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29화 소검후 (1)
챙, 채채챙, 챙!
길을 따라 걷다 보니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란에도 누구 하나 서두르는 기색이 없었다.
아무리 뛰어난 두뇌로 유명하다고 한들, 이곳은 명실상부 팔대 세가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제갈세가였다.
게다가 소리는 그들이 가는 방향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이쪽으로.”
지현이 빠른 걸음으로 앞장섰다.
소리는 점차 가까워졌고, 도착한 곳은 그리 크지 않은 연무장이었다.
“아미파로군.”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까까머리의 여승들이 줄지어 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앞으로 창을 붙잡은 여승과 검을 든 채 등을 보인 여성의 모습이 보였다.
소검후로 짐작되는 인물의 얼굴이 연무장 입구에선 보이지 않았으나, 곧 두 사람은 원을 그리듯 천천히 돌았다.
그 모습을 본 남궁천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발끝이 가벼우면서도 중심이 어느 쪽으로 치우쳐 있지 않아.”
그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소검후의 움직임을 관찰했다.
한참이나 턱을 만지작거리던 그는 그녀와 마주하고 있는 아미승을 바라보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상대가 너무 긴장했군. 발끝이 무디고 상체가 앞으로 쏠려있는 게 당장이라도······.”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미의 여승은 앞으로 창을 내질렀다.
붉은색 창의 잔영은 좌우로 쉴 새 없이 흔들렸고, 그보다도 바쁘게 움직이는 발은 소검후가 거리를 좁히게 두지 않을 기세였다.
몰아치는 기세가 사뭇 거칠었다.
마치 아미파 여승이 승기를 붙잡다 못해, 상대의 목을 물어뜯을 듯 기세가 맹렬했다.
“말려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 흉흉한 공격에 남궁미가 다소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남궁천을 바라보았지만, 그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별다른 표정 변화도 없이 앞을 응시했다.
그 사이, 여승의 창은 소검후의 몸을 꿰뚫어 버리겠다는 듯 연신 몰아붙였다.
덕분에 남궁미는 두 손을 모은 채 침을 꼴딱꼴딱 삼켰다.
그런 동생의 모습이 귀여웠던 것일까, 남궁천의 손은 어느새 남궁미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저건 아미의 복호창(伏虎槍)이다. 복호창을 펼치는 도중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기세가 사뭇 강맹하여, 상대를 압박하고 있다고 착각할 수도 있지만······ 저기 보거라. 소검후의 얼굴이 어때 보이는지. 그리고 뒤편에 있는 아미파 어르신들은 누구를 걱정하고 있는지.”
그의 말에 남궁미는 시선을 돌려 뒤편에 서 있는 여승들을 바라보았다.
또래의 여승들 얼굴에 어린 감정은 기대감이었지만, 그들을 이끄는 위배분 여승들의 표정은 참담했다.
그 모습을 본 남궁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저렇게까지 표정이 안 좋죠?”
“계속 보면 답이 나올 거다.”
남궁천의 아리송한 그의 말에 남궁미는 다시 두 사람을 관찰했다.
한참을 몰아치던 여승이 뒤로 물러났다.
붉어진 얼굴로 호흡을 고르기 시작하더니, 곧 그녀의 창끝이 서서히 떨리기 시작했다.
호흡이 달려서가 아니라 의도적인 듯 그 떨림은 일정했다.
“호퇴일섬(虎退一閃)!”
여태까지 했던 찌르기와는 그 궤를 달리했다.
다만, 소검후에겐 그조차 통하지 않았다.
섬전이라 불러도 무방한 창끝에 닿은 검은 물 흐르듯 움직여 창을 바닥에 내리꽂았다.
여승이 급히 창을 거두려 했지만, 창간에 닿은 소검후의 검은 그것을 허락한 적이 없었다.
그 모습을 본 남궁천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끝났군.”
남궁천의 말마따나 여승은 창을 빼내기 위해 이리저리 용을 써보는 듯했지만, 미동조차 없었다.
극한의 중검(重劍)이었다.
반질거리는 머리 전체가 시뻘게질 때까지 창을 당기던 여승은 이내 포기했는지 팔을 늘어트렸다.
“졌습니다.”
상대가 패배를 시인하자 소검후는 비로소 검을 거둬들였다.
상당히 풀이 죽은 여승이 물러나자, 남궁천은 소검후를 스쳐지나 아미파 여승들에게 다가갔다.
“정현 사태님, 본의 아니게 비무를 지켜보았습니다. 죄송합니다.”
