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10화 초석 (1)
다음 날, 시후는 서신을 받기 위해 다시 천화루로 향했다.
곧 입구로 홍설이 내려왔고 그 얼굴을 바라보자 어젯밤의 긴 여행이 생각났다.
항항은 생각보다 가까웠다.
자신을 바라보는 홍설의 얼굴도 제법 불그스름하게 달아오른 것을 보니, 그녀도 비슷한 생각인 듯했다.
“청소가 끝난 방이 있긴 해요.”
순간 솔깃했다.
하지만, 혹하는 마음을 억누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제야 자존심의 회복이 필요했고,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곤 하지만, 오늘부터는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다.
고개를 가로젓는 시후를 보며 홍설은 다소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곧 손에 들린 서신을 건네주었다.
[‘홍설의 서신’을 입수했습니다.]
“그럼.”
서신을 받아든 시후는 홍설의 묘한 시선을 외면하며, 곧장 정주 외곽으로 걸음을 옮겼다.
앞으로 이곳저곳을 돌아다녀야 하는데 계속 걸어 다닐 수는 없었으니깐.
걸어서 가지 못할 곳은 아니지만, 묵직해진 주머니가 있는데 말을 사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정주 외곽의 마시장(馬市場) 규모는 어지간한 장원 열 개를 합친 것만큼이나 커다랬다.
활짝 열린 정문을 지나자, 졸음이 가시지 않은 듯 연신 하품을 하던 남자가 눈을 번쩍 뜨곤 시후를 향해 달려왔다.
“어서 오십시오! 마방궁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우리 마방궁은 하남성 최고의 마시장이자, 강북 삼대 마시장으로서 보유한 말의 숫자만 해도 이백여 마리에 달하며, 한혈마(汗血馬) 한 마리를 보유한 명실상부······.”
“눈으로 보고 살 테니 안내나 해.”
홍설과 같이 중요 NPC도 아닌데 잘해 줄 필요는 없었다.
시후의 말이 자연스레 하대로 변했다.
“아이고, 현명하십니다. 말이라는 놈은 원래 직접 눈으로 보고 확인을 해야죠. 멋도 모르는 샌님들이 혈통이 어떻냐, 이 말은 하루에 몇 리를 달리느냐 물어보는데, 사실 가장 중요한 건 기수의 능력이죠. 말의 능력을 잘 파악해서 적절한 속도를 유지하는 것부터 시작하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렁이들은······.”
시후는 주저리주저리 떠드는 남자를 철저히 무시하며 안으로 향했다.
마방궁은 마장을 각기 갑, 을, 병, 정 네 개로 나눠서 관리하고 있었는데, 남자는 곧바로 시후를 갑급 마장으로 안내했다.
가장 좋은 말들이 모여있는 갑급 마장의 말들은 한눈에도 상태가 매우 좋았다.
그중 시선을 잡아끄는 말이 있었는데, 유독 특별한 대접을 받는 녀석이었다.
“한혈마입니다.”
시장통 아낙네보다도 말이 많은 남자였지만, 지금은 말을 아꼈다.
한혈마에 설명을 덧붙이는 건 사족에 불과하였으니깐.
예로부터 마답비연(馬踏飛燕)이라 불릴 정도로 빠르면서도, 일주일 밤낮으로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사막을 종단한 적 있다는 한혈마.
시후는 한혈마의 콧잔등을 살포시 쓰다듬어 보았다.
[백마]
「지구력이 대단히 뛰어난 명마이며, 쉽게 지치지 않는다.
순혈 한혈마.」
“가격은?”
“금 백 냥입니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금 백 냥이면 자신이 팔아 치운 흑과와 같은 금액이었다.
사려면 살 수는 있지만, 굳이 가진 돈의 반절 이상을 쓰면서까지 살 이유는 없었다.
게다가 말을 타고 다닌다면 기본적으로 나가는 돈도 생각해야 했다.
시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자, 남자는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갑급 마장을 한 바퀴 돌았다.
가장 비싼 건 한혈마였지만, 나머지 말들도 준마라 불리기 손색이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갑급 마장에서 가장 싼 녀석만 하더라도 금 서른 냥에 달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나가는 유지 비용도 있으므로, 이런 녀석들을 살 순 없었다.
“좀 싼 놈들 없어?”
“저렴한 걸 원하신다면······ 이쪽으로 오시죠.”
말을 툭툭 내뱉어서 그런가, 남자의 태도가 사뭇 퉁명스러워졌다.
그런 남자의 마음을 반영하듯, 그가 안내한 곳은 상태가 가장 나쁜 정급 마장이었다.
널찍한 갑급 마장과 달리 정급 마장의 공간은 좁았다.
게다가 마장 속 말들의 콧잔등을 쓰다듬는 시후의 인상은 점차 찌푸려졌다.
