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5화 서후쌍괴와 신의 (1)
미골(尾骨)을 스치는 차가운 바람보다도 더 큰 문제가 있었다.
‘아, 토할 거 같다.’
서괴는 시후를 짐짝처럼 어깨에 들쳐멘 채로 달리고 있었다.
문제는 그 속도가 어지간한 말에 육박했다는 점이다.
현대인이라면 그보다도 빠른 차를 타고 다니지만, 차는 이딴 식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울창한 나무를 지나기 위해선 연신 좌우로 움직여야 했고, 비탈진 길은 경사가 제멋대로였다.
게다가 복부엔 끊임없는 자극이 가해졌기에 더욱 괴로웠다.
하지만, 이 상태로 토하면 코로 역류할 뿐이다.
무조건 참아야 했다.
시후가 자기 자신과 싸움을 하는 도중, 조금씩 속도가 줄어드는 게 느껴졌다.
“음? 서?”
곧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옴과 동시에, 서괴는 바닥에 내려놓는다는 표현을 쓰기보단 내팽개친다는 느낌으로 시후를 땅에 내려놓았다.
시후의 머리맡에 선 서괴는 잔뜩 날이 선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수상한 놈이다. 청일표국을 미행하는 것도 모자라, 나를 바로 알아보더군.”
“뭣?”
후괴로 짐작되는 인물의 경악이 담긴 외마디와 함께, 바닥에 구겨져 있던 시후의 몸이 휙 돌아갔다.
시야에 들어온 건, 서괴와 마찬가지로 어설픈 가면을 쓰고 있는 후괴의 모습이었다.
“누구냐 넌!”
‘아혈이나 풀어.’
시후가 말없이 눈동자를 위아래로 열심히 움직이자, 뭔가 이상했는지 몸을 몇 차례 두들겨 보더니 아혈을 풀어 주었다.
[아혈이 풀렸습니다.]
“청일표국을 왜 미행했나?”
“그쪽을 만나기 위해서죠. 후괴 철지탁.”
시후의 대답에 후괴는 당황했는지, 서괴를 바라보았다.
그 반응에 서괴는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는 눈빛으로 후괴를 바라봤다.
“두 분이 청일표국의 표물을 노리는 걸 알고 있고, 그 물건이 무엇인지도 알고 있죠.”
“다시 한번 묻겠다. 넌 누구냐.”
목소리를 낮게 내리깔며 물어보는 후괴의 목소리에는 살기가 맴도는 듯했다.
실제로 가면 아래로 보이는 눈빛을 보니, 찢어 죽이는 건 일도 아닐 것 같았다.
그래선 곤란하지.
“두 분에게 도움을 드릴 수 있는 사람? 아, 그렇게 보지 말아요. 정말 도움이 될 거라니까요?”
“누구에게 무슨 말을 듣고 온 건지 몰라도······.”
“천양초 뿌리를 훔치려는 거잖아요?”
두 사람의 눈이 한층 더 가늘어졌다.
후괴는 서괴와 눈을 마주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곧 그의 손바닥에 푸른색으로 빛나는 내공이 모이기 시작했다.
“놈. 거기까지 알고 있다면, 살려서 보내 줄 수 없구나. 모르는 게 약이고, 알고도 모른 척 넘어가야 하는 게 강호의 율법이거늘. 내 손속이 잔혹하다고 원망치 말거라.”
“내가 죽으면 혜아가 죽을지도 모르는데?”
시후의 말에 후괴의 손에 맺혀 있던 내공이 산산이 흩어졌다.
“혜······ 혜아를 어떻게 한 것이냐.”
“응? 어떻게 하다뇨?”
“그 가여운 아이를 납치해서 뭘······.”
“아니, 잠깐. 너무 나갔어요. 내가 왜 그 꼬맹이를 납치하겠어요? 난 정말 순수한 의미에서 도움을 준다는 건데?”
시후의 말에도 두 사람의 반응은 변함이 없었다.
자신을 향한 태도를 보아하니, 영락없이 아동 납치범으로 보는 것 같았다.
