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22화 명진제의 진노 (2)
“적행 패?”
시후의 요구에 추나행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개방과의 친분을 증명해 주며, 호감도를 쉽게 올릴 수 있는 분식 패와 비교한다면, 적행 패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만년 한철’로 만든 물건도 아니고, 흔하디흔한 철 패에 음각으로 ‘적행’이라는 글자만 파여 있을 뿐이었다.
다만, 이 적행 패가 나타나는 곳에는 공통점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사자(死者)의 안식을 위해 마련된 공간에만 나타난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가장 최근에 적행 패가 나타난 곳은 대단히 유명한 곳이었다.
조운묘(趙雲墓).
적행 패는 바로 무영묘적이 도굴했다는 걸 알리는 패였다.
“왜 필요한지 물어보면······.”
“당연히 대답 같은 건 안 하죠, 아시면서.”
시후의 말에 추나행은 인상을 찌푸렸다.
잠시 적행 패의 가치와 시후가 전해 주었던 정보의 가치를 고민하던 추나행은 쩝쩝거리며 입맛을 다셨다.
“끄응······ 일단, 이번 일의 성과가 적지는 않으니, 내 방주에게 이야기해 보마.”
“분식 패는 안 가져가시고요?”
“네 녀석이 가지고 있어야 우리 거지 놈들이 가끔 얻어먹을 게 아니더냐.”
그의 대답에 시후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분식 패는 주지 않는 게 도움이 되었다.
지금 적행 패를 받아 내는 것만 해도, 흑련회에 관한 실마리를 주기는 했다만 거의 공짜로 받아 내는 것과 다름이 없지 않은가.
분식 패로 인해 가끔 빠져나가는 돈과 시후 자신에게 생길 이득을 비교해 본다면, 분명 후자가 더욱 클 것이었다.
“그 ‘가끔’이라는 게 너무 잦은 거 같은데요.”
“껄껄, 너도 그럼 거지가 되면 공평하지 않겠느냐?”
“사양할게요.”
히죽거리며 웃던 추나행은 장난은 여기까지면 족하다고 여겼는지 웃는 낯을 지웠다.
“일단, 이걸 방주에게 전한 뒤, 요 녀석을 해독하기 전까지는 내가 네게 붙어 있을 거다.”
“밥값은요?”
“이런 우라질 놈. 거지가 돈이 어딨어?”
“아, 그럼 오지 말아요.”
“보아하니 네 녀석이 저 무리의 중심은 아닌 거 같다만?”
정곡을 찔린 시후는 몸을 잠시 움찔했고, 추나행은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가보라 손을 휘저었다.
“방주에게 보낼 서신을 작성하고 갈 테니 이만 가보거라.”
[기막이 해제되었습니다.]
추나행은 곧장 몸을 돌려 움막을 향해 걸어갔고, 시후도 자연스럽게 남궁천에게 다가갔다.
시후를 바라보는 남궁천의 표정에는 ‘묻고 싶은 게 참 많다’라고 쓰여 있었다.
다만, 개방 분타와 비교해서 조금 쾌적하다뿐이지, 지금 서 있는 곳도 대화를 나누기에 썩 적합하지 않았다.
게다가 남궁천의 성격상,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캐물을 만큼 낯짝이 두껍지는 않을 것이다.
“무슨 이야기를 나누셨습니까?”
문제는 팽철우였다.
그는 곰의 목을 맨손으로 분지를 듯한 외모답게 거침없었다.
팽철우의 꽉 찬 돌직구를 받은 시후는 남궁천을 향해 도움의 눈빛을 보냈지만, ‘예의범절’이라는 틀로 가둬놨을 뿐, 궁금한 건 남궁천도 마찬가지였던 탓에 시후를 도울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별 이야기 없었는데······.”
“철우야, 기막을 펼쳐가며 나눴던 이야기를 묻는 건 예의가 아니다. 게다가 추 선배님의 표정을 보아하니, 대단히 심각한 이야기하는 거 같았으니 더욱 삼가야지.”
팽철우를 제지하는 남궁천은 말과 달리 무척이나 궁금한 눈초리였다.
아무리 그의 호감을 얻어야 하는 처지라고 해도, 흑련회의 정보를 남궁천이 가지는 건 바람직하지 않았다.
조금의 미움은 받을 수밖에.
“아, 뭐 조금 중요한 이야기가 있었는지라······.”
“괜찮네. 그 종이에 뭐가 적혀 있었길래 그리 심각한 표정으로 대화를 나눴는지, 나는 전혀 궁금하지 않네.”
‘괜찮긴 개뿔이.’
제법 거리가 떨어져 있었거늘, 안력을 돋우면서까지 지켜봤나 보다.
차라리 이렇게 된 이상, 적행 패 이야기는 던져 주고, 나머지는 추나행에게 맡기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앞에 나눴던 대화는 개방에서도 확인이 필요한 사안이라 말하긴 그렇지만, 뒤에 나눈 말은 단순히 적행 패를 줄 수 있냐고 물은 겁니다.”
“적행 패? 그게 뭐 하는 물건인가? 추 선배님의 표정을 보아하니, 예사 물건은 아닐 듯한데······.”