[갈색마]
「온순해 보이는 외견과 달리 성질이 사나워 주인을 낙마시키는 경우가 잦다.」
[백마]
「번지르르한 외양과 달리 속에 앓고 있는 잔병이 많다.」
떠오르는 알람 창을 읽으니, 정상적인 말이 없었다.
다들 어딘가 하자가 있는 녀석들.
한숨을 푹푹 내쉬며 말들을 확인하던 시후의 걸음이 한 녀석의 앞에서 멈춰 섰다.
골격은 훌륭했지만, 검은색 갈기는 기름기가 전혀 없어 푸석푸석해 보였고, 근육은커녕 살조차 없어 비쩍 마른 몸은 볼품없었다.
다만, 다른 말들과 달리 눈빛이 살벌했다.
“아, 이 녀석은 팔 수 없는 녀석입니다. 성질이 보통 지랄 맞은 게 아닌 데다가, 보다시피 밥도 안 먹고 버티는지라, 곧 도축될 녀석입니다.”
도축될 녀석이라.
남자의 설명에 시후는 말의 콧잔등을 쓰다듬었다.
곧 떠오른 알람 창을 보는 시후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이 녀석으로.”
“네? 이 녀석은 팔 수가 없는뎁쇼? 여기서야 이렇게 가만히 있지만, 고삐를 붙잡는 순간부터 미쳐 날뜁니다!”
“아, 그건 내가 걱정할 문제고.”
시후의 짤막한 대답에 한참 동안 입을 닫고 있던 남자의 손이 마장의 문고리로 향했다.
문고리를 잡은 채 한참을 주저하던 그는 낮은 목소리로 시후에게 경고했다.
“문제가 생겨도 저는 책임 안 질 겁니다.”
“그보다, 이 말 얼마야?”
“금 다섯 냥만 받겠습니다.”
그의 말에 시후가 고개를 끄덕였고 남자는 바로 문을 열었다.
자신을 가로막는 울타리가 사라지자, 흑마는 눈빛을 살벌하게 번득이며 앞으로 달려들었다.
다만, 앞으로 달려든 건 말뿐만이 아니었다.
시후는 주먹을 휘둘러 그대로 말의 관자놀이에 꽂아 버렸고, 말은 땅에 몸을 뉘었다.
남자는 그런 시후를 황당하다는 얼굴로 바라보았고, 시후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가볍게 말했다.
“맞다 보면 말을 듣겠지.”
바닥에 쓰러진 말은 시후의 말을 알아들은 것인지 몰라도 짧게나마 몸을 부르르 떨었다.
* * *
관도(官道)를 터벅터벅 걸어가던 시후는 휴식을 위해 길옆으로 슬쩍 빠져나왔다.
식사하기 위함이었다.
다만, 자신의 밥을 챙기기에 앞서 여물통에 물을 붓고, 바닥에 짚단을 먹기 좋게 펼쳐 두었다.
“먹어.”
시후가 먹이를 챙겨 줬음에도, 흑마는 더 걷고 싶은지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시후가 한숨을 내쉬며 주먹을 움켜쥐었고, 흑마는 곧장 여물통에 머리를 들이박았다.
“곱게 좀 먹어라. 매번 이래야겠냐?”
흑마는 얄밉게도 촵촵거리는 소리를 내며 여물통을 비워갈 뿐이었다.
주기적으로 여물과 짚단을 먹여서 그런지 살이 조금 올라왔지만, 타고 다니기엔 요원해 보였다.
시후는 혹시나 한 마음에 흑마의 상태를 확인해 보았다.
[흑마](탑승 불가)
「마음껏 달리지 못하여 마음이 병들었다.
몽골의 야생마와 한혈마의 교배종.」
일반적인 것은 설명이 한 줄로 끝이 나지만, 특별한 것에는 부연 설명이 더 있기 마련이다.
아까 순혈 한혈마가 그러하였고, 이 흑마가 그러하였다.
다만, 예상대로 아직 사람을 태울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빨리 포동포동 살쪄라. 그래야 타고 다니지.”
“푸르르.”
시후의 중얼거림을 알아들은 것일까.
머리를 치켜든 흑마가 고개를 흔들며 짧은 투레질을 했다.
그 모습을 본 시후는 짧은 한숨과 함께 지도를 펼쳐보았다.
악양으로 가려면 허창에서 쭉 남쪽으로 내려가야 하지만, 지금 시후는 서남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해지기 전에는 평정사(平頂寺)에 도착해야 하는데.”
평정사는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 평정산(平頂山)에 있는 조그마한 절이었다.
무강(武剛)이라는 조그마한 마을의 뒤편의 평정산은 특별할 거라곤 전혀 없는 평범한 산이었다.