“망할, 일단 오해부터 풀어야겠네······. 자, 영감님들 잘 들어봐요. 혜아라는 꼬맹이가 절맥을 앓고 있죠? 두 분은 지금 그 절맥 치료를 위해서 청일표국의 표물을 훔치려는 거고?”
“자, 잠시 빌리는 거다. 곧 돈을 벌면 곱절로 보답을······.”
“빌리는 건 상대방이 동의해야 이뤄지는 거고, 두 사람이 하려는 건 도둑질이라고 하는 거죠. 아무튼, 이게 중요한 건 아니고······.”
시후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몸을 앞으로 숙이며 비밀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하려고 했지만, 아직 마혈이 풀리려면 시간이 조금 남아 있었다.
“어차피 신의의 행방만 알 수 있으면 그깟 천양초 뿌리 없어도 그만이죠. 안 그래요?”
시후의 말에 가면 너머 두 사람의 눈동자가 터질 듯이 부릅떠졌다.
성공이다.
“혹시?”
“‘혹시’가 아니라 ‘역시’죠. 네, 제가 신의가 있는 곳을 알아요.”
두 사람은 진위를 따지는 듯 눈빛을 교환했지만, 시후는 그들이 자신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미끼가 너무나도 달콤하거든.
그 예상대로 서후쌍괴는 동시에 가면을 벗어 던졌다.
정체를 알고 있는 것과 얼굴을 본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였으니, 이제 엮이는 건 시간문제다.
후괴는 반신반의하면서도 시후를 향해 기대감에 찬 눈빛을 보냈다.
“정말 우리를 돕기 위해서?”
“그렇죠. 신의의 행방을 알려 드리는 건 제가 두 분께 드리는 선물이죠.”
“고맙네! 정말 고맙네! 내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고마운 마음을 잊지 않고······.”
“단, 주는 게 있으면 받는 게 있어야 하는 법. 공짜는 없다는 사실 아시죠?”
시후의 말에 두 사람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마혈이 풀렸습니다.]
“우리가 재물을 탐하는 성격이 아니라, 줄 수 있는 게 별로 없을 것 같은데······.”
후괴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지만, 그건 시후가 원하는 대답이 아니다.
곧 시후는 오른손을 쭉 뻗어 검지를 좌우로 흔들었다.
대화에 얼마나 집중을 했는지, 쌍괴는 시후가 마혈이 풀렸다는 것도 잊은 듯 정신이 없었다.
“제가 뭐 대단한 걸 바라는 건 아니고, 원래 계획이 있잖아요? 그걸 해 보는 게 어때요?”
“원래 계획?”
시후의 말에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던 후괴가 다시금 눈을 부릅떴다.
그 모습을 보니 자신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눈치챈 듯했다.
“신의의 장소를 알려 주고 천양초 뿌리라면 적당한 선물 교환이라고 생각하는데, 두 분 생각은 어때요?”
서후쌍괴는 탐탁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특히 서괴는 시후의 제안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고개를 저었다.
“애초에 우리가 그걸 행하려 한 이유는 혜아의 병을 고치기 위해선데, 마치 우리가 가지고 있던 물건인 양 달라고 하는 건 조금······ 그렇군.”
“신의의 청정을 깨는데 뭐라도 들고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니, 그래도 이건······ 도둑질 아닌가.”
“어차피 하셨을 일 아닙니까. 혜아를 생각하셔야죠.”
시후의 말에 서후의 낯빛이 굳어졌다.
두 사람은 잠시 뒤로 물러나 이야기를 나누었고, 곧 시후의 눈에 반투명한 알람 창이 떠올랐다.
[돌발 임무 ‘위험한 거래’가 발동합니다.]
* * *
“물러서지 마라!”
늦은 밤, 시후는 산중에 울려 퍼지는 목소리를 들으며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좋아.”
혹시 모를 공동파의 추격에 도망을 쳐야 하는 상황인지라 지켜볼 순 없었지만, 메아리치는 남자의 목소리로 현 상황이 짐작 가능했다.