“신경 쓸 것 없다. 게다가 복호창이 슬쩍 본다고 해서 그 정수를 알 수 있을 만큼 녹록한 무공이 아니지 않으냐?”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남궁천은 정현 사태와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옆을 힐끔거리며 소검후를 관찰했다.
그 모습에 정현 사태가 피식거리며 웃었다.
“인제 보니 제사상보다 잿밥에 관심이 많은 중생이로고.”
정현 사태의 말에 남궁천의 귀가 한껏 달아올랐다.
그 모습에 시후도 어느 정도 이해는 했다.
검후는 초설과 비견될 정도의 미녀였으니깐.
굳이 비유하자면 초설이 눈이 시리도록 새하얀 달같이 청초하고, 소검후는 마치 떠오르는 아침 햇살처럼 생기발랄하달까.
그건 아마도 주위를 둘러보느라 찰랑거리는 머릿결 탓도 있을 것이다.
주변을 둘러보던 그녀의 시선이 연무장 입구에서 멈추었다.
“응? 왜 이쪽으로······.”
잠시 시선이 멈추더니, 소검후의 발은 연무장 입구로 향했다.
정확히는 입구에 서 있는 시후를 향해서였지만.
성큼성큼 다가온 소검후는 시후의 앞에 멈춘 뒤, 등에 멘 창을 힐끗 바라보곤 입을 열었다.
“창을 쓰시나요?”
통성명은커녕 인사조차 없었다.
예의라곤 눈을 씻고 찾아볼 수 없는 그녀의 행동에 다들 눈살을 찌푸렸다.
다만, 소검후가 저런 캐릭터라는 걸 알고 있는 시후는 무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문제는 소검후의 다음 행동이었다.
스르릉.
그녀가 검을 뽑아 들었다.
“현월문의 천비령이 당신에게 비무를 신청합니다.”
덕분에 놀란 남궁천과 정현 사태가 그사이에 급히 끼어들었다.
“소저, 잠시 검을 거두시오.”
“소검후는 검을 거두고 뒤로 물러나시길.”
정현 사태는 그렇다고 해도, 남궁천의 말에 천비령은 뚱한 표정을 지었다.
도대체 왜 끼어드는 것이냐는 표정이었다.
“이번에는 왜 또 말리시는 거죠? 문파와 이름을 밝히면 비무를 해도 된다고 하지 않았나요?”
“본 아미파에는 사전에 이야기가 되어 있으니 괜찮지만, 저 소협은 아니지 않습니까?”
“싫다면 말했겠죠.”
당돌하다.
아니, 당돌하기보다는 건방졌다.
아무리 배분 상 정현 사태와 같은 위치라고 한들, 나이 차를 생각한다면 저런 행동은 욕을 들어 마땅했다.
누구나 화를 낼 법한 상황이었지만, 정현 사태는 그러지 않았다.
“그 모든 것은 검을 빼 들기 전에 해야 합니다. 손잡이를 잡는 것만으로도 상대가 위협이라 생각할지 모르지 않습니까? 무릇, 강호를 종회 하다 보면 끊임없이 시시비비에 휘말리기 마련인데, 그럴 때 가장 중요한 것이······.”
“위협이라고 생각한다는 건, 약한 거 아니에요?”
상식을 벗어난 대답.
덕분에 정현 사태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할 말을 잃었다.
시후를 비롯한 모든 이들의 머릿속에는 천비령을 향한 평가가 하나로 귀결되었다.
‘미친년.’
정현 사태는 곧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검후는 무슨 생각으로······.”
검후라는 말에 천비령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잠시 갈등하던 그녀의 검은 검집 안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입술을 잠시 삐죽이더니 시후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비무 할래요?”
무기를 빼 들지 않았을 뿐이지, 여전히 일방적인 강요였다.
아니나 다를까, 정현 사태가 다시금 그녀를 만류했다.
“상대가 누군지 알아야겠지요. 통성명은 기본입니다.”
“아까 했잖아요?”
“소검후께선 비무를 신청한 거지, 정식으로 소개를 했다곤 보기엔 어렵지 않겠습니까?”
눈을 마주치며 또박또박 말하는 정현 사태의 태도에 천비령은 답답한지 가슴을 두들겼다.
“아, 진짜······. 현월문 16대 제자 천비령이라고 해요.”
“감숙에서 온 차시후이며, 사문은 딱히 없습니다.”
“저랑 비무······.”
“초면에 비무부터 하자고 다짜고짜 권하는 건 검후의 얼굴에 똥칠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정현 사태가 많을 끊은 덕분에 이번에는 말조차 내뱉지 못했다.
