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6화 서후쌍괴와 신의 (2)
“가만히 안 있겠지?”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진 자신을 찾기 위해 동분서주할 쌍괴의 모습이 눈에 훤히 보였다.
곧 자신이 움직인 방식대로 걸어보겠지만, 쌍괴가 들어올 수는 없을 것이다.
이곳에 발을 디디는 게 허락된 NPC들은 몇 없었고, 그들은 그 대상이 아니었으니깐.
“손바닥이 가장 나으려나······.”
후괴에게 받은 단도를 꺼내든 뒤,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시후는 손바닥을 죽 그었다.
그와 동시에 손바닥에선 피가 뭉클뭉클 솟아났다.
경감되었어도 느껴지는 아릿한 통증은 인상을 찌푸리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손바닥을 오므려 피를 모으던 시후는 갑자기 사방으로 손을 휘저으며 핏방울을 멀리 날려 보냈다.
그 순간, 안개가 마치 피를 머금은 것처럼 붉게 변하기 시작했다.
이질적인 그 광경을 한참 바라보던 시후는 인벤토리에 단도를 집어넣곤, 조그마한 상자를 꺼내 들었다.
이건 신의를 밖으로 끌어낼 물건이자, 지금 이곳에는 존재해선 안 되는 물건이었다.
“언제쯤 나오려나······.”
“누구 말이더냐?”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움찔했지만, 놀라지 않은 척하기 위해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천천히 뒤돌아보자, 그곳에는 새하얀 수염을 가슴까지 늘어트린 노인이 서 있었다.
눈썹과 머리카락, 수염은 물론이거니와, 입고 있는 옷가지 역시 백의(白衣)였기에 마치 신선을 보는 것 같았다.
그는 기다란 수염을 쓰다듬으며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경격혈향진을 돌파하지 않고 이렇게 날 불러낸 거로 봐서는 신기자의 제자는 아니고, 그가 말해 주었던 녀석과는 사뭇 다른데······ 네놈은 누구냐?”
시후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는 호기심과 경계심이 어우러져 있었다.
어느 쪽이 크냐고 물어본다면 아마 호기심이 한 발짝 더 앞서 있을 터.
“차시후라고 합니다.”
“들어 본 적 없는 이름이군.”
“뭐, 그렇겠죠. 처음 오프닝 영상 끝자락엔 이름이 올라가기야 하겠지만.”
시후의 말에 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쓸데없는 소리를 했다는 생각에 곧장 손사래를 쳤다.
“이름이 중요한 게 아니죠. 일단······ 지혈부터 시키고 대화를 나누죠.”
여전히 피가 뚝뚝 떨어지는 왼손을 신의가 볼 수 있게 일부러 쫙 펼쳤다.
덕분에 멈춰 가던 피는 다시금 손바닥을 타고 주르륵 흐르기 시작했다.
신의는 그 광경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바라봤다.
잘 지켜보고 있는 걸 알았으니, 이제 그를 놀라게 해 줄 차례였다.
시후는 상자 뚜껑을 한 손으로 낑낑대면서 열더니, 오른쪽 검지를 상자 안으로 넣었다가 뺐다.
그 손끝을 유심히 바라보던 신의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금창약?”
“맞습니다. 하지만, 다르죠.”
“흠······.”
그의 얼굴은 마치 번데기 앞에서 주름을 잡느냐는 듯 오만하기 그지없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했으니, 시후는 대답 대신 행동으로 보여 주었다.
상처 위에 금창약을 골고루 펴서 발라 주자, 신의도 더는 태연하게 있을 수 없었다.
흐르던 피가 멎고 새살이 죽순처럼 올라왔기 때문이다.
그 광경을 목도한 신의는 어느새 시후의 손바닥에 고개를 처박고 있었다.
조금 전 오만하게 바라보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이, 이건 신기자가 말했던······.”
“플레이어용 기초 금창약이죠.”
“그래! 그런 이름이었지! 안 그래도 그 물건을 만드는 것 때문에 골머리가 썩고 있었는데, 이 물건은 어디서 났나?”
“뭐······ 어디서 났는지가 중요한 건 아니잖아요? 필요하시죠?”
시후가 오른손에 들린 상자를 살짝 흔들자, 신의는 잔뜩 흥분한 채로 격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드린다고 해도 이걸 만들려면 재료를 구해야 하잖아요? 구하러 돌아다니는 김에 저기 밖에서 기다리는 분들 좀 도와주시죠.”
“추가와 철가 말인가?”
“네, 절맥 때문에 고통에 빠진 아이가 있는데, 도와주신다면 이걸 드리겠······.”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시후의 손에 들려 있던 상자가 신의의 손으로 옮겨 갔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자, 신의는 마치 신줏단지라도 되는 것처럼 상자를 소중히 품에 끌어안고 있었다.