“총 표두가 쓰러졌고······ 강 표두라는 애는 왜 이 상황에서 다시 달려드는 거야?”
바로 옆에서 듣는 것만큼 생생한 중계는 곧 상황이 끝났는지 멈췄다.
“표물을 다 까뒤집어서 확인할까, 아니면 순순히 물건을 건네주겠느냐?”
“크흑, 분하지만 여기 있소!”
혼자 일인이역을 하며 놀고 있던 시후는 곧 도착할 쌍괴를 맞이하기 위해 허물어져 가는 사당을 나왔다.
예상이 맞아떨어졌는지, 바람 가르는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두 사람이 땅에 내려섰다.
조금 전 떠나갔을 때와는 달리, 서괴의 손에는 조그마한 나무 상자가 들려 있었다.
고풍스러운 외관은 적잖이 중요한 물건임을 알려 주었다.
“물건은 확실하죠?”
“물론.”
“아, 이럴 때는 007가방을 건네면서 물건을 확인해 보라고 해야 하는데······.”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시후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서괴의 표정에 어깨를 한차례 으쓱거렸다.
“별말 아니에요. 공동파에서 사람이 쫓아올 수도 있으니, 일단은 갈까요?”
말과 함께 시후는 앞장서 걸었지만, 경공을 익히지 못한 그의 이동 속도가 쌍괴의 눈에 찰 리 없었다.
한숨을 내쉬는 두 사람 중 앞으로 나선 건 키가 껑충한 후괴였다.
“업혀라. 어디로 갈지 말하고.”
“아, 그럼 저야 좋죠.”
시후는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냉큼 후괴의 등에 업혔다.
비쩍 마른 후괴의 등은 전혀 편하지 않았지만, 가야 할 길은 천 리가 훌쩍 넘었다.
“화산. 화산으로 갑시다.”
“화산? 신의가 그곳에 있더냐?”
“예, 낙안봉 근처에 있으니 거기까지 가시죠.”
시후의 말에 서괴가 눈을 부릅뜨며 앞으로 나섰다.
“이놈, 화산은 내가 2년 전 샅샅이 뒤져 보았다. 화산파의 금지(禁地)를 제외한다면 가보지 못한 곳이 없거늘, 어디서······.”
“절진 속에 있다면?”
시후의 말에 앞으로 내딛던 그의 걸음이 멈추었다.
사실, 이 지경까지 와서 믿지 않을 순 없지만, 돌다리마저 두들겨 보는 서괴의 태도는 칭찬할 만했다.
“어차피 간다면 다 알게 될 사실인데 굳이 거짓말을 할 필요가 있겠어요? 지금 점창파로 청일표국 사람이 달려가고 있을 텐데, 이렇게 여유 부리고 있을 시간 있으려나······.”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후괴는 출발했고, 한숨을 푹푹 쉬던 서괴가 뒤를 따라오기 시작했다.
“뒤는 그만 보고, 꽉 붙잡기나 하거라. 속도를 올리겠다.”
그 말과 동시에 시후는 조금 더 강하게 그의 목을 끌어안았고, 바람은 칼날처럼 뺨을 스쳐 지나가기 시작했다.
* * *
공동산에서 화산까지의 거리는 직선으로만 550km에 육박했고, 리(里)로 환산하자면 1,400리에 달하는 거리였다.
천리마를 탄다고 해도 하루 만에 갈 수 있는 거리는 아니었다.
그리고 말보다 느린 사람이 이틀 만에 갈 거리는 절대 아니었다.
하물며 사람 한 명을 업고 가야 한다면 더욱이.
“이곳이더냐?”
하지만, 후괴는 그걸 가능케 했다.
사실 그는 ‘칠괴’로 이름을 떨쳤지만, 그보다 더욱 그를 유명하게 만든 건 ‘천리비마’와의 경공 대결이었다.
북경에서 서장까지 가로질렀던 둘의 대결은 반 식경 차이로 천리비마가 이겼다.
