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30화 소검후 (2)
새하얀 천비령의 얼굴에 약간의 홍조가 생겼다.
게다가 위로 올라간 입꼬리.
얼굴을 붉히며 웃는 모습을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몰라도, 뭉클뭉클 피어오르는 기세와 더해진다면 오싹함을 느낄 것이다.
“그럼 사양하지 않지.”
스산하게 내리까는 목소리를 듣자, 시후는 약간 후회했다.
쓸데없는 도발은 한 게 아닌가 싶은 찰나.
천비령이 왼발을 땅으로 디디며 가볍게 검기를 날렸다.
“파월참(破月斬)!”
천비령이 아무리 열이 받았다고 한들, 시작부터 절초를 펼치는 미친 짓을 하진 않았다.
단지, 파월참에 담긴 기세가 달이 아닌 해도 부술 만큼 강력했을 뿐.
흉흉한 기세로 날아오는 파월참을 보며 시후는 창을 짧게 고쳐잡았다.
“사폐!”
날아오는 검기를 허공에 가두듯 창을 그 주변으로 휘둘렀다.
단, 파월참은 거리를 좁히기 위한 교두보에 불과했다.
날아오는 파월참을 상쇄하는 사이, 천비령의 검은 이미 왼쪽 아래를 쓸어오고 있었다.
급히 창을 끌어당겨 막아 세우려고 했으나, 시간이 촉박했다.
부끄러움은 잠깐이다.
마음을 굳히자마자 발을 어깨너비보다도 크게 벌리며 자세를 낮췄다.
백후원보 특유의 날랜 움직임.
“어?”
덕분에 그녀는 시후를 놓쳤다.
찰나의 시간을 얻은 시후는 곧장 뒤꿈치로 바닥을 박차며 허공으로 몸을 띄웠다.
허공에서 몸을 뒤틂과 동시에 창을 내질렀다.
“일섬!”
그냥 펼치는 일섬은 다소 아쉬운 초식일지 몰라도, 지금 펼치는 일섬에는 회전력이 가미되어 있었다.
소용돌이치듯 찔러오는 창을 받아친 천비령은 손목에 느껴지는 짜릿한 통증에 살짝 뒤로 물러났다.
시후도 땅에 내려서자마자 발바닥을 땅에 붙인 채 슬금슬금 거리를 벌렸다.
단 한 수의 교환으로 시후는 천비령이 생각보다도 더 강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건 천비령도 마찬가지였다.
천비령의 입꼬리가 더욱 위로 치솟았다.
“재밌는 움직임인데? 곡예단의 원숭이를 보는 거 같아.”
악의가 담겼다기보단 정말 순수히 재밌는 걸 봤다는 듯한 말투.
그랬기에 시후의 얼굴은 확 붉어졌다.
‘빌어먹을 이놈의 무공.’
하지만, 덕분에 천비령을 어느 정도 상대할 수 있었으니 마냥 무공 탓만 할 수는 없었다.
선공을 당했으니 이번에 이쪽에서 갚아 줄 차례였다.
“합!”
우선, 초식을 펼치기보다는 창을 크고 낮게 휘둘렀다.
목표는 그녀의 복숭아뼈.
얕게 쌓여있던 먼지가 창이 지나간 자리에서 구름처럼 일어났다.
허공으로 뛰어오를 것인가, 그도 아니면 아미파의 여승처럼 중검을 사용할 것인가.
휘두르는 도중 그녀의 움직임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찰나의 순간, 천비령은 두 가지 선택지 중 그 어느 것도 고르지 않았다.
검 끝을 바닥에 찔러 넣었을 뿐.
그러나 무슨 속셈인지 몰랐음에도 그녀의 의도대로 흘러가게 두진 않을 시후였다.
“흡!”
왼손을 지지점 삼아 오른손을 위로 잡아당겼다.
덕분에 휘두르던 창은 땅에 강하게 부닥쳤다.
부딪히면 튕겨 나오는 게 물리의 법칙.
복숭아나무 특유의 탄성 덕분인지, 창은 순식간에 가슴께 높이로 치솟았다.