“남아일언 중천금! 일구이언은 이부지자라고 했네!”
아버지가 둘이라니.
덕분에 시후는 넋이 잠시 나가 멍하니 그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 아무리 그래도 패드립은······ 아무튼. 받아 가셨으니 약속은 지켜 주셔야 해요.”
“구음절맥도 문제없으니 걱정하지 말게.”
“아, 그리고 하나만으로는 부족하지 않으세요?”
“더, 더 있나?”
초기에 3개를 받으니 하나 정도는 줘도 문제가 없을 것이다.
어차피 신의가 만드는 것도 그리 오래 걸리는 건 아닐 테니까.
“다만, 저도 이 귀한 걸 그냥 드릴 순 없고, 적당한 약초가 있다면······.”
“줌세.”
몸이 달아오른 신의가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근질거리게 만들어 놨으니, 이제 운을 떼 볼 차례였다.
시후는 신의에게 기초 금창약을 하나 더 건네주며, 슬쩍 입을 열었다.
“혹시 절맥을 치료할 때 천양초 뿌리가 필요할까요?”
시후의 질문에 신의의 미간이 좁아지는가 싶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고개를 가로저었다.
“있으면 좋지만, 나 정도 경지에 다다르면 없다고 한들 아무런 문제가 없네. 왜, 가지고 있기라도 한 건가?”
“아뇨, 혹시나 해서 물어봤죠. 그보다, 쌍괴가 밖에서 절 애타게 찾을 텐데······.”
시후의 말에 신의는 다시 안개 속으로 모습을 감췄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짙은 안개는 마치 거짓말처럼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시후의 뒤편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지탁! 여기에 있네!”
시후를 발견한 서괴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고, 바람 가르는 소리와 함께 후괴가 모습을 드러냈다.
잔뜩 얼굴이 상기된 모습을 보아하니, 전력을 다해서 이 근방을 뒤진 게 분명했다.
얼굴이 시뻘게진 그가 화를 내기 시작했다.
“진에 들어간다면 들어간다고 말을 하고 들어가야······.”
“아, 신의에게 혜아의 치료를 부탁해 뒀어요.”
시후가 말을 툭 끊었지만, 후괴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한참이나 입을 뻥긋거린 그는 간신히, 아주 간신히 말을 내뱉었다.
“저, 정말인가?”
“저기 오시네요. 물어보세요.”
사라진 안개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조그마한 가옥에서 신의가 나왔다.
단출한 짐을 챙긴 모습이 곧바로 떠날 수 있는 준비까지 마친 것처럼 보였다.
그는 오자마자 쌍괴를 힐긋 바라보더니, 시후에게 약초 꾸러미를 건넸다.
“그럭저럭 쓸 만한 녀석들로 골라 담았다.”
시후도 기초 금창약을 한 상자 더 꺼내어 그의 손에 올려다 주었다.
[기초 금창약과 상급 약초 꾸러미를 교환했습니다.]
시후는 떠오르는 알람 창을 확인하고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약초 꾸러미. 그것도 상급의 꾸러미다.
정확히 뭐가 들었는지는 확인해 봐야 알겠지만, 최소한 금 열 냥은 무조건 넘을 게 분명했다.
하늘 높이 승천하려는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내리며, 시후는 기쁜 마음을 숨기기 위해 연신 헛기침을 해댔다.
그 사이, 서괴가 신의의 곁으로 다가갔다.
“신의! 나 추비룡일세. 기억하는가?”
그의 말에 신의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2년 전에도 이곳을 훑고 지나가지 않았나.”
“그렇지. 내가 2년 전에 이곳도 한번 쭉 훑고 지나갔지. 그, 그보다 우리 혜아를 치료해 주겠다고 들었는데······ 사실인가?”
“내 능력이 닿는다면 고쳐 줘야지.”
“자네가 못 고칠 병이 어디 있는가.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서후쌍괴의 소원을 해결하여 호감도가 상승합니다.]
[서후쌍괴의 호감도가 십분준신(十分準信)(65)에 도달하였습니다. 그들을 실망하게 하지 않는 한, 그들은 당신의 말을 전적으로 신뢰할 것입니다.]
어차피 일어날 일들을 앞당긴 것에 불과했는데 호감도가 오르다니.
호감도가 높으면 높을수록 중요한 임무를 받을 수도 있었고, 그들에게 부탁할 수도 있었기에 대단히 중요한 지표였다.
일반적으로 호감도가 올라가는 상황이 많지도 않은 데다가, 특수 NPC인 서후쌍괴의 호감도는 올리는 건 보통 어려운 게 아니었기에 더욱 특별했다.
