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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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화 용봉지회를 향해 (3)
동이 막 터 오르기 시작한 새벽이었지만, 남궁세가 정문에는 열 명 남짓의 사람이 모여 있었다.
그중 말 위에 올라탄 사람은 총 넷이었다.
용봉지회에 참석하는 남궁천과 남궁미, 그리고 팽철우와 시후까지.
시후의 흑마는 그동안 먹인 보람이 있었는지, 탑승 불가 상태가 해제되어 한혈마의 핏줄다운 위상을 뽐내고 있었다.
하지만, 모두가 말에 올라탔음에도 추나행은 끝끝내 말을 사양했다.
“말을 타시는 게 편하지 않겠습니까? 제남까지 가는 길이 평탄하다고는 하나, 그 거리가 상당하지 않습니까?”
“불편하다.”
추나행의 대꾸에 남궁천을 입을 다물었다.
제남까지는 1,500리에 달하는 엄청난 거리였다.
하지만, 본인이 싫다는데 강제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남궁천은 도움을 바라는 눈빛으로 남궁선유를 바라봤지만, 그는 입가에 미소를 띤 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 친구······ 아직도 말을 못 타는 겐가?”
“못 타긴 개뿔!”
아니라고 부정했지만, 거짓이 분명했다.
그제야 남궁천은 왜 추나행이 한사코 말을 거부했는지 알아차렸다.
얼굴이 시뻘게진 채로 등을 돌리는 추나행을 보며, 남궁미는 쿡쿡거리는 웃음을 내비쳤다.
그런 남궁미의 곁으로 남궁선유가 천천히 다가왔다.
조금 전까지 웃고 있었지만, 다시 딸을 보내야 한다는 사실을 떠올리자, 그의 얼굴은 다시금 딱딱하게 굳었다.
“꼭 가고 싶다니 말리지는 않겠다만······.”
남궁선유의 눈 밑은 거뭇거뭇하다 못해, 먹물이라도 찍어 발라 놓은 듯했다.
밤새 잠을 청하지 못한 것 같았지만, 그런 아비의 마음을 모르는 남궁미는 샐쭉한 표정만 짓고 있었다.
남궁선유는 남궁미가 올라탄 말의 콧잔등을 쓰다듬었다.
“산동은 우리 안휘와 마찬가지로 화동(華東) 지방으로 묶여 있지만, 화북(華北)과 닿아 있어 조금 차이가 난단다. 특히 제남은 태산이 가로막아 화북에 조금 더 가까운 문화를 가지고 있으며······.”
남궁선유의 잔소리는 남궁미가 어디로 떠나면 시작되는 인사와 같았다.
낭궁미는 경청하는듯하면서 잘 흘려들었고, 남궁천은 어색하게 웃으며 그 말이 끝나길 기다렸다.
산동의 문화에서 음식으로 넘어가더니, 이윽고 그나마 도움이 될 만한 지형적인 설명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제남에 다다르기 직전, 태산 아래를 지나게 될 터인데, 산세가 험하여 낙마의 위험이 있으니 조심하거라.”
누가 가지고 온 것인지 몰라도, 길었던 그의 말끝에 드디어 마침표가 찍혔다.
“네 알겠어요! 조심해서 다녀올게요!”
잔소리가 더 이어질세라, 남궁미는 서둘러 말의 옆구리를 살짝 걷어찼다.
선두는 체력적으로 가장 문제가 될 남궁미, 일부러 말을 타지 않은 추나행이 있기로 하였다.
다만, 아무리 지구력이 좋은 말이라고 할지라도 종일 달릴 수는 없었다.
말의 체력을 조절하는 사이, 남궁천이 말의 속력을 조금 더 늦추더니 시후의 곁으로 다가왔다.
“어제 부탁한 건 이야기해 놨네.”
“아, 감사합니다.”
“차 아우의 도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 그리고 안휘성에서 머무르고 있다면 용봉지회가 끝날쯤에는 찾을 수 있을 걸세.”
“아······. 그렇군요.”
용봉지회가 끝나는 시점이라는 말에 시후의 얼굴에는 옅은 그늘이 스쳐 지나갔다.
그렇다면 그에게 정보를 받는 일은 추후가 될 것이다.
용봉지회는 정상적으로 끝나지 않을 테고, 남궁천은 그 전에 집으로 돌아가야 할 테니깐.
* * *
사흘.
1,500리에 달하는 거리를 주파할 때 걸린 시간이었다.
남궁세가에서 준비한 말들과 시후의 흑마는 상당한 명마였다.
덕분에 예정된 나흘보다 조금 더 속력을 높일 수 있었고, 사흘째 밤에 제갈세가의 문을 두드릴 수 있었다.
다만, 늦은 시간이었기에 사람을 불러오는 것까지는 다소 기다려야 했다.
“끄응······.”