천비령은 황급히 땅에 꽂았던 검을 뽑아 들었다.
시후는 자신이 조금 빨랐음을 확신했다.
“팔랑!”
시후의 창끝이 독니를 들이미는 뱀처럼 꿈틀대며 천비령을 노렸다.
팔랑 특유의 구불거리는 움직임에는 탄성이 더해졌고, 창의 잔영이 허공을 어지럽게 수놓았다.
“얕은수!”
천비령의 입가에 어려있던 미소가 단박에 날아갔다.
반 박자.
아니, 반의반이라고 해도 모자란 시간을 앞섰을 뿐이지만, 방금 한 수로 인해 시후가 선공권을 쥔 건 분명한 사실이다.
시후는 쉴 새 없이 몰아쳤다.
“이격! 삼휘!”
끊임없이 몰아치는 공격에 조금 전 아미승의 실수를 답습하는 게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창끝을 쳐내는 일그러진 그녀의 얼굴을 본다면, 그런 말은 못 할 것이다.
천비령은 분통한 표정을 지은 채 창을 막기에 급급했다.
하지만 이대로 막고만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그녀는 분노를 거두고 이내 마음을 가라앉혔다.
찔러오는 창을 몸을 비틀어 사선으로 쳐냈다.
소매 끝이 찢어졌지만, 방금 한 수로 뒤처졌던 시간을 복구했다.
시후는 창을 회수하기 전 그 품으로 파고들었다.
“어딜!”
어떻게 거리를 벌렸는데, 쉽게 좁히도록 내버려 둘 순 없다.
창을 당김과 발끝으로 땅을 밀어냈다.
뒤로 물러나는 시후와 앞으로 쇄도하는 천비령의 간극은 삽시간에 좁혀졌다.
그리고 앞으로 내지른 천비령의 검은 자신의 턱밑까지 닿아 있었다.
턱을 뒤로 젖혔다.
땅에서 떨어진 발은 그녀의 턱을 노렸지만, 예상 범위 안에 있었는지 왼손으로 가볍게 막아 냈다.
하지만, 한 손으로 잡은 검은 힘이 떨어지는 법.
당긴 창끝으로 검을 위로 쳐냄과 동시에, 창을 반 바퀴 돌린 시후는 검을 한 번 더 위로 후려쳤다.
위기를 넘기면 기회는 찾아오는 법이다.
어깨 위로 올라간 그녀의 검.
불안정한 자세지만, 당장에 휘두를 수 있는 시후의 창.
이번엔 시후가 웃을 차례였다.
“구룡!”
시후가 창을 내질렀다.
흐트러진 자세였기에 충분한 힘이 실리지 않았지만.
그렇기에 빨랐다.
“월녀천벽!”
천비령은 다급히 검기의 벽을 세웠다.
최초에 인사처럼 날린 파월참 이후, 제대로 된 초식을 펼친 것이다.
급히 펼쳤음에도 구룡을 무난하게 막아냈다.
두 사람이 동시에 뒤로 물러났다.
일순간 정적이 흘렀다.
검을 늘어트린 천비령은 천천히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입꼬리가 다시 올라갔지만, 분명 이전과는 다른 웃음이었다.
이전에 맺혀있던 감정이 그저 즐기기 위한 웃음이었다면, 이제는 자조적인 웃음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한순간, 입가에 맺혀 있던 웃음기가 지워졌다.
“아, 쪽팔려.”
천비령의 그 말과 동시에 시후는 심한 압박감을 느꼈다.
더는 얕보지 않겠다는 그녀의 의지가 느껴졌다.
천비령의 검 끝이 흔들리는가 싶더니 발끝으로 땅을 박찼다.
앞으로 치달리는 그녀의 검 끝은 어디로 튈지 모를 정도로 거칠게 흔들렸다.
‘모르겠다면 그물을 펼쳐야지.’
“육망!”
창이 지나간 궤적에 금빛으로 빛나는 촘촘한 그물이 생겼다.
시후의 창은 모든 것을 가두겠다는 듯 허공을 수놓았지만, 천비령은 가소롭다는 듯 비웃었다.
