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4화 어긋난 톱니바퀴 (3)
순간 혹하는 마음이 들기는 했지만, 어찌나 긴장했는지 허리가 뻑적지근한 게 도전했다간 중도에 쓰러질 것 같았다.
“아니.”
그 대답과 동시에 알람 창이 스팸 메일처럼 주르륵 올라가기 시작했다.
[신화 등급의 무공을 최초로 습득하셨습니다. 내공 한계치가 30 상승합니다.]
[‘신화를 계승하는 자’ 업적을 달성하셨습니다.]
[신화 등급의 운기를 한 번에 성공하셨습니다. 내공과 내공 한계치가 10 상승합니다.]
[‘한 방 신화’ 업적을 달성하셨습니다.]
[일원신공 1성을 달성했습니다.]
[일원신공이 활성화됩니다. 해당 심법에 관한 효과는 무공 창을 열어 확인하십시오.]
“징그럽게도 많이 뜨네.”
가장 고무적인 건 내공 한계치의 상승이었다.
삼류 무공인 ‘삼재심법’을 대성하더라도 한계 내공은 올라가지만, 대성이 쉬운 것도 아니고 삼재심법을 대성해 봤자 오르는 건 고작 10년 치.
“무공 창.”
[일원신공]
달랑 하나.
다만, 등급이 등급인 만큼 일원신공은 금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시후는 손을 뻗어 찬란하게 빛나는 일원신공을 손끝으로 살짝 눌렀다.
그와 동시에 일원신공에 관한 설명이 주르륵 떠올랐다.
[등급 : 신화]
[무공 : 일원신공]
[종류 : 심법]
[상태 : 활성화]
[1성]
「신화 속 내려오는 ‘하나로 존재하는 자’가 세상을 구원하고자, 그의 뜻을 대신할 대리자를 위해 만든 무공이다. 최초의 대리자는······.」
15.3/년(年)
무공에 관한 설명의 맨 밑부분에는 시후가 가장 확인하고 싶었던 내용이 적혀 있었다.
자동으로 쌓이는 내공이 1년에 15.3년 치.
즉, 활성화 상태로 가만히 숨만 쉬어도 4년 뒤면 내공이 무려 1갑자라는 말이었다.
구주신협이 터무니없는 재능충이라는 설정도 있었지만, 그 재능이 한껏 빛나게 된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
“신화 등급 무공이 총 스무 개였으니깐······ 혼자 더럽게 많이도 먹었었네.”
구주신협이 익혔던 무공들을 떠올려 보던 시후는 고개를 내저었다.
혼자서 신화 등급 무공을 다섯 개나 섭렵한 구주신협은 사기 캐릭터, 그 자체였다.
물론, 유일 등급에 비하면 한 단계 떨어졌지만.
잡스러운 생각을 떨쳐버린 시후는 손에 쥐고 있던 공청석유의 마개를 연 뒤, 주둥이를 입으로 기울였다.
안에 들어 있는 내용물이 말라비틀어졌나 싶을 정도였지만, 한참을 기다리자 한 방울이 톡 하고 혀에 닿았다.
한 방울이 전부였지만, 몸이 청량해지는 기분과 동시에 보양식이라도 먹은 듯 몸 안에 힘이 불끈불끈 치솟았다.
[일급 영약 ‘공청석유’를 복용하였습니다.]
[익힌 심법의 영향으로 약을 온전히 흡수하였습니다. 내공이 30 증가합니다.]
“상태 창.”
이름 : 차시후
경지 : 이류
무골 : 하급
내공 : 40/70년
체질 : -
신수 : 기린
배후성 : 천추성
소속 : -
별호 : -
성향 : 중립
무공 : 일원신공
업적 : 신화를 계승하는 자 (+1)
피로도 : 0
포만감 : 99
상태 창을 읽어 보던 시후는 위아래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진 않아.”
고작 이틀 차에 불과한 상황에서 내공과 내공 한계치가 40년이 상승했다는 건, 나쁘지 않은 수준이 아니었다.
다만, 구주신협의 시작점과 비교해 본다면 이제야 비슷해진 상황이었다.
물론, 다른 내공을 배제한 오로지 내공만 보았을 때.
다른 것들을 고려해 본다면 가야 할 길이 한참 멀었다.
인벤토리에 넣어 둔 측천파흑선을 완성하기도 해야 하고, 중요 NPC들과 만나서 최소한의 안면을 터야 했다.
그래야지 나중에 써먹지 않겠는가.
“서후쌍괴가 습격하는 날짜가 정확히 언제였는지는 기억이 안 나는데······.”
자신의 동기인 태영에게 물어봤다면 시간까지 튀어나왔겠지만, 없는 사람을 떠올려 봐선 뭐 하겠는가.
어차피 일주일 이내로는 일어날 일이니 기다리면 그만인 것을.
일단 밖으로 나가기 위해 시후는 발을 돌렸다.