“그러길래······ 말을 탔으면 좋았을 텐데.”
“시끄럽다, 이놈아.”
예정된 기일을 앞당긴 만큼, 추나행은 다소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 거리를 두 다리로 뛰었으니 오죽하겠는가.
인상을 잔뜩 찌푸리던 추나행은 갑자기 히죽거리며 웃었다.
“사흘에 천오백 리라면 후괴랑도 얼추 비슷하려나?”
“에이, 어림도 없죠.”
시후의 말에 기분 좋게 웃던 추나행이 인상을 팍 썼다.
“네놈이 뭘 안다고 끼어드는 게냐?”
“공동산에서 화산까지의 거리가 얼만 줄 아세요?”
“음······ 이보다는 조금 짧을 테지?”
“산길은 더 힘들죠?”
자존심상 대답하기 싫은 것인지 몰라도, 추나행은 더 말해 보라는 듯 턱을 까딱거렸다.
“만약 그 거리를 절 업고 뛴다면 얼마나 걸리겠어요?”
“닷새······ 아니, 나흘이면 충분하다!”
한참을 고민하던 그는 손가락 다섯 개를 쭉 폈다가 냉큼 하나를 접었다.
그 모양새가 우습기 그지없었다.
“후괴는 절 업고 이틀 만에 갔는데요?”
“엥? 후괴를 만났어?”
추나행은 이틀이라는 경이적인 기록보다도 시후가 후괴를 만난 것에 더 관심을 보였다.
“뭐, 어찌어찌 만났죠.”
“만난 건 만난 거다만, 왜 네 녀석을 업고 화산까지 뛴 게냐?”
“뭐, 사정이 있었죠. 서로에게 득이 되는 사정이.”
자신의 말에 추나행이 표정을 굳혔다.
비교당해서 그런 건가 싶었지만, 그건 아니었다.
“쌍괴가 다시 강호로 나온 건가? 그 늙은이들은 진즉에 관 뚜껑을 열고 들어갔어야 할 나이일 텐데······. 그보다 사실이더냐? 네 녀석을 업고 이틀 만에?”
“뭐, 꼬박 밤을 새워서 달리긴 했지만요.”
“쌍괴라는 말을 부정하지 않는 것으로 봐선, 서괴도 나온 모양이군?”
‘영악한 늙은이 같으니라고.’
어차피 숨겨야 할 사실도 아니었기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이, 화롯불 너머 제갈세가 안에서 한 인영이 다가왔다.
그의 얼굴을 확인한 남궁천이 멋쩍게 웃으며 다가갔다.
“지현. 늦은 시간에 미안하네.”
남궁천의 사과에도 지현이라 불린 자의 이마에 새겨진 내 천(川)자는 지워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오려면 내일 오지 그랬나? 헛, 추나행 장로님을 뵙습니다!”
“바로 알아보는군? 역시 제갈 아이들이 눈썰미가 좋구나.”
“이토록 헌양하신 모습을 감추고 계셨더니, 아주 간신히 알아봤습니다.”
“껄껄껄, 요 녀석. 그렇게 아부한다고 거지 주머니에서 나올 게 있겠느냐?”
“제 입은 진실만을 말하기 때문에 자연스레 나오는 겁니다. 혹, 추나행 장로님도 세가에서 머무르실 예정이시라면······.”
“신경 쓰지 말거라. 난 어디 들릴 곳이 있으니.”
추나행의 대답에 제갈지현은 허리를 접었다 펴며, 옆에 있는 시후를 힐긋 흘겨보더니 곧 시선을 남궁천에게 향했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시선 이동이었다.
“이번에 사귄 아주 친한 동생이라네. 용봉지회에 참석시키려고 하네만.”
“보증인은 세 사람?”
지현의 질문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고 지현은 시후의 앞으로 다가왔다.
“제갈지현일세. 부족하지만 강호의 동도들이 지료관필(知了貫筆)이라 부르고 있다네.”
“감숙성 난주에서 온 차시후라고 합니다.”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 안으로 들어갔지만, 추나행은 문을 넘지 않았다.
“내일이나, 늦어도 모레에는 오마.”
추나행은 붙잡을 새도 없이 휘적휘적 온 길을 되짚어 돌아갔다.
곧 추나행이 골목 어귀로 모습을 감추자, 지현은 시후 일행을 안으로 안내했다.
“우리가 가장 늦게 왔는가?”
“그렇진 않네. 꼴찌를 겨우 면한 정도이긴 하지만.”
“하하, 다들 일찍들 왔군.”
이틀 뒤면 지회가 정식으로 열리니 이르다면 이를 수 있지만, 제법 거리가 멀리 떨어진 문파는 일주일 전에도 도착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너스레를 떨던 남궁천은 지현이 눈치를 주자 살짝 헛기침했다.
“흠흠, 아직 어디가 아직 안 왔는가?”
