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17화 신첨어 (2)
옥으로 끌려갈 뻔한 소동이 있었지만, 다행히 악양루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물론, 분식 패를 품에 잘 숨기는 조건이 있었지만.
문제는 안으로 들어가서도 발생했다.
“음, 자리가······.”
주변을 둘러보며 빈자리를 찾으려고 했지만, 혼자 앉을 만한 자리는 마땅치 않았다.
덕분에 점소이는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 발을 구를 수밖에 없었다.
합석을 권하자니, 안에 들어온 자 중 만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소협, 실례가 안 된다면 우리와 합석하는 게 어떻습니까?”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의 주인공은 남궁천이었다.
남궁천의 말은 점소이에게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일 테고, 시후에게도 적잖이 달가운 제안이었다.
다만, 그의 옆에 앉은 남궁미의 고운 아미는 한껏 찡그려졌다.
그 표정 변화를 아는지 모르는지, 남궁천은 시후가 다가오자 자리에서 일어나 포권을 취했다.
“우리 일전에 만난 적이 있는데 기억하시는지 모르겠군요. 아, 저는 남궁천이라고 합니다.”
처음에 기억이 잘 나지 않을 때야 퉁명스럽게 대했다고 하지만, 그는 아주 쓸모가 많은 인물이었다.
그가 먼저 다가오는데 살갑게 대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차시후입니다. 저번에 화음현에서 같이 배를 탔었죠?”
“하하, 그때도 그렇고 예성에서도 같이 배를 타지 않았습니까.”
“아마······ 맹진에서 내리셨죠?”
“오호, 소협의 기억력도 보통이 아니십니다.”
“뭐, 워낙 눈에 띄는 사람이 있잖아요?”
시후는 팽철우를 힐끔거리며 말했다.
그러자 팽철우는 덩치에 안 어울리게 수줍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저게 수줍게 웃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보다······ 악양에 오는 게 목적이셨으면 같이 맹진에서 내렸을 텐데, 어딘가를 들렀다가 오셨나 봅니다.”
제법 날카로운 질문.
맹진에서 내리지 않았냐는 자신의 질문에, 되려 질문을 던지는 남궁천의 모습은 의도했다기보단 습관처럼 보였다.
“아, 정주에서 할 일이 있었습니다. 일단, 주문 좀 하겠습니다.”
시후가 동파육과 볶음밥을 시키는 사이, 남궁천은 그의 옆에 앉은 팽철우에게 눈빛을 보냈다.
보정을 한 시후의 키는 절대 작지 않았다.
오히려 평균을 제법 웃도는 수준.
그러나 옆에 앉은 팽철우와 비교한다면 처참했다.
앉은 상태로도 머리 한 개 차이가 나는 그가 몸을 돌리자, 순간 움찔하지 않을 수 없었다.
“팽철우라고 합니다.”
“······ 남궁미입니다.”
상을 찌푸리긴 했어도 남궁미까지 통성명을 나누자, 남궁천은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아실지 모르겠지만, 저와 동생은 안휘에서 왔고, 철우는 하북에서 왔습니다.”
통성명을 나눴으니 이제 출신지인가.
서울에서 왔다고 말할 수는 없으니, 캐릭터 생성과 동시에 만들어진 호패에 적힌 곳이 적절한 대답이 될 것이다.
“아, 저는 종로······ 가 아니라 감숙이요.”
“감숙이라! 공동파가 그곳에 있지요. 제가 운이 좋아 공동의 현천신장(玄天神掌)을 마주할 기회가 있었는데, 하늘까지는 몰라도 최소한 마주하는 상대는 눈앞이 캄캄해질 정도로 대단한 장법이었죠.”
노련하다.
정보를 캐내는 것과 동시에 무공에 관한 이야기로 슬쩍 빠지더니, 자신의 등에 매인 창을 바라보는 것까지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아, 이 창은 정주에서 용무를 보고, 무강에 들려서 샀죠.”
“무강에서 산 창이라! 대단한 창일 게 분명하군요! 아, 그리고 양가가 쇠하면서 창을 쓰는 자가 극히 드물었는데,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어디서 창을 배우셨는지 여쭤봐도 괜찮겠습니까?”
단순히 배운 곳을 물어봤지만, 말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무공 이름까지 물어볼 터.
그렇게 되면 실례다.
남궁천이 아니라 자신이 곤란하다.
‘내가 익힌 무공은 십창이오!’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어떻게 말해야지 좋게 넘어갈 수 있을까.
“음, 그게 말입니다······.”
“형님.”
시후가 뒤통수를 긁적이는 사이, 그의 얼굴에 스쳐 간 어두운 그림자를 보았는지 팽철우가 만류하고 나섰다.
그제야 남궁천도 시후의 안색을 확인하곤 고개를 살짝 숙였다.
