 힘이 들어가지 않을까 걱정이군요. 오늘의 지도, 감사했습니다.”
“아, 그보다 부탁드릴 게 있는데······.”
어딜 가려고.
시후는 돌아서려는 그를 향해 말꼬리를 흐렸다.
덕분에 몸을 돌리던 그는 덜컥 멈춰 섰다.
표정을 보아하니 ‘무슨 부탁할 게 있냐’는 듯했다.
“제가 들어드릴 수 있는 거라면 들어드리겠지만······.”
‘가능하지.’
그의 대답에 시후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북송의 검을 더 견식 하고 싶습니다.”
말과 동시에 주먹이 절로 꽉 쥐어졌다.
누군가 봤다면 결의를 다지는 모습으로 보였을지 몰라도 시후는 아니었다.
손발이 제멋대로 오그라들었을 뿐.
그런 시후의 모습을 본 북송문의 둘째는 얼굴을 굳혔다.
일반적으로 나이가 다소 차이나는 비무는 지도라고 받아들일 수 있지만, 시후와 그는 거의 동년배로 보였기에 의미하는 바가 달랐다.
아마도 삐딱하게 받아들인다면 ‘너 정도는 내가 이길 수 있을 거 같은데?’라고 들렸을 것이다.
“저랑 말씀입니까?”
“예.”
넌지시 ‘번복하지 않겠냐’는 듯 물어보았던 그의 질문을 시후는 단칼에 쳐냈다.
덕분에 분위기가 삽시간에 바뀌었다.
심기가 불편해진 그는 시후를 바라보던 눈을 위로 치켜떴다.
“운기조식을 하시지요. 기다려드리겠습니다.”
“바로 시작하시죠.”
시후의 가벼운 언행에 그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이것만은 알아 두시길 바랍니다. 북송의 검은 절대 가볍지 않음을.”
* * *
“조금은 손속에 사정을 두지 그랬나?”
남궁천이 다소 질책하는 듯한 말투로 시후에게 말했다.
조금 전, 상대했던 북송문의 둘째는 시후의 봉을 맞고 기절했다.
먼저 당했던 막내 사제가 그를 업고 허둥지둥 연무장을 빠져나갔기에 남궁천이 나무라는 것이었다.
그의 말에 시후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죽자 살자 달려드는데······ 그냥 기절시키는 게 속 편하죠.”
목봉으로 적당히 가슴께와 허벅지를 두들겼음에도 끝까지 달려드는 통에 관자놀이를 강하게 후려쳤었다.
다소 자존심이 상했다고 한들, 포기를 모르고 달려든 게 잘못이지 않은가?
뚱한 표정을 짓는 시후를 향해 남궁천은 고개를 살살 저었다.
“무릇, 자존심에 상처를 입는다면 그를 만회하기 위해서라도 더 악을 쓰는 게 무인 아니겠는가? 차 아우도 그런 경험이 없다고 말할 수 있나?”
그의 말에 시후는 홍설을 떠올렸다.
하긴, 자신도 홍설이 자존심을 살살 긁자 홀라당 넘어가지 않았던가.
순간적으로 짬을 내서 정주를 찾아갈 기회가 있나 떠올렸지만, 곧 고개를 휘휘 내저으며 잡념을 떨쳤다.
“거보게, 앞으로 비무를 신청하고자 할 때는 조금 더 주의를 기울이게.”
그가 말하고자 했던 본질과 다소 동떨어졌지만, 어찌 되었건 자존심을 긁은 건 사실이니 시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곧 연무장을 빠져나와 또 다른 먹잇감을 찾아 물색하는 사이, 익숙한 얼굴이 다가왔다.
“어딜 그리 빨빨거리면서 돌아다니는 게냐?”
추나행은 뭐가 그리 못마땅한지 얼굴을 구기고 있었다.
시후가 퉁명스레 받아치기 전에 남궁천이 먼저 앞으로 나섰다.
“볼일은 다 보셨습니까?”
“내 일이더냐? 저놈 볼일이었지.”
이놈, 저놈 하는 입버릇은 여전했다.
게다가 삿대질로 가리키는 모습에 시후의 기분은 퍽 상해 있었다.
