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18화 신첨어 (3)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네네, 알고 있어요.”
악양루를 책임지고 있다는 장 총관은 꼬장꼬장하게 생긴 외모답게 말이 길었다.
그도 그럴 것이, 초설이 갑작스럽게 순서를 어겨가며 그를 먼저 보겠노라 말하지 않았는가.
연신 불안한 기색을 보이는 장 총관의 뒤를 따라 도착한 곳은 아마도 초설의 방으로 짐작되었다.
“그리 긴 시간은 못 드립니다. 초설의 요구 때문에 일각은 드리겠지만······.”
“그 말은 다섯 번도 더 했는데요.”
“그리고 처음에 약조하셨듯이······.”
“아, 귀에 딱지 앉겠네. 알았다고요.”
계속되는 경고에 시후가 낮게 으르렁거리자, 장 총관은 그제야 뒤로 물러났다.
똑똑.
“들어오세요.”
홍설과 닮은 듯하면서도 미묘하게 달랐다.
기본적으로 맑고 청아한 목소리라는 점에 이견은 없을 테지만.
홍설이 온기를 마지막으로 전해 주고자 하는 노을을 목소리에 담고 있다면, 초설은 온기를 나눠 주기 위해 막 떠오른 햇살을 목소리에 담고 있었다.
방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계절과 맞지 않은 게 복숭아 향기가 코끝을 간지럽혔다.
방에 가득찬 달콤한 냄새에 하마터면 저도 모르게 킁킁거릴 뻔했지만, 검지로 코밑을 쓱 훑으며 위기를 모면했다.
그런 시후의 시선은 곧 잔뜩 긴장한 채 서 있는 초설에게 꽂혔다.
누군가의 사심이 잔뜩 들어간 그녀의 외모는 가까이서 보니 더욱 빛을 발휘했다.
그런 초설을 훑어본 시후는 초설의 꽉 움켜쥔 주먹에서 빼꼼 삐져나온 실을 발견했다.
“뭘 그리 꽉 쥐고 있어요?”
시후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초설은 뒤늦게 깨달은 듯, 꽉 움켜쥔 손을 살며시 폈다.
어찌나 강하게 쥐었던지 손바닥은 마치 분을 바른 것처럼 희게 변해 있었다.
초설의 오른손 위에는 자신이 전해 준 낡은 나무 부적이 놓여 있었다.
손바닥 위에 놓인 부적을 빤히 바라보던 초설의 붉디붉은 입술이 천천히 벌어졌다.
“소중한 물건입니다. 언니에게도······ 그리고 저에게도.”
그와 동시에 초설은 왼손으로 품을 뒤졌다.
품에서 빠져나온 왼손에는 반대편 손의 부적과 똑같은 부적이 들려 있었다.
아니, 조금 덜 반질거린다는 점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어머니께서 이걸 주셨겠죠? 부적을 본 순간 언니가 절 찾고 있다는 걸 확신했고, 서신은 읽어 보지도 않았어요.”
그제야 시후는 초설의 옆에 있는 탁자에 자신이 가지고 온 서신이 놓여 있는 걸 발견했다.
어쩐지 임무 완료가 안 되었더라니.
하긴, 처음 ‘흩어진 자매’를 받으면서도 연계 임무로 이어질 확률이 높다고 했으니, 지금 초설이 임무를 줄 공산이 컸다.
“읽으라고 쓴 것일 텐데, 서신부터 먼저 읽어 보시죠.”
“아, 네.”
초설은 밀봉을 위해 굳힌 촛농을 떼어낸 뒤, 편지를 꺼내어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적힌 내용이 슬픈 내용이었을까, 아니면 그간의 고생했던 일들을 담았던 것일까.
그녀의 눈시울이 붉어지기 시작하더니, 곧 눈물이 한 바가지는 쏟아질 듯 촉촉하게 젖어 갔다.
읽어 가는 활자의 개수만큼, 초설의 감정도 점차 커지는 것일까.
초설의 어깨가 애처롭게 떨려왔다.
절로 다독여주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떨리던 그녀가 일순간 몸을 흠칫 떨었다.
그리고 힐끔 자신을 바라보더니, 다시금 편지로 향했다.
짧은 찰나에 지나갔지만, 초설의 눈빛에 담긴 감정은 어디선가 느껴본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 기억을 떠올리기도 전에 초설은 읽은 편지를 곱게 접어 갈무리하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 실례가 안 된다면······ 조금 있다가 다시 와 주실 수 있으신가요?”
그 말에 시후는 고개를 내저었다.
이미 금 열 냥이 나간 것도 생각 이상의 지출인데, 다시 올라오라니.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소리다.
“또 금 열 냥을 내고 올라오기엔 가진 돈이 넉넉지 않은데요?”
“제가 미리 말해 놓겠습니다. 지금 받은 돈도 돌려드리도록 말씀드릴 테니······.”
“그럼 가능하죠. 언제 올까요?”