“월광강세!”
천비령의 검에 맺혀있던 묵빛의 검기는 모든 것을 찢어발길 듯한 기세로 쏘아졌다.
황금빛 그물은 묵빛 검기로 인해 숭덩숭덩 구멍이 생기기 시작했다.
뒤늦게 내공을 끌어 올렸지만, 천비령은 시후보다 내공이 부족한 인물은 결코 아니었다.
그녀의 검기가 순식간에 시후의 그물을 찢어발겼다.
시후는 다급히 창에 내공을 둘렀다.
쾅!
날붙이가 부딪히는 소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굉음이 터졌고, 시후의 몸이 뒤로 연신 밀려나기 시작했다.
더는 끌려가지 않기 위해, 내공을 한계치까지 끌어올리고 나서야 뒷걸음질을 멈출 수 있었다.
힘은 균형을 맞추었다.
그렇다면 남은 건 기교.
“어설퍼!”
그야 당연하겠지.
고작 1성짜리 십창으로는······.
[십창 2성을 달성하셨습니다.]
남창에서 흑련회의 졸개들을 상대하며 조금은 숙련도가 쌓인 모양이었다.
본래 1성이나 2성이나 그리 큰 차이는 없었다.
하지만, 천비령은 그 조금의 차이를 다르게 받아들인 듯싶었다.
“여유가 있었네?”
그녀로선 오히려 시후가 도발하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조금이지만 시후의 창이 매서워지고 있었으므로.
물론, 시후의 입장에서는 전혀 아니었지만.
천비령의 검이 조금 더 짙게 물들었다.
“현월창세!”
현월문의 무공은 죄다 현월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그렇게 현월이라는 말을 좋아하는 현월문이었지만, 모든 초식에 ‘현월’이라는 단어가 들어가지는 않았다.
단, 최후의 초식에는 죄다 ‘현월’이 들어갔다.
그 말이 의미하는 건 간단했다.
“미친.”
천비령의 검 전체가 검게 물들었다.
현월검법의 최후의 초식인 만큼, 월광강세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터.
창을 굳게 다잡았다.
“막창!”
분명 천비령의 손에 들린 검을 하나였다.
하지만, 검을 휘두를수록 시후의 주변은 점차 검게 물들어갔다.
곧바로 쌀 다섯 포대는 짊어진 것처럼 시후의 무릎이 굽혀졌다.
이왕 받아내기 시작했으니, 남은 내공을 모조리 긁어모아서라도 막아 내리라.
시후는 이를 악물고 남은 내공을 모두 쏟아부었다.
덕분에 시후를 잠식하려던 어둠은 제힘을 뻗지 못한 채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내공은 급속도로 바닥나고 있었다.
점입가경으로 현월창세는 그 위력을 더해가기 시작했다.
마치 시후를 육편으로 만들어 버리겠다는 듯.
그런 시후와 천비령을 지켜보던 정현 사태는 곁으로 다가온 추현 사태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허, 소검후를 상대로 한치의 밀림도 없다니. 강호에 신성이 둘이나 나타났구나.”
‘아니야!’
“보통이 아닙니다. 저자의 나이도 소검후의 또래로 보이는데······. 감숙의 차시후라니, 들어본 적도 없는데 참으로 대단합니다. 저 모습은 마치, 소검후의 기력이 떨어지길 기다리는 것 같군요.”
‘아니라고!’
누군가의 개입이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었지만, 주변에서 보기에는 한편의 경극처럼 완벽히 공방을 주고받는 것으로 보일 터.
입술을 달싹일 힘조차 쏟아부어야 하는 시후에겐 분통이 터질 일이었다.
이 거지 같은 상황을 벗어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현월창세를 막아내고 있는 막창을 거두고 그보다 더욱 강한 공격으로 받아치는 것.
다만, 이 방법은 불가능했다.
막창을 거두는 순간 갈기갈기 찢겨나갈 테니까.
두 번째 방법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아주 간단한 방법이었다.
바로 죽는 것.
