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27화 (9/201)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27화 용봉지회를 향해 (2)

도축을 기다리는 소의 심정이 이러할까.

분명 앉은 자리는 여태까지 그 어느 곳보다도 푹신했지만, 지금 자신에게는 가시방석보다 더욱 불편한 자리였다.

“차라도 한잔하겠나?”

“아뇨.”

‘그냥 내보내 줘 이 양반아.’

속마음을 억누른 채, 시후는 억지로 웃음을 지었다.

그런 시후의 속마음을 알 리 없는 남궁선유는 다관(茶罐)에 찻잎을 차곡차곡 채우더니 찬물을 들이부었다.

찬물을 뜨거운 물로 바꾸는 방법은 간단했다.

바로 삼매진화(三昧眞火).

그윽한 차향이 방안에 솔솔 퍼지더니, 다관에서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곧 남궁선유는 앞에 놓인 찻잔을 채우곤 천천히 향을 음미했다.

“나행이 해 준 이야기는 잘 들었네.”

입술을 축인 그가 눈을 뜸과 동시에 말을 내뱉었다.

감정이 배제된 듯한 어투와 눈빛.

조금 전 남궁미가 팔짱을 낄 때는 식은땀이 절로 났지만, 지금 그의 모습을 보아하니 그 일은 마음속에 묻어 둔 것 같았다.

“하나뿐인 딸아이를 구해 준 건 정말 고맙네. 그러나, 그 정도 극독의 해독제는 흔치 않을 터.”

그의 눈이 서서히 빛나기 시작했다.

마음속까지 바라보는 듯한 그의 눈빛에 시후는 마음의 준비를 했다.

곧 어떤 일이 일어날지 대략이나마 예상 가능했으니깐.

“자네들은 잠시만 자리를 비워 주게나.”

그의 말과 동시에 뭔가 움직이는 기척이 느껴졌다.

자신의 기억이 분명하다면 남궁세가의 직계를 지키는 제왕검군(帝王劍群)일 터.

그들이 모두 물러나자 남궁선유는 상체를 앞으로 숙였다.

남궁천과 닮은 얼굴이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

남궁천이 딱 30년만 나이를 더 먹으면, 저 얼굴이 되겠지.

“딱 세 가지. 세 가지의 질문만 할 텐데, 그것에 관해 거짓이 없었으면 하네.”

“네.”

[남궁선유가 ‘제왕의 눈’으로 당신을 훑어봅니다.]

[격차가 현격하여 저항할 수 없습니다.]

[진실과 거짓이 간파당합니다.]

나왔다.

남궁세가의 가주만 가질 수 있는 특권이라고도 할 수 있는 권능.

물론, 제갈세가의 가주를 비롯해서 개방의 방주, 소림의 방장 등 각 위치에 맞는 권능이 있었다.

NPC들은 단순히 ‘감’이라고 표현하겠지만.

그는 곧 품에서 두루마리 하나를 꺼내어 탁자에 올려놓았다.

이게 뭐냐는 눈빛을 보내자, 그는 집어 들라는 시늉을 했다.

“자네는 그 문자를 읽을 수 있는가?”

[‘흑련회의 비밀 지령(4) 사본’을 받았습니다.]

알람 창을 본 시후는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내쉴 뻔했다.

언제 건네줬을까.

참 의심 많은 늙은이다.

읽을 줄은 모르지만 읽지도 않고 말할 수는 없으니, 우선은 두루마리를 펼쳤다.

역시나 알아볼 수 없는 문자들이 펼쳐졌다.

“모르겠는데요.”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대답했다.

건방지다고도 느낄 수 있을지 몰라도, 이 방법이 시후의 결백함을 증명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시후의 눈을 한참이나 바라보던 남궁선유의 고개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이걸 꺼내든 시점에서 알아차렸겠지만, 입으로 말해 줘야겠지. 나행이 나에게 부탁한 물건이네. 내가 워낙 촉이 좋아서 종종 이런 부탁을 하더군. 그럼 바로 다음 질문으로 들어가서······. 딸아이에게 사용한 약들은 정말 의선에게 받은 건가?”

“네.”

거짓은 아니다.

거짓말 탐지기를 돌리더라도 걸리지 않을 사실이었다.

플레이어가 사용하는 약들은 모두 다 의선이 만들었다는 기본 설정이 있으므로 틀린 말은 아니다.

물론, 과거의 의선에게 받은 게 아니라, 미래의 의선이 대량으로 만든 물건이라는 점에서 다르겠지만.

‘곤란한 질문이 나오면 어째야 하나’ 걱정했던 시간이 무색할 정도였다.

다만, 아직 그의 질문은 하나가 더 남아 있었다.

필시 가장 중요한 질문이겠지.

긴장을 늦추지 않기 위해 마음을 다잡았다.

남궁선유도 마지막 질문의 중요성을 인지하는 것인지 한층 얼굴이 진중하게 변했다.

“자네는······ 내 딸을 좋아하나?”

