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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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화 명진제의 진노 (3)
장강은 그 이름이 무색하지 않게 수많은 성을 지나갔다.
호남성과 강서성도 마찬가지다.
비록 살짝 스쳐 가는 정도에 불과하지만.
장강이 지나는 두 성에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
바로 강과 이어지는 거대한 호수가 존재하는 점.
호남성에 상강(湘江)과 원강(沅江)에서 흘러온 물이 모이는 ‘동정호’가 있었다면, 강서성에는 공강(贛江)에서 흘러온 물을 머금은 ‘포양호’가 존재했다.
포양호에서 흘러나온 물은 호구(湖口)에서 장강과 합쳐졌지만, 지류가 합쳐지는 만큼 큰 나루터가 자리하기엔 좋은 요건이 아니었다.
덕분에 그 옆에 자리 잡은 구강(九江)의 나루터는 포양호를 오가는 배들의 쉼터였다.
다만, 오늘은 평소와 다르게 유달리 배가 많이 정박해 있었다.
“뭔가······ 좋지 않은데?”
단순히 배만 정박해 있다면 모를까, 나루터 뒤편으로 수백의 병사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햇빛에 반사되는 번뜩이는 창날은 불안감을 선물했다.
“내려!”
앞서 멈춘 배에 올라탄 병사의 목소리는 시후가 타고 있는 배까지 전해졌다.
시후는 남궁천을 바라봤고, 남궁천은 추나행을 바라보았다.
시선의 종착지가 되어 버린 추나행이 머리를 긁적였다.
“쓸데없는 짓을······.”
아마도 지휘동지를 죽인 범인을 색출하는 듯했다.
추나행의 말마따나, 정말 쓸데없는 짓을 벌이고 있었다.
배에 올라타는 사람이나 갈아타는 사람들만 확인하면 될 텐데.
배에 탄 모든 사람을 확인하는 꼴을 보아하니, 어딜 가도 군대는 융통성이 없다는 걸 깨닫게 해 주었다.
“우리도 내려야 할까요?”
“그렇겠구나. 미야, 쓸데없이 시비에 휘말리지 않도록 주의하거라.”
남궁천의 경고에 남궁미의 볼이 다소 부풀어 올랐지만, 분위기가 분위기인 만큼 고개를 끄덕였다.
앞서 나루터에 정박한 배에서 사람이 다 내리자, 시후가 올라탄 배로 병사들은 다가오다가 말고 창을 급히 움켜쥐었다.
추나행이야 맨손이었지만, 시후를 비롯한 나머지는 모두가 병장기를 소지했기 때문이었다.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말고 무기를 놓고 물러서라!”
무인에게 무기를 내려놓으라는 말은 목숨을 내려놓으라는 말과 같다.
어느 누가 무기를 내려놓겠는가.
다만, 지금은 그 요구를 충실히 따라야 했다.
나라와 척을 지고 싶은 게 아니라면.
“순서가 바뀐 거 같소만. 꼼짝하지 않고 무기를 내려놓을 방법은 없으니, 내려놓고 뒤로 물러나도록 하겠소.”
그 와중에 남궁천은 병사의 말을 정정해 주었다.
바닥에 무기를 내려놓고 물러났지만, 병사들은 창을 겨눈 채 천천히 다가왔다.
곧 병사 중 한 명이 남궁천의 검을 주워들었고, 검에 달린 수실을 보더니 가장 뒤에서 지켜보던 자에게 달려갔다.
“알아볼까요?”
“어차피 철우가 있지 않으냐.”
남궁천의 말마따나, 지금 철우의 무복에는 ‘팽’이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드러나 있었다.
눈에 이상이 있는 게 아니라면, 곧 발견할 것이다.
곧 병사 중 한 명이 철우를 향해 손가락을 가리켰고, 그들 중 가장 지위가 높아 보이는 자가 쭈뼛거리면서 다가왔다.
“하북 팽가 소속이십니까?”
“그렇소. 팽철우라고 하오.”
“정백호 심교정이라고 합니다. 실례했습니다. 옆에 계신 분들은 일행입니까?”
“그렇소. 그리고 그쪽 손에 들린 검은 여기 남궁세가의 삼공자인 남궁천 형님의 검이오.”
철우의 말에 ‘정백호’라고 소개한 심교정이 화들짝 놀라며, 손에 들린 검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지금 상황이 특별하고, 관과 무림과의 관계가 서로를 모른 척한다고 하더라도, 팔대 세가 중 수위를 다투는 남궁을 무시하기엔 그의 지위가 높지 않을 터.
곧 그는 손에 들린 검을 남궁천에게 돌려주었다.
“실례했습니다.”
그 뒤로 바닥에 놓인 병장기들을 돌려주기야 했지만, 주변의 눈이 많은 관계로 간단한 조사라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철우와 남궁미는 별문제 없이 넘어갔지만, 시후와 추나행은 조금 곤란을 겪었다.
