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15화 거지와 녹림 (4)
저 멀리 무한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광마패도를 잘 속여넘긴 걸 생각한다면 기분 좋은 상황이지만, 시후의 표정은 그리 밝지 못했다.
“일류라······.”
내공이 1갑자를 넘어서면서 일류로 들어서긴 했어도, 부족한 게 너무나도 많았다.
앞으로의 해야 할 일을 생각한다면 ‘벌써’ 일류가 아니라, ‘고작’ 일류라는 말이 어울릴 터.
NPC들을 이용하는 것도 좋다.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로 그들을 속이는 것도 좋다.
하지만, 기존의 사건들을 확확 당기기 위해선 자신의 능력이 가장 중요했다.
“일단 이거부터 전해 주고 무골이라도 올려야지······.”
가장 먼저 추나행에게 부탁받은 것, 서신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천 쪼가리를 전해 주기 위해 무한의 초입에서부터 거지를 찾아 나섰다.
계절상 시월이면 적잖이 선선해야 하는 날씨지만, 악명 높은 찜통더위를 자랑하는 무한의 길거리는 아직 습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 탓인지 몰라도, 거리에 거지들은 죄다 그늘로 숨어들었는지 눈에 쉽사리 띄지 않았다.
결국, 황학루 근처까지 가고 나서야 그늘막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거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도 개방의 실질적인 눈과 귀가 되는 이결 제자.
그의 앞으로 다가가자, 이결 제자는 시후의 발소리에 게슴츠레 눈을 떴다.
“아이고, 나리. 감사합니다. 복 받으실 겁니다.”
품을 뒤적거리는 시후의 모습에 바닥에 넙죽 엎드려 절을 하는 모습을 보니, 적선이라도 해 주는 줄 알았나 보다.
공손히 모은 그의 손 위로 추나행에게 받은 천 쪼가리를 툭 던져 주었다.
이결 제자는 자신의 손 위에 딱딱한 동전 대신 잔뜩 삭은 천이 등장하자,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자신을 올려다봤다.
“추나행이라는 분이 무한에 있는 연개라는 사람에게 전해 달라고 한 서신이니, 날 볼 게 아니라 연개라는 사람을 찾아가는 게 좋지 않을까?”
“장로님께서? 실례지만 소협은 누구신지······.”
“시후. 차시후.”
이결 제자는 시후의 말을 반신반의하면서도 천을 묶은 매듭을 자세히 관찰하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어디론가 달려갔다.
그 모습을 지켜본 시후는 허기를 채울 겸 황학루로 다가갔다.
중원에는 3대 명루라고 불리는 곳이 존재했다.
첫 번째로 가장 웅장한 규모를 자랑하는 ‘등왕각’.
두 번째로는 동정호의 경치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악양루’.
마지막으로, 지금 시후가 들어선 ‘황학루’.
그중 황학루는 특별했다.
바로 도교의 전설적인 인물, 여동빈과 얽혀 있었기 때문이다.
과거 시험에 떨어진 여동빈이 술을 마시며 유랑하던 중 도교의 신선과도 같던 종리권을 찾아가 가르침을 청하는데, 종리권은 열 가지의 시험을 치른 후 여동빈을 제자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길로 수행을 거듭한 여동빈이 전진교의 5대 조사로 올라섰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여동빈이 매일같이 술을 퍼마시던 장소가 이곳 황학루였고, 그가 밀린 술값을 대신해서 그려 준 황학(黃鶴)에 얽힌 전설도 적지 않았다.
물론, 황학루에는 이를 이용한 기연도 많았다.
가장 대표적으로.
“‘여동빈의 시험’은······ 무리겠지?”
‘여동빈의 시험’이 있었다.
여동빈이 그렸다는 황학 앞에서 최호의 ‘황학루’를 읊으면 발생하는 히든 임무지만, 고작 일류로 도전할 만한 임무가 아니었다.
아무리 완성된 용(龍)이 아니라지만, 교룡(蛟龍)을 죽이려면 최소한 ‘절세’, 안전하기 위해선 ‘절대’ 수준까지 올라야 할 것이다.
지금으로선 상상도 못 할 수준이었기에 생각을 지웠다.
자리에 앉기 무섭게 점소이가 쪼르르 다가왔다.
“면 요리.”
시후의 짧은 한마디에 점소이는 잠시 당황했지만, 이내 말뜻을 파악하곤 웃음 지었다.
“열간면을 추천해 드립니다. 날이 좋지 않아 황학루의 경치를 감상하지 못한다고 해도, 이 열간면 한 젓가락이면 그 기분이 눈 녹듯 사라진다고 할 정도로 맛이 일품입니다.”
“그럼 열간면 하나랑 규화계.”
“총 은자 여섯 냥이며 열간면은 금방 나오지만, 규화계는 일 각 정도 걸립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시기 바랍니다.”