인상을 찌푸린 채로 뭐라 대꾸하려 했지만, 그가 품을 만지작거리는 모양새를 보니, 시후는 불현듯 받아야 할 물건이 있다는 게 떠올랐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시후는 언제 그랬냐는 듯 찡그렸던 얼굴을 폈다.
빠른 표정 변화를 지켜본 추나행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웃었다.
“고놈, 눈치 하나는 빠르구나. 옜다.”
그가 던진 물건은 곧장 시후를 향해 날아왔다.
가볍게 낚아챈 시후는 손바닥 위에 놓인 둥그스름한 패를 내려다보았다.
[적행 패를 획득하였습니다.]
혹여나 진품을 주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단순한 기우에 불과했나 보다.
받아든 적행 패를 그대로 품에 찔러 넣으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고맙습니다.”
“어디에 쓸 건지 몰라도, 엄한데 쓰면 곤란한 건 알고 있으렷다?”
“일이 잘 풀리면 개방에 고스란히 돌려드리죠.”
“일 없다.”
손을 흔들며 돌아서는 모양새가 당분간 못 볼 듯하였다.
남궁천과 시후의 시선이 마주쳤다.
무언의 압박이 느껴졌다.
“어디를 가시는데요?”
떠나는 그를 불러 세웠다.
“알 것 없다.”
“그러시는 분이 그렇게 물어봐 달라는 분위기를 팍팍 풍겨요?”
“풍기긴 뭘 풍겼다고······. 그냥 네 녀석이 무슨 일을 꾸미는지 지켜봐야 하는데 아쉬워서 그렇지.”
추나행의 말을 들으니 흑련회 지령을 보여 주면서, 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개방에서 예의 주시할 것이다’라고 했던 그의 말이.
시후의 등에선 식은땀이 흘렀다.
순간적으로 잊고 있었지만, 개방이 자신을 주시하고 있다는 건 상당히 마음에 걸렸다.
만약 무영묘적을 만나는 광경이 개방에게 들킨다면?
그리고 무영묘적의 정체가 탄로 난다면?
앞서 세워 뒀던 계획들이 단숨에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릴 것이다.
“제가 무슨 일을 꾸민다는 말씀이세요? 저만큼 강호의 평화와 안녕을 기원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다고.”
“흰소리 그만하고 비무를 받아들이는 것도 적당히 하거라.”
어디까지 보고 있는 것일까.
목이 타는 느낌이었지만, 마실 물이 없으니 침을 삼키며 넌지시 말을 이었다.
“세상에······. 개방의 거지들은 용봉지회에 와서도 일을 하느라 바쁘네요.”
“무슨 개소리를 하는 게냐? 지금 소검후 다음으로 많은 눈이 쏠려있는 게 네놈이니, 듣기 싫어도 들려오는 것이 당연하지.”
“개방 제자들이 일하느라 바쁜 게 아니라요?”
“그놈들은 술 처먹고 어디에 박혀 있는지는 몰라도, 한 놈도 코빼기를 보이지 않더구나! 용봉지회가 끝나면 이 거지 놈들의 정신머리를 뜯어고치든가 하던지, 원······.”
이를 뿌드득 갈면서 중얼거리는 추나행의 모습을 보며, 시후는 조금 안도했다.
그래도 방심할 순 없었다.
그의 말을 통해서 자신에게 쏠린 시선이 적지 않음을 알 수 있었으니깐.
적행 패를 받자마자 무영묘적을 만나러 가려던 계획은 잠시 뒤로 미뤄야 할듯했다.
* * *
처음에 2%가 오르던 진행률은 일류 무인을 상대하면서부터 3%씩 올랐다.
이대로 간다면 금방이라고 생각했지만, 황산파의 연추혁을 이기자 조건이 다시금 변했다.
[진행률이 3% 상승하였습니다.]
[‘증명’의 진행률이 50%에 달했습니다. 당신에게 비무를 신청하는 절정 무인을 상대로 승리하십시오.]
처음에 했던 걱정이 현실이 되었다.
여태까지는 조금 만만해 보이는 일류 무인을 골랐다면, 지금부터는 그저 그런 무인이 아니라 진짜배기를 상대해야 했다.
그것도 시후 자신에게 비무를 신청하는 상대를.
“차 아우, 추나행 장로님의 말대로 자네를 눈여겨보는 자들이 한둘이 아니네.”
“뭐, 제가 조금 잘 생기긴 했죠.”