하지만, 대결이 끝난 직후 천리비마는 땅에 드러누웠고, 후괴는 그대로 돌아온 길을 되돌아 비슷한 시간이 걸려 원래 지점으로 돌아왔다고 전해졌다.
덕분에 승자는 천리비마였음에도 후괴의 명성은 천하를 진동시켰다.
오죽하면 ‘천 리까지는 천리비마가 확실히 빠를 것이고, 가야 할 거리가 다섯 배라면 비등비등할 것이다. 하지만, 만 리가 된다면 그를 앞설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라는 말이 떠돌았을까.
그 정도로 지구력이 뛰어난 후괴의 얼굴에 피로가 덕지덕지 묻어나와 있었다.
정말 전심전력으로 달렸다는 걸 여지없이 느낄 수 있는 광경이었다.
“예, 이제부터 저 뒤에서 구경하고 계세요.”
시후는 말과 동시에 바닥에 고개를 푹 숙인 채, 뭔가를 찾는 듯 땅을 기다시피 움직였다.
쌍괴는 그런 시후의 곁에서 뭘 하는 것인지 유심히 관찰했다.
곁을 계속 맴도는 두 사람 때문에 시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아, 평생 속고만 사셨나······ 저기 뒤에서 기다리고 있으라고요.”
시후가 버럭 소리를 질렀지만, 쌍괴는 그의 곁을 떠나지 못했다.
인상을 찌푸린다고 해도 물러날 그들이 아니었기에, 시후는 애써 그들의 존재감을 외면하며 바닥을 샅샅이 훑었다.
유심히 주변을 둘러보는 그의 눈에, 동물의 발자국이 눈에 들어왔다.
‘찾았다.’
시후는 얼른 바닥에 떨어진 나뭇가지를 집어 들곤, 발자국을 따라 선을 쭉쭉 그으며 나아갔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선을 그어나가는 시후의 모습은 우스꽝스럽기 그지없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쌍괴는 그의 알 수 없는 행동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 하는 짓일까?”
“일단 지켜보자.”
뒤에서 수군거리는 쌍괴의 목소리를 못 들은 척 넘기며, 시후는 발자국을 따라 선을 열심히 이어나갔다.
앞으로 갔다가 천천히 왼쪽으로 틀었다가를 반복하는 사이, 바닥에 그려진 선들은 한가지 규칙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규칙은 단순했다.
일정 반경 안으로 다가갈 시, 빙 둘러 가도록 돌려보낼 것.
한참 동안 허리를 숙인 채 선을 이어나가던 시후는 찌뿌둥한 허리를 토닥거렸다.
“저기네. 하여간 이놈의 진법 찾는 건 기획 때부터 속을 썩이더니······.”
게임을 개발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게 무엇이냐 묵는다면, AI의 자율성을 구축하는 부분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시스템적 측면에서 가장 만들기 힘들었던 것을 이야기하라고 한다면 단연 ‘진(陣)’이었다.
일정 방위를 점하여 상승효과를 끌어내고, 상대의 눈과 감각을 현혹하는 ‘진’이라는 개념은 여간 어려운 게 아녔다.
진이라곤 아는 게 학익진(鶴翼陣)밖에 없던 시후의 입장에선, 수백 가지의 진이 정말 너무나도 싫었다.
신의는 그런 진 속에 있었다.
마지막으로 확인을 위해 선이 돌아가는 부분에서 직선으로 나아가려고 부단히 노력했지만, 눈앞에 선이 나타나기 일쑤였다.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어디서부터 진의 영향력이 펼쳐지는지 확인했으니, 이제는 신의를 불러낼 때였다.
시후는 눈을 꼭 감은 채, 발을 뗐다.
앞으로 세 걸음. 좌측으로 세 걸음. 다시 앞으로 일곱 걸음.
마지막 걸음을 내디딘 순간, 지저귀던 새 소리가 더는 들려오지 않았다.
눈을 뜨자 지독한 안개를 배경으로 알람 창이 떠 있었다.
[경격혈향진(境隔血響陳)에 들어왔습니다.]
- 6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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