한참 동안 구워야 하는 규화계의 특성상, 주문과 동시에 조리하는 것과 달리 일반적으로 이런 대규모 객잔의 경우는 미리 조리한 게 있기 마련이다.
주문을 받은 점소이가 사라진 지 일 분도 지나지 않아 그릇을 들고 다가왔다.
“열간면 먼저 드리겠습니다.”
열간면은 이 시기에 있어서 안 될 음식이다.
하지만, 답사를 다녀왔던 사람들이 입을 모아 추천했던 이 음식을 넣지 않을 순 없었다.
물론, 가장 큰 이유는 최 이사님이 좋아했기 때문이지만.
나온 열간면을 바라보는 시후의 이마에는 내 천(川)자가 그려졌다.
면에는 국물이 필요하고, 국물이 없는 면은 사도다.
적어도 시후의 생각은 그러하였다.
“음.”
한입 먹기 전까지는.
콧속을 파고드는 고소한 땅콩과 참깨의 하모니는 시작에 불과했다.
고소함이 입안에 자리 잡기도 전에 짭짤한 간장이 그 뒤를 파고들었고, 고명으로 얹힌 다양한 채소가 새초롬하게 빛을 발했다.
그릇에 제법 수북이 쌓여 있던 면은 반 각이 채 되기도 전에 바닥을 드러냈다.
아쉬운 마음에 빈 그릇을 젓가락으로 휘젓는 사이, 황학루 안으로 개방도로 보이는 세 사람이 들어왔다.
“왔네.”
가장 앞에서 들어오는 자는 조금 전 시후가 천 조각을 주었던 이결 제자였다.
안을 둘러보던 그는 뒤의 두 사람과 귓속말을 주고받더니, 시후가 앉아 있는 2층으로 곧장 올라왔다.
2층에 올라온 세 사람 중, 허리춤에 매듭 다섯 개를 매고 있는 거지가 앞으로 나섰다.
“무한의 분타주 연개라고 하오. 소협이 추나행 장로님의 서신을 전해 주셨소?”
“네.”
“다름이 아니라, 이렇게 직접 찾아온 이유는······ 여기 보시오.”
그는 품을 뒤적거려 시후가 전해 주었던 천 쪼가리를 건네주었다.
앞섬을 잠시 열었을 뿐인데 시큼한 냄새가 풍겨오는 게, 과연 분타주를 맡을 만한 상거지였다.
시후는 코를 틀어막은 채 천 쪼가리를 펼쳤다.
암호로 적었다고 생각했지만, 천 쪼가리에 적힌 내용은 자신도 읽을 수 있었다.
「무한으로 가기로 했지만, 사정이 생겨서 가지 못할 것 같다. 일이 끝나는 대로 갈 테니 걱정하지 마라. 혹여나 내가 한 달 이상 연락이 없으면, 이 서신을 가져다준 녀석한테 물어보면 된다.」
물어보긴 뭘 물어봐.
시후는 곧장 천 쪼가리를 돌려주었다.
“지금 무슨 일 때문에 이런 서신을 보내셨는지 모르겠지만, 필시 예삿일은 아니라고 생각하네. 추 장로님께서 무슨 일에 휘말리신 것인지 알아야겠네. 어서 알려 주게나.”
“싫은데요.”
연개의 말을 단호하게 끊었다.
일말의 여지를 주지 않는 시후의 태도에 연개가 주춤거렸다.
하지만, 물러설 수 없다는 듯 표정을 굳힌 채 노려봤다.
“나눴던 대화는 매듭을 걸고 약속했는데, 그 매듭을 가지고 오던가요.”
매듭을 가지고 온다.
매듭의 주인이 더는 개방의 규칙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 말은 파문 또는 사망을 의미했다.
매듭을 걸고 하는 약속은 개방도에 그만큼 중요한 약속이었다.
시후의 말에 당황했는지, 연개는 말을 더듬으며 허둥거렸다.
“미, 미안하네. 매듭을 걸고 약속한 줄은 몰랐군. 내, 사과하지.”
“뭐, 몰랐으면 그럴 수도 있죠.”
말을 주고받는 사이 규화계가 나왔다.
겉의 진흙은 제거하되 연잎은 그대로 두어, 아직 속살의 촉촉함은 잃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시후가 젓가락으로 김이 피어오르는 연잎을 슬쩍 건드리자, 모락모락 빠져나온 김은 코끝을 간지럽혔다.
덕분에 눈앞의 거지 삼인방은 연신 콧구멍을 벌렁거렸다.
그러던 연개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응? 뭔가 친숙한 냄새가 나는데······ 차 소협, 혹시 추 장로님께 받은 물건이라도 있소?”
연잎을 하나하나 벗기던 시후는 갑작스러운 연개의 질문에 품을 뒤지는 척을 했고, 인벤토리에 넣어 두었던 분식 패를 꺼냈다.