“감숙에서 온 차시후라······ 호패밖에 없소? 목적은?”
신원을 밝힐 게 호패밖에 없는 시후야 그렇다 치고, 추나행은 개방의 장로임을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쉽사리 넘어가지 못했다.
“개방의 장로? 세상천지에 어떤 거지가 이렇게 깔끔하게 씻고 새 옷을 입고 다니겠습니까?”
“아니, 정말일세. 이게 어떻게 된 거냐면······.”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변명하려는 추나행의 말을 끊은 그는 병사 하나를 붙잡아 뒤편으로 보냈다.
덕분에 추나행의 얼굴을 붉게 달아올랐고 남궁미는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제법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병사는 돌아왔는데, 돌아온 병사의 곁에는 세 사람이 더 있었다.
그중 한 사람은 심교정보다 갑옷이 조금 더 멋들어졌다.
“정천호 척추룡이라 하오. 개방의 장로라 말씀하시는 분이 계시다고?”
그에 추나행은 한껏 붉어진 얼굴로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척추룡은 옆에 선 부관으로 보이는 자를 슬쩍 바라보았고, 부관은 아리송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용모파기를 본 적이 있습니다. 독안비객이라는 자가 맞을 겁니다.”
“그렇소. 내 사정이 있어서 씻기야 했지만, 독안비객이라 불리는 추나행이 맞소이다.”
부관이 알아보자 추나행은 가슴을 쿵쿵 두들기며 말했다.
그 반응을 지켜본 척추룡은 주변에 사람을 물리라는 손짓을 보냈다.
“개방에서도 강서에서 일어난 일을 알고 있소?”
그 사실을 전해 준 게 추나행이니, 모를 리가 있겠는가.
그의 질문에 추나행의 고개는 가볍게 위아래로 움직였다.
“거두절미하고 말하겠소. 도와주시오.”
너무 잘라낸 것이 아닌가.
척추룡은 자신의 요청에 떨떠름해진 추나행의 표정을 보더니, 실수했음을 깨달았는지 목을 가다듬고 다시 입을 열었다.
“범인을 잡을 수 있게 도와주시오.”
관의 일에 개입하기는 꺼려졌다.
추나행은 남궁천을 바라보았고, 남궁천은 그런 추나행의 시선에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다들 곤란해하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시후는 이걸 기회라고 생각했다.
황궁으로 이어질 기회.
“평소 관과 무림의 관계는 소와 닭의 관계와 비슷했죠.”
시후가 앞으로 나서며 뜬금없는 말을 내뱉자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그 말은 돕지 않겠다는 말로 들리기에 충분했다.
척추룡의 표정은 썩어들었지만, 시후는 웃는 낯으로 다시금 말문을 텄다.
“그건 무림이 관을 도울 방법이 마땅치 않았고, 관 또한 무림과 어떻게 지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우리가 범인을 잡으면, 관과 무림의 관계가 서로에게 한 발짝 다가서는 계기로 바뀌길 바랍니다.”
개소리였다.
그런 거엔 관심이라곤 눈곱만큼도 업었지만, 황궁과 연이 닿기 위해서는 입을 열심히 놀려야 했다.
그리고 남궁천도 열심히 설득해야지.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척추룡을 뒤로한 채, 시후는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추나행의 팔을 잡아당겼다.
“어차피 저들이 개방의 힘을 빌리기로 작정했을 텐데, 이왕 도와주는 거 저들에게 빚을 지게 만들면 좋잖아요.”
“음······ 그렇지만, 잡는다는 보장도 없는데 괜히······.”
“어젯밤 일을 저지르고 멀리 도망치지 못했다면, 분명 등잔 밑에 숨어 있을 겁니다.”
“등하불명(燈下不明)이라.”
긴 손톱으로 머리를 긁적이던 추나행의 고개가 다소 시간이 지난 뒤 끄덕여졌다.
[일반 임무 ‘명진제의 진노’를 수락하였습니다.]
* * *
포양호의 가을은 온통 분홍빛이었다.
이맘때면 호수 주변에 자라난 여뀌바늘 꽃을 보려고 수많은 배가 떠다녔을 테지만, 오가는 배를 다 통제했기에 지금 포양호엔 시후 일행이 탄 배가 유일했다.
덕분에 아름다운 포양호의 풍경은 오롯이 그들만의 것이었다.
그리고 음식의 맛을 더해 주는 조미료처럼, 석양이라는 아름다운 빛무리를 뿌려 주자 한 폭의 그림이 펼쳐졌다.
“너무 예뻐요.”
순수히 풍광을 즐기는 남궁미와 달리, 남궁천과 추나행은 인상을 찌푸린 채 배 귀퉁이에서 시후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귀가 팔랑거려 도와주겠노라 말하긴 했다만, 이거 괜히 시간 낭비만 할지도 모르겠는데······ 꼭 해야겠느냐?”