“······ 뭐라고요?”

시후는 순간, 자신의 귀가 이상해진 줄 알았다.

그렇기에 자신이 지금 들은 질문이 잘못되지 않았는지 다시금 되물어보았다.

하지만, 남궁선유의 표정은 진지하기 그지없었다.

‘아니, 상식적으로 이 질문인 마지막에 나올 이유가 없잖아.’

마음 같아서는 그의 멱살을 붙잡고 따지고 싶은 기분이었으나, 숨을 고르며 남궁선유의 입을 주시했다.

“하나밖에 없는 내 딸을 좋아하는지 물었네.”

그의 표정은 진지하기 짝이 없었다.

‘이런 미친 팔불출.’

한숨과 욕이 동시에 튀어나오려 했지만, 시후는 가까스로 억누르며 고개를 흔들었다.

물론, 위아래가 아닌 좌우로.

“아뇨.”

“그렇겠지. 세상에 어느 남자가 우리 미아를 안 좋아할 수 있겠나. 하지만, 아쉽게도 그 아이는······ 뭐라고 그랬나?”

“안 좋아한다고요.”

시후의 대답에 남궁선유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도 잠시.

곧 그의 얼굴이 확 구겨졌다.

“그 말은 관심도 없는데 우리 미아가 일방적으로 그런 반응을 보인단 말인가?”

방안이 후끈 달아올랐고, 그의 손에 들린 찻잔 속 차는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아, 젠장. 어쩌라고.’

허탈한 마음에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지만, 하늘 대신 꽉 막힌 천장만 시후의 눈에 들어왔다.

“응?”

단둘이 있다고 생각했던 방에는 한 사람이 더 있었다.

추나행.

그가 방의 대들보 위에 앉아 있었다.

시후와 눈이 마주친 그는 아래로 가볍게 뛰어내렸다.

“내가 전음(傳音)으로 의선의 행방에 관해 물어보라고 하지 않았는가? 난데없이 ‘딸아이를 좋아하냐’라니······ 이런 정신머리 없는 자가 남궁세가를 이끌고 있었구나. 쯧쯧.”

“그건 개방에서도 알아낼 수 있지만, 저 녀석이 내 딸아이를 좋아하는지는 개방에서도 알아낼 수 없는 문제 아닌가?”

“헛소리도 정도껏 해야지.”

한심하다는 표정을 짓는 추나행을 향해, 남궁선유는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 한 점 없다는 듯 당당한 태도로 맞섰다.

그 모습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추나행은 시후에게 시선을 돌렸다.

“못 믿어서 서운하더냐?”

“뭘요. 그리 믿음이 돈독한 관계도 아니었는데요.”

시후의 퉁명스러운 대꾸에 추나행은 실실 웃음 지었다.

“요놈, 마음이 적잖이 상했나 보구나?”

“상할 관계조차 아니었다니깐요.”

“일단, 네 녀석이 요구한 적행 패는 며칠 내로 도착할 게다.”

“사실 우리 관계에 믿음 빼면 남는 게 없겠죠?”

시후의 말에 추나행은 잠시 얼빠진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나 시후는 그런 추나행의 반응에 관심을 기울이기보다는 적행 패를 가지고, 어떻게 무영묘적을 밖으로 끌어낼 수 있을지가 먼저였다.

“무영묘적?”

“맞네. 그의 물건이지.”

남궁선유는 시후를 바라보며 의문스러운 눈빛을 내비쳤다.

그 시선에 시후는 대답할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를 쫓는 것인가?”

“음······ 뭐 그렇죠?”

지금은 쫓지만, 나중에는 역할이 바뀔 것이다.

시후의 대답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남궁선유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다.

꼬르르륵.

추나행이 식사의 중요함에 관해 울부짖었으니깐.

입이 아닌 배로.

“저녁 먹으면서 이야기하지.”

시후는 자리에서 일어난 남궁선유를 따라 가주의 방을 나온 뒤, 고즈넉한 돌담길을 걸었다.

식당으로 향하던 그가 몸을 갑자기 돌리더니 질문을 던졌다.

“아, 그보다······ 자네 술은 좋아하나?”

* * *

술은 곧 독과 마찬가지였다.

독은 운기를 하며 몰아낼 수 있다.

그렇다면, 플레이어가 술을 마실 때 취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당연히 내공 심법을 비활성화로 돌려놔야 했다.

만약 활성화 상태로 둔다면?

술을 마셔도 물을 마시는 것과 별반 차이가 없을 것이었다.

그러나 딱히 취할 이유가 없는 시후는 비활성화로 돌리지 않았다.

그 결과, 얼큰하게 취한 남궁선유와 달리 시후의 얼굴은 평온하기 짝이 없었다.

남궁선유는 팔꿈치를 탁자 위에 올리며 얼굴을 앞으로 들이밀었다.

“필요 없다?”