남궁천은 모르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모습을 본 시후가 부연 설명을 하려고 했지만,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적행패는 무영묘적의 흔적 아닙니까?”
잠자코 이야기를 듣고 있던 팽철우가 입을 열었다.
그의 말 덕분에 세 사람의 표정은 얼떨떨하게 변해 버렸다.
‘얘가 왜 알고 있지?’
시후의 심정을 대변하듯 남궁천이 놀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철우야, 적행 패가 무영묘적의 흔적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더냐?”
“형님, ‘최소한의 상식은 쌓고 살아야 한다’라고 항상 말하지 않으셨습니까?”
팽철우의 말에 남궁천은 입을 쩍 벌리고 말을 잇지 못했다.
평소 무공 이외에 관심이 없는 철우를 타박할 때마다 했던 말이었기에, 더욱 충격적이었을 것이다.
철우는 붕어처럼 입을 뻥긋거리는 그를 향해 씨익 웃어주었다.
“사실 저희 숙부께서 주창왕 도굴 사건에 다녀오시면서 해 주신 이야기입니다. 이번에 집을 나오기 전에 들은 이야기라 기억하고 있지요.”
“커, 커험! 그, 그렇구나.”
남궁천은 그간 철우를 놀렸던 전적이 있기에 쉽사리 고개를 돌리지 못했다.
조금이라도 섭섭함이 있었다면 조금 더 괴롭혔겠지만, 철우는 화제를 돌리기 위해선지 몰라도 시후에게 말을 걸었다.
“시후 형님. 적행 패는 왜 달라고 하시는 겁니까?”
“아, 선물로 줄 사람이 있어서······.”
시후는 선물이라고만 말한 뒤, 더는 말을 하지 않겠다는 듯 시선을 외면했다.
남궁천이 뭔가 더 물어보고 싶은 듯 입술을 달싹였지만, 그보단 남궁미가 조금 더 빨랐다.
“그런데 조운묘를 털었다면, 그 안에 있던 청홍검도 가져간 걸까요?”
“그럴지도 모르지.”
“천년도 더 전에 쓰던 검이 무슨 쓸모가 있을까요? 녹이 잔뜩 슬어서 쓰지도 못할 텐데.”
“그래도 역사적 가치가 대단한 물건이지 않으냐? 골동품을 수집하는 자들에게 팔아 치운다면 비싼 값에 팔 수 있겠지.”
“그보다 천이 형님, 곧 비가 쏟아질 거 같은데, 어디 객잔이라도 잡는 게 어떻습니까?”
철우의 말에 세 사람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우중충한 하늘에는 점차 잿빛 구름이 몰려들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두 방울씩 내리기 시작한 빗방울이 지면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다들 발걸음을 재촉했고, 막 객잔에 들어서자마자 비가 억수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밖을 나돌아다닐 수준은 결코 아니었다.
“각필정은 구경도 못 했군.”
“그거야 내일이라도 하면 되는 거고······ 천이 형님, 술이라도 한잔하시겠습니까?”
철우의 제안에 네 사람은 내리는 비가 잘 보이는 2층 창가로 향했다.
미시(未時)부터 기울인 술자리는 어느덧 신시(申時)를 훌쩍 넘겼다.
기분 좋을 정도로 취기가 오른 남궁천이 시를 읊고 있던 사이, 아래층이 제법 소란스럽더니 점소이가 시후를 향해 후다닥 달려왔다.
“대협, 찾으시는 분이 왔습니다.”
“찾으시는 분?”
“개방분으로 보이는데······.”
뒤의 이야기는 들을 필요도 없었다.
아래로 내려간 시후는 처마 밑에 비를 잔뜩 맞은 추나행을 발견했다.
“육시럴, 무슨 놈의 비가 이리도 오는지!”
점소이가 무슨 배짱으로 개방의 인물을 밖에 세워 뒀나 했더니, 추나행의 몰골을 보곤 바로 수긍했다.
시꺼멓게 탔다고 생각했던 얼굴은 단지 씻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얼굴을 타고 흐른 땟국물은 보기에도 역겨웠고, 비에 젖은 냄새는 고약하기 짝이 없었다.
“방주에게 서신을 띄웠으니 연락이 오는 대로······ 뭐냐, 술이라도 마시고 있었던 게냐? 잘 됐군.”
뭐가 잘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추나행은 곧바로 객잔 안으로 들어왔다.
아니, 들어서려고 했다.
앞을 가로막는 점소이가 없었다면 말이다.
“들어오시면 안 됩니다!”
아무리 객잔 안에 손님이 별로 없다고 한들, 거지 중의 상거지인 개방의 장로를 안으로 들인다는 건 불가능했다.
하지만, 추나행은 뻔뻔한 얼굴로 슬쩍 발을 들이밀었다.
“안 되긴 뭐가 안된다는 게야.”
“다른 손님들께 폐가 됩니다!”
“무엇 때문에?”
당연히 얼굴에 흐르는 땟국물과 몸에서 풍기는 지독한 악취 때문이지.