그러나 고작 비무로 목숨을 잃는다면 얼마나 허망하겠는가.
하지만, 원치 않은 두 번째 선택지는 강제로 채택되기 직전이었다.
시후의 남은 내공은 얼마 되지 않았다.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했다.
그 사실을 알아차린 건 남궁천도 정현 사태도 아닌, 남궁미였다.
“시후 오라버니가 왜 저렇게 비지땀을 흘리는 거죠?”
“저 엄청난 공격을 받아내고 있는데, 압박감이 보통이 아닐 테지.”
“위험한 거로 보이는데, 아닌가요?”
“그렇게 위험한 거로 보이······ 네?”
그제야 남궁천은 시후가 박빙이 아니라 살얼음판을 걷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정현 사태 님!”
늦었다.
살얼음판에 금이 갔다.
두꺼운 얼음 바닥도 아니고 살얼음판에 금이 갔다는 건, 힘의 균형이 완벽히 무너졌음을 의미했다.
시후의 얼굴에는 절망이 드리웠고, 천비령은 당혹스러운 기색으로 검에 맺힌 기운을 거두었다.
하지만, 쏘아진 화살과 내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 없듯, 흩뿌린 검기는 돌리 방법이 없었다.
시후는 닥쳐올 두 번째 죽음에 눈을 질끈 감았다.
파파파파팍!
무엇인가 틀어박히는 소리.
천비령의 검기가 자신의 몸에 틀어박히는 소린가 싶었지만, 고통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고통도 느끼지 못할 만큼 신속하게 죽은 것인가?
의아한 마음에 눈을 뜨자 눈앞엔 믿기 힘든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자신을 향해 쏘아졌던 현월창세의 무수히 많은 검기는 허공에 멈춰 있었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이 놀라운 광경에 다들 넋이 나간 듯 바라보았고, 시후는 옆으로 얼른 몸을 피했다.
아니, 피하려고 했다.
알 수 없는 상황에 주변을 둘러보던 시후는 뒤늦게 자신이 들었던 소리의 근원을 알아차렸다.
깃발.
자신이 서 있던 곳을 중심으로 여덟 개의 붉은색 깃발이 꽂혀 있었다.
“어린아이가 손이 매섭구나.”
그와 동시에 뒤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시후는 서둘러 고개를 뒤로 돌렸다.
그곳에는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새하얀 학이 수놓아진 청색 도포를 입고 당당하게 서 있었다.
목소리의 주인이 분명해 보였다.
“힘을 조절하지 못하고 세가 내에서 살인을 저지르려 하다니······. 검후가 제자를 잘못 들였구나.”
천비령의 얼굴이 단숨에 붉어졌다.
노인은 고개를 푹 숙인 천비령에게 할 말이 많은 표정이었으나, 곧 시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일단 저 아이부터 꺼내 주고 이야기하자꾸나.”
노인은 시후를 향해 손을 한 번 흔들었고, 허공에 멈춰 있던 천비령의 검기는 그 손짓 한 번에 눈 녹듯 사라졌다.
툭.
그와 동시에 바닥으로 쓰러지는 깃발.
그제야 시후는 깃발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시후와 천비령을 보며 혀를 차던 노인은 주변을 둘러보더니, 정현 사태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이 비무를 주관한 게 정현, 너였더냐?”
그 날카로운 시선이 꽂히자, 정현 사태가 어깨를 다소 움츠렸다.
“그렇습니다.”
“너도 따라서 오고······. 뭘 멀뚱멀뚱 서 있는 게야? 네놈도 바닥에 떨어진 천로수변(天路手變)을 가지고 냉큼 따라오거라.”
정현에게서 시선을 돌린 노인은 시후를 향해 버럭 소리 질렀다.
그의 일갈에 시후는 냉큼 바닥에 떨어진 깃발을 주워들었다.
평소라면 투덜거렸을 시후가 말을 잘 듣는 이유는 간단했다.
필수 불가결의 존재.
그는 팔황의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천변기황(天變旗皇)이었다.
끝에 다다라서야 볼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그가 등장했다.
- 31화에 계속 -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