돈을 돌려준다는 소리에 냉큼 수락한 게 아니다.
아무튼, 아니다.
시후가 승낙하자 애처롭게 바라보던 초설의 얼굴에 미약한 미소가 생겼고, 동시에 알람 창이 떠올랐다.
[임무 ‘흩어진 자매’가 ‘1,500리를 뛰어넘어’로 변경됩니다.]
[선행 조건인 ‘초설의 소원’이 완료되지 않아, ‘1,500리를 뛰어넘어’를 시작할 수 없습니다.]
[선행 조건을 먼저 달성해 주시기 바랍니다.]
‘1,500리를 뛰어넘어’라는 임무는 아마도 홍설과 초설을 만나게 해 주는 임무일 것이다.
그런데 두 사람을 만나게 하려면 ‘초설의 소원’이 이루어져야 한다니.
문제는 초설이 얼마 있지 않아 없어질 것이다.
그 전에 이 알 수 없는 임무를 해결해야 했다.
물론, 없어진다는 게 죽는다는 뜻은 아니지만.
머리에 열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시원한 바깥바람이라도 쐬었으면 했지만, 방에는 특이하게 얼굴만 한 창문조차 없었다.
“창문이 없네요?”
“기녀의 방에 창문이 있으면 도망칠 수도 있으니, 당연한 거랍니다.”
무공을 익힌 고수도 아니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도 아닐 텐데······ 7층에서 뛰어내릴 사람이 있을까.
초설은 그야말로, 악양루에 갇힌 관상용 구관조와 다를 바가 없었다.
편히 쉬어야 할 자신의 방에서조차 하늘을 볼 수 없는 상황이라면, 그녀가 달을 원할 만도 했다.
“어?”
먼가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지는 듯했다.
마치 눈을 한 곳으로 모으면 보일 것처럼 희미한 그림이.
“그럼, 오시는 시간은······.”
일 각이라는 제한 시간이 다가오자 초조함을 못 이긴 초설이 먼저 말을 꺼냈지만, 시후가 그녀의 말을 끊었다.
“그 시간, 제가 정해도 돼요?”
* * *
1층으로 내려오자마자, 주변의 시선이 모두 자신에게 향하는 걸 느꼈다.
부담스러운 시선을 외면한 채 시후는 자신의 창을 받아 남궁천 일행이 앉은 곳으로 다가갔다.
“혹시 답을 맞혔소?”
“아뇨, 저는 그거 때문에 올라간 게 아니라서요.”
남궁천의 질문에 시후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하자, 옆에서 듣고 있던 남궁미가 조소를 지었다.
“못 풀어 놓고 거짓말은······.”
아, 저 빌어먹을 꼬인 성격.
사람 속을 살살 긁는 남궁미의 말에 시후는 그녀를 슬쩍 째려보곤, 조금 전 장 총관에게 받은 주머니를 꺼내 흔들었다.
“거짓말은 무슨, 이렇게 돈도 돌려받았는데.”
“돈을 돌려받았다? 차 소협은 초설을 오늘 처음 본 것 아니었소?”
“그렇죠.”
“그럼······ 누군가의 부탁으로 초설을 찾은 것이로군?”
정답.
역시나 날카로웠다.
시후가 고개를 끄덕이자, 남궁천은 팔짱을 낀 채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먼저 올라간 사람들보다 먼저 내려온 것으로 볼 때, 그들보다도 앞서 초설을 만났을 테고, 그렇다는 건······ 그 누군가는 초설에게 아주 중요한 사람일 게 분명한데······.”
거기까지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홍설의 존재를 모르는 이상 중요한 사람이 누구인지 파악하긴 어려울 터.
시후가 어색하게 웃자 남궁천이 손사래를 쳤다.
“아, 캐묻는 건 아니니 부담가질 필요는 없소. 그냥 초설과 인연이 있는 사람이 누굴지 궁금했을 뿐이니.”
“뭐 부담이랄 것도 없죠.”
시후는 손사래를 치며 대화거리를 찾으며 시간을 끌었다.
용봉지회에 참석하기 전까지 남궁천과 헤어질 순 없었다.
그와 함께 있어야 참석할 수 있는 명분이 생기니까.
하지만, 텅 빈 식탁을 점유하고 있을 수도 없으니 슬슬 밖으로 나가야 했다.
음식값을 내고 남궁천 일행과 함께 악양루를 빠져나오자, 밖에서 자리를 기다리던 사람들이 냉큼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나 밖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의 숫자는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일단, 전 잠을 청할 객잔을 찾아봐야 하는데······.”
슬쩍 말꼬리를 흐리며 물어보자 남궁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우리와 같이 적당한 객잔을 찾아보는 건 어떠십니까? 우리도 악양에 도착하자마자 이곳으로 달려온 지라, 아직 객잔을 구하지 못했습니다.”
“좋죠. 아, 말은 편히 놓으세요. 나이도 제가 어린 것 같은데.”