“필요 없는 게 아니라, 물질적인 걸 받지 않아도 괜찮다 이 말이죠. 다음에 제가 도움이 필요할 때, 남궁세가에서 손을 건네주는 정도는 어떻습니까?”

“하하하, 그 무에 어려운 일이라고. 좋네! 내 자네가 도움이 필요하다면 도와주지! 암, 우리 남궁세가가 은혜를 모르는 파렴치한은 아니지!”

얼굴이 적잖이 달아오른 남궁선유가 시후의 어깨를 팡팡 두드리며 파안대소를 터트렸다.

지금 영약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남궁세가의 무공을 요구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요구였다.

그 말은 데릴사위로 받아달라는 말과 진배없었기에.

그로부터 조금 뒤, 남궁선유는 남궁천과 제왕검군들의 부축을 받으며 가주실로 돌아갔다.

남궁천은 끝까지 따라간 게 아니었는지, 곧 자리로 돌아와 시후의 앞에 앉았다.

“술이 상당하더군?”

“적당히 마시는 편이죠.”

“아버지도 술을 못 마시는 편이 아니거늘······. 한잔 더 하겠나?”

“아뇨, 뭐든 적당히 마셔야죠.”

“‘적당히 마신다’라······.”

남궁천은 식탁에 올릴 공간이 없어서 바닥에 내려놓은 술병들을 훑어보며 눈을 얇게 떴다.

곧 피식 웃은 그는 앞에 놓인 술병을 붙잡더니, 잔을 천천히 채우기 시작했다.

잔을 다 채운 그는 조심스레 잔을 들어 올리더니 다시금 입을 열었다.

“자네는 용봉지회라고 들어봤는가?”

왔다.

흥분감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뻔도 했지만, 그런 모습을 보일 순 없었기에 천천히 고개만 끄덕였다.

“올해 용봉지회는 내 마지막이 될 거라네.”

“마지막이라뇨?”

“나이가 다 차서 말이지.”

나이 제한이 있다는 건 처음 알게 되었다.

어차피 용봉지회는 내년을 기점으로 열리지 않으니 중요한 것도 아닐 것이다.

남궁천이 술잔을 비우자, 시후가 아직 남아 있는 술병을 붙잡아 잔을 채워 주었다.

“그런데 용봉지회를 이야기하심은?”

“음······ 아우만 괜찮다면, 같이 가지 않겠는가?”

빙고.

남궁천의 제안에 시후는 자신의 잔을 그에게 들이밀었다.

“듣기로는 구파일방과 팔대 세가를 대표하며 내로라하는 신진고수들이 모이는 곳이라던데······ 제가 가면 천이 형님께 누가 되지 않을까요?”

하지만, 기다렸다는 듯 바로 승낙하면 그럴 테니 약간 고민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에 남궁천은 짧지만 강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네 정도면 대단한 고수지. 약관의 나이에 절정에 다다른 고수가 흔하던가? 게다가 거대 문파나 세가에서 전폭적인 지원을 받은 것도 아닌데, 더욱이 대단하지 않은가? 그곳에서 얻는 인연들은 추후에도 자네에게 큰 도움이 될 걸세. 내 장담하지!”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누가 도움이 되는지, 걸러야 할 사람은 또 누구인지 까지도.

못 이기는 척 고개를 끄덕이자 남궁천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곧 두 사람의 잔이 허공에서 부딪히며 쨍 소리를 만들었다.

“좋군. 그럼 중양절만 보내고, 바로 제남으로 가세나.”

“아, 용봉지회가 제남에서 열리나요?”

“그렇지. 이번 용봉지회는 제갈세가에서 하기로 했다네. 무슨 문제라도 있나?”

다소 떨떠름하게 변한 시후의 표정을 보곤 남궁천이 물었다.

시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문제라고 할 만한 건 없었다.

다소 당혹스러웠을 뿐.

“아뇨, 용봉지회에 가자고 권해 주지 않았다고 해도, 그쪽으로 올라갈 사정이 있었거든요.”

“제남에? 무슨 일인가?”

“다소 개인적인 사정이라 말씀드리기는 좀······.”

“아, 그럼 되었네.”

남궁천은 사적인 이야기를 억지로 캐물을 정도로 예의 없는 인물은 아니었다.

다만, 남궁미는 달랐다.

“제남에 별다른 구경거리도 없잖아요?”

어느새 옆자리에 앉은 남궁미가 턱을 괴며 물었다.

구경거리가 있는지 없는지 잘 모르는 시후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볼 것도 없는 제남을 간다면······ 누구 만나러 가요? 그런데 강호는 초행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아는 사람이 제남에 있어요?”

속사포처럼 말을 내뱉던 남궁미의 질문에 시후는 조금 질린 채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그녀의 눈빛이 조금씩 게슴츠레하게 바뀌었다.

“혹시······ 여자?”

그녀가 생각하는 목적과는 다소 어그러졌지만, 짐작은 맞았다.

무영묘적의 성별은 여자였으니깐.

- 28화에 계속 -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