처음 들어왔을 때와 달리 인스턴트 던전이 해제된 동굴은 매우 짧았다.
입구로 걸어가자 바위틈에 끼워 놓은 줄이 곧 빠질 것처럼 거칠게 춤을 추고 있었다.
쏙 빠지는 걸 보니 조금만 늦었어도 바람에 나풀거리는 줄을 넋 놓고 보고 있을 뻔했다.
“조질 뻔했네.”
시후는 곧장 절벽을 오르기 위해 허리에 줄을 둘둘 감았다.
내려오는 건 내려올수록 속도가 붙었지만, 올라가는 건 그 반대가 될 가능성이 너무 컸다.
하지만, 급할 필요는 없다.
“이럴 때 중요한 건 일정한 속도로 꾸준히 올라가는 거지.”
한 번 당길 때마다 한 걸음씩.
바람이 자꾸만 몸을 흔들었지만, 시후는 침착하게 차근차근 절벽을 올라갔다.
다만, 바람이 점차 거세지기 시작했다.
중간에 멈춰 서서 바람이 조금 사그라들길 기다렸지만, 시후의 몸은 누가 흔드는 것처럼 좌우로 계속 움직였다.
“아오, 무슨 바람이 이렇게······.”
짜증을 내던 시후의 몸이 약간 아래로 처졌다.
줄을 붙잡은 손이 미끄러진 건 아니다.
디딜 곳을 찾던 시후의 시선이 위를 향했다.
“무슨······.”
그와 동시에 거친 바람에 날아간 안개 너머로, 절벽에 툭 튀어나온 돌부리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곳에 닿아 있는 자신의 몸을 지탱해 주는 줄.
단순히 닿아 있기만 했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겠지만, 돌부리에 비벼진 줄은 그 굵기가 절반 이하로 줄어들어 있었다.
그곳까지 남은 거리는 대략 3m.
조심스럽게 줄을 당겨 몸을 위로 끌어올렸음에도 몸이 조금 더 아래로 내려갔다.
그리고 조금 전 절벽을 내려오던 것보다 몇 배는 빨리 내려갈 수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닥을 향해.
“썅.”
날개가 없는 것들은 땅으로 떨어지기 마련이고, 그건 시후도 마찬가지였다.
시후는 자신의 눈앞으로 다가온 죽음에 두려움과 동시에, ‘게임 속에서 나갈 수 있지 않을까’하는 작은 희망을 품었다.
[사망하셨습니다.]
[부활까지 72시간이 걸립니다.]
[100m 이상 높이에서 추락사하여 ‘아름다운 비행’ 업적을 달성하셨습니다.]
* * *
72시간.
일수로 친다면 3일.
3일 동안 아무것도 볼 수도, 말할 수도, 들을 수도 없는 공간에 있다면 어떨까.
‘괜찮아. 생각을 정리하면 그만이다.’
처음에는 분명 이러한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계획도 잘 세웠다.
부활하고 나면 청일표국을 찾아간 뒤 서후쌍괴와 만나겠다고.
그 뒤에 둘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에 관한 가정과 그에 따른 대응을 생각했다.
이후 일어날 사건들도 자신에게 가장 도움이 되는 방법을 떠올리며, 긍정적인 생각을 품었다.
다만, 생각하는 것을 제외하곤 그 어떤 것도 할 수가 없다는 게 고문이나 다름없었다.
오롯이 정신만이 존재하는 그곳에서 미치지 않을 수 있을까.
하물며 잠들 수조차 없는 곳이라면 더더욱.
시간이 얼마만큼 지났는지 알 수 없는 곳에서, 3일이라는 기간은 사람을 피폐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 * *
“으아아! 어? 빛! 목소리! 흙!”
시후는 갑자기 앞이 보이기 시작하자, 주변을 둘러보며 바닥에 엎드린 채로 땅에 입을 맞췄다.
다만, 아무도 없는 곳이라면 문제가 되지 않을지 몰라도, 시후가 모습을 드러낸 곳은 사람이 많이 다니는 길의 한쪽 귀퉁이였다.
“엄마, 저 아저씨 이상해.”
“고개 돌려. 지지야 지지.”
“에잉, 갑자기 별 미친놈이 나타나서는 원.”
다만,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NPC들은 땅과 교감하는 시후를 미친놈 취급할 뿐이었다.
시후는 자신을 욕하는 소리조차 달콤하게 들렸다.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흙을 바라보는 시후의 표정은 마약중독자의 그것과 같았다.
그에겐 그런 단순한 광경조차 환상과 같았으니깐.
그 정도로 72시간 동안의 부활 대기 시간은 지옥과 같았다.
현실의 감각을 만끽하던 시후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다신, 다신 안······.”
죽는다는 말을 입에 담지 못했다.
다시금 온통 새하얀 그곳의 끔찍했던 기억이 떠오르려고 했기 때문에.
여전히 감개무량한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보던 시후는 머리를 강하게 흔들더니, 뺨을 짝짝 두들기곤 잡념에서 빠져나왔다.