게다가 다시 검후를 거론하자 천비령의 얼굴은 똥 씹은 듯 변했다.
“아으······. 이것도 안 된다, 저것도 안 된다. 그럼 어떡하라고요.”
“하지 말라고 하는 게 아니라, 어느 정도 안면이 튼 다음에 하는 게 어떤가 싶어서 권하는 겁니다. 저기 계신 소협도 부담스럽지 않겠습니까?”
왜 자신을 걸고넘어지는 걸까.
정현 사태의 말에 천비령은 눈을 반짝이며 시후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하겠다고 해야 하는가? 쓸데없는 시간 낭비에 불과한 비무를 거부해야 하는가?
시후의 결론은 금방 내려졌다.
물론, 하지 않는 쪽으로.
“음······. 사실 부담스럽······ 지 않군요. 진정한 무인이라면 이런 비무 신청을 거부하지 않는 법.”
결론은 ‘하지 않는다’라는 쪽이었지만, 눈앞에 떠오른 알람 창을 보곤 마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돌발 임무 ‘동갑내기 길들이기’가 발동합니다.]
[소검후 천비령과의 비무에서 승리하십시오.]
‘동갑내기 길들이기’라니.
만약 이기게 된다면 어떤 보상이 주어질지 궁금했다.
하지만, 기대감에 찬 시후와 달리 주변에선 걱정이 가득했다.
“차 아우, 괜찮겠나?”
“시후 오라버니께서 아실지는 잘 모르겠으나, 소검후는 이미 절정에서도······.”
남궁천과 남궁미가 무슨 걱정을 하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천비령은 설정상, 그녀는 4년 전에 절정에 발을 디뎠으니깐.
이미 절정에서도 완숙을 향해 달려가고 있을 테지.
하지만, 얻을 수 있을 것으로 짐작되는 보상이 너무나도 달콤했다.
게다가 고작 비무이지 않은가.
시후는 가볍게 손을 내저으며 걱정을 일축했다.
“뭐, 어떻게든 되겠죠.”
시후는 가볍게 대꾸하곤 등에 멘 창을 앞으로 가져와 굳게 쥐었다.
그 모습을 본 천비령은 신이 나서 검을 뽑아 들었다.
남궁천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천비령과 시후 사이에 선 정현 사태는 짧게 혀를 차더니, 둘에게 다가가 엄중히 경고했다.
“양쪽 다 상대에게 살초(殺招)를 펼쳐선 안 됩니다. 상대가 저항 의사가 없다고 판단되거나, 기력이 다 소진되었다면 공격을 멈춰야 합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제가 공격을 멈추라고 말하면 두 사람 다 주저 없이 뒤로 물러나야 합니다. 알겠습니까?”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말했지만, 정현 사태의 시선은 주로 천비령을 향해 있었다.
마치 ‘난 널 믿지 못하니깐 내 말을 잘 따라라’라며 말하는 듯했지만, 비무를 할 수 있다는 기쁨 때문인지 그녀는 연신 싱글싱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소 불안한 눈빛으로 천비령을 바라보던 정현 사태는 곧 시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소협께서는 위험하다고 판단되면 바로 소리치십시오.”
시작도 전에 시후가 질 걸 예상하는 듯한 정현 사태의 말에 다소 기분이 상했지만, 어쩌겠는가.
돈을 걸라고 했다면 시후도 천비령의 승리에 걸었을 테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네.”
시후가 간결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정현 사태는 뒤로 쭉 물러났다.
천비령은 목을 풀었다.
마치 건달처럼.
좌우로 목을 까딱이던 천비령은 시후의 시선에 씩 웃음을 지었다.
“양가가 몰락하고 나서 창을 쓰는 사람이 극히 드물었는데, 오늘만 두 사람을 만났네? 잘 부탁해.”
자연스러운 반말.
시후는 대꾸 없이 창을 빙빙 돌렸다.
그 모습을 본 천비령의 입꼬리는 더욱 위로 올라갔다.
“시작할까?”
그녀의 말에 시후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창을 고쳐잡았다.
팔을 늘어트린 검을 가슴께까지 올려 중단세를 취하자, 천비령의 기세가 급격히 변했다.
마치 높은 철문을 마주한 것처럼 단단함이 느껴졌다.
먼저 들어갔다간, 분명 아미파의 여승 꼴을 면치 못할 것이다.
빠르게 판단 내린 시후는 창을 한 손으로 붙잡은 채, 반대편 손을 펼쳐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효과는 굉장했다.
좋지 않은 방향으로.
- 30화에 계속 -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