“불쾌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창수(槍手)를 보는 게 오랜만인지라 조금 들떴나 봅니다.”
“아, 네.”
시기적절한 팽철우의 개입 덕분에 곤란한 질문을 흘려 넘겼다.
다만, 그 뒤에 침묵이 이어진 건 당연한 일이었다.
다시금 이야기의 물꼬를 튼 건, 이야기를 끊었던 팽철우였다.
“천 형님, 이제 악양루를 보았으니 어디로 가실 생각입니까?”
“당연히 3대 명루를 다 둘러보아야 하지 않겠느냐? 중양절까지 시간이 조금 있으니, 나머지 두 곳도 둘러볼 수 있을 것이다.”
“중양절에 집에서 머무르시려고요? 그러다가 지회에 늦지 않을까요?”
“당일에 제(祭)만 올리고 떠나면 되지 않겠느냐? 그리고 말을 타고 간다면, 제남까지 사흘 만에 도착할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말거라.”
“안휘에서 제남까지 사흘이라······. 엉덩이가 닳겠습니다.”
“우는 소리는.”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시후는 고민에 빠졌다.
지회(支會).
남궁미가 말한 ‘지회’는 ‘용봉지회(龍鳳支會)’가 분명했다.
중원의 미래라고 할 수 있는 명문 정파의 후기지수가 모이는 용봉지회에 간다면, 훗날 도움이 될 인물들이 지천으로 널렸을 것이다.
당장 눈앞의 남궁천만 하더라도 미래엔 남궁세가의 가주가 될 인물이다.
참여할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기에 고려하지 않았지만, 남궁천을 잘만 꼬드긴다면 길이 열리지 않겠는가.
용봉지회에 갈 수 있다면 가야 한다.
무영묘적(無影墓賊)을 만나기 위해서라도.
결심을 굳힌 시후의 눈앞에 접시가 하나둘 깔리기 시작했다.
“주문하신 음식 나왔습니다.”
한 덩치 한다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팽철우 때문일까.
시후가 오기 전에 그들이 주문한 양은 어마어마했다.
왜 4인용이 아닌 6인용 식탁에 앉았는지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시후는 식탁에 쌓이는 음식을 바라보며, 남궁천을 향해 슬쩍 입을 열었다.
“남궁천 공자께선 초설을 보러 오신 거지요?”
“켁, 쿨럭쿨럭.”
차를 마시던 남궁천은 사레가 들린 듯, 미친 듯이 기침을 토했다.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지만, 사례 때문만은 아닌듯했다.
‘뭘 부끄러워하는 거람?’
곧 호흡을 가다듬은 남궁천이 손사래를 쳤다.
“아, 아니, 어디서 그런 말을 들었는진 모르겠지만······.”
“아니긴요. 오라버니가 초설을 그려보겠다고 형주에서 안료(顔料)도 사고······ 읍!”
“하하, 요 녀석 못 하는 말이 없구나. 차 소협, 미아가 농으로 하는 말이니 신경 쓰지 말고 어서 식사나 합시다.”
아니면 아닌 거지, 왜 남궁미의 입을 틀어막았겠는가.
시후는 당황한 그의 얼굴을 애써 외면해주었다.
조금 전처럼 침묵이 이어졌지만, 이전과는 사뭇 달랐고 길게 이어지지도 않았다.
“크흠, 차 소협이 관심이 있어서 하는 이야긴 거 같은데······ 소협은 그녀가 원하는 ‘달’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가장 많이 이야기가 나오던 운철?”
짧은 침묵 뒤에 남궁천이 꺼낸 주제는 아니나 다를까, 초설이 말하던 ‘달’이었다.
“음, 운철은 아닌 거 같은데요. 달이라는 말은 추상적인 느낌이 강해서······.”
“역시! 나도 물건은 아닐 거로 생각했지. 아, 생각해 둔 바가 있는가?”
다소 흥분했는지, 남궁천의 목소리가 점차 격양되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본 시후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그는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하기 위해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그럼 내 이야기를 들어보겠나? 자, 달이 지니는 추상적인 의미를 생각해 보게. 달이라는 게 초승달도 되었다가 보름달도 되지 않는가? 그런 다변하는 달을 이야기했다는 것은 말이야······.”
남궁천은 상체를 앞으로 숙이며 목소리를 낮게 내리깔았다.
남궁천은 앞에 놓인 음식을 먹는 시간보다 떠드는 시간이 곱절은 길었다.
덕분에 시후는 그의 이야기를 듣기만 하며 식사를 할 수 있었다.
굳이 대화를 이끌어 나갈 필요가 없었고, 아주 가끔 그의 말에 동의하거나 반박만 해 주면 대화는 쉼 없이 이어졌다.
자기 생각을 말하려던 남궁천은 고개를 돌려, 초설을 향한 계단을 바라봤다.