“하하, 고맙네. 차차 시간을 두고 놓도록 하지.”
“네, 편하신 쪽으로 해 주신다면······ 아! 이쪽으로 가시죠.”
악양루 주변 객잔은 쓸데없이 비쌌기에, 악양 중심지까지 들어가고 나서야 적당한 객잔을 잡을 수 있었다.
다만, 시후는 방 번호 패를 받자마자 방이 아닌 입구로 향했다.
“어디로 가는가?”
“잠시 살 게 있어서요.”
남궁천은 주저하더니 곧바로 뒤를 따라왔다.
조금 전 하던 이야기가 어지간히도 듣고 싶은 듯했다.
그리고 그건 팽철우도 마찬가지였다.
“저희는 안에 있을게요.”
다만, 뒤따라 오려는 팽철우의 팔을 남궁미가 붙잡았다.
팔을 붙잡힌 철우의 표정을 보아하니 따라 나오고 싶은 듯했지만, 남궁미의 아미가 얕게 꿈틀거리자 군말 없이 위로 끌려갔다.
계단 올라가는 와중에 고개를 힐끗 돌리더니, 자신을 노려보는 남궁미의 모습은 마치 한 마리의 살쾡이 같았다.
“내가 뭘 했다고 저렇게 미워하지?”
“하하, 차 소협이 이해해 주게. 아직 낯을 많이 가릴 나이 아닌가.”
“저 나이에 낯을 가리면 곤란하지 않을까요?”
“그럼, 경계심이라고 하세나.”
“내가 무슨 위험한 인물도 아니고······.”
시후는 툴툴거리면서도 걸음을 재촉했다.
그들의 발길이 향한 곳은 악양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야시장이었다.
초저녁이 막 지난 시간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적잖이 북적거리고 있었다.
시후의 뒤를 쫓아다니던 남궁천이 연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걸 사러 이곳까지 왔는가?”
“그렇죠.”
남궁천의 얼굴을 할 말이 참 많아 보였지만, 시후가 무슨 생각으로 이걸 사는지 알 수 없으니 말을 아낀다는 표정이었다.
슬쩍 하늘을 올려다보니, 동쪽 저 멀리서 달이 떠오르고 있었다.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슬슬 악양루로 돌아갈까요?”
“응? 악양루는 왜 간단 말인가?”
“아까 초설을 제가 바로 볼 수 있었던 이유, 모르시겠죠?”
“음······. 가장 유력한 건 그녀의 가족이 아닐까 싶었네만.”
남궁천의 추측에 시후의 몸에는 순간 소름이 돋았다.
그리고 그 감정은 시후의 얼굴로 드러났고, 남궁천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정말인가?”
“어휴, 깜짝 놀라면 정말 소름이 돋네. 맞아요. 정확히는 그녀의 언니죠. 어떻게 맞췄어요?”
“허허, 기녀로 팔린 여인의 우선순위라면 가족밖에 더 있겠나. 뭐, 그녀가 나이가 조금 있는 기녀였다면 우선순위가 조금 달랐겠지.”
세상의 때가 묻기 시작한 기녀라면 확실히 다르겠지만, 그 말이 남궁천의 입에서 나오자 조금 색다르게 다가왔다.
그런 시후의 표정을 읽은 남궁천은 멋쩍게 웃었다.
“그보다 악양루로 다시 가는 이유는 뭔가?”
“초설을 보러요.”
“응? 또 말인가?”
“편지를 받았으니 답장을 써야죠.”
“미리 이야기돼 있었군.”
남궁천의 말에 시후는 고개를 끄덕였고, 두 사람은 걸음을 옮겨 여전히 붐비는 악양루를 찾았다.
오히려 술을 마시기 좋은 축시(戌時, 19~21시)가 되니 사람이 더 몰린 것 같았다.
많은 인파에 남궁천은 다가가기 껄끄러운지 뒤로 슬쩍 물러나며 손을 건넸다.
“번잡하군. 손에 든 짐을 이리 주고 갔다 오게나.”
“가지고 갈 건데요?”
“응? 그걸 어디에 쓰려고······ 혹시 초설이 사 오라고 한 물건인가?”
“아뇨.”
남궁천의 미간이 조금 찌푸려졌다.
그도 그럴 것이, 시후의 손에 들린 물건이 왜 필요한지 알 수 없을 테니깐.
더욱 궁금증에 빠지게 할까 싶었지만, 정말 슬슬 올라가 봐야 할 때였다.
“이 물건들은······ 초설에게 달을 주기 위한 것들이죠.”
“편지를 받으러 가는 게 아니었나?”
“물론, 받아야죠.”
남궁천의 물음에 가볍게 대답한 시후는 고개를 돌려 악양루를 바라보았다.
악양루 가장 아래층 처마 끝에는 초설이 원하는 달이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었다.
“그리고 저 달도 줘야죠.”
- 19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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