추나행이 점소이와 실랑이하는 사이, 위에서 술을 마시던 세 사람도 슬쩍 아래로 내려와 이를 구경했다.
남궁천의 얼굴을 본 추나행의 표정이 밝아졌다.
“오! 마침 잘 왔다. 당분간 좀 신세 좀 지마. 이놈아, 저기 뒤에 있는 녀석이랑 같은 방을 쓸 테니, 안내나 하거라.”
“안돼요!”
연신 안된다고 외쳤던 목소리와는 달리, 높은 여성의 목소리였다.
덕분에 주변의 시선은 목소리의 주인공에게 쏠렸다.
철우의 뒤에 서 있던 남궁미는 다소 질린 얼굴이었지만, 또박또박하게 소리쳤다.
“목욕하고 옷을 갈아입으시기 전까지는 절대 안 돼요!”
남궁미는 절대 타협은 없다는 듯 말했고, 남궁천도 그런 동생을 말리지 못한 채 뒤로 물러났다.
* * *
[사용자 지정해 둔 알람입니다.]
[경과 시간 2주일.]
[바깥 시간으로 1분 경과. 이 알람 창이 떠올랐다는 건, 밖에서 도움을 주지 않았다는 거겠지. 숨어 있는 놈들의 머리끄덩이를 붙잡아서라도 얼른 끌어내라.]
알람 창을 읽은 시후의 얼굴이 굳어졌다.
혹시나 하였지만, 역시나.
착잡한 마음을 진정시키고 있는 사이, 위에서 추나행이 내려왔다.
우중충한 기분을 털어낸 시후는 애써 밝게 웃어보았다.
“잘 어울리네요.”
“놀리는 게냐?”
“진짠데요? 굳이 꼬질꼬질하게 하고 다닐 필요가 뭐 있어요?”
남궁미가 박박 우긴 탓에 결국 목욕을 한 추나행은 대단히 말끔해졌다.
‘환골탈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인상이 확 바뀌었다.
“제기랄, 오 년 만에 또 씻는군.”
오 년간의 묵은 때를 벗겨 냈으니 오죽하랴.
덕분에 점소이는 목욕물을 세 번이나 갈아야 했지만.
다만, 깔끔해진 것과 별개로 추나행은 빳빳한 새 옷의 감촉이 어색한지 연신 몸을 비틀어댔다.
“휴······ 비걸개가 본다면 배꼽이 떨어지라 웃겠군.”
“지금은 비걸개 선배보다 훨씬 깔끔하십니다.”
“고얀 놈. 거지에게 못하는 소리가 없구나.”
남궁천의 말에 추나행이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하긴, 지금 추나행의 모습을 본다면 누가 그를 거지라고 하겠는가.
허리춤에 어색하게 자리 잡은 때가 잔뜩 탄 매듭만이 그가 개방 장로란 걸 알려 줄 뿐이었다.
“그보다, 어디로 가는 게냐? 최소한 같이 다니려면 가는 곳은 알아야지.”
“악양루와 황학루를 보았으니······ 나머지 한 곳도 들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등왕각 말이더냐?”
남궁천의 말에 추나행이 뚱한 표정을 지으며 되물어보았다.
약간 묘한 뉘앙스를 풍기는 그의 말에 남궁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등왕각은 다음에 보면 안 되겠느냐? 지금은 시기가 그다지 좋지 않구나.”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있다마다······ 커험, 일단 목이라도 한 번 축일까?”
이미 술자리는 파한 지 오래였지만, 남궁미의 요구 때문에 목욕까지 한 추나행을 위해 남궁천은 점소이를 불러 술과 적당한 안주를 시켰다.
술이 먼저 나오자 추나행은 병나발을 불어 재꼈다.
“크하······ 그래, 이 맛을 위해 오 년 만에 씻은 거 같군.”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씻은 다음 먹는 술은 싸구려라 할지라도, 천상의 감로수와 같을지니.
추나행은 헤실헤실한 웃음을 짓더니, 자신을 향한 네 쌍의 눈동자에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우리와 관계가 좋지 않은 곳을 꼽으라면 어디가 있겠느냐?”
남궁천을 바라보며 질문을 던졌지만, 쉽사리 대답하지 못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한둘이겠는가.
녹림과 수로채, 사파와 마교는 물론이거니와 서장 등의 외부 세력까지.
너무나도 많았기에 쉽사리 대답할 수 없었다.
“오늘 아침, 정확히는 어젯밤에 강서성에서 지휘동지(指揮同知)가 죽었다.”
관과 무림의 관계는 좋다고 말하기엔 모호했다.
그렇다고 나쁘다고 말하자니, 그것도 모호한 관계였다.
엄밀히 말하면, 소 닭 보듯 하는, 별다른 제재는 하지 않지만 도와주지도 않고 바라만 보는 관계라고 해야 할까.
그렇기에, 추나행의 말을 듣고 다들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것과 등왕각을 가지 못하는 게 무슨 상관이냐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냥 죽었다면 상관이 없겠지만······ 강서성 지휘동지 둘이 한날한시에 목이 잘린 채 죽었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
말을 끊은 그가 눈을 번뜩였다.
“그것도 무림인의 손에.”
- 23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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