“뭐, 그냥 무시하고 지나갈 수도 있었지만, 무공을 익힌 무림인이 범인이라고 하잖아요. 모른 척 넘어간다면 관에서 무림을 압박할 수 있는 명분을 주는 거죠. 개방에서도 사사건건 관병들과 마주치는 건 싫잖아요? 여기저기 돌아다녀야 하는데 매번 붙잡혀 봐요.”
“끄응······.”
“게다가, 생각해 보세요. 보통 포위망은 발견만 안 되면 넓어지기 마련이니, 오히려 남창에 숨어 있다면 저들이 안전하지 않겠어요? 포위망을 넓어 가는 도중에 갑자기 남창을 조여 온다면? 더 좁아지기 전에 흉수가 도망치겠죠.”
“차 아우, 어차피 모든 건······ 흉수가 남창에 있다는 가정이지 않은가?”
“뭐, 그렇긴 하죠.”
“영 촉이 안 좋은데······.”
“어차피 등왕각에 가려면 남창으로 가야 했는데, 그렇게 생각하면 딱히 손해 볼 건 없으니까요.”
남궁천은 아직도 찜찜한 표정이었다.
시후는 그런 그를 위해 풍광에 정신이 팔린 남궁미를 슬쩍 가리켰다.
“그리고 남창으로 안 갔으면, 이렇게 아름다운 경치도 구경하지 못 했겠죠.”
주변을 돌아보느라 여념이 없는 동생을 바라보던 남궁천은 짧게 고개를 저었다.
포양호는 넓었지만, 빠르게 도착하기 위한 쾌속선은 역할에 충실했고, 어둠이 내리기 전에 남창에 도착할 수 있었다.
“어디서, 뭘 어떻게 찾아야 하나······.”
남창은 강서성의 성도인 만큼 상당히 거대했다.
수많은 인구를 감당하려면 물류의 수송이 쉬워야 하므로, 대부분의 성도는 대규모 운송이 가능한 강에 자리 잡기 마련이었다.
다만, 남창은 공강을 기준으로 성도가 정확히 양분되어 있다는 점이 특이했다.
“나는 지부를 다녀올 테니, 알아서 돌아보고 있거라.”
정천호 척추룡에게 정말 필요한 건 개방의 힘이었기에, 추나행이 지부로 사라지자 남겨진 네 사람은 어색한 침묵을 이어갔다.
다만, 척추룡에게 힘을 줄 수 있는 건 개방 만이 아니었다.
시후는 한점 흐트러짐 없이 서 있는 척추룡에게 말을 건넸다.
“저기······.”
“음? 왜 그러는가?”
“‘낮말을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라는 말이 있는데, 쥐새끼처럼 숨어 지낸다면 소식에 귀를 기울이지 않겠습니까?”
“이해하기 쉽도록, 간단명료하게 설명하게나.”
누가 군인 아니랄까 봐.
시후는 속으로 투덜거리면서도 입가에 미소를 잃지 않았다.
“일단, 바로 사람을 풀어서 정보를 흘리시죠. 개방에서도 수색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독안비객 추나행이 있고.”
“그러다가 더 깊이 숨으면?”
“그럼 숨이 막혀 죽겠죠.”
시후의 말에 척추룡이 인상을 찌푸렸다.
“내게 농을 거는 건가?”
“아뇨, 그게 아니라······ 남창이 제아무리 넓다고 한들 한정된 공간인데, 그들도 무기한 숨어지낼 수 없다는 걸 저들도 알고 있겠죠. 더 숨어들지는 못할 겁니다.”
“저들?”
정천호까지 운으로 올라간 게 아닌 듯, 척추룡은 날카롭게 질문을 던졌다.
그의 지적에 시후는 아차 싶었지만, 낯빛 하나 변하지 않고 태연하게 넘겼다.
“지휘동지 둘을 하룻밤 새에 암살하려면, 최소한 한 명은 아닐 것 같은데요?”
시후의 말을 들은 척추룡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 그렇겠지.”
“쥐새끼들은 소문에 귀를 기울이고 있을 것이고, 추나행 장로님이 개방의 힘을 빌려온다면 그때 저들을 움직이면 됩니다.”
시후의 말에 척추룡이 관심을 기울였다.
그건 옆에서 듣고 있던 남궁천을 비롯한 사람도 마찬가지였나보다.
다들 귀를 쫑긋거리며 시후의 입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떻게 말인가?”
“쥐새끼를 꺼내려면 불을 질러야죠.”
“상징적인 의미로 말고, 이해하기 쉽도록 간단명료하게 말하게.”
척추룡이 다시금 간단한 설명을 요구하자, 시후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꾸했다.
“정말 불을 지르면 됩니다.”
- 24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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