“하······. 그보다 쉴 새 없이 올라가는군.”
초설이 제시한 문제를 맞히기 위해서 사람들은 부단히도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물론, 문제를 맞히지 못한 채 내려오는 자들과 황금 비율을 이뤘지만.
때마침 6인용 식탁에 올려진 접시의 태반이 비워졌기에, 배를 적당히 채운 팽철우가 이야기에 관심을 보였다.
“단순히 문제를 맞히러 올라가는 데만 금 열 냥이라니, 너무 터무니없지 않습니까?”
“돈이 썩어 나는 자들이야 금 열 냥이 아쉬울까? 그래도 초설의 얼굴을 가까이서 볼 수 있는 특권도 있지 않으냐? 물론, 너무 비싸긴 하지.”
악양루에 있는 자들은 대부분이 초설의 문제를 풀기 위해 온 자들이었다.
다만, 어중이떠중이를 거르기 위해서인지 몰라도, 한 번 답할 때 필요한 금액이 무려 금 열 냥.
“누가 들으면 남궁세가에 돈이 없는 줄 알겠습니다.”
“그 돈이 다 내 것이더냐?”
“맞추면 되지 않겠습니까? 천이 형님께선 생각해 두신 답이 있을 거 아닙니까?”
“있기야 하지.”
팽철우의 질문에 남궁천의 얼굴에 자신감이 자리 잡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시후가 그를 바라보자, 남궁천은 주변을 의식하며 몸을 조금 더 앞으로 숙였다.
“‘달’을 주면 머리를 올릴 수 있다? 자, 잘 듣게. 머리를 올린다는 이야기에서 숨은 뜻이야 뭐······ 아무튼. 그녀의 옷을 ‘탈(脫)’하려면, 달(月)이 ‘태(兌)’하면 되지 않겠나? 달이 태를 한다, 즉. 달이 웃음 짓는 날인 그믐달에 이 말을 전하는 게 답이 되지 않겠냐는 게 내 생각일세.”
언어적 측면에서 다가선 그의 접근 방식은 훌륭했다.
답을 알고 있는 시후가 고개를 주억거릴 만큼, 제법 설득력이 있다.
설명을 듣던 팽철우는 입을 쩍 벌린 채 고개를 연신 끄덕였고, 남궁미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남궁천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그 좋은 머리로 고작 이런 문제나 풀고 있다니······. 아버지께서 아시면 뭐라고 하실까요?”
“아, 아니. 이건 차 소협이 물어봐서······.”
그제야 ‘아차’ 싶었는지, 남궁천은 시후를 향해 간절한 눈빛을 보내며 도움을 청했다.
임무가 뜨진 않았지만, 임무와 비슷한 상황이 아닐까.
눈을 마주친 시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차 소협, 어딜 가는가?”
“식사도 다 했으니, 저도 한 번은 도전해 보려고요.”
“정말인가?”
‘댁 때문이 아니라 임무 때문이다’라고 말할 수 없어, 시후는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정말 자신을 도와줄 거라 생각 못 했는지 남궁천의 눈빛은 반짝였고, 그와 반대로 자신을 바라보는 남궁미의 눈빛에는 혐오감이 가득했다.
그 눈을 마주하던 시후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어차피 너한테는 잘 보일 이유도 없네요.’
세 사람의 시선을 받던 시후가 위층으로 향하는 계단으로 다가가자, 험상궂게 생긴 장정 두 사람이 시후의 앞을 가로막았다.
“어디로 가십니까?”
“가장 위층, 초설을 보러.”
“무기를 소지할 순 없고, 가기 위해선 금 열 냥을 주셔야 합니다.”
초설이 내건 문제를 맞히러 가는 건 아니지만, 돈을 내지 않고 초설을 만날 방법은 없어 보였다.
힘으로 뚫는 방법이야 있겠지만, 과연 악양루에 자신을 막을 사람이 한 명도 없겠는가?
순순히 창을 건네준 시후는 장정을 따라 계단을 올라갔다.
6층까지 안내한 장정은 다시 아래로 내려가려고 했지만, 시후는 오르는 도중 꺼내 놓은 홍설의 서신과 낡은 나무 부적을 장정에게 건네주었다.
“만나기 전에 이걸 미리 초설에게 전해 줬으면 하는데······.”
“총관님께 여쭤보겠습니다.”
물건을 건네받은 장정은 곧바로 한층 더 올라갔고, 시후는 주변에 놓인 의자에 몸을 파묻었다.
다만, 시후의 기다림은 그리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저분입니다.”
계단을 내려온 장정이 공손하지만 분명한 태도로 시후를 가리켰고, 제법 고집이 세 보이는 늙은이가 시후의 앞으로 다가왔다.
“초설이 소협을 먼저 뵙고 싶다고 합니다.”
- 18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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