그곳에 있는 평정사도 딱히 유명한 절이 아니었다.
주지 스님이 혼자서 꾸려나가는 아주 조그마한 사찰에 불과했다.
“표면상으론 말이지.”
그렇다.
표면상으로는 시선을 잡아끌 어떤 요소도 없었다.
* * *
시후는 땅거미가 막 내려서기 전에 평정사에 도착할 수 있었다.
불상을 모시는 불당과 주지 스님의 생활 공간 한 채가 전부인 아주 조그마한 절이었다.
갑작스러운 외인의 방문에 주지 스님은 의아해하는 기색을 띠면서도 시후를 반겨 주었다.
“아미타불. 평정사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어인 일로 본 사찰을 찾으셨는지요.”
“오늘 하루 절에 머무르며 밤새 기도를 하려고 합니다.”
누구에게나 첫인상은 중요하다.
평소와 달리 시후는 진중하게 말했고, 밤새 기도한다는 말에 주지 스님은 크게 감동한 표정을 지었다.
“근래에 보기 드문 참된 시주입니다.”
“제가 가진 게 얼마 없어 시주는 얼마 못 하지만······.”
말과 다르게 시후는 은 오십 냥이 들어있는 주머니를 건네주었다.
묵직한 주머니를 받아들자, 스님의 얼굴은 더욱 밝아졌다.
아무리 물욕이 없는 스님이라 하더라도, 숨만 쉬고 살 수는 없었으니깐.
“기도하시는 동안 제가 시주의 옆에서 목탁을 두드려 드리겠습니다.”
“아닙니다. 홀로 부처님을 만나 뵙고 싶습니다.”
“아미타불. 아미타불.”
슬쩍 주지 스님을 흘겨보자 감동한 표정을 지으며, 연신 염주 알을 굴리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한참을 서 있던 스님은 아직도 시후를 밖에 세워 두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는지, 다급히 안으로 들어오라 손짓했다.
“없는 절간 살림이지만, 시주를 굶길 정도로 부족하지는 않습니다. 소승도 식사 전이니, 잠시 방에 들어가 계시면 상을 가지고 들어가겠습니다.”
“아닙니다. 기도를 올리기 전 몸을 경건하게 하려고 금식할 예정입니다.”
“아······. 선재로다.”
손발이 오그라들었지만, 지금 이 시기가 가장 중요했다.
스님에게 불심이 충만한 불제자의 모습을 강하게 심어 줘야 했다.
그래야지 나중에 약을 팔아도 약발이 제대로 먹히지 않겠는가.
스님은 감명받은 얼굴을 한 채 불상을 모시는 불당으로 안내해 주었고, 시후는 불상 앞에서 합장하며 가만히 서 있었다.
뒤통수에 눈이 달린 건 아니었지만, 등 뒤로 스님의 시선이 콕콕 박히는 게 느껴졌다.
계속해서 내리꽂히던 시선은 십여 분이 지나고 나서야 사라졌다.
그제야 시후는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여섯 시간 남았나?”
자정까지 시간이 한참 남았지만, 미리 와서 고생을 자처하는 이유는 한가지였다.
혹시라도 모르는 페널티를 받지 않기 위해서.
편안한 자세로 쉬고 있던 시후의 귓가에 자박자박 발소리가 들려왔다.
그 즉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합장을 취했다.
잠시 후, 뒤편에서 스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승은 바로 옆 안채에 있으니,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부르시면 됩니다.”
“말씀 감사합니다.”
“시주께서도 원하시는 바를 이루시길······.”
걸음을 돌려 문을 닫는 소리가 들려오자, 시후는 바닥에 털썩 드러누웠다.
잠시 졸기도 하고, 바닥을 뒹굴며 시간을 죽이던 시후는 시간이 되었음을 확인했다.
“자정.”
불상 앞으로 들어간 시후는 쌍괴에게 받았던 단도를 옆에 내려놓곤, 천천히 108배를 올리기 시작했다.
불당 안에는 시후가 움직이면서 내는 사그락거리는 소리만이 가득했다.
106······ 107······ 마지막 108배를 올림과 동시에, 시후는 바닥에 내려놓은 단도를 집어 들었다.
순간, 귓가에 들리던 풀벌레 소리가 뚝 하고 끊기더니 알람이 떠올랐다.
[1인 미궁 ‘깨어난 부처’에 들어오셨습니다.]
알람과 동시에 반개한 불상의 눈이 번쩍 뜨였다.
황동으로 만들어진 불상의 눈은 당장이라도 피가 쏟아질 듯 미간주(眉間珠)처럼 새빨갰다.
그와 동시에 사방에서 준엄한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중생이여, 무엇을 찾아 헤매는가.”
“이 개 같은 곳에서 나가는 방법이지!”
- 11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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