정신 차려야 했다.
3년 같던 3일이었지만, 프로그램이 거짓을 말할 리 없었으니 흘러간 시간은 3일이 맞을 것이다.
애초의 계획보다 너무 많은 시간이 흘렀다.
일단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파악하기 위해 지도를 열었다.
“아! 다행이다.”
부활한 위치는 난주 옆 조그마한 소도시, 합작이었다.
청일표국이 공동산으로 표행할 때 지나가는 길목에 있는 도시였기에 아직 지나가지 않았다면, 이곳으로 올 가능성이 컸다.
주변을 둘러보며 말을 물어볼 NPC를 찾았지만, 곧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시후의 시선이 향한 곳에서, 자그마한 먼지를 일으키며 짐을 잔뜩 실은 짐수레가 다가오고 있었다.
사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청일표국」
짐수레의 가장 선두에 걸린 표기는 분명 ‘청일표국’이었다.
시후가 뒤를 쫓아야 할 대상이자 서후쌍괴의 목표.
청일표국 표사들의 얼굴과 분위기를 보니, 아직 서후쌍괴가 표물을 강탈한 건 아닌듯했다.
합작에서 공동파까지의 거리를 생각한다면, 습격은 그다지 머지않았다.
“따라가면 되겠네.”
하늘을 올려다보니 아직 태양은 더 높을 곳을 향해 등산 중이었으니, 청일표국이 이곳에서 머무르지는 않을 것이다.
청일표국이 근처까지 다가오자 시후는 길거리에서 만두를 파는 상인에게 다가갔다.
“왕만두 다섯 개. 포장해서.”
시후가 대나무 잎으로 만든 간이 도시락에 넣은 만두를 손에 넣었을 땐, 청일표국의 행렬이 막 그의 등을 지나간 참이었다.
시후는 간이 도시락을 손에 쥔 채, 느긋하게 그 뒤를 따라갔다.
물론, 속도는 그들에게서 멀어지도록 조절했기에 그들은 점점 시야에서 멀어졌다.
그 후로도 시후는 그들이 보일 듯 말 듯 한 거리를 계속 유지했다.
“속도를 봐선 이틀 내로 공동의 영역에 들어갈 거 같고······ 오늘, 아니면 늦어도 내일 밤인가?”
만두를 한입 베어 물며 중얼거렸다.
무조건 공동산에 들어서기 전에 쌍괴가 습격할 것이다.
아무리 서후쌍괴라고 한들, 구파의 일원인 공동파를 단둘이서 상대하기엔 힘들 테니까.
“이크.”
갑자기 주변을 살피는 표사 덕분에 시후는 수풀을 향해 급히 몸을 던져야 했다.
몰래몰래 따라가는 게 쉽지는 않았다.
앞에 보이지 않는다고 속도를 높이면 청일표국에서 알아차릴 수도 있었고, 너무 떨어져 걷다간 놓칠 수도 있었다.
“그냥 좀 가지, 뭘 저리 두리번거리는 거야?”
짐수레의 가장 뒤를 지키는 표사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시후는 몸을 일으키며 옷을 툭툭 털어냈다.
벌써 몇 번이나 바닥으로 몸을 날렸는지 세기도 어려웠다.
다시 뒤를 밟기 위해 걸음을 옮기려고 했으나, 갑자기 목덜미가 뜨끔하더니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마혈을 점혈 당했습니다.]
[30분간 움직임이 제한됩니다.]
[일원신공으로 인해 효과의 8할이 경감됩니다.]
그와 동시에 주르륵 떠오르는 알람 창.
난데없는 상황에 당황하는 시후의 눈앞으로, 작달막한 남자의 뒷모습이 드러났다.
뒤돌아보는 그의 얼굴에는 어설프게 만든 가면을 쓰고 있었다.
“네놈은 누구냐.”
작은 키, 의도적으로 비튼 목소리, 지금 이 시기에 등장한 고수.
제 딴에는 정체를 숨기려고 했겠지만, 시후는 알 수 있었다.
서후쌍괴 중 서괴가 분명했다.
“서괴 추비룡, 청일표국의 표물을 강탈하려는 걸 알고 있······.”
시후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하였다.
뭔가 움직인다는 것도 느끼지 못했거늘, 갑자기 턱 밑이 따끔하더니 물고기처럼 입만 뻥긋거릴 뿐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아혈을 점혈 당했습니다.]
[30분간 언어 사용이 제한됩니다.]
[일원신공으로 인해 효과의 8할이 경감됩니다.]
마혈에 이어 아혈까지 제압당하자 시후는 눈알을 굴리는 것 이외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서괴는 곧 시후를 어깨에 들쳐멘 뒤 산을 뛰어올랐다.
졸지에 납치당한 시후는 머릿속으로 짜 놨던 계획을 대폭 수정해야 했다.
- 5화에 계속 -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끝