생각보다도 더욱 일이 잘 풀렸다.
게다가 아직 자신의 손에 들어올 게 더 있지 않은가.
시후는 후괴의 곁으로 다가가 그의 팔을 슬쩍 잡아당겼다.
의아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그를 향해 시후는 그의 어깨춤을 가리켰다.
“주셔야죠.”
“응? 뭘 달라는······ 아!”
시후의 손짓에 후괴는 등에 멨던 봇짐을 슬그머니 땅으로 내려놓으며 신의를 바라보았다.
의심 많기는.
“그게 없어도 치료할 수 있다고 합니다. 다 물어봤어요.”
시후의 말에 후괴는 한점의 미련도 없이 봇짐에서 상자를 꺼내 건네주었다.
[돌발 임무 ‘위험한 거래’가 해결되었습니다. 보상으로 천양초 뿌리가 지급됩니다.]
상자를 손에 든 시후는 서둘러 품에 챙겨 넣었고, 그 모습을 본 서괴가 싱글벙글거리며 시후에게 다가왔다.
혜아를 고쳐 주겠다는 신의의 약속을 재차 확인한 것이다.
“우리는 이대로 신의를 데리고 혜아에게 갈 예정인데, 혹시 같이 갈 텐가?”
“아뇨. 할 일이 있어서.”
“아쉽군······ 그보다, 이거 받게.”
서괴는 주머니를 뒤지더니 반짝거리는 은 패 하나를 건네주었다.
높은 호감도로 인해서 추가 보상까지 주어지자 시후는 냉큼 받아들였지만, 눈앞에 떠오른 알람을 보고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추가 보상으로 ‘하오문의 은 패’를 획득하였습니다.]
“그 물건을 아는가 보군. 다소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우리의 마음이 담겨 있으니 받아 주게.”
“마음에 들지 않는 건 아니지만······ 아무튼 잘 쓸게요.”
의도하지 않았다지만, 기껏 올린 호감도를 떨어트릴 필요는 없지 않은가.
게다가 공짜로 받은 아이템인데 싫은 내색을 할 필요는 없다.
손에 들린 은색 패를 품에 집어넣으려다가 문득, 이 아이템을 기획했던 최현질 대리를 떠올렸다.
‘운이 좋은 놈은 여기서도 절세 급의 무공을 얻을 수 있을 테고, 운이 나쁜 놈은 백 개를 쓰더라도 삼류 무공만 얻어 가겠지. 이건 세상은 운이 전부라는 걸 알려 주는 아주 귀한 교훈을 담고 있는 아이템이라고.’
그렇게 말했지만, 사실 모 회사의 ‘랜덤 박스’와 닮은 구석이 많은 ‘랜덤 무공 소환 패’였다.
다만, 은 패로 얻을 수 있는 무공의 절반 이상은 삼류 무공에 불과했기 때문에 기대할 게 못 되었다.
어차피 개똥 같은 무공이라도 필요한 시점이기도 했으니 상관은 없지만.
그런 시후의 속마음을 모르는 서괴는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 언젠가 그 은 패가 귀히 쓰일 줄 알고 아껴 두길 잘했군. 역시 모든 물건에는 임자가 있는 법이야.”
“귀히 쓰이긴 개뿔. 딱 봐도 마지못해 받아 준 거 보면 몰라! 내가 그때 고 녀석을 구해 주고 고작 은 패 하나만 받은 걸 생각하면······.”
“받은 사람이 괜찮다는데 왜 자네가 성을 내는가!?”
한참을 투덕거리던 두 사람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기다리는 신의를 보곤, 급히 시후를 향해 작별 인사를 건넸다.
“커 흠, 아무쪼록 몸조심하면서 지내게. 혜아가 절맥에서 낫는다면 한번 찾아오도록 하겠네.”
“제가 어디에 있을 줄 알고요?”
“뭐, 거지 놈들에게 물어보면 알려 주지 않겠나? 그럼, 정말 가보겠네.”
쌍괴는 고개를 꾸벅 숙이며 시후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곤 자리를 떴다.
신의는 의술로 이름이 더 높아서 그렇지, 무공이 낮지는 않았기에 순식간에 거리가 멀어졌다.
세 사람은 저물어가는 해를 뒤쫓듯 서둘러 산에서 내려갔다.
세 사람이 시후의 시야에서 사라지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은 찰나에 불과했고, 낙안봉 중턱에 홀로 남겨진 시후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낙안봉까지 오면서 자신이 두 발로 걸은 적이 없다는 것과 화산은 기험천하제일산(奇險天下第一山)이라 불릴 만큼 험준하기 짝이 없다는 사실을.
“썅. 여길 어떻게 내려가지?”
- 7화에 계속 -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