“모용세가에서는 이번에 일이 생겨 오지 못하겠다고 말했고, 당문이 아직 안 왔네. 거리가 먼 만큼 서둘러 출발했을 터인데, 아직 산동에도 들어서지 않았나 보더군.”
“뭐, 배를 탔다면 내일이라도 도착하지 않겠나?”
“그래서 말인데······.”
남궁미를 힐끗 바라보던 지현은 잠시 주저하더니 남궁천에게 귓속말을 했다.
그의 어깨가 움찔했다.
지현이 귓속말로 무슨 말을 했을지 궁금증에 빠진 사이, 오늘 잠을 청할 건물에 다다랐다.
고작 넷이서 쓰기에는 너무 과한 게 아닐까 싶었다.
안을 둘러보진 않았지만, 아무리 못해도 방이 열 개는 있을 정도로 커다란 전각이었다.
“방은 아무 곳이나 쓰면 되네. 그럼 잘들 주무시게.”
인사 후 돌아서는 지현의 발걸음은 왠지 모르게 가벼워 보였다.
종일 말을 타느라 피곤했을 텐데도, 남궁미는 방 이곳저곳을 둘러보느라 분주하게 움직였다.
많은 방에 감탄하는 것도 잠시, 뭔가 의문이 들었는지 남궁천에게 쪼르르 다가왔다.
“여긴 우리만 써요?”
“아, 원래 모용세가 사람들이랑도 같이 쓰기로 했는데······.”
“모용세가는 못 온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렇지.”
“와~ 그럼 우리 넷이서 이 넓은 곳을 쓰는 거예요?”
“그렇······ 겠지.”
남궁천의 대답 속에는 짧게나마 공백이 존재했다.
그리고 다소 경직된 듯한 그의 얼굴.
얼핏 바라본 남궁천의 표정에는 난처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와 동시에 깨달았다.
아직 오지 않은 곳이 한 곳 더 있다는 사실을.
“설마······?”
시후와 눈이 마주친 남궁천은 자기 입술 위에 검지를 덮었다.
당문과 같은 곳을 써야 한다는 사실을 알 리 없는 남궁미는 어디서 잠을 잘지 행복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 * *
“어제도 늦게 오더니 아침 식사도 늦게 하는군.”
“미안하네, 미아가 씻는 데 원체 오래 걸려서 늦었네.”
늦은 밤에야 도착한 시후 일행은 씻지도 못했기에, 제갈세가에서는 새벽부터 따뜻한 물을 준비해 주었다.
다만, 처음 만나는 사람들에게 꼬질꼬질한 모습을 보여 줄 수 없다던 남궁미는 욕실에서 나오는 데 한 시진이 걸렸다.
“그럼 이해해야지. 다만, 남은 음식이 그다지 많지 않네.”
그의 말과 다르게 자조찬(自助餐) 식으로 꾸며진 식탁은 호화로웠다.
각자 접시에 먹을 음식을 덜어 자리에 앉아 다들 입을 바삐 움직였다.
물론, 입은 먹을 때만 사용하는 기관은 아니었다.
“그간 어찌 지냈나?”
“뭐, 작년과 다르지 않았지.”
“놀고먹었다는 거로군?”
“그건 자네도 똑같지 않은가?”
“그도 틀린 말은 아니군.”
남궁천과 실없는 소리를 주고받던 지현은 문득,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몸을 앞으로 숙였다.
“그보다 귀한 소식이 하나 있지.”
“음, 그 소식이 지금 내가 먹을 이 과포육(鍋包肉)보다 달콤하길 빌어야겠군.”
남궁천의 장난기가 어린 경고에 지현은 말없이 웃었다.
그 미소에는 무엇인가 확신에 차 있었다.
남궁천의 젓가락에 들린 과포육이 접시로 내려오자 지현은 입을 열었다.
“검후의 제자가 왔네.”
“뭣!?”
지현의 말에 반응을 보인 건 남궁천만이 아니었다.
검후는 여인의 몸으로 팔황에 오른 유일한 인물이었다.
그런 검후의 제자라는 건 미래의 팔황으로 넌지시 거론될 만한 인물일 터.
남궁천을 비롯한 일행은 다들 기대감에 부풀었다.
물론, 시후도 마찬가지였다.
훗날 도움이 될 인물 중에서도 ‘검후의 제자’는 손에 꼽히는 카드가 될 테니깐.
“벌써 세대가 교체될 때인가?”
“검후의 나이를 생각한다면 그리 이른 것도 아니지. 아니, 오히려 늦지 않았을까 싶네만.”
지현의 말에 다들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각자의 상념에 잠긴 사이, 남궁천은 접시를 빠르게 비워 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릇을 다 비운 남궁천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검후의 제자, 아니 소검후는 어디에 머무르고 있나?”
- 29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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