“······ 그 말이 아니지 않은가.”
시후의 너스레에 남궁천이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간신히 말을 받았다.
그의 말마따나 시후도 주변의 시선이 따갑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절정에 갓 발을 디딘 자라고 하루에 이류 무인 열을 상대하는 건 쉬울 것이다.
하지만, 이틀 만에 일류 무인 열을 상대하라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진다.
일류 무인과 이류 무인의 간극을 생각한다면, 소진된 내공이 단순히 두 배일 거로는 생각할 수 없었다.
주변인들은 필시 시후를 절정에서도 완숙에 이르렀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니깐 비무를 신청하는 절정 무인이라는 수식어가 떴겠지.’
“그보다 미아는요?”
“철우와 먼저 식당으로 갔네. 지금 먹으러 가겠나?”
남궁천의 질문에 가볍지만, 분명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포만감을 떨어지지 않게 유지하는 건 상당히 중요했으니깐.
“이쪽으로 오세요!”
식당에 들어서자마자 저 멀리 남궁미가 손을 흔들었다.
아직 접시에 음식도 담지 않았는데 급하긴.
육류를 중심으로 골라 담아 남궁미에게 다가가는데도 주위에서 쏟아지는 시선이 대단했다.
대부분의 시선은 호기심을 차지했지만, 아주 일부, 곱지 않은 시선도 느낄 수 있었다.
“안 그래도 방금 치렀을 비무에 관해서 말이 많았어요. 또 이기셨네요?”
“결과는 아직 모르잖아?”
“말 안 한다고 모를 수 있나요. 오라버니는 이렇게 태연하게 식당으로 들어왔고, 연추혁 소협은 식당에 오지 않은 걸 보면 뻔하죠.”
그도 그렇다.
둘 다 식당으로 오지 않았다면 추측이 난무할지 몰라도, 시후만 식당으로 찾아왔다면 결과는 뻔했다.
남궁미의 말에 시후가 입맛을 다셨다.
안 그래도 어제 북송문의 두 제자가 용봉지회를 떠난 것이 마음에 걸렸는데, 알게 모르게 불편한 관계를 맺는 사람이 늘어난다는 건 썩 기분 좋은 일이 아니었다.
다소 거북한 마음을 억누르며 젓가락을 바삐 움직이는 도중, 식사를 마친 남궁미가 빤히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왜?”
“아뇨, 혹시 저녁 드시고 또 비무 하실 건가 해서요.”
“음······. 청하는 사람이 있다면 하겠지.”
시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주위에서 바라보는 시선이 한층 더 강해졌다.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시후가 주변을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자, 남궁미가 어색하게 웃으며 입을 다물었다.
밥 먹는 동안에도 시선은 계속 이어졌다.
더부룩한 속을 진정시키기 위해, 남궁천은 지나가는 시비를 붙잡아 차를 내오라고 말했다.
유독 차를 즐기는 제갈세가에선 매번 식사마다 다른 차를 내오기로 유명했다.
시비가 총총걸음으로 차를 가지고 오자, 남궁천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이번엔 벽라춘이군. 매번 다른 차를 내오기도 쉽지 않을 텐데, 역시 제갈세가야.”
남궁천은 찻잔에 따르기도 전에 풍겨오는 냄새만으로 어떤 차인지 짐작했다
그런 재주에 별다른 관심이 없던 시후는 말없이 차를 홀짝였다.
‘누가 비무 신청 안 해 주나’ 싶어 주변을 둘러보는 사이, 주변에 앉아 있던 사람들 가운데 한 명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성큼성큼 다가왔다.
“처음 인사드리겠습니다. 점창파의 취하연이라고 합니다.”
여인이었다.
점창파에 여자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아미파와 각 세가를 제외하면 여인의 존재는 극히 드물었다.
시후가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받아 주었다.
“무슨 일이죠?”
“점창파 목일자의 제자 취하연이 차시후 소협께 비무를 청합니다.”
반짝이는 눈.
마주한 눈에는 긴장과 초조, 기대와 염려를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짓눌러 버릴 정도로 강한 감정은 열정이었다.
무를 향한 열정.
그러나 시후에겐 중요하지 않았다.
스스로 비무를 신청했으니 절정일 것이다.
시후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처음은 너로 정했다.’
- 34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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