그 패를 보자마자 세 사람의 얼굴은 크게 밝아졌다.
“형제!”
연개의 외침과 동시에 세 사람은 너나없이 규화계로 손을 뻗었다.
시후는 몰랐겠지만, 사실 분식 패는 개방 NPC의 호감도를 빠르게 올릴 수 있는 것 이외에도 한가지 능력이 더 있었다.
바로, 밥을 같이 나눠 먹는다는 것.
그래서 이름이 분식(分食) 패였다.
게걸스럽게 닭을 뜯어 먹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추나행이 분식 패를 주며 왜 웃었는지를 알 것 같았다.
“어허 드히호.”
입에 한가득 닭 다리를 집어넣은 채 말하는 연개의 모습이 꼴 보기 싫어서, 시후는 두 눈을 감았다.
추나행, 이 빌어먹을 늙은이 같으니라고!
* * *
“빌어먹을 거지 놈들.”
사과를 받기야 했지만, 뱃속으로 들어간 규화계는 어떻게 받아 낼 것인가.
똥 밟은 셈 치고 넘어갈 수밖에 없었고, 그들의 손때가 묻은 규화계는 맛조차 보지 못했다.
어차피 분식 패의 구릿한 냄새 때문에 식욕이 달아나기도 했지만.
의도치 않은 선물이 되어 버린 규화계를 뒤로한 채, 무골을 올리기 위해 귀원선사(歸元禪寺)를 찾았다.
황학루의 ‘여동빈의 시험’은 자신의 수준으로 치를 수 없지만, 무골을 올리는 게 초반에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활짝 열린 귀원선사의 문을 지나자, 노란색 가사를 입은 스님이 다가왔다.
“시주께서는 어인 일로 본사를 찾으셨는지요.”
“아, 시련에 도전하려고요.”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아니, 저기 보이는데······.”
시련의 도전이 가능한 장소는 플레이어의 눈에 초록색으로 빛나지만, 그걸 알 리 없는 스님은 몸을 돌렸다.
앞서 걸어가는 스님의 반질거리는 뒤통수를 보며 도착한 곳은 정문에서 멀지 않은 곳의 거대한 목탑이었다.
붉은 적송을 사용하여 만든 목탑은 웅장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스님은 탑을 올려다보는 시후에게 말없이 합장하며 물러났다.
혹시나 지켜보는 눈이 있는지 주변을 한 번 둘러본 후, 시후는 손바닥을 슬며시 들어 목탑에 가져다 댔다.
[‘귀원의 탑’의 시련에 도전하시겠습니까? 실패 시, 일주일 후 재도전이 가능합니다.]
알람이 떠오르자 시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도전.”
그와 동시에 시후가 손을 가져다 댄 부분을 중심으로 살짝 일렁임이 일더니, 최초 로그인 시에 보았던 흑백이 어우러진 웅장한 문이 생성되었다.
문을 열자, 문 너머의 공간이 단 한 치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시후는 두려움일랑 가지고 있지 않은 것처럼 주저 없이 발을 내디뎠다.
문을 넘어서자 질식할 것 같은 어둠이 펼쳐졌다.
그 어떠한 소리도, 빛도 느껴지지 않는 공간이었지만, 시후는 침착하게 마음을 가라앉혔다.
문을 넘고 난 뒤부터 모든 것이 시련이었기에 마음의 평안을 유지하는 게 중요했다.
다만, 죽었을 때 경험한 어둠 속의 끝없는 기다림이 떠올라 땀이 주르륵 흐르고 있었다.
겨드랑이가 촉촉하다 못해 축축하게 젖었다.
땀이라도 닦을까 싶은 찰나, 주변이 밝아지며 알람과 함께 다시 문이 나타났다.
[‘귀원의 탑’의 시련, 1단계를 통과하였습니다.]
통과했다는 알람이 나왔지만, 시후는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인내를 요구하는 시련은 대부분 더 깊은 인내를 요구하기도 했으니깐.
[기연 발동! 시련 한 단계를 추가로 통과하였습니다.]
[‘귀원의 탑’의 시련, 2단계를 통과하였습니다.]
“후······. 씻고 싶다.”
바깥과 다르게, 시련을 거치는 동안 탑의 내부는 최적의 상태를 유지해 주었다. 그러나 이미 흘려 버린 땀과 기력은 오롯이 자신이 안고 가야 할 짐이었다.
생각보다 쉽게 2단계를 통과했지만, 아직 절반도 오지 않았다는 걸 생각하면 한숨이 절로 나왔다.
창을 잠시 땅에 내려놓곤 손에 흥건한 땀을 바지춤에 대충 문질러 닦았다.
잠시 마음의 준비를 마친 시후는 힘차게 문을 밀었다.
- 16화에 계속 -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